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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뿐 아니라 서점 직원들도 베스트셀러를 ‘만들’ 수 있다. 일본에서 서점발(發) 베스트셀러가 속속 탄생하고 있다. 책의 일부를 가리고, 서점 직원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드는 등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널리 읽히기 위한 서점 직원들의 아이디어가 효과를 보면서다. ‘독서광’ 서점 직원들의 열의와 자신감이 불황 속 출판시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 고토구의 기노쿠니야서점 라라포트도요스점의 특설 판매대에는 책 말미의 해설을 필름으로 가린 문고본이 늘어서 있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미스터리 소설 <이노센트 데이즈> 문고본의 가려진 해설 부분에 삽입된 종이에는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해설을 읽지 않으면 소설의 충격이 절반 또는 제로가 될 것”이라는 이 서점 문고담당자의 홍보글이 쓰여 있다. 지난 3월 이 실험을 시작한 뒤 이 책은 두 달 동안 1000권 넘게 팔렸고 서점 매출은 10배로 뛰었다. 아이디어를 낸 직원 히라노 지에코는 3년 전 이 소설의 양장본을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으니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문고판 발매를 계기로 행동에 옮겼다고 아사히신문에 설명했다.

 

책의 내용물을 숨기는 마케팅은 지난해 7월 이와테현 모리오카의 사와야서점에서 시작됐다. 이 서점 직원이 가장 추천하는 책을 ‘문고X’로 정해 제목과 저자를 알 수 없도록 포장지에 싸서 판매했다. 이벤트는 대성공이었고 전국 650개 이상의 서점으로 확대됐다. ‘문고X’는 18만부 넘게 팔렸다. 한국의 은행나무·북스피어·마음산책 출판사도 지난 4~5월 ‘개봉열독 X 시리즈’로 이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산세도서점은 도쿄 도내 점포에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 수상작과 함께 ‘아라이(新井)상’ 수상작도 나란히 배치한다. 아라이는 이 회사 영업본부의 문학담당 직원 아라이 미에카(新井見枝香)다. 선정 기준은 아라이가 반 년간 읽은 책 중 제일 재미있었던 책이다. 아라이는 “선정은 완전히 주관적이지만 책임과 열의를 가지고 추천한다는 뜻에서 상에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아라이상 이벤트 기간 중에는 나오키상 수상작보다 더 많이 팔리는 작품도 나온다. 이 서점은 지난 4월 시대소설을 다뤄온 작가 다카다 가오루가 선정하는 ‘다카다 가오루상’도 만들었다.

 

아라이상 외에도 일본에선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서점대상’이 있다. 2004년 창설된 이 상은 전국 서점 직원들의 투표로 선정한다. 각 지역에서 만든 ‘서점대상’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도쿄 옆 지바현에서는 책과 술을 좋아하는 서점 직원과 출판사 영업직원들이 술집에서 의기투합해 2005년 ‘사케노미(술꾼) 서점원 대상’을 만들었다. 출판된 지 1년이 지난 문고본을 발굴한다. 시즈오카 서점대상, 오사카 혼마(진짜) 책 대상, 교토 미나즈키(水無月)대상, 오키나와 서점대상 등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상들이 적지 않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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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언제까지 계속 질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이야기다. 미국 민주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조지아주 6지구와 노스캐롤라이나주 5지구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치러진 네 번의 보궐선거에서 모두 공화당을 꺾는 데 실패했다. 몬태나주에서는 기자를 ‘보디슬램’한 그레그 지안포르테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고, 조지아에서는 민주당의 30세 젊은 후보 존 오소프의 바람이 통하지 않았다.

 

보궐선거 4연패가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네 곳 모두 공화당의 전통적 우세지역이었다. 특히 톰 프라이스가 트럼프 정부 보건부 장관으로 가면서 자리가 빈 조지아 6지구는 40년간 공화당 텃밭이었다. 대표적 우파 정치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의 지역구였다.

 

문제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반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느냐에 있다. 2018년 선거에서 하원의 다수당이 되겠다는 민주당의 희망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공화당 의석 24개는 빼앗아와야 한다. 조지아 선거가 전국적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런 흐름의 시작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2010년 공화당 신예 스콧 브라운이 민주당의 텃밭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공화당 연승의 첫번째 물결을 일으킨 바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로 휘청거리며 40%도 안되는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 찬성 여론은 48%까지 올라갔다. 공화당은 가난한 이들의 건강보험을 빼앗아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겠다며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모든 게 민주당에 유리한 환경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싫어하지만, 민주당을 대안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보궐선거의 교훈이다. 현재 민주당 브랜드로는 더 이상 유권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지 못한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선거 패배 후의 모습만 봐도 민주당은 ‘안되는 정당’의 길을 답습하고 있다. 성찰은 없고 노선 다툼에 책임공방만 벌이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트럼프의 가장 큰 결점이 거울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라면 민주당의 문제는 차마 거울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앞세운 트럼프의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은 언제쯤 제동이 걸릴까. 민주당은 내년 중간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을 회복하고, 2020년 대선에서 권력을 되찾아 올 것이라고 낙관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비관론이 더 현실적이다. 샘 스타인 허핑턴포스트 정치에디터는 “민주당은 지금부터 영원히 모든 선거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정도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할 운명에 처해졌다”고 논평했다. 한번 신뢰를 잃은 정당이 유권자의 지지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예를 봐도 그렇다.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내준 한국의 민주당은 다양한 형태로 이름을 바꾸며 혁신을 외쳤지만 선거 때마다 습관성 패배를 계속했다. 2016년 총선에서야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미국 민주당의 보궐선거 4연패는 본격적인 패배 행진의 신호탄일지 모른다. 반트럼프 여론에 취해 유권자들이 왜 자신들을 외면했는지 성찰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내년 중간선거와 차기 대선에서 더 처절하고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할 수도 있다. 깅리치는 예언했다. “네 차례 보궐선거에서 연전연패하고도 (민주당의) 망상과 환상은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재선될 것이고, 2024년에는 아마도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민주당은 지금 트럼프 탄핵을 논할 처지가 아니다. 트럼프 재집권이라는 악몽만은 피할 수 있게, 유권자들에게 외면받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기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할 상황이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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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라크 침공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시사주간) 타임 표지로 14번 또는 15번 나왔다. 타임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다음날인 지난 1월21일에 한 말이다. 둘 다 명백한 거짓말이다. 트럼프는 이라크 침공을 찬성했다. 트럼프가 타임 표지에 나온 횟수는 11번이며, 가장 많이 표지에 등장한 인물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다. 닉슨은 55차례나 타임 표지를 장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트럼프는 입만 열면 거짓말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뉴욕타임스가 그의 거짓말 목록을 지난 23일 공개했다. 취임 첫날부터 지난 22일까지 총 154일을 분석했다. 거짓말을 한 날은 114일이다. 4일 중 3일은 거짓말을 한 셈이다. 특히 취임 당일부터 2월 말까지 40일 연속 거짓말을 했다. 신문은 거짓말을 ‘명백한 거짓말(lie)’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falsehood)’로 구분했다. 명백한 거짓말을 한 날은 취임 다음날부터 53일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트럼프가 한 거짓말 횟수는 모두 99건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한 날은 취임 당일을 시작으로 61일이나 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날은 40일이다. 이유가 있다. 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트위터 글쓰기를 하지 않거나, 자기 소유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거나, 골프 치는 날이다. 거짓말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거짓말하지 않은 최장 기록은 5월에 세웠는데, 총 17일이었다. 트럼프가 매우 바빴던 시기다. 그의 대선 캠프의 러시아 내통 의혹인 ‘러시아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터졌고, 첫 해외순방(20~27일) 일정이 있었다. 특히 15일부터 20일 사이에는 거짓말을 한 건도 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15일)와 뉴욕타임스(16일)가 연속으로 ‘러시아 게이트’ 연루 관련 특종을 터트리자 대책회의에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업가 기질 탓인지 트럼프의 말에는 근거 없는 주장이 많다.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는 언론 보도는 ‘가짜뉴스’라고 깎아내린다. 이 때문에 그의 주장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가 미국 언론들의 고민이었다. 뉴욕타임스 분석은 이 같은 논란에 쐐기를 박는, 의미 있는 일이다. 트럼프의 말을 검증하는 일은 언론의 기본 역할이기 때문이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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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의 ‘워싱턴 발언’은 새삼스럽지 않다. 발언 내용은 상식적이고 처음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곧 국가 안보가 무너질 것처럼 과도한 반발이 나오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야당과 보수층의 공격이 일제히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북한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 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교환해 북핵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문 교수의 발언은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기의 심각성은 북한이 얼마나 진전된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지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핵·미사일 실험을 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것이 진짜 위기이며 안보 위협이다.

 

핵·미사일 제거는 나중 문제고, 일단 더 이상 실험을 못하게 함으로써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역주행하는 열차를 제 방향으로 되돌리려면 우선 열차를 멈춰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핵·미사일 활동 동결’과 이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제만 확보될 수 있다면 군사훈련 규모를 축소하는 것보다 더 큰 ‘상응조치’를 제공하더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핵화든 평화체제든 시간이 걸리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문 교수 발언은 그가 평소 강연·언론기고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4월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이 말을 했다. 지난달에는 미국의 고위 관계자 입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는 대화할 수 없다”는 발언이 나왔다. 문 교수 발언은 이처럼 한·미 양측에서 수차례 제시됐던 내용을 한번 더 반복한 것뿐이며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보수층의 느닷없는 비난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전형적인 정치공세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안보를 위협하는 친북 행위로 규정하고 미국이 이에 분노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공갈을 퍼뜨리는 것은 이성을 잃은 행태다.

 

보수인사와 야당, 보수언론까지 합세한 대정부 공세는 뿌리 깊은 친미 사대주의와 색깔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의 대미관·안보관을 ‘약한 고리’로 본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를 반미·친북으로 몰아세워 한·미 갈등을 부각시키고 정권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문 교수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과 같다. 하지만 청와대는 보수층의 공격에 정면 대응을 피한 채 이번 사태가 한·미 정상회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문 교수 발언은 개인적 견해’라며 거리를 두고 문 교수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는 해명까지 곁들였다. 지난 세월 문 대통령에게 씌워졌던 지긋지긋한 ‘종북·좌파·반미 프레임’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당한 권력이 야당과 미국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청와대는 당초 염두에 둔 인물을 국가안보실장에 기용하지 못했다. 그 자리가 돌고돌아 결국 외교안보 경험이 많지 않은 정의용 현 실장에게 간 것도 미국을 의식한 결과다. 하지만 ‘사드 보고 누락’ 사태와 이번 문 교수 발언 파동에서 청와대 안보실이 보여준 미숙한 대응은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조기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해 외교부담을 자초한 것도 대미외교 공백을 서둘러 벌충하려는 조급함에서 빚어진 실책이다.

 

문 교수를 포함해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를 정하고 공약을 만든 인사들은 지금 모두 물러났다. 외교부 장관도 이 분야에 경험이 없는 인물이다. 정부가 ‘개문발차’한 탓에 외교부와 주미대사관 등 관련 부처·기관에는 여전히 전 정부 관료들이 고위직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정체성을 찾으려면 전열 재정비가 시급하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정치세력과 손잡지 않은 촛불혁명의 산물이며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가진 강력한 정부다. 야당이든 미국이든 정공법으로 상대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한·미동맹은 국가 간 동맹이지 정권 동맹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달라졌다고 해서 흔들릴 체제가 아니다. 동맹이라고 해도 정책 우선순위와 안보 환경이 다른 개별 국가 간 관계에서 이견이 없을 수는 없다. ‘빛 한줄기 샐 틈 없는’ 동맹관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건강한 동맹관계는 한 치의 이견도 없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견이 생겼을 때 신속히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한·미 간 견해는 언제나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국정과 대외정책을 펴 나가기를 바란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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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웰다잉(Well Dying)’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시신 기증이나 유언장 작성 등 지금까지 걸어왔던 삶을 되짚으면서 ‘잘 죽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웰다잉’ 바람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에서 먼저 불었다. 임종(臨終)을 준비하는 활동인 ‘슈카쓰(終活)’는 문화 현상, 나아가 산업으로까지 성장했다. 일본 노인들은 간병, 종말 의료, 장례 준비, 재산 상속 등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엔딩노트’라는 공책도 팔린다. 자신이 묻힐 납골당이나 묘지를 둘러보는 ‘슈카쓰투어’도 성행하고 있다. 무덤 친구인 ‘하카토모(墓友)’라는 말도 생겼다.

 

‘슈카쓰’의 배경으론 일본인 특유의 철저한 준비성이 꼽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초고령사회를 넘어 ‘독거노인 사회’ ‘고독사 사회’로 가는 현대 일본의 그늘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슈카쓰에선 생전(生前) 정리나 생전 계약이 성행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효고현 니시노미야에 있는 ‘릴리프’라는 회사는 연간 1000건의 생전 정리를 해주고 있다. “물건들을 방치한 채 죽으면 주변에 폐를 끼친다”는 이유로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 비용은 35만엔(약 356만원). 신원보증과 간병부터 화장이나 납골까지 대신해 주는 생전 계약도 인기를 끈다.

 

‘고독사보험’이라는 금융상품도 나왔다. 독거노인이 임대주택에서 홀로 사망할 경우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어렵고 임대주택 정리에 비용이 많이 들어 이에 대한 집주인의 손실을 보상해주는 보험이다. 일본에선 고독사 우려 때문에 집주인들이 노인들에게 주택 임대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집주인의 65%가 독거노인에게 주택 임대를 꺼린다는 조사도 나왔다. 고독사보험은 이런 집주인을 안심시킬 수 있는 수단인 셈이다.

 

일본 사회의 문제는 노인 인구가 많다는 것을 넘어선다. 혼자 사는 사람이 증가하고, 가족·친지간의 관계는 옅어지고 있다. 2014년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는 65세 이상 독거노인이 2035년에는 762만명으로, 2010년 498만명보다 53%나 늘어난다고 예측했다. 노쇠하고 병이 들어도 혼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슈카쓰의 최근 동향에는 ‘웰다잉’보다 ‘불안’의 요소가 더 강해 보인다. 죽기 직전까지, 혹은 죽고 나서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걱정이 투영돼 있는 게 아닐까.

 

문제는 슈카쓰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본종합연구소는 2035년에는 고령자 세대의 27.8%가 수입이나 저축이 부족해 생활보호 수준을 밑돌 것이라는 추계를 최근 내놓았다. 죽음을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간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실버산업에만 맡겨둘 게 아니라 국가가 정책적으로 나서서 품위 있는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독거노인 주거 지원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세계에서 장수(長壽)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해지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령화나 노인 문제를 듣다 보면, 모두들 노인들을 ‘주변에 폐를 끼치는 존재’로 여기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경제발전의 장애물도 고령화고, 국가재정 위기의 이유도 고령화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보여줬다. 이를 능가하는 게 한국이다. ‘웰다잉’은 둘째치고, 고독사나 독거노인 문제가 얼마나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노쇠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고려장’은 설화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현대판 고려장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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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100도(약 38도)를 넘나드는 한낮 폭염을 뒤로하고 미국 워싱턴의 의사당에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러시아 스캔들’에 관한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사진)의 증언을 취재하기 위해 13일(현지시간) 찾아간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장 하트빌딩 216호. 입구에는 방청객들이 이미 수십m의 줄을 이루고 있었다. 청문위원들과 마주 보는 기자석의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예정보다 10여분 지난 오후 2시40분쯤 세션스가 입장하자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공화당 소속 리처드 버 정보위원장과 민주당 간사 마크 워너 의원의 모두발언 이후 세션스가 선서를 했다. 그는 10여분의 모두발언에서 “나는 지난 20년간 상원에서 여러분의 동료였다”면서 “러시아 내통 의혹에 내가 연루됐다는 주장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거짓말”이라고 했다. 앞서 그는 인준 청문회 때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 대사를 두 번 만났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메이플라워호텔에서 한 차례 더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세션스는 이번 증언에서 “러시아 대사나 러시아 관리들과 대화하거나 만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법무부의 오랜 관행상 대통령과의 비밀대화를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와의 대화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의혹은 부인하고 불리한 질문에는 답변을 거부하겠다는 예고였다.

 

앞서 8일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트럼프가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중단하라는 압박을 했다고 증언했다. 버는 세션스에게 코미의 이 증언에 대해 물었다. 세션스는 “대통령과 FBI 국장 간의 대화에는 전혀 잘못된 게 없다”고 답했다. 세션스는 민주당 첫 질문자인 워너의 질문까지 자르며 공격적으로 답변했다. 코미가 트럼프와 독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상의해왔을 때 법무장관으로서 어떻게 조치했느냐고 묻자 세션스는 “코미는 그게 부적절하다는 세부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몇몇 민주당 의원들과는 날카로운 설전을 벌였다. 코미에 관해 트럼프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일절 답변을 거부했다. 민주당 마틴 하인리히 의원은 “의회 조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공격했고, 론 와이든 의원도 “의사진행 방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세션스는 “법무부의 역사적 정책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출신인 카말라 해리스 의원은 ‘법무부 관행’을 들며 답변을 거부하는 세션스를 몰아붙이다 위원장의 경고를 듣기도 했다.

 

키슬랴크 대사와의 만남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세션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러시아 스캔들 수사에서 스스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다른 이유가 있느냐고 와이든이 몰아붙이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나한테 말해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 의원들은 세션스 방어에 나섰다. 톰 코튼 의원은 “미국의 현직 상원의원과 외국 대사가 수백명이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파이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공모한다는 웃기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고, 세션스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며 웃었다. 민주당의 의혹 제기를 희화화한 것이다.

 

2시간30여분에 걸친 청문회가 끝났지만 트럼프 측과 러시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트럼프가 무엇을 감추려 했는지 선명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트빌딩을 나설 때도 숨막히는 더위는 여전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프랭크 브루니는 “세션스는 여러 질문들을 쳐냈고, 대답을 했다 하더라도 얄팍하고 무용했다”고 비판했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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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시의 한 고등학교 졸업 사진이 중국 전역에서 화제가 됐다. 사진을 본 이들은 분노했고 학생들의 마음에는 생채기가 났다.

 

청두 룽취안(龍泉)고등학교 고3 학생들은 지난 5월 졸업 앨범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인화된 사진 속에는 촬영할 때는 없던 교장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사진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으로 교장의 사진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학생들은 “교장선생님, 그렇게 바쁘세요? 이거 졸업 사진인데 어떻게 조작할 수 있죠?”라고 분개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학교 측은 재단에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있다 보니 교장이 반마다 다니며 단체사진을 찍기 힘들었다고 해명했다. 올해 졸업하는 고3 학생들만 28개 반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장은 이 중 2개 반인 엘리트반 학생들과는 직접 사진을 찍은 것으로 확인됐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에게 ‘촬영 차별’을 한 것이다. 가장 순수해야 할 학교에서 숭고한 교육의 정신이 무너졌다는 분노가 쏟아지고 있다.

 

중국 교육계도 성적 우선주의냐 인성을 중시하는 인재 양성이냐 하는 고민에 부딪혀 있다. 난제를 풀기도 전에 취업난이 심화되고 경쟁이 격화되자 성적 우선주의에 힘이 실린다. 문제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수가 됐다는 사실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뜻의 중국 속담인 ‘까마귀 둥지에서 봉황이 난다’는 실현되기 힘들다. 지난달 상하이의 유명 사립초등학교인 양푸(陽浦)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은 지능(IQ) 테스트를 치러야 했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양육 상태를 상세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또 다른 형태의 ‘연좌제’다.

 

상하이의 또 다른 사립학교인 칭푸(靑浦)세계외국어학교는 신입생 선발 과정에서 조부모의 직업과 학력을 조사했다. 학부모들에게는 최종 학력이 아니라 최초 입학 대학을 따로 물었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체 임원이 되면 명문대 대학원에 쉽게 입학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변별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좋은 집안 자제를 가려 뽑기 위해 학업 능력 파악과는 무관한 질문에 몰입했다. 교육의 기회는 균등해야 하지만 초등교육부터 부모의 지능, 학력, 직업, 재력으로 갈라진다.

 

올해로 중국 수능인 가오카오(高考)가 회복된 지 40년이 됐다. 대학 입학시험은 문화대혁명(1966~1977년) 10년간 사라졌었다. 당시 학생들은 지식 청년을 노동 현장으로 보내는 하방(下放) 정책에 따라 농촌에서 일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등학교나 대학에 쉽게 갈 수 없었고 추천제만이 유일한 입학 통로였다. 학업 성적보다는 당에 대한 충성이 우선시됐다.

 

신경보는 “가오카오는 펜으로 찬란한 미래를 그릴 기회”라면서 “4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가오카오란 사치스러운 희망에 불과했다”고 했다. 환구시보는 “가오카오가 수천, 수만명의 중국 청년들에게 운명을 개척할 기회를 줬다”고 평가했다. 1977년 입시제도가 되살아난 후 대학에 들어간 이들은 현재 중국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시진핑 주석도, 리커창 총리도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칭화대, 베이징대에 입학해 대학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40년간 중국이 경제적으로 무섭게 성장하면서 교육은 운명을 개척할 기회가 아니라 또 다른 부의 상속 방법으로 변형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세우고 국가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다. 교육이라는 공정한 계층 이동 통로가 사라진 사회는 암울하다.

천바오셩 교육부장(장관)도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듬해인 1978년, 22세에 베이징대에 입학했다. 그는 중국의 교육이 상식, 본분, 초심, 꿈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기본’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교육은 상식적이고 본분에 충실한가, 초심을 잊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이 없을 것이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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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최근 잇달아 치러진 프랑스와 영국의 총선 결과는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에마뉘엘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일으킨 돌풍은 총선에서도 이어졌다. 마크롱이 지난해 4월 창당한 정당 리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공화국)는 지난 11일 치러진 총선 1차 투표에서 압승했다. 오는 18일 2차 결선투표에서 전체 의석(577석)의 3분의 2가 넘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출구조사가 예측했다. 창당한 지 1년2개월밖에 안된 정당이 한 달 사이에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하는 현상은 현대 정치사에 유례없는 일이다. 가히 정치혁명이라 할 만하다. 반면 지난 8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집권 보수당은 예상과 달리 과반 의석조차 잃는 등 참패했다. 조기 총선을 강행한 테레사 메이 총리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졌다. 유럽연합 탈퇴를 의미하는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보수당으로서는 1년도 안된 시점에서 믿기지 않는 결과에 아연실색하고 있다. 19일부터 진행될 브렉시트 협상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9일(현지시간) 잉글랜드 메이든헤드에서 총선 개표 진행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마크롱의 잇단 돌풍은 기성 정당 및 정치인에게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 그만큼 공화·사회당 중심의 기존 정당체제는 프랑스 유권자들의 열망을 읽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반면 신생 정치인 마크롱은 유권자들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새 정치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천혁명을 이뤄냈다. 공천자의 절반을 여성과 시민사회 출신 전문가로 채운 것이다. 영국 보수당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메이 총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노인요양 지원 축소 공약(일명 치매세)을 발표했다가 논란이 되자 철회함으로써 지도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홀로 토론을 거부하는 오만도 부렸다. 그 결과 의석은 물론 신뢰도 잃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브렉시트에 대한 유권자의 태도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데 있다. 그러나 이번 총선으로 기사회생한 노동당은 보수당의 긴축정책과 불평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 젊은 유권자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두 나라의 총선 결과가 시사하는 점은 변화하는 현실이나 유권자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좌파든 우파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크롱의 성공과 메이의 실패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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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에게 ‘러시아 게이트’ 수사 중단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코미 전 FBI 국장은 8일 미 상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트럼프가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이같이 압박했다고 증언했다. 코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제기돼온 수사 중단 압력 의혹을 ‘가짜뉴스’라며 책임을 회피해온 트럼프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특히 수사 중단 압력이 사법방해에 해당한다면 트럼프는 탄핵 소추 등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임스 코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왼쪽 사진)이 8일(현지시간) 워싱턴 의사당에서 열린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오른쪽)의 ‘러시아 스캔들’ 수사 개입 등에 대해 증언했다. 코미는 트럼프 대통령이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한 수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는 ‘사법방해’인지를 놓고 미 정가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코미의 증언으로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러시아 게이트 수사 방해와 그의 해임을 둘러싼 사태의 전모가 드러났다. 트럼프는 회유책을 먼저 썼다. 트럼프는 취임 일주일 뒤인 지난 1월27일 백악관에서 코미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충성심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코미는 대통령이 “모종의 후원 관계를 만들려”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트럼프의 제왕적 대통령관을 드러낸 것으로, FBI 독립을 훼손하는 행위다. 회유에 실패한 트럼프는 수사 중단 압력을 넣었다. 트럼프는 지난 2월14일 코미를 백악관에서 만나 러시아와 내통한 의혹을 받고 있는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 수사에 대해 “나는 플린을 놔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코미는 “대통령이 플린 수사를 멈추라고 요구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토로했다. 특히 트럼프는 코미와 단둘이 대화하려고 다른 참석자들을 내보냈다. 지난 3월30일에는 코미에게 전화를 걸어 러시아 게이트 수사를 국정운영을 방해하는 ‘구름’이라며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물었고, 빨리 수사를 마무리하겠다는 답을 얻어냈다. 회유와 압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트럼프는 지난 5월9일 코미를 전격 해임했다.

 

코미의 증언에서 탄핵 소추의 사유가 되는 사법방해에 해당할 수 있는 대목은 2월14일 대화와 3월30일 전화 통화다. 트럼프의 행위가 사법방해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법방해로 탄핵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집권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어 탄핵은 쉽지 않다. 코미의 증언으로 트럼프에 대한 미국 내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리스크’의 현실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중동의 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당장 열흘여 남은 한·미 정상회담이 정상적으로 열릴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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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27일 저녁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수도 알제 시내가 갑자기 캄캄한 암흑이 됐다. 전기가 나갔다. 전기가 부족해서도, 전력회사의 실수도, 천재지변이 온 것도 아니었다. 정부가 일부러 끊은 것이다. 정부가 수백만명의 불편과 바꾼 것은 알자지라 방송이었다. 이날 알자지라는 알제리 반정부 인사의 토론을 내보낼 예정이었다. 알제리군의 민간인 학살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카타르 도하 알자지라 본사를 방문했다. 무바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 모든 소란이 이 작은 성냥갑에서 나온단 말이냐.” 개국한 지 3년밖에 안된 카타르의 방송사는 그렇게 중동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바라크는 2년 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시민혁명으로 30년 독재를 내려놓고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지금 알자지라는 다시 걸프국이 주도한 카타르 ‘왕따’ 사태의 최전선에 섰다. 이웃 나라 쿠웨이트 군주 셰이크 사바가 중재를 자처하며 왕따를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갔지만 갈등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걸프국들이 원하는 건 뭘까. 걸프 안팎에서는 카타르와 이란의 친밀한 관계, 카타르의 ‘얄미운’ 개혁 등 여러 배경이 복잡하게 얽힌 이번 사태의 희생양으로 알자지라가 거론된다.

 

3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우디,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수개월의 외교분쟁 끝에 카타르 주재 자국 대사를 모두 소환했다. 그때도 알자지라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하마스 같은 저항조직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지역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카타르의 특사가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만난 직후 카타르는 알자지라의 이집트 채널을 폐쇄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놨다. 단교까지 치달은 상황을 볼 때 카타르는 이번에 더 큰 양보를 해야 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UAE의 유명 지역 평론가인 술탄 소우드 알카세미는 지난 4일 트위터에 “카타르의 첫 화해 제스처는 알자지라 폐쇄가 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1996년 4월 영국 BBC방송이 사우디 정부와 공동 소유하고 있던 ‘BBC아랍’이 사우디의 검열을 둘러싼 갈등 끝에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인력과 카타르의 셰이크 하마드 전 국왕이 ‘빌려준’ 5억 카타르 리얄(약 1500억원)이 합쳐져 그해 11월 알자지라가 탄생했다. 알자지라는 철저한 정부의 보도 통제에 익숙하던 중동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물주’인 카타르 왕실과 정부를 빼면 알자지라의 보도 대상이 아닌 게 없었다. 알자지라는 아랍권 TV로는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하는 이스라엘인을 방송에 내보낸 언론이었다. 알자지라가 선보인 라이브 토크쇼 <반대방향(The Opposite Direction)>은 늘 논쟁거리였다. 알자지라의 모토는 ‘의견 그리고 또 다른 의견’이다. 종래 언론에서 볼 수 없던 다른 목소리와 금기들이 전파를 탔다. 그들은 서방 언론과도 달랐다. 알자지라만 내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BBC, CNN 등에서 재방송됐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개국 후 첫 10년 동안 카타르 정부에 450건이 넘는 외교적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난해 개국 20년을 맞은 알자지라는 400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확보한 중동의 1위 방송사가 됐다.

 

2010~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중동의 ‘알자지라 울렁증’은 더 극심해졌다. 당시 알자지라는 소셜미디어와 함께 ‘아랍의 봄’의 일등 공신으로 거론되며 ‘알자지라 효과’라는 말을 낳았다. 이집트 사상 최초 민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하고 들어선 엘시시 정권은 2014년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보도로 테러를 도왔다”며 알자지라 기자들을 가두고 추방했다. 사우디도 단교하자마자 알자지라의 리야드 사무소를 폐쇄해버렸다.

 

걸프국들과 카타르가 어떤 타협을 볼지 아직은 알기 어렵다. 만약 타협안에 휘말려 ‘다른 목소리’가 사라지게 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다른 건 원래 불편한 법이다.

 

국제부 이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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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큰딸 이방카의 장기는 ‘사라지기’다. 트럼프가 지난 1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발표하는 순간 이방카는 현장에 없었다. 트럼프가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기 위해 트럼프케어의 하원 표결을 시도한 지난 3월에도 이방카는 콜로라도주의 스키리조트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즐겼다.

 

‘퍼스트도터’ 이방카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 없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그녀를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으로 묘사한다. 트럼프 정부에서 성소수자(LGBTQ), 여성,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와 환경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게 미국 언론의 평가다. 직함도 없이 백악관 웨스트윙에 버젓이 사무실도 냈다. 실제 지난 2월 트럼프는 전임 행정부의 성소수자 권리 보호 행정명령을 폐기하려다 포기했다. 당시 뉴욕타임스 등은 이방카 부부의 설득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방카는 파리협정 탈퇴도 끝까지 반대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등은 전했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정책들을 얼마나 견제하고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얼마나 견인했느냐를 기준으로 이방카의 성적을 한번 매겨보자. 이방카가 반대했다고 하지만 트럼프는 결국 ‘종교의 자유’ 행정명령을 통해 성소수자 보호막을 걷어내버렸다. 2400만명이 건강보험을 잃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트럼프케어에 이방카가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은 없다. <일하는 여성: 성공의 법칙 다시 쓰기>란 책도 냈으나 오바마케어에서 의무화했던 산아제한 지원을 없애는 데 저항하고 있다는 전언은 들려오지 않는다. 기후변화 대응을 옹호한다지만 결국 트럼프의 파리협정 탈퇴를 막지 못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빵점’이다. 이방카는 공식 직함도, 직무도 없으니 책임질 일도 없다. 하지만 정식 직책을 맡았다면 그녀는 백악관 대변인 션 스파이서와 함께 해고 후보에 올라야 한다.

 

이쯤 되면 이방카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 이방카의 정치적 성향이 잘못 알려졌거나, 아니면 언론이 평가하는 것보다 트럼프에 대한 영향력이 미약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의 크리스티 골드퍼스는 “트럼프의 파리협정 탈퇴는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이방카의 능력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그녀의 명성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방카는 트럼프의 정치적 자산이다. ‘야수’ 아버지의 부정적 이미지를 보완해줄 ‘미녀’ 딸이다. 트럼프가 세 번 결혼한 방탕한 부동산 갑부라면 이방카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는 세 아이의 엄마다. 트럼프가 부인 멜라니아의 손을 잡으려다 퇴짜 맞는 영상이 화제가 될 때 이방카는 꽃미남 남편, 아이들과 함께한 행복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린다. 트럼프가 피츠버그의 블루칼라 노동자 이미지라면 이방카는 세련된 뉴요커다. 미국 사회에서 이방카와 그녀의 가족은 동경의 대상이다. 코미디 프로그램 <SNL>은 그녀를 상징하는 정서에 ‘공모(complicit)’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방카는 외국 정상들과의 회담 같은 빛나는 자리에는 배석해도, 파리협정 탈퇴처럼 이미지 구길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를 두고 마치 ‘환경보호광고(greenwashing)’ 같다는 비판이 나온다. 환경오염의 주범 기업들이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적은 돈으로 환경을 소중히 하는 듯한 광고를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란 것이다. 심지어 이방카는 그런 최소한의 희생조차 하지 않고, 이해충돌 논란 속에 상업적 이득만 취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 반성소수자, 반여성, 반이민, 반환경으로 가는 게 이방카 탓은 아니다. 그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제 이방카가 트럼프의 독주를 견제해줄 것이란 기대는 접는 게 어떨까. 이방카는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와 브랜드로만 존재하는지 모른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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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외주의적 공격에 대한 무관심, 이지메(괴롭힘)를 못 본 척하는 게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걸어다니고 싶다,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3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 한국YMCA에선 헤이트스피치(증오발언)억제법 시행 1년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다. 차별에 괴로워하는 마이너리티,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싸워온 외국인인권법연락회 등 시민단체들이 지난 1년을 되짚고 향후 과제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이번 법이 심각한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던 일본 정부가 처음 내놓은 대책이라는 데 의의를 뒀다. 실제로 법 시행 후 우익단체 시위는 줄어들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법 시행 후 지난 4월까지 우익단체의 시위는 3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61건에 비해 감소했다.

 

하지만 집회 신청이 필요 없는 거리 선전은 그만큼 줄지 않았다. 아케도 다카히로(明戶隆浩) 간토가쿠인대 강사는 “거리 선전은 19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234건에 비해 그리 많이 줄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본인을 살해해온 ○○인”처럼 위협을 먼저 가해온 게 상대방이라는 ‘정당방위’ 뉘앙스를 사용하거나 “소멸시키자”라는 극단적인 표현 대신 “(재일한국·조선인 등에게 영주권을 주는) 입관특례법 폐지”라는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터넷이다. ‘사형’ ‘사살’ ‘살처분’ ‘기생충 구제(驅除)’처럼 거리 시위나 거리 선전에서 피하는 잔혹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인이 관련된 범죄사건 기사에는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다.

 

김명수 간사이가쿠인대 교수는 “인터넷상의 헤이트스피치 때문에 한국·조선 국적의 40%가 인터넷 이용 자체를 피하고 있고, 프로필에 자신의 출신을 쓰지 않는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이트스피치억제법은 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을 없애기 위해 지난해 6월3일 시행됐다. 지자체 단위에서 제도를 보완하고 있지만 아직 미흡하다. 아케도는 “법무성은 선동의 범위를 ‘쫓아내자’처럼 직접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유럽에선 특정집단의 위협이나 위험성을 부채질하는 듯한 발언도 선동에 포함시킨다”며 “프랑스에선 ‘무슬림이 이 나라의 지배자’ ‘외국인의 침략을 받고 있다’는 발언을 한 이들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상이 헤이트스피치만이라는 점도 한계다. 지난 3월 발표된 법무성의 외국인주민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재일 외국인의 40% 정도가 살 집을 구하는 데에서 차별을 겪었고, 25%는 취업 차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주택 입주나 취업에서의 차별은 국제사회가 금지하는 중대한 차별인데 일본에는 관련 법률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법은 ‘일본 외 출신’에게만 적용된다. 하지만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나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만만치 않다. 이날 연단에 선 기타가와 가오리는 “‘아이누 사람들은 겉모습으론 알 수 없으니 DNA 감정을 해야 한다’거나 ‘아이누가 멸종되게 놔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게 한 일본 정부가 대단하다’는 식의 헤이트스피치가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오키나와 류큐신보의 아라카키 쓰요시 기자는 “경찰이 오키나와인을 ‘토인(土人)’이라고 말했는데도 일본 정부는 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헤이트스피치가 퍼지다 보면 헤이트크라임(증오범죄)이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이 법이 제대로 이행되려면 정부 차원의 실효성 있는 대책과 함께 인종차별철폐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모로오카 야스코 변호사는 “정부와 지자체는 국제 인권법에 합치하는 인종차별 철폐정책을 만들고 법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면서 “법무성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인권대국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연내에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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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엔 사무총장 등 세계 각국 지도자의 반대에도 파리 기후변화협정 무력화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는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는 전 지구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임에 틀림없다. 또한 전 세계 국가들이 참여해 만든 국제협약을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무시하는 폭력적인 행태나 다름없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트럼프의 이런 태도는 어떤 변명으로도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지구온난화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전 지구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은 이날부터 파리기후변화협정의 이행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는 대선 전후로 파리협정을 부정한다고 공언해왔다. 그는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주장할 만큼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를 불신했다. 이런 개인적 인식 외에 국익을 앞세우는 미국 우선주의에 근거해 협정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등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판단도 기후협정을 부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위협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미 정부도 인정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기후변화를 ‘위협 증폭기’라고 했고, 국가정보위원회는 “향후 20년 동안 정치·경제·사회·안보에 직간접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협정 탈퇴는 지도력 실추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어 미국 안에서도 논란이 됐다. 아무리 국익이 중요하다해도 동맹국이나 파트너와 협력해야 미국 우선주의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협정을 탈퇴하면 미국 입장에서도 소탐대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트럼프가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중국에 이어 세계 온실가스 배출 2위인 미국이 발을 뺀다면 후유증은 심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파리협정은 유명무실해진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협정을 준수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게 하고, 나아가 ‘탈퇴 도미노’를 자극할 수도 있다. 다행히 중국과 유럽연합이 미국의 탈퇴와 상관없이 파리협정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2일 발표하기로 했다. 이 약속이라도 성실히 이행하도록 국제사회가 힘을 모으는 일이 절실하다.

 

세계는 이제 미국 없이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청정에너지를 개발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언젠가 다시 미국을 협정에 복귀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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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만큼 당사자에게 더 큰 조롱이 있을까. 일흔 살이 넘은 한 나라의 대통령, 그것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어떨까. 한국이라면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비난이 쇄도할 만하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버젓이 다뤄진다. 그것도 최고 신문 뉴욕타임스(NYT)에서 말이다.

 

지난 5월 중순 ‘트럼프가 어린애냐 아니냐’는 논쟁이 NYT를 달궜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쓴 ‘어린이가 세계를 이끌고 있는 시대’라는 글이 발단이었다. 브룩스는 도널드 트럼프가 그동안 한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그를 ‘유아기에 머문 어른’을 일컫는 미성숙자(infantilist)라고 규정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대부분의 성인들이 차분히 앉아 있을 수 있지만 트럼프는 교실에서 뛰어다니는 7세 초등학생 같다. 둘째, 성인들은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지만 트럼프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셋째, 성인은 상대의 미묘한 생각을 이해하는 법을 알지만 트럼프는 ‘마음이론’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이틀 뒤 NYT 오피니언면에 발달심리학자들의 반박 편지가 실렸다. 제목은 ‘아이들을 트럼프와 비교하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끊임없는 인정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심리학 교수의 ‘4살짜리도 트럼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반박 글이 이어졌다. 글쓴이는 4살 아이의 특징들을 열거하면서 트럼프와 어린애를 비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 국장

‘트럼프=어린애’ 비유는 대통령이 된 후 트럼프가 한 결정이나 행동을 어린애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취임 전 트럼프 대선 캠프 관계자들이 러시아 측과 내통했다는 의혹인 ‘러시아 게이트’ 스캔들과 관련해 수사 책임자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전격 해임한 사례를 보자. 마치 화난 아이가 맘에 들지 않는 장난감을 던져버리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쌓는다는 발상은 어떤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심술꾸러기의 심보를 빼닮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회원국들에 분담금을 더 내라고 한 것은 골목대장이 나약한 아이에게 “내 말 안 들으면 알지?”라며 협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어 무임승차만 하려는 회원국들에 대한 트럼프의 분노는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나토 정상회의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몬테네그로 총리를 밀치거나 새파랗게 젊은 프랑스 대통령과 힘겨루기 악수를 하는 모습은 어떤가. 떼를 써서라도 원하는 걸 가지려는 어린애의 행동 아닌가. 이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행태는 친구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못되어 먹은 아이와 뭐가 다를까.

 

심리학자들이 꼽는 어린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충동 조절을 잘 못한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한다, 인간의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한다 등이다. 이 기준을 트럼프에게 적용하면 꼭 들어맞는다. 아무리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고 자기만족에 빠진 나르시시스트이지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을 터이다. 부유층으로 자란 트럼프는 어릴 때부터 우월감과 승부욕이 넘쳤다. 그런 기질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교사에게 주먹을 휘둘러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트럼프는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있었으며 폭력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내 생각을 알리고자 했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트럼프 부모는 아들의 고약한 기질을 바로잡기 위해 13세 때 규율이 엄격한 군사학교에 보냈다. 거기서는 어땠을까. 해병대 출신의 거칠고 엄격한 선생을 만난 트럼프는 존경과 환심을 사는 행동으로 매질을 피하는 영악함을 보였다고 한다.

 

울며불며 대드는 아이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감정을 추스르도록 다독이며 다정하게 안아주는 일이다. 그러고는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트럼프는 공인이 된 이후 어른다운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지금부터라도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그럼에도 지금 그에게 성숙함이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자신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를 위해서도 그렇다. 취임 후 첫 해외순방에서 돌아온 트럼프는 다시 ‘러시아 게이트’ 스캔들을 마주하고 있다. 탄핵 이야기가 나올 만큼 스캔들은 미국을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 탄핵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궁금하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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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유럽 역사는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 견제와 균형의 역사였다. 네 나라가 서로 물고 물리면서 세력 균형자 노릇을 했다. 독일은 공포이자 비난의 대상이었다. 어느 누구도 강력한 독일도, 분열된 독일도 원치 않았다. 어떤 경우든 유럽의 세력 균형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독일 입장으로서는 영향력을 행사해도, 하지 않아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국제관계 속에서 형성된 ‘독일 딜레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8일(현지시간) 뮌헨에서 열린 기민·기사당 합동 행사에 참가해 연설 도중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뮌헨 _ AF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독일 딜레마’ 속으로 뛰어들려는 걸까. 메르켈이 지난 28일 “유럽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한 발언을 보며 든 생각이다. 메르켈은 맥주파티 형식의 정당행사에서 “이것이 지난 며칠간 경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및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협약 5조 준수를 거부하고 파리기후협정을 반대한 데 대한 불만으로 해석됐다. 파장이 컸다. 유럽과 미국의 결별선언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협회(CFR) 리처드 하스 회장은 “분수령”이라고 표현했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기드온 라흐만은 4개월여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70년 된 대서양동맹에 의문을 품게 한 점 등을 들어 “메르켈의 실수”라고 했다.

 

메르켈 측은 다음날 진화에 나섰지만 파문이 가라앉을지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의 발언이 맥주를 마시며 늘어놓을 넋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정세를 분석한 끝에 내린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영국은 지난해 유럽연합 탈퇴로 대륙에서 멀어졌다. 풋내기 정부 프랑스는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에 대항할 태세다. 미국은 유럽을 버리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몸속에서 세력 균형자로 나서야 한다는 욕구가 일렁이지 않을까.

 

실제로 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에 비례해 그의 위상은 높아가고 있다. 오는 가을이면 4선 총리도 가능하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나, ‘라인강의 기적’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견줄 만하다. 메르켈의 발언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머지 국가 지도자들의 견제가 불을 보듯 뻔하다. ‘메르켈 딜레마’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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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8일 재임 1981일을 맞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를 제치고 전후 세 번째 ‘장수 총리’가 된 것이다. 아베 총리가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할 경우 2019년 8월에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2798일)를 제치고 전후 최장수 총리에 오를 수도 있다.

 

실제 일본 언론들은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고공행진 중이고, 강력한 장악력으로 당내에 반대 목소리가 없으며, 제1 야당인 민진당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최장수 총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분위기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아베 총리와 측근들의 최근 언행에선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자신감이 배어나온다. 잇따르는 망언과 독선에선 오만함까지 엿보인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는 가케(加計)학원 스캔들 대응도 마찬가지다. 이 스캔들은 아베 총리가 친구가 이사장으로 있는 가케학원이 수의학부 신설 허가를 받도록 힘을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지난 17일 폭로된 정부 문건에는 총리실을 담당하는 내각부가 가케학원 수의학부 신설에 대해 문부과학성 측에 “관저 최고위층의 의견” “총리의 의향”이라고 압력을 가한 내용이 담겼다. 26일에는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성 사무차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문서는 확실히 존재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폭로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문제는 아베 정부의 대응이다. “괴문서” “출처를 알 수 없어 신빙성이 없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마에카와 전 차관의 도덕성 문제를 부각시키는 식으로 스캔들을 덮으려 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마에카와 전 차관이 문부성 퇴직 관료들의 취직 알선 문제로 지난 1월 사직한 것을 두고 “스스로 사임하지 않고 지위에 연연하며 매달렸다”고 비판했다. 마에카와 전 차관이 유흥업소에 출입했던 사실도 거론했다.

 

이번 스캔들의 핵심은 가케학원의 수의학부 신설에 아베 총리의 의향이 작용했는지, 아니면 내각부가 ‘총리의 의향’을 핑계 삼아 문부성의 ‘신중론’을 눌렀는지다. 아베 정부는 이에 대해선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관료사회의 ‘손타쿠(忖度·알아서 기다)’ 현상만 두드러진다. 문부성은 자체 조사 결과 앞서 폭로된 내부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관련 직원들의 컴퓨터 문서 삭제 이력을 조사하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바다에 가서 잉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잉어는 없다’고 말하는 논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스캔들은 한국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첫째는 ‘정윤회 문건’ 사건이다. 지난 2014년 최순실씨의 전 남편 정윤회씨가 국정에 관여한다는 내용의 청와대 유출 문건 파동을 말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 “문건 내용은 찌라시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어도 최씨 일가가 박 전 대통령과 국정농단을 해왔다는 것은 추후 드러났다. 둘째는 ‘채동욱 낙마’ 사건이다. 2013년 검찰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방패막이였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조선일보의 ‘혼외자식’ 보도로 결국 사임했다. 이번 가케학원 스캔들에선 ‘괴문서’라는 말이 등장한다. 마에카와 전 차관의 유흥업소 출입 문제는 보수신문인 요미우리신문이 단독 보도했다.

 

요즘 아베 정권이 밀어붙이는 ‘테러 등 준비죄’(공모죄) 법안을 두고 지난해 한국에서 야당의 기록적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낳았던 테러방지법 논란의 ‘일본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일 평행이론’ 얘기도 들려온다.

 

아베 총리 주변에선 ‘최장수 총리’ 등극은 시간문제로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베 1강(1强)’의 뒤틀린 인식이 어느 틈에 파열음을 낼지 모르는 일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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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엔과 일본 정부의 관계가 미묘하다. 유엔 특별보고관이 일본 국내 문제에 대해 잇따라 우려를 표명하자 일본 정부가 대놓고 반박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유지하기 위해 ‘여론 호도’를 서슴지 않으면서다. 급기야 유엔 측이 “위안부 합의에 동의한 적 없다”고 진화에 나서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28일(현지시간) 논평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합의에 따라 해결할 사안이라는 데 동의했다”면서 “구체적인 합의 내용이 아니라, 위안부 해법의 본질과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양국에 달렸다는 원칙에 동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외무성은 구테흐스 총장이 지난 1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회담하며 “위안부 합의를 지지하고 환영한다”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두자릭 대변인은 또 “특별보고관은 독립적인 전문가로 유엔 인권이사회에 직접 보고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특별보고관의 우려 표명에 항의했고 구테흐스 총장도 항의에 공감했다는 듯이 발표했는데, 두자릭 대변인은 이 또한 부인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면담 내용을 호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게 됐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분담금 지급을 보류하면서 유네스코의 난징(南京)대학살 자료 등재에 반발하고, 한·일 위안부 자료의 심사 및 등재를 막아왔다. 유엔 인권최고기구 산하 고문방지위원회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개정하라고 권고한 것에 대해서도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문을 제출했다. 국제무대에서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전을 펼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본의 외교전에는 위안부 문제 등 보편적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빠져 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반인도 범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고,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데 앞장서는 일이다.

 

일본 내 인권·민주주의 상황에 대해 유엔 특별보고관들의 우려가 잇따르고 있는 점도 되새겨볼 대목이다. 유엔은 ‘감시사회’ 논란을 일으킨 공모죄 법안,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해온 시민운동가의 장기 구류, 언론 통제 등을 두고 인권과 표현의 자유 침해를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우려를 되레 반박하고 있다. 심지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우려한 특별보고관의 서한에 대해 “무언가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고까지 했다.

 

일본은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이다. 북한 납치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는 이유로 특별보고관에게 국가훈장을 준 적도 있다. 다니구치 마유미(谷口眞由美) 오사카국제대학 부교수는 전날 TBS 방송에 나와 일본 정부가 “두 개의 혀”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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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해외순방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는 9일간 중동 및 유럽 5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28일 트위터에 “이번 순방은 미국에 큰 성공이었다”고 썼다. 트럼프의 첫 순방은 미국의 핵심이익인 중동과 전통적인 동맹인 유럽 국가에 맞춰진 만큼 대외정책의 근간인 미국 우선주의와 유럽 동맹국과의 협력관계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첫 순방은 그의 평가처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익을 앞세운 나머지 미국과 유럽 간 동맹관계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킨 점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중동 방문은 큰 이변 없이 순조로웠다. 이란 핵무장 반대, 이슬람국가(IS) 격퇴 등 동맹국들을 안심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보인 행보는 달랐다. 유럽 안보나 러시아 위협은 안중에 없이 국익에만 치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 협약 5조 준수 거부, 방위비 분담금 확대 요구는 회원국의 분노를 샀다. 1949년 나토 창설 이후 정상회의에서 협약 5조 준수를 거부하고 분담금 증액을 요구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가 유일하다. 트럼프 관점에서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고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은 나토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파리기후협정을 유일하게 반대하고,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보는 독일을 “매우 나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8일(현지시간) 뮌헨에서 열린 기민·기사당 합동 행사에 참가해 연설 도중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뮌헨 _ AFP연합뉴스

 

미국 안에서는 트럼프의 유럽 순방을 두고 고립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자 미국의 리더십을 재확인해 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이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국익 우선주의가 장기적으로는 전통적인 동맹국 관계도 해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유럽 최강국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G7 회의를 마친 뒤 “미국은 독일이나 유럽에 믿을 만한 파트너가 아니다”라고 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브렉시트와 미국 우선주의 속에서 미국과 유럽 동맹관계를 재검토해야 할 때가 됐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 우선주의가 계속된다면 미국 주도로 구축된 유럽 질서는 변화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미국과 세계에 불확실성을 안겨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제협력과 번영의 기회도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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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밀어붙이는 ‘테러 등 준비죄’(공모죄) 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세다. 정부·여당은 지난 23일 국회 중의원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회기 내(6월18일)에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야당과 시민단체에선 “감시사회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지난해 2월 한국에서 야당의 기록적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낳았던 테러방지법 논란의 ‘일본판’이다.

 

공모죄 법안은 조직범죄를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기만 해도 계획에 합의한 전원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범죄가 실행돼야 처벌하는 현 일본의 형사법 원칙을 크게 바꾸는 것으로, 과거 세 차례 무산된 것을 아베 정권이 다시 추진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테러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야당·시민단체 등은 처벌 대상 범죄가 277개로 범위가 너무 넓고 불명확해서 일반시민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수 있고, ‘범죄계획 합의’ ‘준비 행위’를 판단하는 것도 수사기관의 자의에 달려 있어 공권력이 오·남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법안이 실제 테러 방지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도 있다. 공중납치나 화학무기 사용을 사전 단계에 처벌하는 예비죄가 있는데 굳이 공모죄 법안이 또 필요하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테러방지’를 이유로 합법적으로 국민 모두를 감시하는 수단을 얻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우려가 크다. 공모죄 법안이 개인의 사상이나 양심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권이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도통신이 지난 20~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공모죄 법안에 대한 정부 설명이 충분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가 77.2%에 달했다.

 

이는 2016년 3월 한국에서 통과된 ‘테러방지법(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 수정안) 논란과 ‘닮은꼴’이다.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에 정보 수집 및 추적권을 주고 테러인물을 감시·관리할 수 있는 근거를 뒀다. 두 법안 모두 범죄를 모의하거나 의심이 가는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권력 남용 및 인권 침해 우려가 있다. 정부가 전 국민을 합법적으로 사찰할 수 있어 ‘대국민 감시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유사하다. 온라인상에선 한·일 양국 ‘평행이론’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야당 측은 국정원의 무분별한 감청 및 금융정보 수집이 가능해져 민간인 사찰을 포함한 정치 탄압에 악용될 수 있다며 9일간 필리버스터를 펼치며 반대했지만 필리버스터가 끝난 직후 법안은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본의 무력한 야당을 볼 때 공모죄 법안 논란은 한국의 테러방지법 때보다 더 참담하게 끝날 듯하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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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남북 군비통제를 통한 전쟁 위협 제거. 남북 경제통합을 기초로 한 점진적 통일 지향. 실용적인 미·중·일·러 등 주변 4강 외교. 국방개혁 및 국방 문민화.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대선후보 문재인’이 내세웠던 외교안보 분야 주요 공약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환경은 강대국이나 다른 평범한 국가와 다르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외부 변화에 적응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 공약들은 국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자 목표다. 국민들이 선거에서 문 후보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 인선을 발표하던 날 이 공약들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임명된 사람들은 과연 문재인 정부의 공약을 추진할 적임자인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에 대한 이론 구축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이다. 정부와 학계 모두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문 교수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은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연합뉴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장에 정의용 전 주제네바 대사를 임명했다. 여권의 ‘원조 외교관 출신’ 인사로 오랫동안 문 대통령과 여당을 위해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서 예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외교부 장관에는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발탁했다. 유엔 사무총장 3대에 걸쳐 중용된 다자외교의 실력자다. 하지만 이 인선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한 전략을 발견할 수 없다.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 내정자

 

강 내정자는 외교부의 유리천장을 깬 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인 데다 탁월한 실력까지 갖췄다. 더구나 그는 비(非)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 만연한 정치권 줄서기와 파벌, 순혈주의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대중들은 그를 외교장관에 임명한 것에 열광하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번 외교안보라인 인선 전체를 ‘잘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강 내정자는 지금 한국 외교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 상황과는 상관 없는 업무를 해온 인물이다. 유엔 업무는 한 나라의 생존전략을 다루는 개별 국가의 외교와 다르다. 그는 한국에 사활적 문제인 북핵과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중·일·러 등 주요국과의 양자 업무 등을 해본 적이 없다. 10년 이상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환경에도 익숙지 않다.

 

강 내정자는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쓰는 것만이 인사의 전부는 아니다. 얼마나 적시(適時)에 기용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핵·미사일 능력을 극도로 키우고 있는 북한과는 아무런 긴장관리 장치가 없고, 중국·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으며, 외교안보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에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언사를 일삼는 예측불허의 대통령이 앉아 있는 엄혹한 시기는 그를 외교장관으로 기용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다.

 

청와대는 강 내정자 인선 배경으로 다자외교에 익숙하고 국제인권분야 전문가라는 점을 들었다. 역시 납득할 수 없다. 다자외교를 잘못해서 한국 외교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이 지적받는 이유는 선거 개입·언론 장악·간첩 조작·노동 탄압 같은 정부의 잘못 때문이지 외교장관이 인권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강 내정자 인선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 측은 “외교는 장관(만)이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컨트롤타워인 청와대가 리드하고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청와대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다. 정의용 신임 안보실장은 통상교섭조정관, 국제노동기구(ILO) 의장 등을 지낸 통상 전문가다. 그의 경력은 외교·통일·국방·정보 분야를 아우르며 외교안보 전략을 총괄하는 국가안보실장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국가안보실 기능을 강화한 것은통일·외교·국방 정책을 통합관리하면서 국가전략을 지휘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십수년이 지난 원로 통상관료 출신에게 돌아갔다. 청와대는 이 같은 약점을 의식한 듯 2명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특보를 신설했지만 문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인 문정인 특보는 비상임이라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홍석현 특보는 문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가 아니다. 안보실 차장 인사가 남아 있지만 이들은 실무자이지 국가전략을 짜는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누가 청와대에서 외교부를 리드하고 보완한다는 말인가.

 

다시 ‘문재인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하나가 모두 사력을 다한다는 각오로 매달려도 될까 말까한 중대한 사안들이며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고차방정식이다. 매 사안마다 넓고 높게 바라보고, 세밀하게 계산하고, 거칠게 싸우고, 끈질기게 설득해야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교안보라인은 목표 의식을 갖고 난제를 해결하려는 인선이 아니라 환영과 찬사를 얻기 위해 안배와 외형 관리에 치중한 인선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훌륭한 공약들을 그대로 내팽개칠 참인가. 아직 배가 출항한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부디 초심을 잃지 않기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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