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 띠링.’


지난 1일 오후 1시50분 리비아와 튀니지의 국경 부근에 다다르자 자동 로밍된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리운전이나 세일정보를 알려주는 스팸 문자가 그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국경을 건너자마자 ‘아, 이제 전화가 되는 곳으로 나왔구나’라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고 환호성이 터졌다. 그동안 좋은 친구가 된 리비아인 운전기사 유세프 파토리(34)가 우리 앞에서 뻔히 운전하고 있는데도, 그는 리비아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리비아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벗어나 마침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던 그곳이 파토리에게는 사랑하는 임신한 아내와 세 살배기 딸이 있는 가정이자 고향일 텐데 말이다.




■ ‘왜 리비아로 가는가’ 다시 물었다


이날 오전 11시. 그동안 숙소로 썼던 트리폴리 알 와단 호텔을 출발해 튀니지로 향했다. 동료 기자들 중 한 명은 트리폴리에 더 남기로 했다. 그를 두고 나오는 마음이 개운치는 않았지만 ‘얼른 튀니지로 들어가면 씻을 수 있겠지’ ‘맘껏 먹을 수 있겠지’ 하는 원시적인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리비아에서 취재를 마치고 튀니지로 나오는 길은 지난달 27일 들어갈 때 이용했던 남부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다하브-와진’ 국경 대신 북부의 ‘빈 가르데인-라스 아즈다이르’를 통하는 루트를 택했다. 튀니지 제르바에서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까지 북부 국경을 통하면 쭉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약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거점 도시에서 벌어졌던 반군과 정부군 간의 교전으로 이 국경은 한동안 가로막혀 있었다.


리비아 취재 기간 중 트리폴리에서는 ‘반군이 해안도로 중간중간의 도시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교전도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경도 열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식’일 뿐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 ‘그 도로를 이용해도 괜찮다’는 증거를 자꾸 모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트리폴리 코린시아 호텔 로비에서 만난 외국 기자들에게 “해안도로가 안전하다는데 정말이냐?”라는 질문을 계속해댔다. 한 호주 기자가 “회사 동료 일부가 그 길을 타고 하루 전 나갔다”고 말해줬다. 그의 얘기만으로 도로가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안심이 됐다.


■ 형용 못할, 불태워진 학살 현장


지중해 왼편을 따라 뻗어 있는 해안도로를 타면 푸른 지중해를 내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차창으로는 황량한 사막만이 펼쳐졌다. 우리 일행이 탄 차는 트리폴리를 지나 자위야, 사브라타, 주아라 등을 거쳐 쌩쌩 내달렸다. 반군들의 검문소도 남부 국경을 통과할 때보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계속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특히 마지막까지 교전이 벌어졌던 도시 주아라를 통과할 때는 혹시나 저격수가 있을지 몰라 건물 옥상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주아라 지역 일부 도로에서는 반군들이 길을 가로막고 “위험하니 우회하라”며 다른 길을 안내해주기도 했다. 쿵쾅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황량한 사막을 보며 트리폴리에서의 여정 가운데 한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트리폴리를 떠나기 전날 들른 트리폴리 남쪽 카미스 여단 옆 임시 수감시설이다. 수감시설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누추한 창고는 50여명이 사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진 학살의 현장이었다. 이미 시신은 처리되고 없었지만 수십구의 시신을 불태운 뒤 남은 악취는 코를 찔렀다. 난생 처음 맡아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였다. 쥐고 있던 손수건을 저절로 코에 갖다댔다. 현장을 목격한 인근 주민들이 다가와 설명해줬다. 엄마를 따라 나온 세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학살의 참혹함을 모르고 누비는 어린아이라니. 미래 리비아에 남은 과제는 바로 저런 꼬마 아이에게 왜 이런 학살이 일어났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라에딘 병원에서 만난 여의사 모하메드 이남에 대한 인상도 강하게 남았다.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 동안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한 뒤 5년간 병원에서 근무했다. 35세 미혼 여성으로 히잡을 쓰고도 전혀 거리낌 없이 일하는 이남은 외신에서 묘사되는 억압된 무슬림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외국 기자들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영어를 구사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영어는 금지하고 오직 아랍어만을 배우게 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익혔다고 했다. 가끔씩 자신이 얘기하고 싶은 영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윽, 이게 다 카다피 때문”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어린아이들과 젊은 세대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없이 죽어간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남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불쑥 올라왔다. 그 울컥함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동지애이자 힘든 시간을 겪어온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튀니지로 돌아와 곧바로 그에게 e메일을 보냈다. 쉬운 영어로 또박또박. “당신의 열정에 감동받았습니다. 리비아와 당신의 미래에 행운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처음 한국을 떠나 리비아로 향할 때 떠올렸던 “왜 위험한 리비아로 가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리비아에서 받은 타 신문사 기자로부터의 e메일 한 통이 생각났다. 일면식도 없는 그 기자는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고 극심한 스트레스,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겠지만 몸조심하라”고 응원했다. 그는 또 한 기고문을 읽다가 ‘왜 리비아로 가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떠올랐다며 그 글을 링크해서 보내줬다. 리비아 현장을 누비며 속보를 전하고 있는 영국 스카이뉴스 채널의 알렉스 크로퍼드의 남편 리처드 에드몬슨이 쓴 것이었다. 크로퍼드는 2008년 인도 뭄바이 테러 현장 등 수많은 분쟁지역을 취재한 대표적인 여성 기자다. 인디펜던트 기자로 일하다 ‘전업주부’가 된 남편 에드몬슨은 크로퍼드가 보육에 소홀하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 지난달 29일 인디펜던트에 반박하는 글을 썼다.


“내 아내 알렉스를 화나게 하고 싶다면 그를 여기자라고 부르거나 또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됩니다. 알렉스에게 여기자는 전쟁터로 가서는 안된다고, 특히 어린아이들이 집에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말해보세요. 그렇다면 그건 매우 치명적인 말이 될 겁니다. 알렉스는 지난주 참석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남성 기자들은 ‘남기자’로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알렉스는 다시 리비아로 갈 것입니다. 그는 그가 말하고 싶은 사실을 위해 싸워왔고, ‘여성·아내·엄마’라는 작은 구멍으로 그를 보려 하는 사람들과도 싸워왔습니다.”


■ 해안도로 타고 튀니지로 귀환


나 역시 ‘왜 리비아를 다녀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기자’가 아니라 ‘기자’로서 대답해야 할 것 같다. 기자는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력에 기초해 현장과 사건을 보고 기사를 작성한다. 그곳이 전장이든 휴양지든 상관없다. ‘여기자’이기 때문에 ‘남자’ 기자와는 다른 감수성과 접근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그것을 기사로 소화했더라도 그것은 여성이 아니라 ‘기자’로서 평가받아야 할 일이다. 수가 적고, 과거에 그래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분쟁 현장으로 달려간 ‘여기자’가 관심 내지는 차별을 받고 있지만, 현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보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리비아 현장에는 ‘기자’가 있다.


‘살아서’ 기사를 보냈으니 선배가 말해줬던 종군기자 제1수칙은 잘 지킨 셈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멀리서 큰 소리가 나면 혹시 총소리가 아닐까 깜짝깜짝 놀란다. 이제 그런 일도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일상은 다 잊으라’는 여행자의 제1수칙을 마음에 담고 여행금지국가가 아닌 리비아를 다시 찾을 날을 기대해본다. 그때에는 반군 기숙사로 쓰였던 알 와단 호텔 야외 수영장에 몸을 담가볼 수 있을 것이다. 호텔 엔지니어 타레크와 약속한 대로. 


<제르바에서> 끝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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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40일 된 베로니카는 살을 태우는 듯한 뙤약볕 아래서도 새근새근 참 잘 잤다. 부모의 어려운 상황을 알기라도 한 걸까. 3일 오전 11시30분. 유엔난민기구가 운영하는 튀니지 라스아지르의 슈샤 리비아 캠프를 찾았다. 


■ 카다피 용병으로 의심 받아


이곳은 튀니지와 리비아의 해안 국경에서 8㎞ 남짓 떨어진 사막에 위치해 있다. 지난 2월 리비아 상황이 악화된 이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 가운데 제3국 국민들이 머무는 캠프다. 특히 고국의 내전, 테러, 빈곤, 기근 등으로 인해 리비아로도, 고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난민이나 난민 지위 신청자들이 모여 있다.


에리트레아 출신 난민인 아담 로울리(26·가명)가 지난 3월31일 리비아 국경을 넘어 튀니지의 난민캠프로 옮겨온 뒤 태어난 딸 베로니카를 돌보고 있다. 아기 엄마(22)는 사진 촬영을 한사코 꺼렸다. _ 이지선 기자

 


베로니카는 바로 이곳 슈샤 캠프에서 태어났다. 아빠 아담 로울리(26·가명)와 엄마 리븐스 돌(22·가명)은 에리트레아 출신 불법이민자이다. 리비아에서 3년가량 일하다 리비아 상황이 혼란에 빠지자 지난 3월31일 어렵사리 국경을 넘어 튀니지로 왔다.


임신한 돌이 국경을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리비아에 머무는 것은 더 위험했다. 반군에게는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 측의 용병으로 의심받았고 카다피군도 그들을 차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자리도 없었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수도 트리폴리에서 리비아인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튀니지로 오는 데 든 경비는 1인당 600리비아디나르(약 64만원). 기름값이 4~5배 오른 상황에서 트리폴리에서 4명이 리비아인 기사가 운전하는 리비아 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데 우리 일행이 850리비아디나르를 지불한 것에 비하면 얼마나 비싼지 알 수 있다. 그만큼 당시의 다급했던 상황을 말해준다. 


로울리는 2008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이나 에리트레아 내전으로 인한 징병을 피해 일단 수단으로 탈출했다가 일거리를 찾아 리비아로 넘어갔다. 그 여정이 어땠는지 묻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시무시했다”고 말했다. 정부군에 색출돼 고국으로 보내지면 어떤 고초를 겪을지 모르고 운이 좋게 수단쪽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약 5000㎞의 사막을 건너야 했다. 모두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것이다. 


로울리는 “적어도 리비아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더운 날씨를 이겨낼지 은근히 걱정이다. 이날 기온은 42도. 캠프에 설치된 수도를 틀자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돌은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피했지만 로울리는 다정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로울리와 돌 부부는 지난달 11일부터 난민지위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난민 지위를 받으면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제3국으로 갈 생각이다. 부부는 “세상의 모든 돈을 다 준다고 해도 위험한 리비아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어린 친구야, 두려워 말아라


슈샤 캠프에는 로울리와 돌과 같은 사연을 간직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소말리아인이 가장 많고 에리트레아, 수단, 에티오피아 등 인구가 많은 순으로 구역이 구분돼 있다. 나머지 국가 출신들은 한 구역에 모여 있다. 모두 22개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세워진 지 6개월이 넘었기 때문에 캠프는 그나마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생수병 대신 수도관이 들어왔고 밤에도 불빛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전기가 공급된다.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음식 배급장소도 구역별로 나뉘어 있다. 유니세프나 세이브더칠드런 등은 글자를 배운 적 없는 사람들에게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를 가르치는 간이학교를 세웠다. 국경없는의사회를 비롯한 구호단체들은 의료를 담당한다. 


난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작은 구멍가게도 있다. 인근 도시인 빈 가르데인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데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은 담배와 국제전화카드라고 한다. 하지만 이날도 캠프는 잠잠하지 않았다. 캠프 관계자는 소말리아 구역의 안전업무를 담당하는 남자직원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구역 전체가 들썩였다고 브리핑했다. 또 7명의 카다피군 용병이 사막을 넘어 캠프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반군이 장악한 국경 검문소를 피해 용케도 튀니지로 넘어온 것이다.


얼마 전 캠프에서는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이 끝난 뒤 5일간의 이드 연휴를 맞아 다함께 즐길 수 있는 조촐한 파티를 마련했다. 파티라고 해봐야 풍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안으로 밀어두었던 아픔을 해소하는 자리였다. 학생 2명이 파티 때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려주었다. 바로 자신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어린 친구여, 두려워하지 말아요.”


<리비아 접경 라스아지르에서>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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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오전 4시 전에 이 종이를 문밖에 걸어두시면 아침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콘티넨탈 식사는 신선하게 짜낸 오렌지 주스와 크루아상, 토스트, 대니시 패스트리가 담긴 빵 바구니, 갓 내린 커피나 차로 준비됩니다. 알 와단(Al Waddan)만의 아침을 주문하실 경우 기름에 살짝 튀긴 양고기에 양파와 향신료를 첨가한 리비아 전통음식인 ‘글라야(glaya)’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기자가 머물고 있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알 와단 호텔 방에는 이 같은 내용의 아침식사 룸서비스 메뉴판이 아직도 문에 걸려 있다. 반군이 총을 들고 다니는 현실(이 호텔은 반군이 기숙사로 쓰고 있다)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 호텔은 이탈리아 식민지 시절인 1936년 지어진 이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트리폴리 시내 유명 호텔 가운데 하나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트리폴리에 미군 기지를 만들었고, 미군은 무아마르 카다피가 혁명으로 집권한 뒤인 1970년에 철수했다. 


미군 주둔 당시 1960~70년대 유명 팝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과 영화배우 숀 코너리 등이 이 호텔에 머물렀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는 호텔은 꽤 괜찮은 부티크 호텔 같아 보였다.

 

호텔 입구의 카다피 사진 한 리비아 남자가 1일 수도 트리폴리의 코린시아 호텔 입구 바닥에 놓인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사진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트리폴리 _ AFP연합뉴스



■ 호텔 지하엔 무슬림 기도실


하지만 현재는 정상 가동을 멈춰, 180~200명 규모의 직원들도 대부분 떠난 상태다. 호텔 지하로 내려가 봤다.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하는 작은 기도실이 있었고 폐쇄회로(CC)TV를 관리하는 보안실, 기계실 등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문은 야외 수영장으로 이어졌다. 야자수 한 그루가 서 있는 수영장에는 물이 말라버린 지 오래다. 하긴 먹을 물과 씻을 물도 부족한 상황에서 야외 수영장이라니 언감생심이었다. 야외 수영장 옆 건물에는 사우나 시설과 여러 운동기구를 갖춘 피트니스룸이 있었는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사우나나 수영을 끝내고 음료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커피숍 역시 문이 닫혀 있었다. 


메인 레스토랑의 이름은 알 미단. 프로젝션 TV가 설치돼 있는 이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식사도 즐길 수 있고, 야외 테이블에서는 중동 사람들이 즐기는 물담배인 시샤도 피워볼 수 있다. 실제 여러 개의 시샤가 나뒹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식사는 정오부터 오후 11시까지 먹을 수 있다. 16장에 달하는 메뉴판에는 해산물 펜네, 야채 라자냐, 스파게티 봉골레, 새우 리조토 등 이탈리아 음식은 물론 농어구이·양고기 스테이크 등 메인 요리와 홈메이드 초콜릿 무스·티라미수 케이크 등 디저트도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물이 안 나와 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커다란 커피잔에 가득 담긴 블랙커피를 보자 바로 입맛이 당겼다.


2년 전 호텔을 개조한 뒤 운영을 맡았던 인터콘티넨탈그룹은 이번 내전이 터지자 잠정적으로 리비아에서 철수했다. 호텔은 반군을 돕는 일부 리비아인 직원과 반군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호텔에서 1년 정도 근무한 엔지니어 타레크 엘테리키(42)는 “반군이 오기 전인 3월쯤부터 이 호텔에는 리비아인, 카다피군, 저널리스트들이 함께 머물기 시작했다”며 “호텔 안에 카다피군이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 자원봉사자·반군 함께 운영


반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4층 스위트룸은 모두 카다피군과 용병들의 차지였다고 한다. 자신의 동료들을 죽인 바로 그 총을 보고 그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반군을 도와 호텔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엘테리키는 “물과 음식은 물론 뭐든 힘이 닿는 대로 반군을 돕고 있고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신세를 졌던 이프라트 음식이나 간간이 마련됐던 차나 주스도 엘테리키의 동료인 호텔 요리사가 호텔에 저장돼 있던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반군이 4층 스위트룸을 쓰고 있다.


1일 튀니지로 건너갈 것이라는 말에 엘테리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얼른 수영장에 물을 채워야겠다. 물이 채워진 수영장을 보면 너무 좋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을 건네면서 “언제라도 다시 자유로운 리비아를 방문해달라”고 했다.


<트리폴리에서>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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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입원 카다피군 병사 “나토의 공습 소식에 나라 지키려 자원”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시내를 걷다보면 눈돌리는 곳 어디에서나 반군의 삼색기를 볼 수 있다. 나무에도, 담벼락에도, 차량에도 반군을 지지하는 표식이 새겨져 있다. 차를 탄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승리의 V자를 그리면서 ‘리비아는 자유다’를 외친다.


지난 2월부터 8월21일 반군이 입성하기 전까지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손아귀에 있던 트리폴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곳 사람들은 반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것일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색 광장(현 순교자의 광장)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친카다피 시위를 벌인 곳이 트리폴리 아니었던가. 지난 31일 찾은 트리폴리 살라에딘 병원에서는 반정부 시위 발발 이후 지금까지 트리폴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반쯤 이드 연휴로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은 한산한 시내를 달려 살라에딘 병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똑같은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명절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옷가지 등 선물을 전하러 온 자원봉사자들이었다. 리비아에서 가장 큰 병원인 이곳은 얼마 전 수백구의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된 아부 살림 지역의 병원 등과 함께 트리폴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여성 외과의사인 모하메드 이남(35)은 지난 2월 이후 트리폴리에서 생존하는 것은 끔찍했다고 회고했다. 이남은 “카다피군과 그가 고용한 용병들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직후 가리지 않고 민간인을 죽였다”고 말했다.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12년차 의사인 그는 “시내 곳곳에 저격수가 배치돼 두려워서 나오지도 못하고 출근하는 것조차 무서웠다”고 말했다.


 

카다피군에 자원해 친위부대 카미스여단 소속으로 반군과 교전하던 중 다친 이브라힘 마흐무드가 지난 31일 트리폴리 살라에딘 병원에서 V자를 그리고 있다. 트리폴리 _ 이지선 기자

1층 다른 병실에서 만난 모하메드 파우지(43)는 카디피군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당한 경우다.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60㎞가량 떨어진 소크나 출신인 파우지는 사무직 직원이었다. 지난 21일 밤 볼일이 있어 택시를 타고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샘소나이트 가방을 들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카다피 정부군 1명이 다가와 그를 쓰러뜨리더니 권총으로 그를 쐈다. 그러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향해 다시 여러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팔에서 목 쪽으로 관통한 총알은 아직까지 목과 어깨의 연결 부위에 박혀 있고, 한 발은 척추를 관통해 그는 하반신 마비 상태다. 평생 걸을 수 없게 돼 휠체어를 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다. 파우지는 “대체 왜 나를 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며 “카다피가 잡히면 새장에 가둬 옆에 들고 다니면서 죽이고 싶을 때 죽이겠다”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파우지를 직접 일행에게 소개해주면서 통역과 안내를 맡은 의사 압둘 카피 타샤니(52)는 “그는 하반신이 마비됐다”며 “이런 과격한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 반군과 한 병동 긴장감 팽팽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반군이 트리폴리를 손에 넣기까지 6개월 동안 카다피 치하의 트리폴리는 말 그대로 ‘공포의 도시’였다. 외과의사 이남은 “내 외가 친척 3명을 비롯해 이웃에서만 100명은 죽은 것 같다”면서 “트리폴리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정은 일가친척 가운데 한 명꼴로 카다피군에 의해 희생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의 병원 동료 한 명은 자녀 4명을 한꺼번에 잃고 완전히 미쳐버린 경우도 있다고 했다. 


외신에서 ‘트리폴리 시민들이 위험하다’ ‘트리폴리에 저격수가 활보한다’는 등의 내용을 접한 적이 있지만 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직접 듣고도 믿겨지지 않는 현실에 입이 떡 벌어졌다.


카다피군은 병원도 위협했다. 리비아의 상황을 실시간 업데이트하는 알자지라 방송 웹사이트에 따르면 지난 2월22일 트리폴리의 의사들은 총에 맞은 병사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위협받고 살해되고 있어,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남이 전한 상황과 일치했다. 그는 “카다피군은 병원을 때때로 찾아와 반대 세력이 오면 치료해주지 말라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시민들에게 트리폴리로 진격해 카다피군을 쫓아준 반군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지금 반군들이 들고 다니는 총은 숨어서 민간인들을 쏘기 위해 카다피군과 용병들이 쥐고 있던 총과는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병원마다 반군 깃발이 휘날리고, 병원 인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반군을 지원하는 시민들의 자원봉사 손길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병원 한쪽에는 교전 중 다친 카다피군과 수단, 나이지리아, 우간다 등에서 온 아프리카 용병들도 함께 치료를 받고 있다. 치열한 교전을 벌인 양쪽이 같은 병동에서 치료를 받는 상황이었다. 이들 만나기 위해 6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에만 40명, 전체적으로는 100여명의 카다피 지원군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카다피군에 자원해 카다피 최정예 친위부대인 카미스여단(32여단)에 배속된 스무 살 이브라힘 마흐무드가 누워 있는 병실로 갔다. 그는 일주일 전쯤 병원 인근 지역을 지키다 반군과 마주쳐 교전을 벌였고, 왼쪽 골반에 총격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취재진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서부 나푸사 사막지대 미르다 출신의 그는 텔레비전을 보고 카다피군에 지원했다고 했다. 마흐무드는 “TV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했다”며 “기쁜 마음으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에 자원했다”고 말했다. 그가 카다피군에 자원한 것은 지난 6월. 3개월의 훈련 기간을 거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한 달 만에 바로 총을 받아 전장에 투입됐다.


반군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냐고 했더니 “주변에서 일부 반군에 합류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TV에서 ‘반군은 쥐새끼’라고 했고 모스크의 이맘도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며 반군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있었다고 답했다. 통역을 맡은 의사 타샤니는 “지난 2월부터 알자지라를 비롯해 리비아 내 민영방송도 모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마흐무드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마흐무드는 이웃끼리 민영방송을 보는지 서로 감시하고 만약 그럴 경우 당국에 신고가 들어가기 때문에 도저히 민영방송은 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했다. 카다피가 철저하게 미디어 선전전을 벌였고, 거기에 세뇌된 젊은이들이 카다피군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카다피 정권은 철저히 미디어를 통제하면서 무작위로 총구를 들이대는 공포의 정치로 자신의 최대 지지기반인 트리폴리를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자신의 아들이 이끄는 카미스여단 말고는 군대를 키우지 않았던 카다피는 거액을 들여 용병을 많이 고용했다. 이 병원에서는 용병 부상자도 만날 수 있었다. 용병들의 병실을 찾기 전 의사 이남은 “이들은 대부분 보복이 두려워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등의 핑계를 댈 것”이라며 “하지만 모두 교전 중 다쳐 반군에 의해 이송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남의 말처럼 차드 출신 하심 아메드(33)는 “출근길에 트리폴리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총을 쏴 본 적이 없고 반군과 싸운 적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다피 측 용병으로 활동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이웃을 살해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얼마나 복잡할까. 이남에게 물어봤다. 그는 “솔직히 이들을 직접 죽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아이들과 여성들도 모두 쏴서 죽였고, 용병들이 우리 돈으로 하루에 3000~5000디나르(266만~435만원)라는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얘기가 리비아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다”며 “마음속에서는 이들을 증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 증오 이면에 내전 상처 깊어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배경에는 카다피 정권의 실정도 한몫했다. 병원에는 약품과 의료기구가 턱없이 모자라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 동안 월급을 못 받고 일한 적도 있지만 카다피는 용병을 고용하는 등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만 돈을 펑펑 썼다는 것이다. 이남은 “치과의사인 여동생도 4년째 일자리가 없어서 집에서 놀고 있고 남동생도 실직상태”라며 “카다피는 오일머니를 이런 데 쓰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종교가 그들을 동등하게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며 “신이 그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다피 정부군 역시 병원에서 다른 환자들과 동등한 치료와 처우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내전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치료받고 나간 반군이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정부군을 쏘는 것을 보았다”는 병원 직원 압둘 하말의 말에 의사 타샤니는 내전에서 겪은 괴로움을 털어놨다. 그는 “누군가를 치료해주면 병원 밖으로 나가 다시 서로를 죽인다”며 “모두가 리비아인들인데 서로 싸우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병원을 나서면서 카다피군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며 수줍게 웃던 마흐무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반군의 승리를 뜻하는 V자도 그려보이던 그였다. 선전전에 속아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에 카디피군에 가담한 그에게 행여 보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마흐무드는 복수를 당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리비아의 미래가 밝지 않을까 점쳐본다. 이남이 “보복은 하고 싶지만 처벌은 신이 할 것”이라고 말했듯이.


<트리폴리에서>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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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누군가 내 손을 당겼다… 얼떨결에 신발을 벗었다… 2만여명에 섞여 몸을 숙였다


라마단(이슬람 단식 성월)이 끝나고 닷새간의 축제인 이드 알 피트르가 시작된 31일(현지시간). 전날 오후부터 호텔에 잘 나오던 물이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배도 곯고 있는데 물까지 안 나오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는데, 새벽 3시쯤 수도관을 타고 물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있을 때 씻어둬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일어나 샤워를 마쳤다. 이날 오전부터 이틀 전 찾았던 트리폴리 중심가 순교자의 광장에서는 이드 알 피트르의 첫날을 맞아 대기도회 살라트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새벽부터 광장으로 나가볼 생각이었다.


이날 기도회는 지난 2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이후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모임이다. 단지 종교적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트리폴리 주민 수만명이 한곳에 모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다른 나라의 반정부 시위와 달리 산발적 시위 이후 곧바로 내전 국면으로 넘어간 리비아의 경우 대규모 집회가 열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전 6시.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순교자의 광장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주민들과 함께 걸어서 광장으로 향했다. 기도할 때 쓰는 개인용 카펫인 사자다를 끼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기도 장소를 향해 가는 수많은 시민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무슬림 특유의 동그란 흰 모자와 전통의상인 새하얀 카미스 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뤘다. 눈인사를 나눈 몇몇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노래를 부르며 일렬로 기도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중심가에 있는 순교자의 광장에서 이드 알 피트르 대기도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31일 메카를 향해 일제히 절을 하고 있다. 수만명의 군중이 모인 광장 전체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트리폴리 _ 이지선 기자


하지만 경비는 삼엄했다. 길목마다 반군이 총을 들고 가방을 확인하고 간이 검색도구로 몸수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천명이 한곳에 모인다는 얘기는 그만큼 친정부군 테러 공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군들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작은 가방까지 일일이 검색했다.


어떤 반군 병사는 신분증명서도 보여달라고 요구해서 국제기자증을 내밀었다.


여성을 검색하는 줄이 따로 있었지만 검색하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자의 가방 수색을 마친 한 반군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반군들이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보안체크를 하는 등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트리폴리가 점차 안정을 찾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이날 반군들은 모두 자신의 신분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실제 활동하고 있는 반군의 수나 무기의 개수 등이 정확히 파악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7번의 검색 포인트를 거쳐 광장에 도착했다. 총을 든 반군은 광장 중간 중간 또 광장을 둘러싸고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국립박물관을 비롯해 광장에 면한 건물들의 옥상에도 총을 든 반군 병사들이 있었다. 일부는 망원경으로 수상한 시도가 없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평화의 상징인 기도와 폭력을 의미하는 총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이방인의 눈에 어색하고 불편했다.


■ 국제기자증 보여주자 “통과”


하지만 리비아 사람들에게 총은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 수단이었다. 기도와 총이 공존하는 모습은 순교자의 광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인 셈이다. 종교 기도회였지만 곳곳에서 반군 깃발이 흩날렸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까지 발디딜 틈 없이 가득찬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 양손을 번쩍 들고 승리의 V자를 그리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는 의미였다. 매년 반복되는 기도회지만 이날의 기도회는 리비아인들에게는 특별한 감회를 느끼게 할 터였다. 한 기도 참가자는 “전통적인 기도회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지만 사람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함께 온 치과의사 타리크 무하마드(32)는 무슨 기도를 할 거냐고 묻자 “리비아가 안전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이룰 수 있길 기도할 것”이라며 “리비아인은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남성들과 따로 떨어진 구역에 마련된 여성들의 기도 장소로 향했다.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불안한 상황이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테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곳에 나오는 것이 무섭지 않으냐고 한 모녀에게 물었다. 딸 하자르 함무다(18)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혀 무섭지 않다고 했다. 그는 “매년 기도회에 나오고 있지만 이번에는 혁명을 축하하기 위해 나왔다”며 “리비아의 행복과 국가 재건을 위해 기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 마나니 함무다(42)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말했다.


이들의 카다피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무하마드는 “비록 물도, 전기도 없고 생필품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지만 혁명이 이뤄져서 정말 기쁘다”며 “왜냐하면 카다피는 매우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자르 함무다도 “카다피는 어떤 방식으로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그들의 말에서 카다피에 대한 두려움은 감지되지 않았다. 서슬 퍼런 42년 통치에서 기를 못 펴던 사람들이 낯선 외신기자를 향해 독재자는 죽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로 트리폴리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전날 반군 과도국가위원회의 알리 타르흐니 석유·재무장관이 코린시아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카다피가 어디 있는지 확신하고 있다”고 밝히고 “도주 중인 카다피를 잡을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코린시아호텔에는 현금인출기가 작동하는가 해서 들렀다가 기자회견 개최 사실을 알게 돼 운좋게 참석했다. 타르흐니 장관은 반군이 트리폴리를 장악한 뒤 이곳을 방문한 최고위직이었다.


■ 여성들 기도장소 따로 마련


한 여성이 여성기도구역 앞으로 나와 V자를 그리며 ‘리비아는 자유다’라고 외치기 시작하자 다른 여성들이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옆에서 지켜보며 취재하고 있던 내 손목을 이 여성이 잡아끌더니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양탄자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얼떨결에 신발을 벗고 이들 사이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본 이들 하나하나의 표정은 살아 있었다. 기도회의 엄숙함과 신성함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서로 사진을 찍거나, 반군의 깃발을 들고 있는 장면에서 이들이 얼마나 자유와 민주주의에 갈증을 느껴왔는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오전 7시50분쯤 순교자의 광장을 가득 메운 2만여명이 절하는 기도를 시작했다. 전날의 과격한 들뜸과 기쁨 대신 숙연함이 흘렀다. 개별적으로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알라가 가장 위대하다’는 뜻의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를 7번 외친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수만명이 한꺼번에 일제히 메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단 몇 초간, 트리폴리 전역은 숨을 죽였다. 난생 처음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된 웅장하고 엄숙한 장면에 소름이 돋았다. 이 순간만은 총을 내려놓고 기도를 올리는 반군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아랍혁명 과정에서 ‘분노의 금요일’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슬람권의 휴일인 매주 금요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를 찾았고, 모스크 자체가 대규모 시위가 번지는 시발점이 돼왔다. 예멘, 이집트, 시리아 등에서는 금요기도회를 마친 시민들이 시내의 광장 등에 모여들면서 반정부 시위로 격화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도회와 반정부 시위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리비아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혁명’ 역시 ‘알라’의 뜻이라는 말을 자주 건넸다. 이틀 전 이곳 순교자의 광장에서 만난 여성 옴 오웨스(40)도 “혁명은 알라의 뜻을 높이 세운 일”이라고 말했다. 기도회는 오전 8시30분쯤 끝났다. 


같은 날 호텔 로비의 TV에서는 역시 라마단을 마치고 이드 연휴를 시작한 시리아 다라의 끔찍한 상황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보안군이 대기도회를 끝내고 모스크를 떠나던 시민들을 공격해 13세 소년을 포함해 최소 7명이 다쳤다는 CNN 보도가 흘러나왔다. 5만명의 목숨이 희생됐지만 그래도 성공이 멀지 않은 혁명을 이룬 리비아인들이 이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자신을 낮추고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순교자의 광장에서 돌아와 기사를 마감하고 있는데 다른 방 동료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이날 처음으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주기 시작했으니 빨리 내려가 보라고 했다. 인샬라! 얼른 내려가 봐야겠다. 

<트리폴리에서>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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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현지 교민 집서 김치찌개… 어찌나 맛있던지 한그릇 뚝딱


리비아 라마단(이슬람 단식 성월)의 마지막 날인 30일(현지시간). 숙소인 알 와단 호텔이 반군 기숙사로 쓰이고 있는 덕분에 찬물이라도 물은 잘 나오지만 식사는 고역이다. 그동안 온종일 금식 끝에 오후 7시30분쯤 먹는 라마단의 저녁식사, 이프타르가 하루 중 제대로 된 유일한 식사였다. 


하지만 배경음악처럼 창문 너머로 들리는 총소리가 익숙하지 않다.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총 든 반군 청년들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무슬림들은 라마단이 끝나면 이슬람권 최대 명절의 하나인 이드 알 피트르(이드) 연휴를 시작한다.


 

일상의 평화 찾아가는 트리폴리 거리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중심가인 라시드 거리에서 29일 시민들이 라마단 뒤 열리는 이슬람의 최대 명절인 이드 알 피트르 때 쓸 식료품을 사고 있다. 트리폴리 _ AFP연합뉴스


각 지역의 종교 지도자가 달을 보고 “달을 보았다”는 공식선언을 하면, 라마단이 끝나고 그 다음달 첫날 5일간의 이드 연휴가 시작된다. 대부분 고향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큰 명절이다. 


각 지역의 종교 지도자가 달을 보고 “달을 보았다”는 공식선언을 하면, 라마단이 끝나고 그 다음달 첫날 5일간의 이드 연휴가 시작된다. 대부분 고향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큰 명절이다. 


그래서인지 29일 트리폴리 시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트리폴리 서쪽의 구트샤알 거리는 전날만 해도 상점이 모두 철시하고 인적이 없던 거리가 맞나 싶게 북적였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이곳에서는 옷가게, 빵집 등 생필품 상점은 물론이고 보석상까지 문을 열었다. 사람과 노점상, 차들이 뒤엉켜 상점가 앞 도로를 가득 메웠다. 신발가게에 들어가 “언제부터 문을 열었느냐”고 물어봤더니 “오늘부터”라고 답했다. 


트리폴리가 하루가 다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거리를 지나는 한 여성이 두 손을 번쩍 들더니 “리비아는 자유다”라고 외쳤다.


트리폴리 항구에서는 이드를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트리폴리에서 취업했었거나 반군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귀향 방법을 찾기 위해 부두에서 무작정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25일 국제이주기구가 파견한 전세 선박이 트리폴리로 들어와 난민들을 태우고 벵가지로 이동했고, 전날인 28일에도 벵가지로 향할 배가 들어왔다. 덕분에 집에 갈 수도 있다는 사람들의 기대가 커졌다. 


항구를 출입하는 철문 앞에 20명쯤 돼 보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앉아 있었다. 무하마드 아비디(22)도 그중 하나였다. 벵가지 출신인 아비디는 트리폴리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지난 2월 처음으로 반정부 시위 소식을 듣고 반군에 합류했다. 얼마 전까지 나푸사(Nafusa) 산에서 벌인 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리비아 서쪽에 위치한 나푸사 산맥은 수도인 트리폴리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고 지난 3월부터 최근까지 반군과 카다피군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배를 구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차를 이용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너무 위험하다”고 말했다. 서쪽 트리폴리에서 동쪽 벵가지까지 잘 뚫린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려면 무아마르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를 거쳐야 한다. 시르테에는 전국의 카다피군이 속속 집결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이 카다피군의 무장 차량과 주요 시설을 타격하고, 반정부군도 시르테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이라 해안도로 이용은 어렵다. 남부 사막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경로 역시 사정이 녹록지 않다. 그는 “이드 연휴가 내일모레인데…”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 육로는 카다피군 집결 위험


트리폴리 항도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이날은 터키로부터 들어온 물과 식량을 항구로 보내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물과 식량을 항구로부터 도시로 싣고 나오는 작업이 아니라 다시 항구로 내보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고생해서 내린 물건을 왜 다시 항구로 내보내느냐”고 물었다. 항구 물류 담당인 피투리 알바쉬(23)는 트리폴리의 도로가 정부군 공격을 막기 위해 봉쇄됐기 때문에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알바쉬는 “특히 이드를 앞두고 각 지역의 물자 수요가 더 많아져서 항구가 바쁘다”고 전했다.


알바쉬는 반군에 참여했다가 지난 7일부터 항구에서 컨테이너를 관리하는 물류 담당 업무를 맡고 있다. 트리폴리 동쪽 외곽의 타주라 출신인 그는 모스크(이슬람 사원)에서 나오다 정부군의 총격을 받아 총상을 입고 반군이 됐다고 한다. 셔츠를 들어 왼쪽 복부의 총격 자국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거의 100% 반군에 의해 장악됐지만 아직 트리폴리가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다”며 “아직 정부군 일부가 남아 폭탄 공격을 시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새 항구 관리인도 반군에 참여한 청년으로 바뀐 것에서 보듯 트리폴리 항구는 그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주인이 끊임없이 바뀌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를 낀 유럽 도시들 간의 중요한 교역루트, 그곳이 바로 트리폴리 항을 끼고 있는 수도 트리폴리이기 때문이다. 미 해군의 첫 전투는 1801년 바르바리 전쟁(트리폴리타니아 전쟁)으로 트리폴리타니아는 바로 현재의 트리폴리 항을 중심으로 한 트리폴리 인근 지역이다. 1804년에는 이 지역이 미국 함대에 의해 봉쇄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가 장악했고, 2차대전 때 독일·이탈리아군과 영국군이 싸운 격전지도 바로 이 트리폴리 항 인근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정상을 찾아가는 일상 이면에 잠재한 문제도 눈에 띄었다. 우선 다양한 집단이 화해를 이룰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날줄과 씨줄처럼 엮인 부족 간의 복잡한 관계는 반군 과도국가위원회가 다뤄야 할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과도국가위가 구성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벵가지에 기반을 뒀던 과도국가위가 트리폴리를 포함해 다양한 부족을 아우르는 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부족 간의 문제뿐 아니라 친·반 카다피로 나뉘어 보복의 보복이 거듭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한 소식통은 “(과도국가위는) 카다피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수뇌부 인사들을 보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르단, 레바논, 독일 등의 경호업체에 경호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과도국가위 측은 트리폴리를 장악한 뒤 반군들에게 카다피 정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에 대한 보복을 삼가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려보내고 있다. 하지만 일선 반군 개개인들이 그것을 지켜낼지는 미지수다.


또 다른 문제는 치안이다. 갑자기 반군이 된 이들은 전투를 위해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데 ‘저러다가 사고 한번 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전에 대한 생각 없이 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규 전 리비아 한인회장(59)은 “하늘을 향해 총을 쏘던 시민군이 벨 소리에 무심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총구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옆 동료가 총에 맞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한인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교민 박경옥씨(54)는 “총을 든 반군 두 명이 서로 언쟁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지자 한 명이 들고 있던 총으로 다른 사람의 종아리를 쏘는 장면을 봤다”며 “앞으로 총기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총’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껏 부풀어오른 미래에 대한 기대가 채워지지 못했을 때 또다시 ‘총’을 꺼내들 가능성 역시 우려된다. 상황이 안정되면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가겠다는 반군이 많지만 학생 또는 무직 상태에서 ‘혁명’에 참여해 그 ‘열매’를 맛봤던 반군들은 새로운 정부에서 일하길 원하고 있다. 새 정부가 이런 욕구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경우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총이 위험한 도구로 변하게 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 몇 달째 실직, 생업 복귀 바라


트리폴리의 일반 시민들은 이런 ‘거창한 문제’보다는 생업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가장 크다. 시가총액 1위의 미국 정유회사 엑손모빌에 근무하는 유세프 파토리(34)는 2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3월부터 현재까지 5개월째 실직상태로 있다. 미국인 사장의 운전기사였던 그는 엑손모빌이 철수하면서 실업자 신세가 됐다. 회사가 5개월치 월급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받지 못했다.


파토리는 “저금해둔 돈을 아껴서 살고 있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신한 아내와 두 딸에게는 “돈을 좀 아껴 쓰고 용감하게 버티자”고 격려한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가 언제 다시 문을 열게 될지 아무 정보도, 기약도 없다. 바로 이런 게 지금 리비아인들의 마음일 것 같다. 희망으로 충만했지만 불안 역시 상존한다. 이들이 내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평범하고 편안한 이드 연휴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명절 분위기는 시장기를 돋운다. 다행히 어제 저녁에는 현지 교민을 만나 오랜만에 한식을 포식할 수 있었다. 어묵을 넣은 김치찌개와 감자볶음, 갈치조림과 멸치, 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백반이 어찌나 맛있던지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당초 30일 트리폴리를 떠날 예정이었지만 며칠 더 잔류하게 됐다. 고락을 함께해온 동료들의 의견을 좇아서다. 계약기간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튀니지인 운전기사의 표정이 왠지 밝아보였다. 전화가 전혀 안돼 인터넷으로만 교신을 하는데, 부모에게 전화로 매일 안부를 전해주던 서울의 동료가 “어머님이 오늘 나오는 줄 알고 계시다가 실망하신 목소리더라”고 전해주었다. 이드를 맞기 위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곳에 더 남게 됐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하지만 그 마음을 꾸욱 눌러본다. “이드 무바라크!(Eid Mubarak·행복한 명절을 보내라는 뜻의 이슬람 인사)” 

<트리폴리에서>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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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위치한 ‘순교자의 광장’은 혁명의 해방구였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독재를 자신들의 손으로 끝낸 시민들은 축포의 의미로 총과 자동화기를 하늘로 쏘아댔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총소리는 트리폴리 사람들에게 이미 공포가 아니라 ‘영광과 자유의 소리’였다.


28일 오후 6시(현지시간). 도착 첫날 기사를 송고하자마자 시내 중심부 순교자의 광장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식민지배 당시 지어진 광장은 카다피 집권 시기인 1951~1969년 그의 사상과 이념을 강조하는 의미로 ‘녹색광장’이라고 불렸다. 카다피는 자신의 통치 철학을 담은 책을 그린북이라고 부르고 단색의 녹색기를 리비아 국기로 채택하는 등 녹색을 선호해왔다. 지난 22일 트리폴리를 장악한 반정부군은 녹색광장을 약 6개월간 친카다피군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순교자의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카다피가 반군에 대한 결사항전을 연설했고 친정부 시위가 벌어지던 순교자의 광장은 이미 180도 변한 모습이었다. 무대 조명을 위해 설치된 대규모의 구조물은 반군의 삼색기로 뒤덮여 있었다. 구조물 상단에는 카다피를 본뜬 사람 크기의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이지선 기자(뒷줄 가운데)가 29일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시내의 알 와단 호텔 앞에서 반군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5~26세의 학생 또는 청년인 이들은 카다피군과의 교전을 위해 미스라타에서 온 반군이다. <트리폴리에서>



반군이 순교자의 광장에 진입한 지난 22일 이후 계속 축제 분위기였지만 이날은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바로 반군 대표인 과도국가위원회가 동부도시 벵가지에서 수도 트리폴리로 본부를 옮긴 첫날이기 때문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하늘에 총을 발사하는 의식은 반군의 자신감이 극대화됐을 때 자주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2세 아이부터 노인까지 광장으로 쏟아져나와 42년 독재에서 해방된 기쁨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소총을 하늘로 쏘아대고 자동화기를 하늘로 뿜는 축포로 광장 인근 도로는 탄창과 탄피가 가득 깔려 있었다. 자동차 경적소리가 광장 주변 도로를 가득 메웠다. 가족,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나온 사람들은 경적을 울려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몸을 차 밖으로 내밀고 반군 깃발을 흔들며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를 외쳐댔다. 


광장 한편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자리잡고 있던 앰뷸런스에서도 옛 국가가 흘러나왔다. 1951년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카다피가 42년 철권통치를 시작하기 전인 1969년까지 사용됐던 국가다. 


차량을 운전하던 사람이 기자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면서 V자를 그리기에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더니 곧바로 자동화기를 하늘로 뿜는 것으로 답례했다. 바로 옆에서 쏘아대는 자동화기 소리와 일행을 향해 날아오는 탄피, 매캐한 화약 냄새에 혼비백산했다. 귀청이 떠나갈 듯한 크기의 총성과 포성이 들릴 때마다 움찔움찔하게 됐다. 혹시 사고로 잘못 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 기자 일행을 보며 안내를 맡은 리비아인은 ‘뭐 이 정도에 그렇게 놀라느냐’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외국인의 귀에는 총성이 신변을 위협하는 무기 소리일 뿐이지만 이들에게는 독재정치를 마감한 자랑스러운 소리이자 축제의 소리일 터. 그의 웃음에 괜히 멋쩍어졌다.



리비아 서부 지역에서 카다피군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반군들이 28일 라그달린 검문소 주변에 차량을 몰고 와 집결해 있다. 라그달린 _ AFP연합뉴스



실제 이미 이곳 사람들은 총성에 익숙한 듯했다. 친구, 자녀들과 함께 광장에 나온 여성을 만나봤다. 옴 오웨스(40)는 트리폴리 자위에른 다메니 구역에서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부르카를 입고 승용차를 운전해 광장까지 나온 그는 “여기서 들리는 발포소리가 음악소리와 같다”고 말했다. “이 총소리는 영광의 소리, 자유의 소리이고 총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난다”고 말했다. 부르카 사이로 흰머리가 흘끗 보이긴 했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밝았고 기분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기도 했다.


엄마와 함께 광장으로 나온 아이들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커다란 총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웨스는 “2살난 딸이 ‘엄마, 나에게 총이 있다면 카다피를 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총소리가 기쁨의 축포였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지만 아이들이 무기소리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짓눌렀다.


■ 밤새 총소리… 옆방엔 무장군인


사실 반군이라고 해서 애초부터 총에 익숙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학생이었던 15세 청소년,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총을 든 ‘반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이 되지 않은 일이다. 투숙하는 호텔 인근에서 만난 반군들은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이어 리비아 제3의 도시인 미스라타에서 왔다고 했다. 모하메드 주발리(21)는 기자를 보자 “중국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자신이 중국 기업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신분증을 꺼내 보여줬다. 미스라타에 있는 중국건축공정총공사(China State Construction Engineering Corp)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는 증명서였다. 미스라타에는 대우건설을 포함해 대규모 건설 사업을 진행하는 외국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6일 전에 미스라타에서 트리폴리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왜 수도로 들어왔느냐고 묻자 말 없이 호텔 앞에 서 있는 자동화기를 장착한 트럭을 가리켰다. 아직 남은 트리폴리의 교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 호텔이 반군의 기숙사로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을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간신히 방을 얻게 된 터라 호텔의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서 알아볼 틈이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호텔 로비와 엘리베이터에서도 모두 AK소총을 한 자루씩 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호텔 앞에는 자동화기를 실은 트럭이 놓여 있고 창문 밖에서 축포 총성이 자주 들렸던 이유도 설명이 됐다.


기자 일행이 묵은 알 와단 호텔이 반군들의 근거지가 된 사연은 이랬다. 호텔은 카다피의 한 여성 측근의 소유였는데 반군에게 ‘전리품’처럼 떨어졌고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됐다. 호텔에는 지난주 초부터 미스라타에서 온 반군들이 머물고 있다. 반군들과 한 호텔을 쓰고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순교자의 광장에서 가까운 지역이고 반군이 장악한 지역이니 이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겠다 싶다가도, 이러다가 카다피군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트리폴리에서 반군이 장악하지 못한 아부 살림 지역에서만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저격수가 총을 쏘지나 않을까 무의식적으로 건물 위를 쳐다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맨발·반바지 차림의 혁명가들


하지만 이 반군들은 군인이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모자란다. 총만 내려놓는다면 맨발에 슬리퍼, 면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평범한 이들이다.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도 못했을 터다. 쉬는 시간에 호텔 앞 나무 그늘에 앉아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어쭙잖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얼굴을 익히자 총을 한번 들어보라고 건네기도 한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며 포즈를 취하는 천진난만함도 있다.


이들에게 무기는 이미 일상용품이 됐다. 여차하면 무기를 들고 사선으로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지난 22일부터 지금까지 카다피의 관저가 있는 요새 바브 알 아지지야 공격 등에서 130명의 반군이 죽었고 2000명가량이 부상을 입었다고 반군들은 전했다.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변화에 대한 갈망이 평범한 청년들을 전사로 바꾸어놓은 셈이었다.


트리폴리에서의 첫날 밤. 호텔 창문 밖에서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총과 무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옆방에 묵고 있다. 정상화 과정이지만 아직 불안한 모습의 트리폴리. 하지만 시민들은 미래를 밝게 점치고 있었다. 오웨스는 “충돌을 피해 도시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도 일주일이면 돌아오고 상점도 문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카다피의 압제에서 벗어난 리비아에 대해 훨씬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혁명은 모든 리비아인을 하나로 만들어줬다”며 “세계는 ‘리비아는 곧 카다피’라고 알고 있었지만, 카다피는 리비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군의 깃발색은 빨강, 검정, 녹색의 3가지로 이뤄져 있다. 날루트 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청년들은 빨강은 리비아 사람들이 흘린 피를, 검정은 이탈리아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을, 녹색은 천연자원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리비아가 바로 이런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결국 식민지배에서 독립했고 이제 42년간의 독재를 극복했다. 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췄고, 이제 국민의 손으로 이뤄낸 민주주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미래에는 한번 해볼 만한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늘로 쏘는 축포의 배경인 자신감은 바로 그런 희망과 기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리폴리에서>


이지선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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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곳곳에 반군 검문소 … 약탈 우려해 짐은 차 안으로


“환영합니다. 리비아는 이제 자유입니다(Welcome to Libya, Libya is free now).”


튀니지 국경을 건너 처음 만나는 리비아의 작은 도시 날루트(Nalut)에서 트리폴리까지 향하는 여정은 희망과 불안의 교차점이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철권통치를 몰아낸 리비아 국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 하늘을 찔렀지만 폐허가 된 트리폴리 시내 풍경이 말해주듯 현실의 시계(視界)는 잔뜩 흐림이었다. 


28일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시내에 도착한 이지선 기자.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인터넷이 가능한 호텔 로비를 찾아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바깥 어디에선가 총성이 울렸다. 


트리폴리 시내와 검문소에서 만난 반군들은 환한 표정으로 승리의 표시인 브이(V)자를 그려보이며 “카다피는 이제 없다” “우리가 이겼다” 등의 구호를 외치는 등 현재의 승리를 자축했다. 국경도시 날루트에서 4시간20분을 달려 28일 오전 10시(현지시간) 트리폴리 도심에 진입하기까지 19개의 검문소를 지났다. 엄격한 검문을 당하면서 여전히 마음놓을 수 없는 상황을 실감했다.


트리폴리 시내 역시 온전한 기능을 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고 총을 든 반군과 펜과 카메라를 든 기자들뿐 일반 주민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심하게 붐벼 노련한 운전사라도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구트샤알 거리도 반군과 카다피의 대치 상황이 길어지면서 상점은 모두 문을 닫고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다. 


마주친 반군들은 “트리폴리의 상황이 95%는 안전하지만 카다피군이 좋은 위치에 저격수를 배치해놓은 아부슬림 지역은 많이 위험하다”고 입을 모았다. 


트리폴리 옆 도시 자위야에서도 건물들에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 희망·불안 교차하는 사막도로


리비아 국경도시 날루트를 출발한 것은 28일 새벽 5시40분(현지시간). 전날 날루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일찌감치 트리폴리로 향하기로 했다. 차를 타러 나오자 운전사와 가이드가 전날 운전을 할 때 차 지붕 위에 올려두었던 짐들을 차 안으로 싣고 있었다. 가뜩이나 좁은 차 안에 왜 짐을 싣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진짜 여정이 시작인데 혹시 짐을 보고 약탈을 하기 위해 총을 쏠 수도 있기 때문에 넣어두어야 한다”고 답했다. 겁이 덜컥 났다.


여전한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쭉 뻗은 리비아의 사막도로를 달리며 바라보는 여명의 색조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잠시, 곳곳마다 반군 깃발이 꽂힌 임시 검문소가 설치돼 우리의 신분을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 날루트에서 트리폴리로 출근하는 리비아 반군 병사를 대동하지 않았지만 검문소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출발 후 1시간쯤 지난 6시30분 티지(Thig)라는 마을에 도달하자 타고온 4륜구동차의 타이어가 구멍이 났다. 타이어를 갈기 위해 잠시 멈춰 동행한 반군 모하메드 자루크(33)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전하는 리비아 상황은 희망 쪽이었다. 날루트에 거주하는 그는 원래 엔지니어 출신으로 컴퓨터 공학 박사과정을 하다가 반군에 가담했다. 자루크는 “혁명 이전 우리는 ‘아니다’라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며 “혁명은 먹을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투표와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벵가지에서 일어난 반군 봉기를 카다피군이 폭력으로 진압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실제 1984년 카다피를 향한 쿠데타 당시 트리폴리와 날루트에 살던 그의 삼촌 2명도 희생됐다. 그러나 그는 단연코 전쟁 참여가 복수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은 매일 날루트부터 트리폴리로 출근하며 혹시 모를 교전에 대비하고 있지만 상황이 안정되면 박사과정을 끝마치고 싶다고도 했다.


리비아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똑같이 혁명을 겪은 접경국 튀니지 젊은이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아까지 따라온 튀니지인 가이드 이삼 오피(23)는 “리비아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기 때문에 상황이 안정되고 정치가 바로 잡히면 두바이와 같은 부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며 “하지만 튀니지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실제 날루트에서 트리폴리까지 이어지는 길목마다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탑 등이 많이 눈에 띄는 등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한 리비아의 인프라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앞서가는 상황이다.


자루크는 카다피의 수중에 있던 타지와 반군 거점인 날루트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반군 4명이 사망하는 등 갈등이 극에 달했었다고 전했다. 그는 “하지만 이제는 카다피 정권 당시의 교통경찰과 반군이 울력으로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면서 “트리폴리에서도 곧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인샬라 … 국경을 넘다


튀니지 제르바에 머문 지 이틀째인 지난 27일 국경을 넘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여정은 기름통 2개와 함께 사륜구동 차 맨 뒤칸에 쪼그리고 앉아 2시간 넘게 사막길을 달리는 것으로 막을 열었다. 기름통은 리비아 내 주유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 튀니지에서부터 싣고 가야 하는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제르바 호텔에서 이날 오전 11시30분 출발한 기자는 2시간여를 달려 튀니지 중남부의 조그만 마을 타타윈(Tataouine)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갈아탄 차는 스포츠유틸리티 차량이다. 기자 4명에, 아랍어를 하는 튀니지인 가이드가 타고 있어 짐을 모두 실을 만큼 자리가 넉넉하지 않았다. 뒷좌석 기름통에서 새어나오는 지독한 냄새를 견뎌가며 사막길을 달려야 했다. 돌아가며 맨 뒤칸에 쪼그리고 앉아 맞는 사막의 햇볕은 어찌나 따가운지 에어컨을 켜도 땀이 줄줄 흘렀다.


타타윈을 떠난 지 약 2시간. 리비아 도시 와진과 튀니지의 데히브 사이의 국경이 나타났다. 반군이 장악한 국경검문소에는 여기저기 반군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국경을 넘어 처음 만난 리비아의 도시는 날루트. 서쪽 국경이 막혀 있는 상태에서 남부 국경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 기자들이 대부분 거쳐가는 코스다. 일찌감치 반군이 장악한 도시의 가장 좋은 건물인 동사무소는 ‘날루트 미디어 센터’로 역할을 바꾸었다. 이곳에서 트리폴리까지 향하는 취재를 위한 이동 허가증을 발급하고 있었다. 


리비아인 가이드는 오후 8시쯤 이프타르를 같이해야 한다면서 함께 식사할 것을 권했다. 이프타르는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금식을 해야 하는 라마단(이슬람 금식 성월) 기간의 저녁식사를 말한다. 이슬람권의 적십자사인 적신월사가 이프타르를 주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대추야자와 신선한 우유 등으로 먼저 온종일 허기진 속을 달랜 뒤 정식식사를 했다. 6개월간의 기나긴 교착상태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는 모습이 스쳐갔다.


이프타르를 마치고 난 뒤 리비아인 가이드는 “트리폴리까지 가는 길에 일부 초소에는 밤에 반군을 가장한 괴한들이 나타나 돈을 요구하는 등 안전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날루트에서 하루 묵을 것을 권했다. 물론 안전이 중요해 날루트에 묵고 가기로 결정했지만 당초 가이드와 이날 안에 트리폴리까지 가기로 약속한데다 사전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 자체가 황당했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아랍의 인샬라 문화였구나’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신이 뜻하는 대로’라는 의미의 ‘인샬라’라는 말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건 신의 뜻에 달렸다’면서 약속을 어긴 것을 회피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가장 큰 돌발변수는 제르바를 떠나기 전날인 26일에서 27일 오전 사이에 일어났다. 26일 오전 11시. 제르바 호텔에서 동료와 기사 작성을 하고 있는데 한 남성이 다가오더니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기자세요?” “네. 왜 저희를 기자로 보셨나요?” “심각하게 노트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당신 둘뿐이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리비아인 모하메드 엘키시(31)이며 반군 과도국가위원회의 국제미디어 담당 업무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리비아 반군 지지자들이 27일 트리폴리에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통치지침을 담은 그린북을 불태우고 있다. 트리폴리 _ AP연합뉴스



■ 어긋난 계획, 사라진 ‘안전판’


엘키시는 “반군 거점인 벵가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르바로 왔고 국경을 넘어 트리폴리로 들어갈 예정”이라며 “트리폴리에 외신기자들을 위한 미디어 센터를 세우는 일을 급선무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키시는 기자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원하는 기자와 함께 트리폴리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이미 25일 밤 여러 명의 기자가 트리폴리로 입성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회사에 바로 보고했다. 제르바에 있는 기자나, 서울에 있는 데스크나 누구도 트리폴리의 치안상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믿음과 바람을 바탕에 깔고 내려야 하는 결정이었다. 모두가 고심을 거듭했다. 한편에서는 트리폴리의 치안상태가 과연 들어가기에 안전한가도 걱정됐다. 엘키시는 “100% 안전하다고 볼 수 없고 어떤 곳은 매우 안전하고 어떤 곳은 매우 불안하지만 카다피군을 대부분 몰아냈다”고 말했다. 특히 “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은 안전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각 한국 대사관 측은 트리폴리의 상황이 어제와 변함이 없이 불안하다고 밝혔다. 트리폴리 현지 기업에 근무하다 알제리에서 전쟁을 피하고 있는 한 교민이 현지 직원과 통화를 한 뒤 알려준 트리폴리 상황은 양측의 입장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트리폴리 시내는 비교적 평온을 되찾아 95%까지 정상을 회복했지만 고층 빌딩에서 카다피군이 반군을 저격하고 있기 때문에 빌딩이 늘어선 광장이나 거리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직접적인 위협은 적을지언정 잠재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 낙타와 탱크가 공존하는 풍경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종 결정은 출발 몇 시간 전인 27일 새벽에야 이뤄졌다. 어렵게 내린 결정은 반군 측 인솔자와 함께 트리폴리로 간다는 것이었다. 엘키시의 신분과 그가 실제 차량 등을 섭외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그와 함께 트리폴리로 가는 길은 무산됐다. 당초 국경을 넘어 리비아로 들어섰을 때 엘키시가 섭외해주기로 했던 반군 측과 제대로 연락이 닿지 않아 그가 제안했던 방법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다양한 자발적 참여조직이 층위를 이룬 반군 측이 아직 일사불란한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오직 신만이 아는’ 변수들이 꽤나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것도. 


사막 한가운데 풀을 뜯는 낙타와 얼마 전까지도 교전에 동원됐을 버려진 탱크가 공존하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리비아. 그 비현실이 담고 있는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 날루트·트리폴리에서 >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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