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외주의적 공격에 대한 무관심, 이지메(괴롭힘)를 못 본 척하는 게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걸어다니고 싶다,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3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 한국YMCA에선 헤이트스피치(증오발언)억제법 시행 1년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다. 차별에 괴로워하는 마이너리티,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싸워온 외국인인권법연락회 등 시민단체들이 지난 1년을 되짚고 향후 과제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이번 법이 심각한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던 일본 정부가 처음 내놓은 대책이라는 데 의의를 뒀다. 실제로 법 시행 후 우익단체 시위는 줄어들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법 시행 후 지난 4월까지 우익단체의 시위는 3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61건에 비해 감소했다.

 

하지만 집회 신청이 필요 없는 거리 선전은 그만큼 줄지 않았다. 아케도 다카히로(明戶隆浩) 간토가쿠인대 강사는 “거리 선전은 19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234건에 비해 그리 많이 줄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본인을 살해해온 ○○인”처럼 위협을 먼저 가해온 게 상대방이라는 ‘정당방위’ 뉘앙스를 사용하거나 “소멸시키자”라는 극단적인 표현 대신 “(재일한국·조선인 등에게 영주권을 주는) 입관특례법 폐지”라는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터넷이다. ‘사형’ ‘사살’ ‘살처분’ ‘기생충 구제(驅除)’처럼 거리 시위나 거리 선전에서 피하는 잔혹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인이 관련된 범죄사건 기사에는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다.

 

김명수 간사이가쿠인대 교수는 “인터넷상의 헤이트스피치 때문에 한국·조선 국적의 40%가 인터넷 이용 자체를 피하고 있고, 프로필에 자신의 출신을 쓰지 않는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이트스피치억제법은 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을 없애기 위해 지난해 6월3일 시행됐다. 지자체 단위에서 제도를 보완하고 있지만 아직 미흡하다. 아케도는 “법무성은 선동의 범위를 ‘쫓아내자’처럼 직접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유럽에선 특정집단의 위협이나 위험성을 부채질하는 듯한 발언도 선동에 포함시킨다”며 “프랑스에선 ‘무슬림이 이 나라의 지배자’ ‘외국인의 침략을 받고 있다’는 발언을 한 이들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상이 헤이트스피치만이라는 점도 한계다. 지난 3월 발표된 법무성의 외국인주민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재일 외국인의 40% 정도가 살 집을 구하는 데에서 차별을 겪었고, 25%는 취업 차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주택 입주나 취업에서의 차별은 국제사회가 금지하는 중대한 차별인데 일본에는 관련 법률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법은 ‘일본 외 출신’에게만 적용된다. 하지만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나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만만치 않다. 이날 연단에 선 기타가와 가오리는 “‘아이누 사람들은 겉모습으론 알 수 없으니 DNA 감정을 해야 한다’거나 ‘아이누가 멸종되게 놔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게 한 일본 정부가 대단하다’는 식의 헤이트스피치가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오키나와 류큐신보의 아라카키 쓰요시 기자는 “경찰이 오키나와인을 ‘토인(土人)’이라고 말했는데도 일본 정부는 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헤이트스피치가 퍼지다 보면 헤이트크라임(증오범죄)이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이 법이 제대로 이행되려면 정부 차원의 실효성 있는 대책과 함께 인종차별철폐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모로오카 야스코 변호사는 “정부와 지자체는 국제 인권법에 합치하는 인종차별 철폐정책을 만들고 법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면서 “법무성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인권대국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연내에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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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엔 사무총장 등 세계 각국 지도자의 반대에도 파리 기후변화협정 무력화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는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는 전 지구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임에 틀림없다. 또한 전 세계 국가들이 참여해 만든 국제협약을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무시하는 폭력적인 행태나 다름없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트럼프의 이런 태도는 어떤 변명으로도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지구온난화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전 지구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은 이날부터 파리기후변화협정의 이행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는 대선 전후로 파리협정을 부정한다고 공언해왔다. 그는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주장할 만큼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를 불신했다. 이런 개인적 인식 외에 국익을 앞세우는 미국 우선주의에 근거해 협정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등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판단도 기후협정을 부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위협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미 정부도 인정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기후변화를 ‘위협 증폭기’라고 했고, 국가정보위원회는 “향후 20년 동안 정치·경제·사회·안보에 직간접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협정 탈퇴는 지도력 실추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어 미국 안에서도 논란이 됐다. 아무리 국익이 중요하다해도 동맹국이나 파트너와 협력해야 미국 우선주의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협정을 탈퇴하면 미국 입장에서도 소탐대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트럼프가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중국에 이어 세계 온실가스 배출 2위인 미국이 발을 뺀다면 후유증은 심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파리협정은 유명무실해진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협정을 준수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게 하고, 나아가 ‘탈퇴 도미노’를 자극할 수도 있다. 다행히 중국과 유럽연합이 미국의 탈퇴와 상관없이 파리협정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2일 발표하기로 했다. 이 약속이라도 성실히 이행하도록 국제사회가 힘을 모으는 일이 절실하다.

 

세계는 이제 미국 없이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청정에너지를 개발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언젠가 다시 미국을 협정에 복귀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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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만큼 당사자에게 더 큰 조롱이 있을까. 일흔 살이 넘은 한 나라의 대통령, 그것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어떨까. 한국이라면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비난이 쇄도할 만하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버젓이 다뤄진다. 그것도 최고 신문 뉴욕타임스(NYT)에서 말이다.

 

지난 5월 중순 ‘트럼프가 어린애냐 아니냐’는 논쟁이 NYT를 달궜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쓴 ‘어린이가 세계를 이끌고 있는 시대’라는 글이 발단이었다. 브룩스는 도널드 트럼프가 그동안 한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그를 ‘유아기에 머문 어른’을 일컫는 미성숙자(infantilist)라고 규정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대부분의 성인들이 차분히 앉아 있을 수 있지만 트럼프는 교실에서 뛰어다니는 7세 초등학생 같다. 둘째, 성인들은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지만 트럼프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셋째, 성인은 상대의 미묘한 생각을 이해하는 법을 알지만 트럼프는 ‘마음이론’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이틀 뒤 NYT 오피니언면에 발달심리학자들의 반박 편지가 실렸다. 제목은 ‘아이들을 트럼프와 비교하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끊임없는 인정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심리학 교수의 ‘4살짜리도 트럼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반박 글이 이어졌다. 글쓴이는 4살 아이의 특징들을 열거하면서 트럼프와 어린애를 비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 국장

‘트럼프=어린애’ 비유는 대통령이 된 후 트럼프가 한 결정이나 행동을 어린애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취임 전 트럼프 대선 캠프 관계자들이 러시아 측과 내통했다는 의혹인 ‘러시아 게이트’ 스캔들과 관련해 수사 책임자인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전격 해임한 사례를 보자. 마치 화난 아이가 맘에 들지 않는 장난감을 던져버리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쌓는다는 발상은 어떤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심술꾸러기의 심보를 빼닮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회원국들에 분담금을 더 내라고 한 것은 골목대장이 나약한 아이에게 “내 말 안 들으면 알지?”라며 협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어 무임승차만 하려는 회원국들에 대한 트럼프의 분노는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나토 정상회의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몬테네그로 총리를 밀치거나 새파랗게 젊은 프랑스 대통령과 힘겨루기 악수를 하는 모습은 어떤가. 떼를 써서라도 원하는 걸 가지려는 어린애의 행동 아닌가. 이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행태는 친구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못되어 먹은 아이와 뭐가 다를까.

 

심리학자들이 꼽는 어린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충동 조절을 잘 못한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한다, 인간의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한다 등이다. 이 기준을 트럼프에게 적용하면 꼭 들어맞는다. 아무리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고 자기만족에 빠진 나르시시스트이지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을 터이다. 부유층으로 자란 트럼프는 어릴 때부터 우월감과 승부욕이 넘쳤다. 그런 기질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교사에게 주먹을 휘둘러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트럼프는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있었으며 폭력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내 생각을 알리고자 했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트럼프 부모는 아들의 고약한 기질을 바로잡기 위해 13세 때 규율이 엄격한 군사학교에 보냈다. 거기서는 어땠을까. 해병대 출신의 거칠고 엄격한 선생을 만난 트럼프는 존경과 환심을 사는 행동으로 매질을 피하는 영악함을 보였다고 한다.

 

울며불며 대드는 아이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감정을 추스르도록 다독이며 다정하게 안아주는 일이다. 그러고는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트럼프는 공인이 된 이후 어른다운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지금부터라도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그럼에도 지금 그에게 성숙함이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자신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를 위해서도 그렇다. 취임 후 첫 해외순방에서 돌아온 트럼프는 다시 ‘러시아 게이트’ 스캔들을 마주하고 있다. 탄핵 이야기가 나올 만큼 스캔들은 미국을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 탄핵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궁금하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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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유럽 역사는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 견제와 균형의 역사였다. 네 나라가 서로 물고 물리면서 세력 균형자 노릇을 했다. 독일은 공포이자 비난의 대상이었다. 어느 누구도 강력한 독일도, 분열된 독일도 원치 않았다. 어떤 경우든 유럽의 세력 균형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독일 입장으로서는 영향력을 행사해도, 하지 않아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국제관계 속에서 형성된 ‘독일 딜레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8일(현지시간) 뮌헨에서 열린 기민·기사당 합동 행사에 참가해 연설 도중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뮌헨 _ AF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독일 딜레마’ 속으로 뛰어들려는 걸까. 메르켈이 지난 28일 “유럽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한 발언을 보며 든 생각이다. 메르켈은 맥주파티 형식의 정당행사에서 “이것이 지난 며칠간 경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및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협약 5조 준수를 거부하고 파리기후협정을 반대한 데 대한 불만으로 해석됐다. 파장이 컸다. 유럽과 미국의 결별선언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협회(CFR) 리처드 하스 회장은 “분수령”이라고 표현했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기드온 라흐만은 4개월여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70년 된 대서양동맹에 의문을 품게 한 점 등을 들어 “메르켈의 실수”라고 했다.

 

메르켈 측은 다음날 진화에 나섰지만 파문이 가라앉을지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의 발언이 맥주를 마시며 늘어놓을 넋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정세를 분석한 끝에 내린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영국은 지난해 유럽연합 탈퇴로 대륙에서 멀어졌다. 풋내기 정부 프랑스는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에 대항할 태세다. 미국은 유럽을 버리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몸속에서 세력 균형자로 나서야 한다는 욕구가 일렁이지 않을까.

 

실제로 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에 비례해 그의 위상은 높아가고 있다. 오는 가을이면 4선 총리도 가능하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나, ‘라인강의 기적’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견줄 만하다. 메르켈의 발언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머지 국가 지도자들의 견제가 불을 보듯 뻔하다. ‘메르켈 딜레마’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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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8일 재임 1981일을 맞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를 제치고 전후 세 번째 ‘장수 총리’가 된 것이다. 아베 총리가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할 경우 2019년 8월에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2798일)를 제치고 전후 최장수 총리에 오를 수도 있다.

 

실제 일본 언론들은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고공행진 중이고, 강력한 장악력으로 당내에 반대 목소리가 없으며, 제1 야당인 민진당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최장수 총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분위기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아베 총리와 측근들의 최근 언행에선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자신감이 배어나온다. 잇따르는 망언과 독선에선 오만함까지 엿보인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는 가케(加計)학원 스캔들 대응도 마찬가지다. 이 스캔들은 아베 총리가 친구가 이사장으로 있는 가케학원이 수의학부 신설 허가를 받도록 힘을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지난 17일 폭로된 정부 문건에는 총리실을 담당하는 내각부가 가케학원 수의학부 신설에 대해 문부과학성 측에 “관저 최고위층의 의견” “총리의 의향”이라고 압력을 가한 내용이 담겼다. 26일에는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성 사무차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문서는 확실히 존재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폭로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문제는 아베 정부의 대응이다. “괴문서” “출처를 알 수 없어 신빙성이 없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마에카와 전 차관의 도덕성 문제를 부각시키는 식으로 스캔들을 덮으려 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마에카와 전 차관이 문부성 퇴직 관료들의 취직 알선 문제로 지난 1월 사직한 것을 두고 “스스로 사임하지 않고 지위에 연연하며 매달렸다”고 비판했다. 마에카와 전 차관이 유흥업소에 출입했던 사실도 거론했다.

 

이번 스캔들의 핵심은 가케학원의 수의학부 신설에 아베 총리의 의향이 작용했는지, 아니면 내각부가 ‘총리의 의향’을 핑계 삼아 문부성의 ‘신중론’을 눌렀는지다. 아베 정부는 이에 대해선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관료사회의 ‘손타쿠(忖度·알아서 기다)’ 현상만 두드러진다. 문부성은 자체 조사 결과 앞서 폭로된 내부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관련 직원들의 컴퓨터 문서 삭제 이력을 조사하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바다에 가서 잉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잉어는 없다’고 말하는 논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스캔들은 한국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첫째는 ‘정윤회 문건’ 사건이다. 지난 2014년 최순실씨의 전 남편 정윤회씨가 국정에 관여한다는 내용의 청와대 유출 문건 파동을 말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 “문건 내용은 찌라시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어도 최씨 일가가 박 전 대통령과 국정농단을 해왔다는 것은 추후 드러났다. 둘째는 ‘채동욱 낙마’ 사건이다. 2013년 검찰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방패막이였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조선일보의 ‘혼외자식’ 보도로 결국 사임했다. 이번 가케학원 스캔들에선 ‘괴문서’라는 말이 등장한다. 마에카와 전 차관의 유흥업소 출입 문제는 보수신문인 요미우리신문이 단독 보도했다.

 

요즘 아베 정권이 밀어붙이는 ‘테러 등 준비죄’(공모죄) 법안을 두고 지난해 한국에서 야당의 기록적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낳았던 테러방지법 논란의 ‘일본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일 평행이론’ 얘기도 들려온다.

 

아베 총리 주변에선 ‘최장수 총리’ 등극은 시간문제로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베 1강(1强)’의 뒤틀린 인식이 어느 틈에 파열음을 낼지 모르는 일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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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엔과 일본 정부의 관계가 미묘하다. 유엔 특별보고관이 일본 국내 문제에 대해 잇따라 우려를 표명하자 일본 정부가 대놓고 반박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유지하기 위해 ‘여론 호도’를 서슴지 않으면서다. 급기야 유엔 측이 “위안부 합의에 동의한 적 없다”고 진화에 나서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28일(현지시간) 논평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합의에 따라 해결할 사안이라는 데 동의했다”면서 “구체적인 합의 내용이 아니라, 위안부 해법의 본질과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양국에 달렸다는 원칙에 동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외무성은 구테흐스 총장이 지난 1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회담하며 “위안부 합의를 지지하고 환영한다”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두자릭 대변인은 또 “특별보고관은 독립적인 전문가로 유엔 인권이사회에 직접 보고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특별보고관의 우려 표명에 항의했고 구테흐스 총장도 항의에 공감했다는 듯이 발표했는데, 두자릭 대변인은 이 또한 부인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면담 내용을 호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게 됐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분담금 지급을 보류하면서 유네스코의 난징(南京)대학살 자료 등재에 반발하고, 한·일 위안부 자료의 심사 및 등재를 막아왔다. 유엔 인권최고기구 산하 고문방지위원회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개정하라고 권고한 것에 대해서도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문을 제출했다. 국제무대에서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전을 펼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본의 외교전에는 위안부 문제 등 보편적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빠져 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반인도 범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고, 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데 앞장서는 일이다.

 

일본 내 인권·민주주의 상황에 대해 유엔 특별보고관들의 우려가 잇따르고 있는 점도 되새겨볼 대목이다. 유엔은 ‘감시사회’ 논란을 일으킨 공모죄 법안,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해온 시민운동가의 장기 구류, 언론 통제 등을 두고 인권과 표현의 자유 침해를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우려를 되레 반박하고 있다. 심지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우려한 특별보고관의 서한에 대해 “무언가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고까지 했다.

 

일본은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이다. 북한 납치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는 이유로 특별보고관에게 국가훈장을 준 적도 있다. 다니구치 마유미(谷口眞由美) 오사카국제대학 부교수는 전날 TBS 방송에 나와 일본 정부가 “두 개의 혀”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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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해외순방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는 9일간 중동 및 유럽 5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28일 트위터에 “이번 순방은 미국에 큰 성공이었다”고 썼다. 트럼프의 첫 순방은 미국의 핵심이익인 중동과 전통적인 동맹인 유럽 국가에 맞춰진 만큼 대외정책의 근간인 미국 우선주의와 유럽 동맹국과의 협력관계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첫 순방은 그의 평가처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익을 앞세운 나머지 미국과 유럽 간 동맹관계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킨 점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중동 방문은 큰 이변 없이 순조로웠다. 이란 핵무장 반대, 이슬람국가(IS) 격퇴 등 동맹국들을 안심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보인 행보는 달랐다. 유럽 안보나 러시아 위협은 안중에 없이 국익에만 치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 협약 5조 준수 거부, 방위비 분담금 확대 요구는 회원국의 분노를 샀다. 1949년 나토 창설 이후 정상회의에서 협약 5조 준수를 거부하고 분담금 증액을 요구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가 유일하다. 트럼프 관점에서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고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은 나토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파리기후협정을 유일하게 반대하고,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보는 독일을 “매우 나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8일(현지시간) 뮌헨에서 열린 기민·기사당 합동 행사에 참가해 연설 도중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뮌헨 _ AFP연합뉴스

 

미국 안에서는 트럼프의 유럽 순방을 두고 고립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자 미국의 리더십을 재확인해 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이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국익 우선주의가 장기적으로는 전통적인 동맹국 관계도 해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유럽 최강국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G7 회의를 마친 뒤 “미국은 독일이나 유럽에 믿을 만한 파트너가 아니다”라고 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브렉시트와 미국 우선주의 속에서 미국과 유럽 동맹관계를 재검토해야 할 때가 됐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 우선주의가 계속된다면 미국 주도로 구축된 유럽 질서는 변화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미국과 세계에 불확실성을 안겨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제협력과 번영의 기회도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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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밀어붙이는 ‘테러 등 준비죄’(공모죄) 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세다. 정부·여당은 지난 23일 국회 중의원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회기 내(6월18일)에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야당과 시민단체에선 “감시사회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지난해 2월 한국에서 야당의 기록적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낳았던 테러방지법 논란의 ‘일본판’이다.

 

공모죄 법안은 조직범죄를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기만 해도 계획에 합의한 전원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범죄가 실행돼야 처벌하는 현 일본의 형사법 원칙을 크게 바꾸는 것으로, 과거 세 차례 무산된 것을 아베 정권이 다시 추진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테러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야당·시민단체 등은 처벌 대상 범죄가 277개로 범위가 너무 넓고 불명확해서 일반시민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수 있고, ‘범죄계획 합의’ ‘준비 행위’를 판단하는 것도 수사기관의 자의에 달려 있어 공권력이 오·남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법안이 실제 테러 방지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도 있다. 공중납치나 화학무기 사용을 사전 단계에 처벌하는 예비죄가 있는데 굳이 공모죄 법안이 또 필요하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테러방지’를 이유로 합법적으로 국민 모두를 감시하는 수단을 얻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우려가 크다. 공모죄 법안이 개인의 사상이나 양심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권이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도통신이 지난 20~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공모죄 법안에 대한 정부 설명이 충분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가 77.2%에 달했다.

 

이는 2016년 3월 한국에서 통과된 ‘테러방지법(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 수정안) 논란과 ‘닮은꼴’이다.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에 정보 수집 및 추적권을 주고 테러인물을 감시·관리할 수 있는 근거를 뒀다. 두 법안 모두 범죄를 모의하거나 의심이 가는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권력 남용 및 인권 침해 우려가 있다. 정부가 전 국민을 합법적으로 사찰할 수 있어 ‘대국민 감시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유사하다. 온라인상에선 한·일 양국 ‘평행이론’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야당 측은 국정원의 무분별한 감청 및 금융정보 수집이 가능해져 민간인 사찰을 포함한 정치 탄압에 악용될 수 있다며 9일간 필리버스터를 펼치며 반대했지만 필리버스터가 끝난 직후 법안은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본의 무력한 야당을 볼 때 공모죄 법안 논란은 한국의 테러방지법 때보다 더 참담하게 끝날 듯하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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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남북 군비통제를 통한 전쟁 위협 제거. 남북 경제통합을 기초로 한 점진적 통일 지향. 실용적인 미·중·일·러 등 주변 4강 외교. 국방개혁 및 국방 문민화.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대선후보 문재인’이 내세웠던 외교안보 분야 주요 공약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환경은 강대국이나 다른 평범한 국가와 다르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외부 변화에 적응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 공약들은 국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자 목표다. 국민들이 선거에서 문 후보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 인선을 발표하던 날 이 공약들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임명된 사람들은 과연 문재인 정부의 공약을 추진할 적임자인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에 대한 이론 구축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이다. 정부와 학계 모두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문 교수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은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연합뉴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장에 정의용 전 주제네바 대사를 임명했다. 여권의 ‘원조 외교관 출신’ 인사로 오랫동안 문 대통령과 여당을 위해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서 예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외교부 장관에는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발탁했다. 유엔 사무총장 3대에 걸쳐 중용된 다자외교의 실력자다. 하지만 이 인선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한 전략을 발견할 수 없다.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 내정자

 

강 내정자는 외교부의 유리천장을 깬 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인 데다 탁월한 실력까지 갖췄다. 더구나 그는 비(非)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 만연한 정치권 줄서기와 파벌, 순혈주의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대중들은 그를 외교장관에 임명한 것에 열광하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번 외교안보라인 인선 전체를 ‘잘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강 내정자는 지금 한국 외교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 상황과는 상관 없는 업무를 해온 인물이다. 유엔 업무는 한 나라의 생존전략을 다루는 개별 국가의 외교와 다르다. 그는 한국에 사활적 문제인 북핵과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중·일·러 등 주요국과의 양자 업무 등을 해본 적이 없다. 10년 이상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환경에도 익숙지 않다.

 

강 내정자는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쓰는 것만이 인사의 전부는 아니다. 얼마나 적시(適時)에 기용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핵·미사일 능력을 극도로 키우고 있는 북한과는 아무런 긴장관리 장치가 없고, 중국·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으며, 외교안보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에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언사를 일삼는 예측불허의 대통령이 앉아 있는 엄혹한 시기는 그를 외교장관으로 기용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다.

 

청와대는 강 내정자 인선 배경으로 다자외교에 익숙하고 국제인권분야 전문가라는 점을 들었다. 역시 납득할 수 없다. 다자외교를 잘못해서 한국 외교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이 지적받는 이유는 선거 개입·언론 장악·간첩 조작·노동 탄압 같은 정부의 잘못 때문이지 외교장관이 인권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강 내정자 인선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 측은 “외교는 장관(만)이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컨트롤타워인 청와대가 리드하고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청와대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다. 정의용 신임 안보실장은 통상교섭조정관, 국제노동기구(ILO) 의장 등을 지낸 통상 전문가다. 그의 경력은 외교·통일·국방·정보 분야를 아우르며 외교안보 전략을 총괄하는 국가안보실장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국가안보실 기능을 강화한 것은통일·외교·국방 정책을 통합관리하면서 국가전략을 지휘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십수년이 지난 원로 통상관료 출신에게 돌아갔다. 청와대는 이 같은 약점을 의식한 듯 2명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특보를 신설했지만 문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인 문정인 특보는 비상임이라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홍석현 특보는 문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가 아니다. 안보실 차장 인사가 남아 있지만 이들은 실무자이지 국가전략을 짜는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누가 청와대에서 외교부를 리드하고 보완한다는 말인가.

 

다시 ‘문재인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하나가 모두 사력을 다한다는 각오로 매달려도 될까 말까한 중대한 사안들이며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고차방정식이다. 매 사안마다 넓고 높게 바라보고, 세밀하게 계산하고, 거칠게 싸우고, 끈질기게 설득해야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교안보라인은 목표 의식을 갖고 난제를 해결하려는 인선이 아니라 환영과 찬사를 얻기 위해 안배와 외형 관리에 치중한 인선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훌륭한 공약들을 그대로 내팽개칠 참인가. 아직 배가 출항한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부디 초심을 잃지 않기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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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맨체스터 아레나 공연장에서 어제 자살폭탄 테러로 추정되는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미국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공연을 보러 왔던 청소년 등 22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다쳤다. 자폭 테러범은 못과 나사 등 파편을 채워 넣은 사제폭탄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테러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로 강력 규탄한다.

 

22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의 실내체육관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일어난 자살폭탄 공격으로 다친 사람들이 객석 출입구 앞에 쓰러져 있다. 맨체스터 _ AP연합뉴스

어제 테러는 비무장 민간인을 노리는 ‘소프트 타깃’ 테러가 일상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최근 몇년간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이 테러공포에 떨고 있다. 지난해 7월 프랑스 니스에서 화물차 테러로 최소 86명이 사망했고, 앞서 3월엔 벨기에 브뤼셀 국제공항과 지하철역에서 연쇄 자살폭탄 테러로 32명이 숨졌다. 2015년 11월에는 파리 바타클랑 극장에서 89명이 희생된 것을 비롯, 인근 식당과 축구경기장 등에서 연쇄 테러가 발생해 모두 130명이 사망했다. 중동은 물론 유럽과 미국, 동남아 등 테러는 이제 국가와 장소에 제한이 없다. 자살폭탄이나 총기 난사, 트럭 돌진 등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대규모 테러단이 아닌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에 의한 테러도 증가하고 있다.

 

이번 테러는 두 달 전 런던 의사당 테러 후 높은 테러 경보 상태가 유지되는 와중에 발생했다. 테러 대비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의미다. 테러의 배후를 자처한 IS는 끊임없이 테러를 획책하고 있다. 테러 대응은 인류 공동의 과제다. 테러에 대한 국제 공조와 함께 각국 정부는 다중 시설 테러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지구촌 시민의 일상이 테러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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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잠비아 대통령과 만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중국의 국제적 의무를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마오 주석은 “전 세계가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면 중국 역시 스스로 완벽한 해방을 이룰 수 없다”면서 “먼저 독립한 국가는 나중에 독립한 국가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중국은 1955년 4월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에서 내정 불간섭 등을 앞세운 비동맹 외교로 제3세계 국가들의 마음을 열었다. 이들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기 위해서는 물질적 보상이 필요했다. 공산주의의 우월함을 과시하면서 ‘맏형’ 역할을 꿰차고 싶었던 중국은 대외 원조에 몰두했다. 1967년 중국이 대외 원조에 쓴 돈은 19억9400위안으로 국가 재정 지출의 4.5%에 달했다. 당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794억위안에 불과했다.

 

 

그 후 50년이 흘렀다. 중국은 미국과 맞먹을 정도의 막강한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GDP 규모는 2014년 기준으로 10조3511억달러 규모에 달하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세계에서 두 번째 경제 대국을 이끄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체제 이데올로기 대신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라는 더 세련된 방법으로 체면을 세우고 싶어 하는 듯싶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금전이다.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세계를 향해 내놓는 돈 보따리 크기도 커졌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베이징 국가회의센터에서 열린 일대일로 정상포럼에서 세계 각국의 참여를 요청하는 개막연설을 하고 있다. 베이징 _ AP연합뉴스

 

지난 14일 시 주석은 베이징에서 개막된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 통 큰 계획을 발표했다. 일대일로 건설을 위해 실크로드 기금에 추가로 1000억위안(약 16조3600억원)을 지원해 총 3000억위안(49조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등 29개국 정상과 130개 국가의 대표단 앞에서 막대한 숫자를 내세우며 중국의 체면을 세웠다. 포럼이 끝나자 중국 정부는 포럼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76개 항목, 270개 항의 경제협력 사업 추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시 주석이 2013년 일대일로 계획을 발표한 후 중국은 이를 통해 국내외 영향력 넓히기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국내 빈곤 문제 해결이 아직 초보 단계인 수준에서 점점 규모를 키우는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내 문제도 해결 못하는데 대외 과시용으로 쓰는 예산이 너무 많다며 ‘가난한 대범함’ ‘빈곤한 큰손’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일대일로 포럼을 열면서 베이징 시내 교통은 수시로 통제됐다. 그러자 ‘일로일대’라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나왔다. 베이징 순환도로인 2환의 한쪽 차로는 통제 때문에 텅텅 비어 있고, 반대편 차로는 주차장처럼 차가 들어찬 광경을 두고 한쪽은 길이고 한쪽은 주차벨트 같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평소에도 아프리카 국가 등 각국 지도자들이 베이징에 오면 예우를 다하기 위한 통제 때문에 차로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소시민들에게 일대일로는 먼 얘기다.

 

일대일로 포럼은 시진핑 주석이 주도한 세력 과시 이벤트인 동시에, 중국 공산당 정권의 국제적 지위를 보장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마오쩌둥 시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시 주석의 체면은 세워줬다.

 

지난해 3월 마오 주석 이후엔 나타나지 않던 얼굴을 새긴 배지가 등장했다. 배지에는 시진핑 주석의 얼굴이 인쇄됐다. 지난 3월에는 관영 CCTV가 시 주석의 하방(下放) 시절을 다룬 3부작 다큐멘터리 <초심(初心)>을 방송하며 시 주석의 과거 미화에도 나섰다. 올가을 열리는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시 주석의 통치이념을 정리한 시진핑 사상이 당의 헌법인 당장(黨章)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래저래 50년 전 마오 시대와 닮아간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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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 지난해 대선 때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러시아 게이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탄핵론까지 나오고 있다. 러시아 게이트는 지난해 대선 당시 트럼프 후보 캠프가 러시아의 도움으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의 e메일을 해킹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지난 2월 러시아와 비밀접촉한 사실이 드러난 마이클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경질,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의 비밀접촉 연루 의혹을 수사해온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전격 해임으로 불거졌다. 지난 16일 뉴욕타임스가 플린 전 안보보좌관에 대한 수사를 중단할 것을 트럼프가 요구했다는 ‘코미 메모’의 존재를 보도하면서 의혹은 정점에 다다랐다. 게다가 트럼프가 동맹국이 준 IS 관련 기밀을 러시아에 넘겨줬다는 전날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와 맞물리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터져나오는 의혹으로 미 정가는 극도로 어수선한 상황이다. 민주당은 트럼프 의혹을 권력남용으로 보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를 요구하는 동시에 탄핵론을 제기하는 등 트럼프 행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도 민주당의 탄핵론에 동참 의지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백악관은 백악관대로 대통령과 보좌진 간 불화에 휩싸여 있다. 트럼프의 국정 수행 능력에 대한 미국인의 실망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38%에 불과한 최악의 국정 지지도와 48%에 이르는 탄핵 지지율이 이를 방증한다. 물론 탄핵은 쉽지 않다. 하지만 미 언론들은 ‘코미 메모’가 탄핵 가능성의 결정적 증거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수사 중단 요구가 사법방해죄에 해당될 경우 탄핵 요건이 되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탄핵 직전까지 몰렸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임했을 때도 수사 중단을 요청한 내용이 담긴 백악관 녹음테이프가 결정적 증거가 됐다.

 

이번 사태의 여파는 결코 미국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동맹국이 준 기밀을 타국에 넘긴 행위는 미국과 동맹국 관계를 해치는 불안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태도에 영향을 받는 한국으로서는 사태 추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내 정치 문제로 곤경에 처한 트럼프가 이를 모면하기 위해 북한 핵 문제로 긴장을 고조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문제로 인한 한반도 불안이 없도록 ‘트럼프 리스크’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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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역대로 백악관 대변인에게 방탄복을 취임 기념선물로 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론과 정권 사이에 낀 대변인 역할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게 미국 언론의 중평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워싱턴에서 최악의 직업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워싱턴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한다.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자유로운 언론들에 맞서 입만 열면 거짓말인 도널드 트럼프를 대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해보라.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주류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규정하고 언론과의 전쟁을 해왔다. 스파이서는 그 전쟁의 맨 앞에 서서 언론의 화살을 맞고 있다. 그의 첫 임무는 취임식에 역대 최대 축하객이 왔다는 트럼프의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게 위성사진으로 증명됐지만 스파이서는 “하객이 역대 가장 많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트럼프는 근거도 없이 오바마가 자신을 도청했다고 주장했고, 스파이서는 근거를 내놓으라는 기자들의 추궁을 맨손으로 며칠간 버텨냈다. 기자들을 향해 “절대 고개를 가로젓지 말라”며 위협하고, “의도적으로 거짓 보도를 한다”고 도발도 했다. 덕분에 그는 코미디 프로그램 SNL 등에서 전 국민의 조롱거리가 됐다.

 

션 스파이서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 3월 8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스파이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에 중국이 반발하는 것에 대해 “지난 주말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서 보듯 사드 배치는 한국 방어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AP연합뉴스

 

스파이서를 정말 딱하게 만드는 것은 세간의 조롱이 아니다. 그는 아마 미국 정부의 간판인 백악관 대변인이란 권력을 얻었으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보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언론에 전해지는 트럼프의 평가는 항상 부정적이다. “트럼프는 스파이서 임명을 매일 후회하고 있다” “트럼프가 생각한 대변인은 스파이서가 아니었다”. 최근에는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있을 것이고 그 핵심 대상이 스파이서라는 보도가 계속 나온다. 본인은 최전방 전투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지원은커녕 비난만 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일 것이다.

 

트럼프의 대변인이란 자리는 누가 맡아도 고난이 불가피하다는 평가가 많다.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인식하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 양심과 공감능력이 없는”(영국 행동심리학자 조 헤밍스) 트럼프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수석 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뉴욕타임스에서 트럼프의 대리인들은 결국 “거짓말쟁이 또는 바보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좋아할 만한 대변인은 없을까.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독재자들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사례를 찾아보자. 세계 최고 독재자로 통하는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최근 아프리카·프랑스 정상회의 만찬에서 눈을 감고 졸고 있는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올라 논란이 됐다. 그러자 짐바브웨 홍보 담당관은 “대통령은 잠시 눈을 쉬게 한 것일 뿐이지 잠을 잔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당초 대변인으로 고려했던 켈리언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도 ‘대안 사실’이란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서 트럼프의 역대 최다 취임식 참석자 주장을 옹호했다. 물론 이런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는 않다. MSNBC의 간판 진행자 미카 브레진스키는 15일(현지시간) 콘웨이도 지난해 대선 때 카메라 앞에서는 트럼프를 적극 옹호했지만 카메라가 꺼지면 “내가 하는 말이 너무 더러워서 샤워를 해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그런 것에 익숙해진 것 같다”는 평도 빼놓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스파이서는 트럼프의 신뢰를 얻기에는 아직 너무 양심적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슬픈 미국의 현실이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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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세요?”


지난달 2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여성경제정상회의(W20) 회의장. 사회자의 직설적인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옆에 앉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어쩔 줄 몰라하는 메르켈을 보더니 박수를 치며 폭소했다. 사회자가 패널에게도 물었다. “여기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메르켈의 초청을 받아 패널로 나란히 앉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의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여성 지도자의 롤모델로 여겨지는 메르켈은 왜 끝내 손을 들지 않았을까.


이 작은 에피소드는 다분히 고지식하고 수사(修辭)와 친하지 않은 그의 성격 탓인 듯하다. 메르켈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페미니즘의 역사는 내가 공감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나는 그저 모든 여성이 선택과 기회의 자유를 누리길 원한다. 이런 게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페미니스트겠지만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타이틀로 날 꾸미고 싶지 않다.” 그는 2013년에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도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한다면 진짜 페미니스트들이 불쾌하게 느낄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번쩍 손을 든 ‘퍼스트도터’ 이방카가 지난 2일 <일하는 여성: 성공의 법칙 다시 쓰기>라는 책을 냈다. 세 아이를 둔 엄마이자 잘나가는 사업가로서 ‘워킹맘’들에게 전하는 성공의 조언을 담은 책이다. 누군가는 부러워 책을 사볼지 모르겠지만 책에 대한 평가는 혹평 일색이다.


뉴욕타임스 북리뷰는 “온갖 영감을 주는 명언으로 범벅이 된 딸기 밀크셰이크”라고 표현했다. 실제 이방카의 책은 소크라테스,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 제인 구달 등 명사의 말로 가득하다. 구달은 “내 말을 진심으로 이해했길 바란다”고 뼈 있는 충고를 던졌다.


주옥같은 말씀이 겉도는 이유는 그와 어우러진 이방카의 공허한 경험 때문이다. 그는 “대선 기간에 너무 바빠 마사지도 받지 못했고 매일 아침 20분씩 하던 명상을 할 시간도 없었다”고 토로한다. 또 육아휴직을 하는 엄마들에게 “믿을 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서 당신이 떠난 자리를 지키게 하라”고 조언한다. 부동산 재벌의 딸로 태어나 7억4000만달러(약 8300억원)를 가진 자산가이자 아랫사람에게 언제든 일을 맡기고 언제든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는 트럼프그룹 부회장이니 가능한 얘기다. 성평등 운동가인 파티마 고스 그레이브는 “아무리 드라이브를 하고 화창한 해변에 놀러 나가도 집세와 밥값을 벌기 위해 분투하는 두 자녀 엄마의 삶의 무게가 덜어지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경험은 공감의 자양분이다. 그러나 겪어봤다고 공감할 줄 아는 건 아니다. 진짜 공감은 내 경험에 대한 성찰, 다른 이의 경험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이게 빠진 경험은 상처를 주는 독이 되기도 한다. 이방카의 ‘워킹맘’ 운운이 울림이 없는 이유, 차라리 어설프게 아는 척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메르켈의 말이 더 와닿는 이유다.


우리에게도 ‘내가 해봐서 다 안다’고 입버릇처럼 ‘노오력’을 말하던 대통령이 있었다. 찢어지는 가난에 고학으로 성공한 그는 시장에서 어묵을 먹고 청년들에게 실업타개책으로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런 경험도 없는 또 다른 대통령은 ‘아버지가 해봐서 안다’며 ‘한강의 기적’을 말하고 청년들에게 “중동에 가라”고 했다. 올해 대선에 나왔던 어떤 후보는 경비직 아버지와 까막눈 어머니를 앞세워 서민대통령을 자처하면서 ‘귀족노조’를 귀가 따갑도록 들먹였다.


새 대통령은 ‘친구 같은 대통령’을 말한다. 공허한 아는 척과 오만한 ‘지적질’은 이제 그만.


국제부 이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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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의 당선이 유럽 포퓰리즘 확산에 쐐기를 박았다.’ 프랑스 대선에서 중도 노선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극우 민족전선의 마린 르펜을 꺾은 데 대한 언론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럴 만도 하다. 지난해 6월 영국의 브렉시트와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절정에 이른 포퓰리즘은 이후 예상과 달리 퇴조했다. 지난해 12월 오스트리아 대선, 올해 3월 네덜란드 총선, 6월 영국 조기 총선의 척도로 여겨진 지난 4일 지방선거, 오는 9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의 첫 연방의회 진입이 예상된 지난 7일 독일 주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은 줄줄이 패퇴했다. 결은 다르지만 한국 대선에서도 ‘홍트럼프’로 불린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도 참패했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 사상이나 활동을 의미한다. 포퓰리즘 정당은 기성 정치권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유럽의 포퓰리즘 정당은 1990년대 이후 반유럽통합, 반이민, 인종차별 등을 표방하며 등장했다. 프랑스 민족전선, 오스트리아 자유당, 네덜란드 자유당, 영국 독립당, 독일을위한대안 등이 대표적이다. 한 줌에 불과하던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세계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와 이민자의 유입 등이다. 고실업 상황에서 이민자가 일자리를 잠식할 것이라는 논리가 먹혀든 것이다.

 

과연 마크롱의 승리와 함께 포퓰리즘은 종말을 맞은 걸까. 물론 아니다. 부활의 불씨는 곳곳에 살아 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의 토양인 실업률과 이민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포퓰리즘 정당들은 집권당과 사안별 동맹 전략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이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여전하다. 동유럽의 반이민주의자인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유럽연합과 난민 송환협정을 맺어 향후 협상에서 유리한 카드를 쥔 터키 대통령은 지난달 ‘21세기 술탄’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포퓰리즘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정치가 실패하면 포퓰리즘은 되살아난다. 마크롱 대통령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할지 세계가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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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橫浜)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바다를 따라 조성된 야마시타(山下) 공원을 걷다보니 히카와마루(氷川丸)가 보였다. 1930년 건조돼 1960년까지 시애틀 항로를 오간 1만2000t급 호화 화물여객선이다. 나들이객들이 히카와마루를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10살 남짓한 일본 남자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칼빈슨은 어디 있어?”

 

‘골든위크(황금연휴)’ 막바지에 아이의 입에서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 얘기가 나올 줄은 예상 못했다. 하긴 지난 한 달여간 일본 정치권과 보수 언론들이 야단법석을 떤 걸 감안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아이의 뇌리에 ‘칼빈슨’이라는 이름을 새겨넣었을 정도로 칼빈슨호의 동향을 시시각각 전했으니 말이다.

 

한반도 위기론을 둘러싼 일본 측의 야단법석은 칼빈슨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무성은 해외여행 관련 홈페이지에 한국을 방문하는 자국민들에게 한반도 정세에 주의하라는 경고문을 올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북한이 사린가스를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다고 대놓고 얘기했다. 언론에선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 시 일본의 사전협의 요청, 한반도 유사시 일본 국민과 납치 피해자 구출 방안 마련 등의 내용이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발로 보도됐다. 급기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에 도쿄 지하철과 일부 신칸센의 운행이 잠시 중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칼빈슨호의 한반도 해역 전개로 한반도에 전운(戰雲)이 급격히 감돌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을 아예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치권과 보수 언론들이 합작해 한반도 위기론을 부추기고, 일본 국민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일 해상 자위대에 미군 군함을 보호하는 ‘무기 등 방호’ 임무를 처음 부여했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급 호위함인 ‘이즈모’가 미 보급함을 이틀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또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적 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하겠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헌법 시행 70주년을 맞은 지난 3일 2020년 개정 헌법 실시, 자위대 헌법 명시 등의 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이는 ‘화룡점정’일 뿐 일본은 이미 ‘전쟁 가능한 국가’를 향해 착착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위협론은 ‘전쟁 가능한 국가’를 향한 아베 정권의 행보에 좋은 구실인 셈이다. 이솝 우화 ‘늑대와 양치기’에 비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물 들어온 김에 노 젓겠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실패로 끝난 북한 미사일 발사 뉴스에 다중이용시설인 지하철의 운행을 멈추면서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는 왜 멈추지 않았나. 게다가 미 보급함 방호 임무는 북한의 위협이 없는 태평양 쪽에서 이뤄졌다. 소형 호위함을 투입해도 될 일이다.

 

‘칼빈슨’을 입에 올리는 아이를 보고 호들갑을 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권이 부채질하고 조성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국민들의 생각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친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국민들의 감정을 지배하면서 전화(戰火)를 향해 내달렸다.

 

‘한반도 4월 위기설’은 다행히 ‘설’로 끝났다. 하지만 한반도의 긴장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반도 위기설’의 한편에는 주요 우방국인 일본이 있다. 그 일본은 지금 평화국가에서 전쟁국가로의 전환을 통해 ‘전전(戰前) 복귀’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군사적 대응만 강조하고, 주변국과의 긴장을 높이는 일본의 선택지에 ‘한반도 평화’가 설 자리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악몽’은 아주 작은 불씨를 통해 현실로 나타난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진실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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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만 39세의 프랑스 정치 신예 에마뉘엘 마크롱이 7일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당선이 프랑스는 물론 유럽과 전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작지 않다. 그의 승리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경종이자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어서다.

원내 의석이 하나도 없는 신생 정당의 후보가 창당 1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주요 서방국가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기존 정치문법을 깨뜨린 그의 승리는 기존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당 정부는 경제를 살리고 국민을 통합하는 데 실패했고, 애초 당선이 유력했던 제1야당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는 부패 혐의로 스스로 몰락했다. 그 결과 1958년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사회·공화 양당은 처음으로 대선후보가 결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마크롱은 그 틈을 파고들어 승리를 이뤄냈다. 물론 그의 승리 요인에는 극우 포퓰리즘 정권의 출몰을 반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지혜도 있다. 무능·부패 정권은 결코 두번 다시 선택받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준 좋은 예다.

 

마크롱의 새로운 정치의 핵심은 중도주의다. 그는 법인세 인하, 복지 및 공공 일자리 축소 등 우파 정책은 물론 이민과 하나의 유럽을 존중하는 좌파 정책을 아우르며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프랑스판 제3의 길’로도 불리는 그의 중도주의가 프랑스 현실 정치에서 실현될지는 불투명하다. 오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산물이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마크롱의 새 정치의 성패는 원외 정당 출신 대통령인 그가 어떤 정치력을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가 강조한 새 정치는 의회 기반 없이는 실현하기 어렵다. 다음달 프랑스는 총선을 치른다. 마크롱이 이끄는 정당 ‘앙마르슈(전진)!’는 모든 선거구에 후보자를 낼 것이라고 한다. 의미 있는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마크롱의 새 정치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다가오는 총선에 마크롱식 새 정치와 그의 정치적 생명은 물론 프랑스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이다. 마크롱의 당선이 한국 대선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한국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며 교훈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기성 정치가 실패하면, 시민들이 변화를 선택한다는 사실은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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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걸까. 버락 오바마가 퇴임 대통령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자마자 고액 강연료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달 24일 오바마가 오는 9월 월가의 한 투자은행이 주최하는 건강보건 관련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대가로 40만달러를 받기로 한 사실이 공개됐다. 공교롭게도 이를 폭로한 매체는 재임 동안 그를 괴롭혔던 폭스뉴스그룹 계열의 ‘폭스 비즈니스’였다. 사흘 뒤에는 한 미디어 기업이 주최한 홍보 행사에서 인터뷰 대가로 40만달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잇따른 고액 강연·인터뷰료로 비난받은 오바마의 심경은 어떨까. ‘남들도 다 하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며 억울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일각에서는 그가 단 한 번의 연설로 대졸자 평생 수입의 6분의 1을 벌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오바마의 거액 강연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고액 강연료는 전임 대통령의 특권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바마도 그 길을 따랐을 뿐이다. 논란의 본질은 고액 강연이 아니다. 누구의 돈을 받느냐,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느냐가 문제다. 그가 2006년에 쓴 <담대한 희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부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로펌 파트너들, 투자은행가들, 헤지펀드 매니저들, 벤처 자본가들이었다.” 오바마는 정치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자들을 만났다. 새 정치를 꿈꿔온 그로서는 충격이었다. 월가 부자에 대한 경계심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2009년 CBS 방송 <60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월가의 살찐 고양이 은행가 무리를 도우려 출마하지 않았다.” 탐욕의 화신인 월가 은행가들이 세계금융위기를 낳은 장본인임을 꼬집은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월가 고액 강연도 그의 비판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클린턴 전 장관과 그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강연 액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CNN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2001년부터 2015년 5월까지 총 729회 강연을 했다. 수입은 1억5367만달러다. 월가 투자은행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39차례(770만달러)다. 이 가운데 클린턴 전 장관은 골드만삭스 3회 등 8차례(180만달러) 강연을 했다. 오바마가 그토록 비난해온 월가 은행가와 ‘악마의 악수’를 했으니 그의 동료인 워런 엘리자베스·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비난은 당연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반월가 전사들이다.

 

퇴임 대통령 오바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하나다. 그가 여느 전임 대통령과 다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는 전임자들보다 좋은 유산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달변가이자 웅변가이자 재담꾼이다. 전직 대통령 프리미엄도 엄청 높다. 마음먹기에 따라 클린턴 부부보다 더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도 있다. 40만달러 강연료나 6500만달러에 이른다는 오바마 부부의 회고록 계약금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를 돋보이게 할 존재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의 헛발질이 거듭될수록 오바마의 몸값은 높아질 게 뻔하다. 그의 행보에 미국 민주당의 운명은 물론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 환경도 나쁘지 않다. 트럼프의 취임 100일 지지도는 아이젠하워 이후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인기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문제가 트럼프에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오바마의 역할이 여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인 셈이다.

 

오바마의 고액 강연 논란에 대해 그의 보좌관은 이런 성명을 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가끔 강연을 할 것이다. 일부는 돈을 받을 것이고 일부는 무료로 할 것이다. 그리고 장소나 스폰서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가치와 비전과 그가 남긴 기록에 충실할 것이다.” 이 말은 오바마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업적에 맞다면 강연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퇴임 후 행보 첫날에 한 연설은 의미가 있다. 정치적 고향 시카고에서 그는 시민참여와 공동체 조직을 강조했다. 새로운 세대의 리더십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도 했다. 연설 내용은 그가 퇴임 전에 한 약속 그대로였다. 오바마다웠다.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이긴 이유는 그가 잘해서가 아니다. 상대가 못했기 때문이다. 클린턴 후보는 입으로는 친서민을 부르짖으면서 뒤로는 월가의 이익을 옹호했다. 높은 도덕성과 양심, 언행일치는 정치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미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3연임을 하지 않는다는 대통령 임기에 대한 전통을 세웠다. 오바마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퇴임 대통령의 새 모델을 만드는 일이다. 오바마는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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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올 9월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회의가 열릴 중국 남부도시 샤먼(廈門)에는 특이한 이름의 도로가 있다. 2009년 개통된 이 도로명은 ‘성공의 큰길’이라는 뜻의 성공대도(成功大道)다. 같은 발음인 ‘성공까지 닿는다’는 의미도 담았다. 시내와 공항을 잇는 이 도로의 원래 이름은 봉황(鳳凰)이었지만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만들겠다며 야심차게 개명했다.

 

세계에서 이름짓기에 가장 민감한 나라 중 하나가 중국이다. 중국사업의 첫 단추는 회사나 브랜드의 중국어 네이밍이다. 좋은 뜻과 발음을 두루 고려한 좋은 이름이 사업 성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달 26일 다롄 조선소에서 첫 자국산 항공모함인 001A형 항모를 진수했다. 옛 소련의 항모를 개조한 첫 항모인 랴오닝함과 달리 레이더, 통신, 무기 같은 핵심 시스템을 중국의 독자 기술로 만들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새 항모의 이름은 이날 공개되지 않았다. 랴오닝함처럼 지역 이름을 따 산둥함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지만 공식 발표된 것은 아니다.

 

국력과 직결되는 항모를 자국 기술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의 체면을 세워줬다. 이런 항모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를 놓고 여론은 달아올랐다. 한 홍콩 매체가 30만명의 중국 누리꾼을 상대로 함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대만함, 베이징함, 광둥함같이 지역명을 딴 이름이 우세했다. 샤먼과 대만을 근거지로 명나라 부흥운동에 나선 정청궁(鄭成功) 장군의 이름을 딴 정청궁함이나 손오공을 뜻하는 제천대성(齊天大聖)함도 나왔다. 그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대만함이다.

 

대만 매체들은 이 대만함이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랴오닝함 항모전단이 지난해 12월 보하이만을 출발해 서해, 동중국해, 서태평양으로 해역을 넓혀 가면서 훈련을 벌였다. 중국 언론은 중국 항모전단이 처음으로 제1도련선(열도선)을 돌파했다고 흥분했고, 대만은 F16 전투기 2대를 긴급 출격시키며 경계했다. 첫 국산 항모 이름을 대만함으로 정하자는 여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국방부 대변인 양위쥔은 지난달 월례브리핑에서 대만함이 될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온라인 투표는 누리꾼들의 관심의 표현일 뿐”이라며 “갯가재함이라는 함명을 제의한 누리꾼도 있었고 적지 않은 이들이 투표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투표를 한다고 해도 갯가재함이라는 이름이 채택될 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함명이 정식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일보 등 중국 주요 관영매체들은 첫 중국산 항모 앞에 ‘국지중기(國之重器)’라는 표현을 덧붙여 쓰고 있다. 나라의 중요한 기구라는 뜻으로 옥새를 뜻한다. 제왕의 인장을 옥으로 만든 것은 예로부터 군자를 옥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옥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오래가는 특성을 군자의 도덕 수양과 비교했다.

 

아무리 스스로의 기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도 항모를 옥새에 비유해 부르는 것은 너무 나간 듯하다. 항모는 자국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에 불과할 뿐이다. 일본이 자위대 헬기 탑재 호위함 등을 진수하면서 ‘가가’ ‘이즈모’ 같은 군국주의 시절 이름을 되살려낼 때마다 중국은 거세게 반발해왔다. 때로는 이름이 실체보다 더 중요한 작용을 한다.

 

다시 샤먼의 ‘성공의 큰길’로 돌아간다. 개통된 지 8년이 지난 지금, 성공대도는 급증한 교통량과 교통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신호체계로 심각한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2억2000만위안(약 3603억원)을 쏟아부은 이 도로는 결국 이름값을 못했다. 현지 운전자들은 ‘가장 성공하지 못한 도로’라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물며 자국민뿐 아니라 인접국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항공모함은 어떻겠는가.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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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탐욕스러운 자본가나 기업가를 비난할 때 ‘살찐 고양이(Fat Cat)’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192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할 때부터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는 부자를 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현재 의미로 굳어졌다. 당시 금융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임기 동안 월가 은행가들을 자주 ‘살찐 고양이’에 비유했다. 그는 2009년 CBS 방송 <60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월가의 살찐 고양이 은행가 무리를 도우려고 출마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후계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월가 고액 강연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살찐 고양이’ 비난이 오바마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오바마가 오는 9월 월가 투자은행 캔터 피츠제럴드가 주최하는 보건 관련 회의에서 오찬 기조연설자로 나서는 대가로 40만달러(약 4억5000만원)를 받기로 계약했다고 미 언론들이 25일 보도했다. 오바마에게 위선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백악관을 떠난 뒤 95일 만에 공식 활동을 시작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24일(현지시간) 시카고대학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 참석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시카고 _ UPI연합뉴스

 

강연료 40만달러는 전임자들과 비교해도 고액이다. 퇴임 대통령으로 고액 강연료를 처음 챙긴 이는 제럴드 포드였다. 그의 몸값은 4만달러였다. 가장 몸값이 높았던 빌 클린턴은 20만~50만달러였다. 특히 클린턴이 부인과 함께 챙긴 강연료는 천문학적 수준이다. CNN에 따르면 이들은 2001년부터 2015년 5월까지 총 729회 강연을 해 1억5367만달러를 벌었다. 논란이 된 월가 투자은행을 대상으로 한 것도 39차례 770만달러나 됐다. 이 가운데 클린턴 전 장관도 골드만삭스 3회 등 5개사에서 8차례의 강연으로 180만달러를 받았다. 이 사실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드러나면서 클린턴은 곤욕을 치렀다.

 

백악관을 떠나기 전부터 오바마의 몸값이 퇴임 대통령으로서 최고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 2월 맺은 그와 부인의 회고록 계약금은 6000만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논란은 그의 천문학적인 몸값을 재확인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퇴임 대통령으로서 공식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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