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틀간 워싱턴의 모습은 분열된 미국의 미래를 예고했다. 설레임과 기대보다는 다가올 낯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이 넘쳤다.

 

트럼프가 취임한 지난 20일(현지시간)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아침 7시쯤 도착한 워싱턴 외곽의 전철역. 예상 밖으로 취임식이 열리는 연방의회 의사당 앞마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의회 앞마당에 모여든 축하객들 중에는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글을 세긴 빨간 모자를 쓴 이들이 여럿 보였다. 조지 워싱턴의 고향 버지니아주 마운트버논에서 왔다는 제리 피츠제럴드(49)는 “오늘은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라며 “트럼프는 미국의 일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장담했다.

 

10시가 넘으면서 뒷편 내셔널몰이 인파로 채워졌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 첫번째 취임식도 취재했다는 한 외국 기자는 “8년 전의 절반”이라고 귀띔했다. 광장 양쪽 대형 스크린에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이 비쳤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가 소개되자 ‘우’하는 야유가 나왔다.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녀를 가둬라’는 외쳤다. 낮 12시, 21발의 예포가 새 정권의 출발을 알렸다. 트럼프는 취임연설에서 “공장은 묘지처럼 흩어졌고, 갱단과 범죄와 마약이 미국인의 생명과 잠재력을 앗아가고 있다”며 미국의 현실을 “학살”이라고 했다. 이제 “미국 것만 사고 미국인만 고용하자”고 말했다. 겨울비를 맞으며 백인 민족주의에 열광하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트럼프의 연설을 듣자니 한기가 느껴졌다.

 

시내에는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집결했다. 15번가 근처에서 만난 제임스 라이트(32)는 “인종주의자 트럼프는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이민은 미국을 강하게 한다. 바보같은 벽은 쌓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밤까지 반(反)트럼프 시위가 계속됐고, 2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다음날에는 ‘위민스마치(여성들의 행진)’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50만명이 거리를 활보했다. 이들은 “나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지 말해달라”는 선창에 “이것이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화답했다. 미국 언론들은 곳곳의 집회에 참석한 인원이 100만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8시20분쯤 내셔널몰에 가까운 랑팡플라자 지하철역에서는 행진 참가자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나왔다. 시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지하철 이용객은 27만5000명, 전날 취임식 때의 19만3000명보다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도 걷혔다. 영화배우이자 활동가인 아메리카 페레라가 무대에 등장했다. “우리의 존엄과 인격, 권리가 공격받고 있으며 증오와 분열의 집단이 어제 권력을 이양받았다!” 영화배우 스칼릿 요한슨, 가수 마돈나도 뒤따라 무대에 올랐다.

 

오후부터 시작된 거리 행진은 의사당 부근 3번가를 따라 백악관 방향으로 몇 ㎞에 걸쳐 이어졌고 골목마다 인파가 넘쳤다. 전날 트럼프가 축하 퍼레이드를 한 페실베이니아애비뉴는 분홍색 물결이 흘렀다. 트럼프인터내셔널호텔 앞에는 시민들의 메시지를 담은 팻말들이 쌓였다. ‘용감한 사람은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시위 참가자 캐서린 레일리(55)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여성권과 평등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라고 했다. 스타벅스 매장 유리창을 깬 시위대도 있었다지만 시위는 대체로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가족 단위 참가자들과 어린 학생들도 많았다. 고등학생 에린 벨(16)과 매들린 래이포드(15)는 “미국이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보여준 날”이라며 “함께 하면 강해진다. 우리는 함께 저항할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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