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지난달 27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콘퍼런스 기조연설을 통해 역사 문제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갈등 구조가 지속되는 것에 대해 직설적으로 작심 발언을 쏟아낸 것에서는 미국의 깊은 좌절과 초조감이 묻어난다. 이 발언은 동북아 역사문제로 자신들의 아시아전략이 좌초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표출이다.

그런데 미국의 좌절은 놀랍지 않다. 이미 예견됐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른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표방했던 2012년에 이미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한·중·일 3국이 얽힌 역사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미국은 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국익과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시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아시아 중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하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미국은 아마도 이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거나 간과했던 것 같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중국의 부상과 궤를 같이한다. 미국은 초기 단계부터 아시아 각 지역의 몇개국과 손잡고 소규모의 안보협력체 블록을 만드는 작업에 치중했다. 지역마다 3~4개 국가와 정치·안보적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이다. 호주·필리핀·베트남·미얀마·인도 등이 주요 거점 국가였다. 가장 중요한 지역인 동북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한데 묶어 한·미·일 공조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었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단순히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지 않다. 미국도 중국과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은 불가피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무분별한 굴기’를 막으면서 적당한 긴장 속에서 협력과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한·일이 미국의 생각처럼 쉽게 묶이지 않으면서 미국의 고민이 시작됐다. 특히 중·일 갈등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서 중국과 ‘긴장 속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애초 목적이 틀어지고 있다. 또 중·일 갈등이 미·중 갈등으로 번져 미국의 아시아전략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미국은 크게 당황하고 있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이 같은 미국의 전략적 실패에 대한 실망과 초조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좌절은 자업자득이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군사적 존재감을 키워 중국을 견제하게 하는 방식은 중국을 극도로 자극할 뿐 아니라 한국의 협조도 얻기 어렵다는 충고를 무시한 대가다. 그동안 한국의 전문가, 언론이 이 같은 문제점을 수없이 지적했음에도 미국은 듣지 않았다.

미국은 동북아 역사문제의 민감성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이해하지는 못했다. 역사와 문화, 휴머니즘을 무시하고 한 국가를 장기판의 말처럼 인식하는 전략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미국은 남미와 중동에서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아시아에서 반복한 것이다.

시민단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한 회원이 3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과거사 발언을 규탄하는 1인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셔먼 차관은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쉽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정치 지도자는 사실 한국이 아닌 중국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에게도 ‘과거의 적’이다. 미국은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상태였기 때문에 일본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도 정통성을 가진 임시정부와 항일 독립군이 있었고 지금 한국의 헌법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다면 이런 발언은 나올 수 없다. 미국은 전쟁상대국이었던 일본과 이미 오래전에 화해했는데 한국과 중국은 왜 그러지 못하느냐는 인식은 전형적인 승자의 논리다.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고 항복을 받아낸 미국과 달리 한·중은 일본으로부터 과거 침략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받지 못했다. 미국이 서둘러 일본에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북아 역사갈등의 국외자가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미국이 태평양전쟁 승리 이후 전후 질서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은 채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서둘러 봉합한 업보다. 한·중·일 역사갈등의 책임을 논하자면 미국도 절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충고할 수 있는 제3자가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당사자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수순이 잘못됐다. 아무리 실망스럽고 초조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국은 지금부터라도 한·중·일 역사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