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갖는 법적·역사적·외교적 함의는 매우 엄중하다.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과 법리적 공방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과 배치되는 판결이어서 정부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파장과 문제점을 논하기에 앞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을 한국의 최고법원이 명확히 재천명했다는 점이 이번 판결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판결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한반도 역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다.

 

한·일관계는 애초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정상화할 때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없었다. 안보·경제적 이유로 일본과의 수교가 시급했던 탓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이 미국의 주도로 이뤄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전후질서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에 있다.

 

13년이나 끌어 온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종 선고가 원고 승소 판결로 내려진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7년간의 일본 점령통치를 끝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국가가 됨과 동시에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다. 미·소 냉전에 대비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전범국 일본에 서둘러 면죄부를 준 것이다. 당시 국제적 존재감이 미미했던 한국은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의 중요한 부분들은 미해결 상태로 종료됐다.

 

그럼에도 한·일관계는 상호 필요성에 의존해 유지될 수 있었다. 냉전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는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냉전구도가 해체되면서 한·일은 서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강제징용 판결은 이 같은 한·일관계 변화 추세의 결정판이다. 판결의 핵심은 간명하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법이므로 강제징용도 불법이고 따라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 한·일이 외면하고 회피해왔던 한·일관계의 ‘태생적 모순’을 정조준하고 있다. 53년간 덮어놓았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1965년 체제’로는 더 이상 한·일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일관계를 파탄낼 수는 없다. 출발이 잘못됐으니 처음으로 돌아가 한·일관계를 근본부터 뒤집고 이미 국제적으로 뿌리내린 전후질서를 바꾸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은 미국 주도의 전후질서와 동아시아 전략의 희생물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만들어놓은 전후질서의 그늘 아래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는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싫든 좋든 현재의 체제 안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일은 이제 1965년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협력모델을 빨리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교적 해결 노력과 국내 여론 설득을 병행할 수 있는 양국 정부의 ‘용기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일본은 청구권협정과 한일기본조약의 문구 하나하나를 머리카락 쪼개듯 분석하고 법적 효력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한·일관계에는 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알면서도 ‘법적으로 다 끝난 일이니 책임질 일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한국은 일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일본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면 즉각 비현실적인 강경론 일색의 반응이 나오고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한국에는 국민적 반일감정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부류, 이 같은 선동에 자극받아 대책없는 대일 강경론에 목소리를 높이는 부류, 이 같은 악순환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분위기에 눌려 모른 척 침묵하는 비겁한 부류가 존재한다. 정치인·학자·언론·관료·시민단체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개인과 집단 대부분은 이 세 가지 부류 중 하나에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 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인 담론이 형성될 수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일 모두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 법리적·현실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소지가 충분한 판결이지만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의 근본적인 사안에 대해 양국 모두 진지하게 고민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기에 가치 있는 판결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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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20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될 때 전 세계 언론은 온통 비핵화 문제에 관심을 쏟았지만, 사실 이번 평양공동선언은 비핵화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공동번영을 남북이 주도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는 것에 더 많은 역사적 의미를 둬야 할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임을 선언하고 실천 방안을 명시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했다. 사실상 ‘남북 간의 종전선언’이다. 특히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이 15만 평양 군중에게 “나와 김 위원장은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고 확약했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70년 분단 역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반도 안보 환경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알리는 자주적 선언이라고 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평양 시민들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평양공동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진짜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낸 회심의 카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에서 확실한 어젠다를 갖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주변정세와 북한의 태도,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확고한 한·미 군사동맹’은 지금까지의 한반도 안보환경에서 절대 변할 수 없는 상수였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 안위를 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이 같은 안보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보 지형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지금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북·미 비핵화 대화가 정체된 상황에서 이 같은 공동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기 ‘굴욕을 감내하면서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긴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미국을 의식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담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내에서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싱가포르 북·미 정상선언 이후 북·미 대화가 뒤처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미국을 기다려주기보다 남북관계를 가속화하여 북·미 비핵화 대화를 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진 것이다.

 

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진전으로 비핵화를 견인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북·미 대화 정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3차 남북정상회담과 미국이 그토록 불편해 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을 강행했다.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로 비핵화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 자신감은 올해 초 대화에 나서기 시작한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도록 견인차 역할을 한 경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또한 북·미 모두 되돌아갈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났다는 판단도 과감한 행보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마이 웨이’를 선언하기에 가장 부담 없는 타이밍은 북·미 비핵화 논의가 확실한 궤도에 오르고 평화체제 논의가 순항하기 시작하는 시점일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 시점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앞으로가 문제다. 남북의 구상이 순항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김 위원장의 표현대로 ‘탄탄대로도 아니고 역풍도 각오’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아직 평양선언을 이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탓이다.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은 남북의 의지 외에 국제적 지지도 필요하다. 미국은 평양선언의 비핵화 방안과 북·미 대화 접점 마련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지만, 평양선언 전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미국은 앞으로도 ‘한·미가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이 남북관계 진전을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히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한국 정부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할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한·미 군사동맹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성격 변화를 해야 하는지, 한반도 평화체제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에 대한 물음에 즉각 답할 수 있는 확실한 원칙을 지금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는지 여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김정은과 트럼프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퇴로가 없는 3자가 벌일 치열한 외교전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가 스러지고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높아지고 있다. 시간은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지만 지금 한반도는 운명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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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북·미 정상 공동선언을 역사적 의미나 상징성을 제외한 ‘북핵 협상’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논의해야 할 의제의 순서를 바꾸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신뢰구축을 통해 북·미 간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 결과물로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진전시키면 이에 상응하는 경제·정치적 조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던 그동안의 ‘선(先) 비핵화’ 논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2008년 12월 6자회담이 중단된 이후 북한이 줄곧 요구해왔던 것이었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합의를 해도 이행이 안된다는 것이 증명됐으니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해보자는 주장이었다. 북한은 2010년 1월11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이 같은 제안을 공식화했다. 당시 북한은 성명에서 “조선반도 비핵화 과정을 다시 궤도 위에 올려세우기 위해서는 조·미 사이의 신뢰를 조성하는 데 선차적인 주목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미 사이에 신뢰를 조성하자면 적대관계의 근원인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부터 체결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지금 주장도 8년 전 이 성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미는 ‘비핵화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어 궤도에 오르고,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해도 비핵화 진행이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면 평화체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싱가포르 합의에서 미국은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앞세워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북한의 입장에서 싱가포르 합의는 외교적 승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독특한 방식’이라고 표현하면서 “훌륭한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한 것은 비핵화보다 신뢰구축과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하기로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싱가포르 합의 이후 진행되는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에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이 같은 태도는 약속 위반이다. 지난달 7일 북한 외무성이 평양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싱가포르 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고 거칠게 쏘아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신뢰구축 조치를 비핵화보다 앞세우기로 한 ‘조·미 수뇌분들의 약속’을 미국이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를 할 때 북한의 요구를 ‘통 크게’ 수용하고 새로운 협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기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협상 방식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간과한 채 합의를 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함으로써 북한이 비난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구축 작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비핵화가 먼저냐 신뢰구축이 먼저냐’의 논쟁이 아니다. 이 같은 논쟁은 현재 한반도 현실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비핵화와 신뢰구축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상호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비핵화 진전이 있어야만 생긴다. 애초부터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시작한 이유도 북한의 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종전선언 문제만 봐도, 신뢰구축과 비핵화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이 신뢰구축을 위한 선차적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이 종전선언을 강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미국의 비핵화 요구도 강해진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된 지금 ‘선 비핵화’를 내세운 협상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북한 핵미사일이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위협으로 떠오른 상태에서 핵문제를 그대로 두고 북·미 간 신뢰를 조성하겠다는 것도 비현실적 발상이다. 결국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를 낮은 단계부터 병행추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해법이 없다. 국제정세와 동북아시아 역학 구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응축된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매우 길고 험난한 여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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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수관이 터져 오물이 온 동네로 쏟아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먼저 오물이 퍼지지 않게 펜스를 쳐야 한다. 그리고 터진 곳을 막고 펜스 안에 고인 오물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확실히 막았는지 점검하고 재발방지 조치까지 마쳐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북핵 6자회담이 한창이던 10여년 전 미국의 북핵담당 고위 관료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비핵화’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비핵화는 핵물질·기술 이전 차단-동결-핵무기·핵물질·장비 폐기-검증-핵 재무장 방지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완전한’ ‘비가역적인’ 등의 수식어를 앞에 주렁주렁 붙이는 것은 사족일 뿐이다.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라는 용어를 ‘시간 부족으로’ 북·미 합의문에 명시하지 못한 미국은 지금 PVID, FFVD 등으로 표현을 바꿔가며 북한의 동의를 받아내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어떤 용어를 쓰느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같은 개념인지 여부가 핵심이다.

 

북·미는 정상회담에서 “4·27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판문점선언에도 남과 북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의미는 다르다. 한국 정부가 번역한 판문점선언 영문본은 ‘핵 없는 한반도(nuclear-free Korean Peninsula)’라고 되어 있지만 북한 외무성은 ‘한반도 비핵지대화(turning the Korean peninsula into a nuclear-free zone)’라고 번역했다.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나 ‘핵우산’까지 염두에 둔 표현이다. 미국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판문점선언을 원용했다.

 

비핵화 용어 논란은 미국의 허술한 준비를 드러낸 단편이다. 싱가포르 북·미 합의가 불안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방향이 틀렸거나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협상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와 미국의 협상력 부족 등이 드러나고 이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비핵화를 이끌어낼 역량이 있는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약탈적 거래’에 능한 트럼프 대통령이 이처럼 허술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북핵 문제를 지나치게 정략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한 것은 준비가 완료됐기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정치 일정에 맞춘 결정이었다. 북·미 회담 성과가 급한 쪽은 오히려 트럼프였다. 실질적 내용보다는 정치적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외형에 집착했다. 상대에 대한 분석도, 전문 인력도 갖추지 못한 채 날짜를 먼저 정해놓고 협상을 시작했으니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합의문에 서명하자 북한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음이 더욱 명확해졌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재촉하고 있지만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양국 수뇌분들께서 합의한 대로’ 비핵화보다 신뢰구축 조치가 먼저라고 맞서고 있다. 실제로 북·미 정상이 서명한 합의문은 신뢰를 구축해 새로운 북·미관계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비핵화에 이르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에 북한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다. 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은 이미 북한과 밀착하고 있고 미·중은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트럼프는 정상 간 합의를 통한 톱다운 방식의 접근으로 돌파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논하는 각론에 들어가면 상황이 다르다. 돌파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최고 권력자들의 ‘통 큰 합의’로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절대권력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쯤 트럼프는 전임자들이 왜 북핵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싱가포르 북·미 합의가 유지되려면 트럼프가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북한도 선(先)신뢰구축만을 주장하며 비핵화 논의를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비핵화 진전을 통해 신뢰를 만들어가는 조치를 병행해 미국 내 여론의 반대로 북·미 합의가 좌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북·미 모두 합의를 유지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타협점을 찾기 위한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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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남북 정상의 합의문에 중국과 미국 등 제3국이 등장하고 이들의 역할과 시한까지 명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중과 사전에 협의된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남북 모두 매우 빨리 일을 진행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정전체제가 끝났음을 확인하는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으로 가는 로드맵을 상정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전에 관련국 정상들이 모여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고 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절차다.

 

문재인 정부가 법적 구속력도 없고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 종전선언을 그것도 비핵화 협상이 본격화하기 전인 ‘입구’에서 하려는 이유는 이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진작시키고 미국을 이 정치적 약속에 묶어두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비록 구속력은 없지만 정상들의 공개적 약속이어서 그 무게감은 결코 작지 않고 북·미 모두 이탈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제외한 미 행정부의 참모들은 모두 조기 종전선언에 부정적이다. 현실은 여전히 정전체제에 머물고 있는데 각국 정상이 이미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커다란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태도변화가 미국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군사적 행동 가능성에 대한 우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종전선언은 협상 과정에서 대북 군사적 옵션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종전선언이 비핵화 과정에 극적 효과를 발휘하려면 ‘입구’가 아닌 ‘출구 직전’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비핵화·관계정상화·평화협정 발효를 마지막 순간에 동시에 한다고 해도 기술적으로는 일정한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으로서는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핵무기를 버리는 순간이므로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단계다. 이때 각국 정상이 종전선언이라는 정치적 약속으로 ‘마지막 고개’를 넘을 수 있는 탄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종전선언에 누가 참여하느냐도 문제다. 판문점선언에서는 평화협정 논의 과정에서 가급적 중국은 마지막 순간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속내가 드러난다. 중국이 개입하면 일을 빠르게 진척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평화협정 논의에서 중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강하게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 매우 부담스럽다.

 

하지만 정상 간 합의 문서에 ‘3자 또는 4자’라는 표현을 적시한 것은 문제다. 이에 자극받은 중국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8일 다롄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유관 각국과 함께 역내 영구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중국이 1994년 판문점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당사국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지만 이 같은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중국은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의해 쫓겨났다. 한·중 수교를 했으니 군사정전위에 남아 있으면 안된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로도 중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 지위를 포기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법적 지위 여부와 무관하게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적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 것도 중요하고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한 정치인들이 만들어가는 일인 만큼 관련국 모두 국내 정치적 계산이 없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정치적 효과는 일을 추동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극도로 세밀하고 신중하게 다뤄나가야 한다. 조급함과 정치적 욕심을 조금 자제하고 차분하게 한발씩 전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빠른 진전이 아니라 다시 뒷걸음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견고한 진전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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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외교 이벤트가 열린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첫 단추를 잘 끼우고 이를 토대로 북·미 정상회담에서 의미 있는 합의가 나온다면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와 평화구축, 남북 평화공존의 출발이 될 것이다. 실패하면 전쟁의 위기가 이전보다 짙게 드리워질 수 있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지금의 갑작스러운 정세변화의 원동력이 북한의 달라진 태도였던 것처럼, 앞으로 전개될 일들의 성패 역시 북한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북한의 태도 변화가 제재를 피하고 핵무기를 실전배치하기 위한 시간벌기라고 의심하는 시각도 있고 이번에야말로 북한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6일 정부의 대북 특별사절단에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핵포기와 ‘체제안전보장’을 위한 조치를 맞바꾸자는 제안이다. 북한의 진정성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단서는 앞으로 벌어질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체제안전보장을 위한 조치로 한·미에 무엇을 요구하는지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체제안전보장 조치에 대해 명시적이고 일관되게 밝힌 적이 없다. 우리에게 낯익은 ‘대북 적대시정책 철폐’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북한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체제안전보장은 평화협정 체결이나 불가침 선언일 수도 있고 북·미 관계 정상화, 제재 해제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미국의 핵우산 철폐,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나 완전 철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체제안전 보장을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는 당사자인 북한도 잘 모른다. 북핵 협상에서 일괄타결식 아이디어가 나온 것도 북한에 딱히 뭐가 필요한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꾸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한·미의 고민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의 방안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라면, 북한의 고민은 체제안전을 어떻게 보장받을 것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북한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요구할 것인지가 대화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이른바 ‘합리적 안보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를 한다면 진지한 협상의 기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핵우산 철폐나 주한미군 철수, 한·미 동맹 해체 등을 들고 나올 경우 한·미는 북한이 진정으로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체제안전을 위한 조치는 외부에서 제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한 국가의 정치체제 붕괴는 주로 정통성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 외부 요인보다 내부 요인이 더 크다. 흔히 북한과 비교되는 우크라이나 사태나 리비아 카다피 정권 붕괴도 본질은 핵무기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 구소련이 남겨놓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독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핵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정권이 붕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은 형용모순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민중봉기로 붕괴하자 러시아가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무력개입했으며 우크라이나가 독립 당시 미·러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영토와 안전을 보장받은 ‘부다페스트 협약’이 결국 휴지조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북한에 주는 시사점은 독재정권이 민중봉기로 붕괴했다는 점, 확실한 담보가 없는 다자안보조약은 무용지물이므로 견고한 장치의 동북아 다자안보체제가 필요하다는 점 등이지, 핵포기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것도 나토와 미국의 공습 이전에 ‘아랍의 봄’에 영향을 받은 민중혁명이 직접 원인이다. 설사 우크라이나와 리비아가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내부에서 촉발된 정권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미가 제공할 수 있는 안전보장조치는 북한 체제안전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체제유지에 필요한 외부환경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지금의 북한 통치체제가 지속가능할 리 없다. 오히려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려면 미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북한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면 비핵화와 그에 따른 주변 강대국의 안전보장 외에 비현실적이고 기형적인 통치체제와 인권 문제를 점진적으로 정상화해 나가는 내부 개혁조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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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한반도에는 봄기운이 감돈다. 곧 전쟁이 나더라도 이상할 것 같지 않던 엄혹한 상황에서 노심초사하던 것이 불과 한 달여 전 일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항구적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길고 지난한 항해가 곧 시작된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장정이다. 가는 도중 어떤 암초와 풍랑을 만날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과연 끝까지 갈 수는 있는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생각할수록 아득한 여정이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위기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천행이다.

 

온갖 제재와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던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꿈으로써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받아들이면서 반대급부로 제시한 핵심 요구 사항은 ‘체제안전 보장’이다.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 안보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북한이 수십년간 국제사회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핵개발에 매달려온 최종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 셈이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을 맞바꾼다는 간단한 명제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비핵화는 북한의 핵폐기는 물론 이를 검증하는 작업이 수반된다. 또 핵폐기 이후 다시 핵무장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동북아시아 안보환경을 다자안보체제로 바꿔주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은 북·미 적대관계 종식과 각종 대북 제재의 해제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모든 스텝 하나하나가 세계사에서 유사한 사례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희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핵무기 완성 단계에서 스스로 핵을 포기한 국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세계 21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했다가 ‘일시 중단’ 상태로 60년 넘도록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은 전인미답의 길이다. 또한 미국이 공식적으로 교전 당사국이며 불법 핵무장국이자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낙인찍힌 북한과 정식 수교를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이 모든 것들을 병행 추진해 보조를 맞춰 진전시키다가 최종 단계에 이르러 한꺼번에 동시 발효시켜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이 대목에서 당사국들이 과연 이 같은 험난한 여정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핵 문제는 냉전체제와 동북아시아의 미묘한 역학관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모순 등이 모두 집약돼 만들어진 산물이다. 1990년대 초반 북핵 위기가 처음 터졌을 때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이 선행되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국들은 이 같은 본질을 회피하고 뒤로 미루면서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거나, 북한의 핵물질과 기폭장치만 외과수술하듯 도려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60년 이상 쌓여진 국제정치의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고 만시지탄일 수도 있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보수와 진보정권을 거치는 동안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고 국내정치의 도구로 활용돼왔다. 평화체제에 대한 준비가 돼 있을 리 없다. 지금의 상황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미 접촉 성사’에 전력투구하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파격적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하는 ‘더 큰 파격’으로 대응했지만, 본디 행동을 먼저하고 계획은 나중에 세우는 그의 성향상 면밀한 대비가 돼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업적 과시에 집착하는 그가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의 열매를 자신의 임기 내에 따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경우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양국 최고지도자들은 원칙적 선언 수준의 합의를 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 로드맵을 만들기 위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험난한 이행 협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국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국내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정치적 선언을 통해 입구에 들어선 이후 출구를 찾지 못해 미로를 헤매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출항의 뱃고동이 울리기 전에 모든 준비가 완료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항해를 마치겠다는 각오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만들어진 이번 대화 국면은 아마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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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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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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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결정 이후 곧바로 남북 고위급회담에 나와 선수단·응원단·예술단 파견 문제를 일사천리로 결정해 나가고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대화제의에 꿈쩍도 않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런 추세라면 평창 올림픽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한반도 상황은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평화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안도 뒤에는 한층 더 팽팽해진 긴장감이 잠복해 있다.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본게임’이 올림픽 이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만들어진 남과 북의 가느다란 대화통로가 한반도 주변에 터질 듯이 가득 찬 긴장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출구로 이어질 수 있을지 여부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북한은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곧 갖게 된다. 길어야 수개월밖에 시간이 없다. 미국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외교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군사적 수단으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내에 압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공통 인식이다. 지금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 버락 오바마라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국은 눈앞에 닥친 국가안보 위협을 ‘전략적으로 인내하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미국과 북한의 대화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북·미는 그동안 매우 거칠게 대결국면을 유지해온 탓에 쉽게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은 이처럼 파국의 순간을 앞에 두고 열린 마지막 기회의 창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이 한반도 상황의 결정적 기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마련된 남북대화’라는 표현을 썼다. 또 “바람 앞에 촛불을 지키듯이 대화를 지키고 키우는 데 힘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는 대목에선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번 남북대화가 북·미 접촉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한반도가 매우 위험해진다는 것을 미국과 북한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남북대화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군사적 행동을 일단 유보하고 북한의 의중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고 싶다는 의미다.

 

북한 역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의 군사적 행동 가능성과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제재 강화도 큰 부담이다. 특히 미·중이 북한의 급변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북한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김정은 정권일 필요는 없다는 인식을 중국이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는 이 같은 상황에서 결정된 대화의 신호다.

 

한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대화를 안전하게 북·미 접촉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특히 북·미가 한 번 접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올림픽과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접근법이 전략적이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올림픽에 참석한 북한 고위급 인사와 의미 있는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 새로운 남북관계 틀을 구축한다는 ‘평창 구상’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구상을 실행할 적기가 아니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꾸준히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이산가족 상봉, 민간교류를 거쳐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평창 구상’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하고 갑자기 북한이 올림픽에 뛰어들어온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그랜드디자인’은 불가능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틀을 위한 ‘홈런성 타구’가 아니라 북·미 대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해낼 ‘진루타 1개’다.

 

남북관계에서도 습관화된 과거의 패턴을 벗어나야 한다. 북핵 문제가 심화되고 남북 적대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국민들의 대북인식은 극도로 악화됐다. 적대적인 국민정서가 안타깝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현실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는 이미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 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하고 북핵 문제와도 연계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다’ 식의 감성적 접근으로는 풀 수 없다. 비즈니스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북한·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비즈니스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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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과 중국은 북한 체제 붕괴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할 때가 됐다. 그런 대화가 이뤄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이 이 같은 현실이 도래했음을 인정해야 하고, 미·중이 이런 논의를 한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몰라야 한다.”

 

미 행정부 고위 관리를 지낸 아시아 전문가가 2013년 초 사석에서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했던 말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갑작스러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3대 권력세습이 이뤄져 정권의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은 강경 보수 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렸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피벗(회귀)’을 내세우며 집권 2기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북한 체제가 정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과 ‘북한 붕괴’를 상정한 논의를 회피했다. 미국도 동맹국이자 북한 문제 당사국인 한국이 미·중 간의 이 같은 논의를 지켜보기만 하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했다.

 

4년 반이 지난 현재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2일 애틀랜틱카운슬 주최 토론회에서 중국 고위 관계자들과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고 매우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중국과 (북한의) 핵무기 확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이 이미 준비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공개하고 “(미·중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진입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할 것을 중국에 약속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이처럼 민감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중국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급변사태 논의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 역시 동맹국을 배려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북핵 문제를 급박한 안보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이미 한·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북한과 중국 역시 더 이상 북핵 문제에 대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급변 사태 가능성은 1990년대부터 북한 정권이 취약성을 보일 때마다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기반이 공고해지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할 정도로 북한 정권이 안정돼 있는 지금 미·중이 함께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대비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 인위적으로 그와 같은 사태를 만들어 갈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미·중이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핵으로 무장한 북한 정권의 붕괴는 한국에는 혼돈 그 자체다. 더구나 지금 상태라면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미·중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중은 군사작전을 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자세한 행동규범을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핵무기 관련 문제에 관여할 수 없으며 전시작전통제권도 없다. 난민·국경·식량 등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한꺼번에 떠안아야 한다.

 

그동안 북한의 급변사태와 정권 붕괴는 곧 ‘한반도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 문제가 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된다면 상황은 다르다. 틸러슨 장관 말대로 북한 핵무기가 확보된 이후 주한미군이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하고 북한에 친중정권이 수립되면 중국은 여전히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를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은 더 이상 안보를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미·중은 실리를 얻고 타협할 수 있지만 한국은 북한 급변사태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평화가 얻어진다 해도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가 아니라 ‘분단 영구화를 위한 평화’가 될 수밖에 없다.

 

틸러슨 장관 발언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미래에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로 인해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북핵 문제는 기존의 판을 모두 걷어치우고 새로 깔아야 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패턴화된 대응, 진영논리에 기초한 접근법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북핵문제가 여기에 이른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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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난달 29일 화성-15형 미사일을 발사하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은 북핵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2017년 11월29일 이전과 이후’로 구별될 만큼 큰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입증한 것은 아니지만, 북핵 문제를 다루는 국제적 메커니즘은 이 같은 북한의 ‘정치적 선언’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국가 전략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핵·경제 병진노선’의 한 축인 핵무력이 완성됐다고 선언한 북한의 다음 목표는 나머지 한 축인 ‘경제강국 건설’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따라서 북한은 제재 해제에 매달릴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핵을 다른 곳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들에게 가해진 제재가 부당하다는 점을 부각시킬 것이다. 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비핵화 요구의 강도를 낮추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제재가 느슨해진다는 것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보유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말하는 ‘경제강국 건설’ ‘병진노선 완성’ ‘제재 해제’ ‘핵보유국 지위 인정’ 등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동의어다.

 

지금 북핵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북한이 핵기폭 장치를 개발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미국에게 북핵 문제는 동북아 지역 문제였다. 지역 동맹국의 안보문제이며 국제 비확산체제의 사안일 뿐이었다. 하지만 북한 미사일이 미국을 사정권에 넣게 되면서 북핵은 지역 문제가 아닌 ‘미국의 안보 문제’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역대 어느 행정부보다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이다. 이제 미국은 북핵 문제의 ‘운전석’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둔 현 단계에서 ‘동결’을 미끼로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한·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추가 제재 등 강력한 대응을 말하고 있지만, 제재를 강화하고 나면 결국 협상론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협상이 열린다면 이는 북한과 미국이 주도하게 되고 한·미 관계는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는 안보 문제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북한이 미국을 직접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핵능력 동결, 핵 사용 및 확산 금지 등에 합의하고 관계개선을 모색하게 되면 북한에는 최상이며 한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북핵 문제는 어느덧 한·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까지 흘러왔다. 미국과의 철저하고 세밀한 협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협상의 궁극적 목표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에 대한 미국의 확실한 동의를 받아야 한다. 또한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한 절대 제재는 풀릴 수 없고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으며 핵보유보다 비핵화의 인센티브가 더 크다는 것을 북한이 인식하도록 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제는 한국이 이 문제를 주도하기 어렵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대북·북핵 전략이 필요하다. 달라진 북핵 논의 구조 속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실종되거나 국익에 반하는 쪽으로 흐름이 전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실력은 이제부터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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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은 완전히 다르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는 공통점이 있다. 외교 관료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 관료들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 대통령은 반대로 한국 외교관들은 모두 친미 성향의 수구적 성향을 갖고 있는 부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믿는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파리기후변화협약 등 대외 협정에서 탈퇴하고 이란과의 핵문제 합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등 미국의 중요한 외교적 성과를 부정했다. 이 같은 결정은 전문 외교관료와 국무부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한반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잘 알면서도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을 담당하는 동아·태 차관보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새로운 주한 미국대사를 위한 임명 절차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8개월이 지나도록 국무부는 주요 보직이 채워지지 않아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방치되고 있으며 외교 관료들과의 반목이 커지면서 국무부는 사실상 기능부전(機能不全) 상태에 빠져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에서도 외교관과 외교부에 대한 불신이 도드라진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겪었던 ‘자주파와 동맹파’ 갈등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외교부와 외교관들에 대한 매우 부정적 인식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 외교안보수석 등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송민순·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등 전문 외교관에 대한 배신감도 작용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지난 대선에서 한때 문 대통령에게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송 전 장관도 의도했든 안 했든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후보를 곤경에 빠뜨렸다. 또 윤병세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외교장관으로 발탁돼 마지막까지 박 전 대통령과 한 배를 탔다. 지금 여당과 문 대통령 입장에서 본다면 외교관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외교부 ‘적폐청산’에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외교관 배제’로 모아지고 있는 것은 문제다. 미·중·일·러 등 이른바 ‘주변 4강국’ 주재 대사를 모두 비외교관 출신인 학자·정치인으로 채운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조윤제 주미대사 내정자가 “한·미 정상 간 ‘정직한 메신저’가 되겠다”는 임명 소감을 밝힌 대목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이전 존재했던 외교관 출신 대사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는 또 외교관 출신이 아닌 다른 분야 인사를 대사로 발탁하는 ‘특임 공관장’을 전체 30%까지 확대하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직업 외교관이 아닌 ‘믿을 만한’ 민간인 적임자를 찾느라 정권 출범 6개월이 넘도록 공관장 인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여파로 공관장 인사와 맞물려 있는 국장급 인사도 기약 없이 늦어져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됐던 간부들은 몸과 마음 모두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그야말로 ‘영혼 없이’ 근무하는 중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불신은 외교부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국민들 기대를 배반한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논란, 북한 핵·미사일 고도화 방치 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외교부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적폐’는 근본적으로 정권의 잘못일 뿐 정권의 명령을 받아 수행한 일개 부처에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은 아니다. 특히 전문성과 경험을 키워온 직업 외교관을 배제하는 것이 능사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지금과 같은 안보위기 상황에서 경제학 교수를 주미 대사로 보내고, 대일 외교는 일본 문제에 생소한 캠프 원로에게 맡기고, 주재국 상황보다 국내 정치에 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정치인을 중국·러시아 대사로 임명하는 식으로 외교가 풀릴 리 없다.

 

공무원(civil servant)은 말 그대로 국민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고 정책이 바뀌면 새로운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이다.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정해주고 임무를 부여하면 관료는 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관료제다. 외교관 전체를 적폐 세력으로 간주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만 골라서 쓰겠다는 태도는 관료제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교부 조직을 개방해 외부 인사 영입을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외부 인사의 능력을 평가하고 공정하게 발탁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머릿수만 늘리는 것은 ‘낙하산 논란’을 불러올 뿐이다.

 

한국을 둘러싼 대외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외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외교부의 기능을 외면한 채 자기 사람만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는 외교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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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북핵·한반도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은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증가에 군사적 조치로 맞서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했던 가치나 대선후보 시절 공약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6차 핵실험 이후 정부는 대통령이 공언했던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결정했고 탄두중량을 무제한으로 늘렸다. 또 한국의 방위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핵잠수함 도입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정부 일각에서 제기되는 전술핵 재배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일본 지도자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으로 대북 제재 강화를 말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7년9월4일 (출처: 경향신문DB)

 

이에 대한 청와대의 설명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등 ‘안보상황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보상황이 엄중해져서 군사적 조치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일리가 있지만 위험하다. 그 말대로라면 북한이 지속적으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전술핵 재배치는 물론 핵무장까지 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북한이 이끄는 대로 깊은 군비경쟁의 늪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한국은 이 악순환에서 빨리 빠져나와 다른 국면으로 옮기는 것이 유리하다. 정부의 노력도 그런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 마땅하다.

 

박근혜 정부가 ‘알박기’ 해놓은 사드를 철회할 수 없었다면 다른 것을 얻어냈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사드 배치의 대가로 받은 것은 미사일 탄두중량 해제였다. 미사일 족쇄를 푸는 것은 자주국방 차원에서 한국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탄두중량을 늘리는 것이 지금 한국의 안보상황에서 그토록 시급한 일이었는가. 사드를 배치하는 대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대담한 대북 접근법을 시도해보자고 미국을 설득하고 북핵 국면을 전환해 중국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왜 하지 못했는가.

 

송영무 국방장관은 지난달 30일 워싱턴에서 미국 정부 고위관계자들에게 “전술핵 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한국 내에 있다”고 전하면서 핵잠수함 도입 필요성을 말했다. 전술핵 배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문재인 정부의 국방장관이 이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한국 내에서 일고 있는 전술핵 배치 주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핵잠수함 도입에 동의해달라는 것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군비증강에 매달리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해서 살 수 없으니 독자방위 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사드를 배치하고 탄두중량을 늘리고 핵잠수함을 도입하는 식으로 군비를 늘리는 것이 한반도 위기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북한이 핵을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 남한에 무기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다. 자주국방도 필요하지만 동북아 군비경쟁이 촉발되고 그 피해를 한국이 고스란히 받는 상황도 피해야 한다. 그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한 주간지 기자가 페이스북에서 ‘문 대통령은 지금 북한과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기고 있는 것’이라며 옹호한 적이 있다.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글을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통일·외교·안보 분야 행보에 대한 가장 정확한 분석”이라고 소개했다.

나도 문 대통령이 치밀한 계산속에 계획된 행보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동안 보여준 모습은 그런 믿음을 주기에는 너무 허술했다. 사드 배치 문제로 오락가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할 때는 말 바꾸기도 했다. 지난 6월 문정인 특보의 이른바 ‘워싱턴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문 대통령은 “나는 선거 과정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축소와 조정을 언급한 적이 없다”며 명백한 사실을 부인했다.

 

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것이 한국 대법원 판례이며 정부도 그런 입장에서 과거사 문제에 임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킨 뒤 일본의 거듭된 해명 요구에 “이 문제는 한·일 합의에 의해 해결된 것”이라면서 자신의 말을 정정한 적도 있다. 섣부른 ‘레드라인’ 발언으로 혼란을 자초하는가 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대북 원유수출 금지를 공개 요청했다가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인권변호사 출신 한국 대통령이 독재자 푸틴에게 “그런 조치는 북한 주민을 다치게 한다”는 훈계를 듣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문재인 정부가 최소한 외교안보 분야에서만큼은 철저히 준비된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상황은 박근혜 정부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당분간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외교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됐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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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로 상대의 핵무기를 무력화시키고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북한의 6차 핵실험 감행 이후 북한의 위협을 상쇄시키기 위해 우리도 핵무장을 하거나 미국의 전술핵을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도처에서 고개를 든다.

 

이 같은 주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 근거는 ‘공포의 핵균형’이다. 상대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서로 가짐으로써 심리적으로 상대의 선제공격을 제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북한이 핵무장 국가가 됐으니 우리도 핵으로 무장해 심리적 공포상태의 균형을 이뤄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3일 1면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현지지도했다는 기사와 사진을 게재했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탄두로 장착할 더 높은 단계의 수소폭탄을 개발했다고 이날 보도에서 주장했다. 연합뉴스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은 그동안 ‘동반 핵무장’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초간편 해법을 놔두고 20년 동안 헛수고를 한 셈이다. 또한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아주 쉽다. 모든 나라가 핵무기를 하나씩 갖고 서로를 견제하면 세계 평화가 올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포의 균형론’은 개념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론이며 지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한 비현실적 해법이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전쟁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 핵보유국도 전쟁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류는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서기도 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은 핵무기가 없는 아르헨티나가 핵보유국인 영국을 상대로 일으킨 경우다. 핵을 갖고 있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이론적으로나마 공포의 균형이 성립하려면 상대도 매우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서른을 갓 넘긴 예측불가능한 지도자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고 국제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와 이성적으로 교감하면서 균형을 이룰 자신이 있는가. 동반 핵무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똑같은 수준의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비핵화를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며 분단을 고착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고도 핵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핵전쟁은 면밀한 계산에 의해 벌어지지 않는다. 오판·우발적 충돌·사고 등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핵무기가 늘어날수록, 핵보유국이 증가할수록, 핵통제 체제가 느슨해질수록 핵전쟁 확률은 높아진다. 남북 동반 핵무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멸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핵무장 주장은 날로 고도화되는 북한 핵프로그램에 대한 무력감의 다른 표현일 뿐 북핵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북핵 문제의 엄중함을 진실로 인식하고 있다면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주장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한번 더 숙고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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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문재인 정부의 첫 한·미 정상회담 이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 중 하나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다. 한국에 사활적 문제인 북핵·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한국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 확보’를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로 꼽는 데 별로 이견이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주도적 역할’을 한국 외교의 금과옥조이며 최대 가치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만연하는 상황은 왠지 불편하다.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실제 내용은 빈약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남들이 다 잘했다고 하는 것을 한번 비틀어 보고 싶은 삐딱한 신문쟁이 근성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북핵·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내용 면에서는 손해를 본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6일 오후(현지시간)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주함부르크 미국총영사관 에서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일 3국 정상만찬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예나 지금이나 국내에서 가장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통미봉남(通美封南)’이다. 북한이 한국을 상대하지 않고 미국과 직거래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때는 합의문에 한국의 요구 사항인 ‘남북대화를 재개한다’는 문구를 포함시키는 문제를 놓고 북·미가 충돌해 다 된 협상이 거의 결렬 직전까지 갔다.

 

북핵 문제 해결 바이블로 불리는 9·19 공동성명에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한·미·중·일·러 등이 북한에 에너지 지원을 한다는 내용 뒤에 따라붙은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200만킬로와트 전력 공급에 관한 2005년 7월12일자 제안을 재확인하였다”는 대목이다. 당시 정부가 교착상태에 빠진 6자회담을 재가동시키기 위해 북한에 제시한 이른바 ‘중대제안’에 대한 언급이다. 이 제안은 북한이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어서 협상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9·19 공동성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과시하기 위해 자칫 에너지 지원 덤터기를 쓸 수도 있는 위험한 내용을 ‘재확인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삽입시켰다. 이 문구를 넣기 위해 쏟아부은 외교적 자산과 문안 협상에서 ‘트레이드오프’ 등을 감안하면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알 수 있다.

 

북·미가 뭔가 접촉을 가질 기미가 보이면 한국이 소외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국내에서 어김없이 고개를 든다.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이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통해 탐색적 대화를 시작하려 하자 정부는 남북대화가 먼저 선행되지 않으면 북·미 접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억지춘향식 남북대화를 형식적으로 가진 뒤에야 북·미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발목을 잡지 않고 몇 개월만 빨리 북·미 접촉이 시작됐더라면 2012년 ‘2·29 합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이전에 나왔을 것이고 북핵 문제 양상도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통미봉남은 최근들어 ‘코리아 패싱’이라는 약간 변형된 형태로 많이 유통되고 있지만, 한국이 북한 문제 논의에서 어떤 식으로든 소외되거나 판을 주도하지 못하면 큰일난다는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문제에 주인의식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은 백번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이 판을 좌지우지하면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국은 그만 한 외교적 역량이 없다. 특히 한반도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변하면서 한국 입지는 더 좁아졌다. 미·중·러 등은 한반도 문제를 서로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한반도 사안은 강대국 패권 전략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란 정확히 말하면 강대국의 논의 구조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실종되지 않고 국익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다루는 다자구도의 속성상 어느 한 나라가 주도권을 잡으려 하면 그 논의는 반드시 깨진다.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가 다자외교에서는 진정한 승자다. 한국처럼 강대국에 둘러싸인 외교 현실 속에서는 이 같은 태도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남북관계에서도 북한에 끌려다니면 안되겠지만 우리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 북한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한국의 목표는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문제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평화를 정착시키고 비핵화 논의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한반도 문제가 진행될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를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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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의 ‘워싱턴 발언’은 새삼스럽지 않다. 발언 내용은 상식적이고 처음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곧 국가 안보가 무너질 것처럼 과도한 반발이 나오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야당과 보수층의 공격이 일제히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북한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 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교환해 북핵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문 교수의 발언은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기의 심각성은 북한이 얼마나 진전된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지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핵·미사일 실험을 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것이 진짜 위기이며 안보 위협이다.

 

핵·미사일 제거는 나중 문제고, 일단 더 이상 실험을 못하게 함으로써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역주행하는 열차를 제 방향으로 되돌리려면 우선 열차를 멈춰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핵·미사일 활동 동결’과 이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제만 확보될 수 있다면 군사훈련 규모를 축소하는 것보다 더 큰 ‘상응조치’를 제공하더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핵화든 평화체제든 시간이 걸리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문 교수 발언은 그가 평소 강연·언론기고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4월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이 말을 했다. 지난달에는 미국의 고위 관계자 입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는 대화할 수 없다”는 발언이 나왔다. 문 교수 발언은 이처럼 한·미 양측에서 수차례 제시됐던 내용을 한번 더 반복한 것뿐이며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보수층의 느닷없는 비난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전형적인 정치공세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안보를 위협하는 친북 행위로 규정하고 미국이 이에 분노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공갈을 퍼뜨리는 것은 이성을 잃은 행태다.

 

보수인사와 야당, 보수언론까지 합세한 대정부 공세는 뿌리 깊은 친미 사대주의와 색깔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의 대미관·안보관을 ‘약한 고리’로 본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를 반미·친북으로 몰아세워 한·미 갈등을 부각시키고 정권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문 교수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과 같다. 하지만 청와대는 보수층의 공격에 정면 대응을 피한 채 이번 사태가 한·미 정상회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문 교수 발언은 개인적 견해’라며 거리를 두고 문 교수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는 해명까지 곁들였다. 지난 세월 문 대통령에게 씌워졌던 지긋지긋한 ‘종북·좌파·반미 프레임’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당한 권력이 야당과 미국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청와대는 당초 염두에 둔 인물을 국가안보실장에 기용하지 못했다. 그 자리가 돌고돌아 결국 외교안보 경험이 많지 않은 정의용 현 실장에게 간 것도 미국을 의식한 결과다. 하지만 ‘사드 보고 누락’ 사태와 이번 문 교수 발언 파동에서 청와대 안보실이 보여준 미숙한 대응은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조기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해 외교부담을 자초한 것도 대미외교 공백을 서둘러 벌충하려는 조급함에서 빚어진 실책이다.

 

문 교수를 포함해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를 정하고 공약을 만든 인사들은 지금 모두 물러났다. 외교부 장관도 이 분야에 경험이 없는 인물이다. 정부가 ‘개문발차’한 탓에 외교부와 주미대사관 등 관련 부처·기관에는 여전히 전 정부 관료들이 고위직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정체성을 찾으려면 전열 재정비가 시급하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정치세력과 손잡지 않은 촛불혁명의 산물이며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가진 강력한 정부다. 야당이든 미국이든 정공법으로 상대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한·미동맹은 국가 간 동맹이지 정권 동맹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달라졌다고 해서 흔들릴 체제가 아니다. 동맹이라고 해도 정책 우선순위와 안보 환경이 다른 개별 국가 간 관계에서 이견이 없을 수는 없다. ‘빛 한줄기 샐 틈 없는’ 동맹관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건강한 동맹관계는 한 치의 이견도 없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견이 생겼을 때 신속히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한·미 간 견해는 언제나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국정과 대외정책을 펴 나가기를 바란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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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남북 군비통제를 통한 전쟁 위협 제거. 남북 경제통합을 기초로 한 점진적 통일 지향. 실용적인 미·중·일·러 등 주변 4강 외교. 국방개혁 및 국방 문민화.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대선후보 문재인’이 내세웠던 외교안보 분야 주요 공약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환경은 강대국이나 다른 평범한 국가와 다르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외부 변화에 적응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 공약들은 국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자 목표다. 국민들이 선거에서 문 후보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 인선을 발표하던 날 이 공약들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임명된 사람들은 과연 문재인 정부의 공약을 추진할 적임자인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에 대한 이론 구축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이다. 정부와 학계 모두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문 교수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은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연합뉴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장에 정의용 전 주제네바 대사를 임명했다. 여권의 ‘원조 외교관 출신’ 인사로 오랫동안 문 대통령과 여당을 위해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서 예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외교부 장관에는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발탁했다. 유엔 사무총장 3대에 걸쳐 중용된 다자외교의 실력자다. 하지만 이 인선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한 전략을 발견할 수 없다.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 내정자

 

강 내정자는 외교부의 유리천장을 깬 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인 데다 탁월한 실력까지 갖췄다. 더구나 그는 비(非)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 만연한 정치권 줄서기와 파벌, 순혈주의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대중들은 그를 외교장관에 임명한 것에 열광하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번 외교안보라인 인선 전체를 ‘잘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강 내정자는 지금 한국 외교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 상황과는 상관 없는 업무를 해온 인물이다. 유엔 업무는 한 나라의 생존전략을 다루는 개별 국가의 외교와 다르다. 그는 한국에 사활적 문제인 북핵과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중·일·러 등 주요국과의 양자 업무 등을 해본 적이 없다. 10년 이상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환경에도 익숙지 않다.

 

강 내정자는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쓰는 것만이 인사의 전부는 아니다. 얼마나 적시(適時)에 기용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핵·미사일 능력을 극도로 키우고 있는 북한과는 아무런 긴장관리 장치가 없고, 중국·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으며, 외교안보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에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언사를 일삼는 예측불허의 대통령이 앉아 있는 엄혹한 시기는 그를 외교장관으로 기용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다.

 

청와대는 강 내정자 인선 배경으로 다자외교에 익숙하고 국제인권분야 전문가라는 점을 들었다. 역시 납득할 수 없다. 다자외교를 잘못해서 한국 외교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이 지적받는 이유는 선거 개입·언론 장악·간첩 조작·노동 탄압 같은 정부의 잘못 때문이지 외교장관이 인권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강 내정자 인선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 측은 “외교는 장관(만)이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컨트롤타워인 청와대가 리드하고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청와대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다. 정의용 신임 안보실장은 통상교섭조정관, 국제노동기구(ILO) 의장 등을 지낸 통상 전문가다. 그의 경력은 외교·통일·국방·정보 분야를 아우르며 외교안보 전략을 총괄하는 국가안보실장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국가안보실 기능을 강화한 것은통일·외교·국방 정책을 통합관리하면서 국가전략을 지휘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십수년이 지난 원로 통상관료 출신에게 돌아갔다. 청와대는 이 같은 약점을 의식한 듯 2명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특보를 신설했지만 문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인 문정인 특보는 비상임이라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홍석현 특보는 문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가 아니다. 안보실 차장 인사가 남아 있지만 이들은 실무자이지 국가전략을 짜는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누가 청와대에서 외교부를 리드하고 보완한다는 말인가.

 

다시 ‘문재인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하나가 모두 사력을 다한다는 각오로 매달려도 될까 말까한 중대한 사안들이며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고차방정식이다. 매 사안마다 넓고 높게 바라보고, 세밀하게 계산하고, 거칠게 싸우고, 끈질기게 설득해야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교안보라인은 목표 의식을 갖고 난제를 해결하려는 인선이 아니라 환영과 찬사를 얻기 위해 안배와 외형 관리에 치중한 인선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훌륭한 공약들을 그대로 내팽개칠 참인가. 아직 배가 출항한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부디 초심을 잃지 않기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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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은 한국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굵직한 일들이 벌어졌던 해이다. 신년 벽두에 베를린에서 날아온 크리스토퍼 힐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양자접촉 소식은 ‘파란의 1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양측은 이 접촉으로 꽉 막혔던 협상 재개의 물꼬를 텄다. 이어 ‘2·13 합의’가 나오면서 북핵 문제는 급진전됐다. 3월에는 김 부상이 뉴욕을 방문해 미국과 관계정상화 논의를 시작했다. 북한은 6월에 북핵 시설 불능화 작업을 모니터링할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단 방북을 수용했고, 7월에는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했다. 북한은 연내에 영변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핵신고서를 제출하기로 했으며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 시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2007년 한 해에만 4번의 6자회담이 열렸고 비핵화, 경제·에너지 지원, 관계정상화,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그룹회의는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곧이어 북한이 핵신고서를 제출하고 검증·폐기에 착수하게 되면 한반도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지금 한국 대선판을 뒤흔들고 있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회고록의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문제는 이 같은 상황에서 일어났다. 이 문제를 거론하려면 북핵 문제의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던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그해 10월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과 국제사회의 인식 차이 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비핵화에 발맞춰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기반을 놓으려 했다. 이를 위해 추진한 것이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외교부에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등 주변국들이 남북정상회담 추진 소식을 알게 되면 성사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한·미는 북핵 문제에 적극 공조하면서도 상대를 경계했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이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외부로 나가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편 송 총장은 이날 오전 총장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미국은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매우 놀라면서 국제공조로 진행되는 비핵화 작업에 변수가 될 것을 우려했다. 중국은 남북정상선언에 포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의 종전선언’ 구상에 분노했다. ‘3자 또는 4자’라는 야릇한 문구는 중국을 배제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관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지만 미국과 중국의 축복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외교부는 이 같은 상황을 우려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공조가 필수인데 임기가 몇 달 남지도 않은 정부가 미·중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남북정상회담을 기습적으로 가진 것이 국제공조를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하려고 하자 외교부는 더욱 난처해졌다. 불과 1년 전 북한의 핵실험을 이유로 인권결의안에 찬성했던 한국이 이번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이유로 다시 기권하면 국제사회로부터 인류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이 국내정치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송 전 장관이 ‘장관직을 걸고’ 대통령에게 저항한 배경에는 이 같은 상황이 있었다. 회고록에는 그 내용이 비교적 소상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공조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노력을 조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남북관계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 전략적 유연성을 갖는 것 중 어떤 것이 우선적인 가치인지 등을 생각한다면 ‘글의 요지’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자마자 당시 새누리당과 보수층은 유력 야당 대선후보를 흠집낼 거리가 있는지부터 찾았다. 그러곤 “인권결의안 표결 문제를 북한에 결재를 받아 처리했다”는 저열한 ‘색깔론’을 집어들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대응도 실망스럽다. 그동안 보수 정치세력이 그에게 씌워온 지긋지긋한 ‘종북 프레임’에 위축돼 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사안은 정공법으로 대처했어야 한다. 외교 카운터파트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당시에는 무수히 열려 있는 남북채널로 긴밀한 대화가 오가던 시절이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당당히 맞서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다.

 

송민순 회고록에서 제기된 남북관계와 비핵화 논의의 선순환, 남북관계 접근법에 대한 딜레마 등은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서 북핵 문제를 다루더라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비핵화를 논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피할 길은 없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공방을 보고 있으면 다음 정부에도 북핵 문제 해결에 관한 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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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를 갖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지만, 5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핵기폭장치와 기초적인 핵억지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북핵 불용’은 한·미뿐 아니라 중국·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가 유지하고 있는 기본 입장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북핵 불용’이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북한이 갖고 있는 핵무기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다.

 

가끔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정치인들을 본다. 이 말은 형용 모순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북한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이유도 없고 협상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인정해야 할 것은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서 북한의 국가적 실체이지 핵보유국 지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팜비치 _ AFP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명확해진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느슨해지면 그것이 곧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한 제재는 절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국제사회는 북한에 지속적인 제재를 가하고 있다. 국제법적 지위를 갖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가 줄줄이 이어지고 각국의 독자 제재도 날로 강화되고 있음에도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북 제재의 효용성은 심하게 의심받고 있다. 중국이 뒷문을 열어주고 제재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기 때문에 대북 제재는 소용이 없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제재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 제재가 없었다면 북한은 일찌감치 핵강국이 됐을 것이다. 북한이 핵개발에 착수한 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 완전한 핵억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속적인 제재 강화로 핵관련 장비·기술 이전을 차단하고 경제적·정치적 제약을 가해온 결과다. 제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무줄처럼 조여오는 특성이 있다. 빈틈을 찾아가면서 견뎌낼 수는 있지만 벗어날 수는 없다. 특히 북한처럼 전방위적 제재를 받고 있는 상태가 유지된다면 핵무기를 아무리 많이 가져도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없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의지가 약화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은 북핵 당사국인 한국의 책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재가 북핵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이 손익계산을 따져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협상이다. 제재는 상대를 대화 테이블로 끌고 나오고 유리한 입지에서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협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맹목적 제재로 핵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다고 말한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대북 선제타격, 전술핵 재배치, 미·중의 전략적 결정에 의한 해결 등등을 모두 모색한 뒤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선택지는 많지 않다. 테이블에 올려진 모든 옵션에서 불가능한 것을 하나씩 제외시키는 ‘네거티브 셀렉션’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현실적인 대안이 남을 수밖에 없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국제비확산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없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따르는 전면전을 감수하고 선제타격을 선택할 수도 없다. 만일 미국이 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국제사회와 한국이 이를 뜯어말려야 한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제재와 협상의 병행 추진’이라는 기존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굳이 차별화를 꾀한다면 ‘더 강력한 제재와 더 적극적인 협상’ 정도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실버 불릿’은 없다. 지금까지의 북핵 접근법이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제재와 협상 중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탓이며 북핵 당사국 간의 일치된 대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력과 인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합리적 해결책은 ‘제재와 협상’이라는 상식적이고 약간은 진부해 보이는 틀 안에만 있다. 조만간 들어설 한국의 새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차분하고 인내심 있게 북핵 문제에 접근하기를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