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미국 주요 방송과 신문들은 매일 북한과 미국의 전쟁 가능성을 보도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괌 포위사격 발언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경고로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했다. 온라인에서는 핵전쟁 대피시설과 비상식량 등 전쟁 대비 물품들의 판매가 급증했다. 곧 전쟁이라도 날 것 같던 미국 언론들의 호들갑은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트럼프의 백인 우월주의자 폭력사태 두둔 발언 이후 북한 뉴스는 찾기 어려워졌고 화제는 미국 사회의 현존하는 병폐인 인종주의 문제로 급반전됐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 시민들의 반응이 더 인상적이었을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최근 이번 사태를 회고하는 기사에서 “북핵 위기에 대해 보도할 때마다 마치 두 개의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적었다. 전쟁 위기를 전하는 긴박한 뉴스에 비해 서울 시민들의 반응은 너무나 차분하고 심지어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한국 시민들은 20년 넘게 반복되는 북핵 위기를 한반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월10일 뉴저지주 베드민스터 내셔널골프클럽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베드민스터_AP연합뉴스

 

미국 사회의 위기감은 흙탕물 가라앉듯이 진정되고 있지만 물밑의 현실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위기는 이제 본격화됐다는 게 맞는 말이다. 빈센트 브룩스 한·미 연합사령관의 말처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는 “게임 체인저”였을 수 있다. 미국은 이제 북핵을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북한이 임박한 위협으로 다가오면서 미국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은 북핵 문제에 대한 속내를 상당 부분 드러냈다. 한국 입장에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의 순간’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때문이다.

 

2년 후라고 가정해보자.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핵탄두 소형화와 대기권 재진입 기술까지 터득하고 활용 가능한 ICBM을 모처에 실전배치했다고 발표한다. 미 국방정보국(DIA)은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의 ICBM 완성까지 2년으로 예상했다가 1년 앞당겼다고 하니 내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 한·미는 어떻게 대응할까. 트럼프 정부의 군사적 옵션은 더 이상 공허한 협박이 아닐지 모른다. 군사적 긴장은 극에 달할 것이고 각종 군사적 옵션이 거론될 것이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가 “거기(한국)서 죽는 것이지 여기(미국)서 죽는 게 아니다”라며 북한과의 전쟁불사론을 폈다는 공화당 의원의 전언은 새삼 공포스럽다.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도 이미 공격 징후가 없어도 예방타격 가능성까지 거론한다.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생어는 지난 20일 “2002년 이라크전 이후 백악관에서 적국에 대한 선제적 군사행동의 장단점에 대해 이렇게 많은 토론이 이뤄진 적이 없다”고 전했다.

 

다른 선택도 있다. 북한을 파키스탄처럼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미국 전문가들 중 일부는 이미 북핵을 현실로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DNI 국장을 지낸 제임스 클래퍼는 “이제 우리는 북핵을 받아들이고 한계를 정하거나 통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머리에 핵을 이고 살아야 한다. 내부적으로 전술핵 도입, 핵개발 등 핵으로 핵을 대응하자는 요구도 이어질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을 시작으로 며칠 잠잠하던 한반도는 다시 시끄러워질 조짐이다. 미국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 북핵 위기가 몇 번 더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한반도 전쟁이냐 북핵 인정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만은 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20년을 넘게 끌어온 북핵 외교에서 한·미의 완패를 의미한다. 서울 시민들은 무관심하지만 한국 정부 당국자들과 외교관들은 어느 때보다 긴장한 채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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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니미’로 불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앤서니 스카라무치 백악관 공보국장이 임명 열흘 만인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코미디처럼 해임됐다. 기존 비서실장을 정신병자로 공격하더니 존 켈리 신임 비서실장에 의해 바로 잘렸다. 스카라무치가 잃은 건 명예만이 아니다. 뉴욕포스트는 지난달 29일 스카라무치의 부인이 최근 이혼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한 관계자는 “부인은 스카라무치가 노골적인 정치적 야망을 위해 정신 나간 듯이 워싱턴을 추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때문에 이혼한 사례는 또 있다. 플로리다 지역지 팜비치포스트는 지난달 28일 미국프로풋볼(NFL) 치어리더 출신으로 열성 트럼프 지지자인 부인 린 애런버그와 팜비치 카운티 주 검사로 열성 민주당원인 남편 데이브 앨런버그의 ‘트럼프 이혼’ 사례를 소개했다. 남편은 부인의 트럼프 지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둘은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결혼 3년 만에 이혼했다. 트럼프는 대선 직후부터 미국 사회의 스트레스 거리였다. 워싱턴주에서는 22년을 함께 살던 남편이 트럼프를 찍었다고 고백하자 바로 이혼을 선언한 부인도 있었다. 대선 한 달 후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를 보면 대선 이후 절친한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는 응답이 13.4%나 됐다.

 

앤서니 스카라무치 미국 백악관 신임 공보국장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회견 직전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의 사임 소식이 알려졌다. 워싱턴 _ EPA연합뉴스

 

트럼프 본인도 세 번 결혼을 했으니 두 번은 이혼을 해봤다. 첫번째 부인은 체코 출신 모델 이바나였다. 두번째 부인은 유부남 트럼프와 스캔들을 일으켜 첫번째 부인과의 이혼으로 몰고간 배우 말라 메이플스였다. 지금 부인은 슬로베니아 출신 모델 멜라니아다.

 

트럼프의 이혼 사례를 소개하는 이유는 또 한 번의 이혼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멜라니아와 헤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트럼프의 세번째 이혼은 집권과 국정운영을 위해 정략결혼한 공화당과의 정치적 이혼이다. 성장 배경도 성격도 딴판인 사람들의 사랑 없이 떠밀려 한 결혼이 오래가기는 어렵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 트럼프는 워싱턴의 주류 정치를 ‘하수구’라며 개혁 대상으로 설정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성폭행이나 자랑하는 더러운 입을 가진 부동산 졸부를 지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겼고 둘에겐 정략결혼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트럼프는 의회의 힘이 필요했고, 공화당은 10년 만에 집권당이 됐다. 라인스 프리버스 공화당 전국위원장의 비서실장 임명은 화해의 상징이었다.

 

트럼프는 취임 6개월 만에 결국 공화당과의 연결고리였던 프리버스를 경질했다. 뉴욕타임스가 전했듯이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집무실의 파리를 잡는 역할이라도 맡기며 참으려 했으나 한계에 도달했다. 트럼프가 보기에 공화당은 무능 그 자체다. 오바마케어 하나 폐지하지 못하는 공화당을 향해 트럼프는 대놓고 “바보”라고 비난한다. 트럼프는 이제 포퓰리스트로 돌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한심한 사람들’과 함께 주류 정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 생각이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프리버스가 없으면 트럼프는 정당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의 이혼 협박이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대통령이 과반 여당이란 든든한 배경을 버리고 골수 지지층만 끌어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화당은 러시아 스캔들 수사에서 더욱 원론적 목소리를 내며 트럼프를 옥죌 것이다. 트랜스젠더 군 복무 금지 정책에 반기를 들었듯이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의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어쩌면 트럼프는 집권 6개월 만에 레임덕에 빠진 미국의 첫번째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섣불리 이혼을 거론할 게 아니라 숙려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공화당이 진짜 이혼을 결심하면 가장 불행해질 사람은 트럼프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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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는 공화당의 새 건강보험법안, 일명 ‘트럼프케어’다. 트럼프 대통령은 1호 행정명령으로 ‘오바마케어’ 폐지와 대체를 선언했다. 이후 공화당은 하원에서 새 건강보험법안을 통과시켰고, 이제 상원에서 자체 건강보험법안을 만들어 표결을 앞두고 있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공화당 지도부는 집권 한 달 만에 오바마케어를 폐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건강보험 제도는 ‘러시아 스캔들’이나 북한 핵·미사일 위협 등에 비해 미국인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다. 게다가 공화당이 추진하는 건강보험법안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건강보험 혜택을 크게 축소하는 데 맞춰졌다. 건강보험 재원 마련을 위한 부유층에 부과하는 세금은 감면해주고 정부 재원을 통한 메디케이드 지원은 삭감, 폐지한다는 게 기본 방향이다. 가입 강제조항도 사라지고, 기존 질병 보유자에 대한 보험사의 차별도 인정된다. 의회예산국(CBO)은 이미 공화당 법안으로 10년 안에 2300만명이 보험을 잃을 것이란 평가를 내놨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공화당의 건강보험법안 때문에 “매년 9·11 테러보다 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라고 비판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품 쇼케이스’에 참석해 텍사스에서 생산된 카우보이 모자를 써보고 있다. 워싱턴 _ AP연합뉴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좀비 법안’이란 비아냥까지 들으며 법안 수정을 거듭하고 있지만 통과는 쉽지 않아 보인다. 52명의 공화당 의원들 중 3명만 반대하면 통과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17일(현지시간) 이미 4명이 반기를 들었다. 메인주가 지역구인 수전 콜린스 의원과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73%의 지지를 보냈던 캔자스주가 지역구인 제리 모란 의원은 타운홀미팅에서 유권자들의 거센 항의를 경험한 후 법안 반대를 선언했다. 결정타는 강경파들이 날렸다. 마이크 리, 랜드 폴 의원은 수정안이 오바마케어의 완전한 폐기가 아니라며 반대를 선언했다.

 

외국인 입장에서 미국의 오바마케어 폐지 논쟁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특수성이다.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는 나라다. 그런 점에서 오바마케어는 보편적 복지와 미국적 현실의 절충이었다. 공공보험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전 국민을 민간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만든 게 오바마케어의 기본 발상이다. 하지만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과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월 OECD 국가들 중 “미국의 기대 수명은 이미 고소득 국가들에 뒤지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미국의 의료복지는 열악하다.

 

현실이 이런 데도 미국의 집권당은 국민 건강보험을 국가가 아닌 시장에 맡기는 데 집중하고 있다. 민주당은 오바마케어 방어에 주력하고 있을 뿐 보편적 복지로서의 건강보험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칭하는 샌더스 상원의원이 정부 차원에서 운영하는 단일 건강보험제도인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를 위한 법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은 울림이 약하다. 몇몇 주에서도 자체적으로 공공보험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성공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주정부가 보험료 징수와 의료혜택지급을 일괄담당하는 단일보험체계 도입 법안이 상원 통과 후 하원에서 막혔다. 뉴욕·콜로라도·네바다주도 최근 보편적 복지 개념의 건강보험 개혁안을 추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미국 예외주의>란 저서에서 미국은 유럽에 비해 훨씬 덜 복지 지향적이고, 덜 국가주의적이며, 더 방임주의적이고, 더 권리지향적이고, 더 애국적이며, 더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이란 점에서 ‘예외적’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경험이 없는 미국의 예외주의는 립셋의 평가처럼 양날의 칼이다. 미국의 장점이자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의미다. 특히 건강보험 개편을 둘러싼 미국 정치권의 논쟁은 우물 안 개구리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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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언제까지 계속 질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이야기다. 미국 민주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조지아주 6지구와 노스캐롤라이나주 5지구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치러진 네 번의 보궐선거에서 모두 공화당을 꺾는 데 실패했다. 몬태나주에서는 기자를 ‘보디슬램’한 그레그 지안포르테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고, 조지아에서는 민주당의 30세 젊은 후보 존 오소프의 바람이 통하지 않았다.

 

보궐선거 4연패가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네 곳 모두 공화당의 전통적 우세지역이었다. 특히 톰 프라이스가 트럼프 정부 보건부 장관으로 가면서 자리가 빈 조지아 6지구는 40년간 공화당 텃밭이었다. 대표적 우파 정치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의 지역구였다.

 

문제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반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느냐에 있다. 2018년 선거에서 하원의 다수당이 되겠다는 민주당의 희망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공화당 의석 24개는 빼앗아와야 한다. 조지아 선거가 전국적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런 흐름의 시작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2010년 공화당 신예 스콧 브라운이 민주당의 텃밭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공화당 연승의 첫번째 물결을 일으킨 바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로 휘청거리며 40%도 안되는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 찬성 여론은 48%까지 올라갔다. 공화당은 가난한 이들의 건강보험을 빼앗아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겠다며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모든 게 민주당에 유리한 환경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싫어하지만, 민주당을 대안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보궐선거의 교훈이다. 현재 민주당 브랜드로는 더 이상 유권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지 못한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선거 패배 후의 모습만 봐도 민주당은 ‘안되는 정당’의 길을 답습하고 있다. 성찰은 없고 노선 다툼에 책임공방만 벌이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트럼프의 가장 큰 결점이 거울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라면 민주당의 문제는 차마 거울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앞세운 트럼프의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은 언제쯤 제동이 걸릴까. 민주당은 내년 중간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을 회복하고, 2020년 대선에서 권력을 되찾아 올 것이라고 낙관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비관론이 더 현실적이다. 샘 스타인 허핑턴포스트 정치에디터는 “민주당은 지금부터 영원히 모든 선거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정도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할 운명에 처해졌다”고 논평했다. 한번 신뢰를 잃은 정당이 유권자의 지지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예를 봐도 그렇다.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내준 한국의 민주당은 다양한 형태로 이름을 바꾸며 혁신을 외쳤지만 선거 때마다 습관성 패배를 계속했다. 2016년 총선에서야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미국 민주당의 보궐선거 4연패는 본격적인 패배 행진의 신호탄일지 모른다. 반트럼프 여론에 취해 유권자들이 왜 자신들을 외면했는지 성찰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내년 중간선거와 차기 대선에서 더 처절하고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할 수도 있다. 깅리치는 예언했다. “네 차례 보궐선거에서 연전연패하고도 (민주당의) 망상과 환상은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재선될 것이고, 2024년에는 아마도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민주당은 지금 트럼프 탄핵을 논할 처지가 아니다. 트럼프 재집권이라는 악몽만은 피할 수 있게, 유권자들에게 외면받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기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할 상황이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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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100도(약 38도)를 넘나드는 한낮 폭염을 뒤로하고 미국 워싱턴의 의사당에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러시아 스캔들’에 관한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사진)의 증언을 취재하기 위해 13일(현지시간) 찾아간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장 하트빌딩 216호. 입구에는 방청객들이 이미 수십m의 줄을 이루고 있었다. 청문위원들과 마주 보는 기자석의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예정보다 10여분 지난 오후 2시40분쯤 세션스가 입장하자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공화당 소속 리처드 버 정보위원장과 민주당 간사 마크 워너 의원의 모두발언 이후 세션스가 선서를 했다. 그는 10여분의 모두발언에서 “나는 지난 20년간 상원에서 여러분의 동료였다”면서 “러시아 내통 의혹에 내가 연루됐다는 주장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거짓말”이라고 했다. 앞서 그는 인준 청문회 때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 대사를 두 번 만났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메이플라워호텔에서 한 차례 더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세션스는 이번 증언에서 “러시아 대사나 러시아 관리들과 대화하거나 만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법무부의 오랜 관행상 대통령과의 비밀대화를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와의 대화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의혹은 부인하고 불리한 질문에는 답변을 거부하겠다는 예고였다.

 

앞서 8일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트럼프가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중단하라는 압박을 했다고 증언했다. 버는 세션스에게 코미의 이 증언에 대해 물었다. 세션스는 “대통령과 FBI 국장 간의 대화에는 전혀 잘못된 게 없다”고 답했다. 세션스는 민주당 첫 질문자인 워너의 질문까지 자르며 공격적으로 답변했다. 코미가 트럼프와 독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상의해왔을 때 법무장관으로서 어떻게 조치했느냐고 묻자 세션스는 “코미는 그게 부적절하다는 세부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몇몇 민주당 의원들과는 날카로운 설전을 벌였다. 코미에 관해 트럼프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일절 답변을 거부했다. 민주당 마틴 하인리히 의원은 “의회 조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공격했고, 론 와이든 의원도 “의사진행 방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세션스는 “법무부의 역사적 정책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출신인 카말라 해리스 의원은 ‘법무부 관행’을 들며 답변을 거부하는 세션스를 몰아붙이다 위원장의 경고를 듣기도 했다.

 

키슬랴크 대사와의 만남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세션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러시아 스캔들 수사에서 스스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다른 이유가 있느냐고 와이든이 몰아붙이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나한테 말해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 의원들은 세션스 방어에 나섰다. 톰 코튼 의원은 “미국의 현직 상원의원과 외국 대사가 수백명이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파이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공모한다는 웃기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고, 세션스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며 웃었다. 민주당의 의혹 제기를 희화화한 것이다.

 

2시간30여분에 걸친 청문회가 끝났지만 트럼프 측과 러시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트럼프가 무엇을 감추려 했는지 선명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트빌딩을 나설 때도 숨막히는 더위는 여전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프랭크 브루니는 “세션스는 여러 질문들을 쳐냈고, 대답을 했다 하더라도 얄팍하고 무용했다”고 비판했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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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큰딸 이방카의 장기는 ‘사라지기’다. 트럼프가 지난 1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발표하는 순간 이방카는 현장에 없었다. 트럼프가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기 위해 트럼프케어의 하원 표결을 시도한 지난 3월에도 이방카는 콜로라도주의 스키리조트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즐겼다.

 

‘퍼스트도터’ 이방카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 없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그녀를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으로 묘사한다. 트럼프 정부에서 성소수자(LGBTQ), 여성,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와 환경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게 미국 언론의 평가다. 직함도 없이 백악관 웨스트윙에 버젓이 사무실도 냈다. 실제 지난 2월 트럼프는 전임 행정부의 성소수자 권리 보호 행정명령을 폐기하려다 포기했다. 당시 뉴욕타임스 등은 이방카 부부의 설득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방카는 파리협정 탈퇴도 끝까지 반대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등은 전했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정책들을 얼마나 견제하고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얼마나 견인했느냐를 기준으로 이방카의 성적을 한번 매겨보자. 이방카가 반대했다고 하지만 트럼프는 결국 ‘종교의 자유’ 행정명령을 통해 성소수자 보호막을 걷어내버렸다. 2400만명이 건강보험을 잃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트럼프케어에 이방카가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은 없다. <일하는 여성: 성공의 법칙 다시 쓰기>란 책도 냈으나 오바마케어에서 의무화했던 산아제한 지원을 없애는 데 저항하고 있다는 전언은 들려오지 않는다. 기후변화 대응을 옹호한다지만 결국 트럼프의 파리협정 탈퇴를 막지 못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빵점’이다. 이방카는 공식 직함도, 직무도 없으니 책임질 일도 없다. 하지만 정식 직책을 맡았다면 그녀는 백악관 대변인 션 스파이서와 함께 해고 후보에 올라야 한다.

 

이쯤 되면 이방카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 이방카의 정치적 성향이 잘못 알려졌거나, 아니면 언론이 평가하는 것보다 트럼프에 대한 영향력이 미약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의 크리스티 골드퍼스는 “트럼프의 파리협정 탈퇴는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이방카의 능력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그녀의 명성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방카는 트럼프의 정치적 자산이다. ‘야수’ 아버지의 부정적 이미지를 보완해줄 ‘미녀’ 딸이다. 트럼프가 세 번 결혼한 방탕한 부동산 갑부라면 이방카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는 세 아이의 엄마다. 트럼프가 부인 멜라니아의 손을 잡으려다 퇴짜 맞는 영상이 화제가 될 때 이방카는 꽃미남 남편, 아이들과 함께한 행복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린다. 트럼프가 피츠버그의 블루칼라 노동자 이미지라면 이방카는 세련된 뉴요커다. 미국 사회에서 이방카와 그녀의 가족은 동경의 대상이다. 코미디 프로그램 <SNL>은 그녀를 상징하는 정서에 ‘공모(complicit)’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방카는 외국 정상들과의 회담 같은 빛나는 자리에는 배석해도, 파리협정 탈퇴처럼 이미지 구길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를 두고 마치 ‘환경보호광고(greenwashing)’ 같다는 비판이 나온다. 환경오염의 주범 기업들이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적은 돈으로 환경을 소중히 하는 듯한 광고를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란 것이다. 심지어 이방카는 그런 최소한의 희생조차 하지 않고, 이해충돌 논란 속에 상업적 이득만 취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 반성소수자, 반여성, 반이민, 반환경으로 가는 게 이방카 탓은 아니다. 그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제 이방카가 트럼프의 독주를 견제해줄 것이란 기대는 접는 게 어떨까. 이방카는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와 브랜드로만 존재하는지 모른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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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역대로 백악관 대변인에게 방탄복을 취임 기념선물로 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론과 정권 사이에 낀 대변인 역할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게 미국 언론의 중평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워싱턴에서 최악의 직업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워싱턴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한다.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자유로운 언론들에 맞서 입만 열면 거짓말인 도널드 트럼프를 대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해보라.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주류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규정하고 언론과의 전쟁을 해왔다. 스파이서는 그 전쟁의 맨 앞에 서서 언론의 화살을 맞고 있다. 그의 첫 임무는 취임식에 역대 최대 축하객이 왔다는 트럼프의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게 위성사진으로 증명됐지만 스파이서는 “하객이 역대 가장 많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트럼프는 근거도 없이 오바마가 자신을 도청했다고 주장했고, 스파이서는 근거를 내놓으라는 기자들의 추궁을 맨손으로 며칠간 버텨냈다. 기자들을 향해 “절대 고개를 가로젓지 말라”며 위협하고, “의도적으로 거짓 보도를 한다”고 도발도 했다. 덕분에 그는 코미디 프로그램 SNL 등에서 전 국민의 조롱거리가 됐다.

 

션 스파이서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 3월 8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스파이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에 중국이 반발하는 것에 대해 “지난 주말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서 보듯 사드 배치는 한국 방어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AP연합뉴스

 

스파이서를 정말 딱하게 만드는 것은 세간의 조롱이 아니다. 그는 아마 미국 정부의 간판인 백악관 대변인이란 권력을 얻었으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보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언론에 전해지는 트럼프의 평가는 항상 부정적이다. “트럼프는 스파이서 임명을 매일 후회하고 있다” “트럼프가 생각한 대변인은 스파이서가 아니었다”. 최근에는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있을 것이고 그 핵심 대상이 스파이서라는 보도가 계속 나온다. 본인은 최전방 전투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지원은커녕 비난만 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일 것이다.

 

트럼프의 대변인이란 자리는 누가 맡아도 고난이 불가피하다는 평가가 많다.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인식하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 양심과 공감능력이 없는”(영국 행동심리학자 조 헤밍스) 트럼프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수석 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뉴욕타임스에서 트럼프의 대리인들은 결국 “거짓말쟁이 또는 바보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좋아할 만한 대변인은 없을까.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독재자들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사례를 찾아보자. 세계 최고 독재자로 통하는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최근 아프리카·프랑스 정상회의 만찬에서 눈을 감고 졸고 있는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올라 논란이 됐다. 그러자 짐바브웨 홍보 담당관은 “대통령은 잠시 눈을 쉬게 한 것일 뿐이지 잠을 잔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당초 대변인으로 고려했던 켈리언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도 ‘대안 사실’이란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서 트럼프의 역대 최다 취임식 참석자 주장을 옹호했다. 물론 이런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는 않다. MSNBC의 간판 진행자 미카 브레진스키는 15일(현지시간) 콘웨이도 지난해 대선 때 카메라 앞에서는 트럼프를 적극 옹호했지만 카메라가 꺼지면 “내가 하는 말이 너무 더러워서 샤워를 해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그런 것에 익숙해진 것 같다”는 평도 빼놓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스파이서는 트럼프의 신뢰를 얻기에는 아직 너무 양심적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슬픈 미국의 현실이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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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 문제 대응 방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소위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이다. 한성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14일 평양에서 외국 언론들을 불러모아 “미국이 군사작전을 한다면 우리는 선제타격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오히려 미국을 위협했다. 그러면서 “최고 지도부가 결심하는 때, 결심하는 장소에서 핵 실험이 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면 미국이 군사적 대응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나온 대응이다. 노동신문은 지난 19일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의 한반도 배치에 맞서 ‘절대병기’ 수소폭탄까지 거론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월 7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사실 벼랑 끝 전술의 특허권은 미국에 있다. 냉전시대 미국이 소련과의 협상에서 주로 동원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대표적 사례다. 1956년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 전술을 예술에 비유하기도 했다. “전쟁에 이르지 않고 벼랑에 이르는 능력은 필요한 예술이다. 이 예술을 정복하지 못하면 불가피하게 전쟁에 이르고 말 것이다. 전쟁을 피하려고 하거나 벼랑에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전쟁에 지게 된다.” 냉전 이후에도 이 협상 기술을 발전시킨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벼랑 끝 전술은 이제 북한의 협상 전술의 전형을 일컫는 용어가 됐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협상을 막다른 상황까지 몰고가는 초강수로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협상 전술이다.

 

 

 

그런데 북한의 ‘치킨게임’ 전술을 무색하게 하는 상대가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 특유의 대응 덕분에 ‘광인전략(madman strategy)’이란 용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북베트남과의 평화회담을 위해 핵전쟁 경계령을 내린 데서 유래한 용어다. 미국 대통령이 비이성적이고 ‘미친 X’여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관측을 의도적으로 퍼트려 상대방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려는 전술이다.

 

실제 트럼프식 대응은 두려움을 확산시키는 측면에서는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 한·미 언론들과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실제 북한 핵·미사일 시설을 선제타격하는 등 군사적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연일 떠들고 있다. 중국은 한반도 정세 불안정을 우려하며 유례없는 북한 경제 조이기에 나섰다.

 

트럼프 정부 들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진 이유는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과 미군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다. 트럼프는 하루아침에 시리아 정책을 뒤집어 미사일 공격을 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재래식 폭탄 중 최대 폭발력을 가진 ‘폭탄의 어머니’를 투하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근해로는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을 급파했다. 트럼프는 북한에 단호하게 대응하겠지만 그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겠다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군사적 타격 가능성을 두고 백악관 대변인과 국가안보보좌관이 다른 말을 한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차관보가 트럼프 정부의 이 같은 행태를 두고 ‘북한보다 더 북한스럽다’고 지적할 정도다.

 

하지만 트럼프의 광인전략은 북핵 해법이 될 수 없다. 북핵 문제에 대한 예측불가능하고 무계획적인 대응은 관련 국가들의 정책 혼란을 야기하고, 자칫 화약고 같은 한반도에서 북한의 ‘오판’에 의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한국 시민 수백만명의 목숨이 걸린 선제타격 같은 군사적 대응 이슈를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동맹국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더불어 김정은이 ‘미친 뚱보 아이’(존 매케인 상원의원)라서 똑같이 대응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판이다. 트럼프 정부가 지금 같은 대외 정책을 고수한다면 국제무대에서 신뢰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벼랑 끝 전술은 북한처럼 정권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나라들이나 최후의 수단으로 동원할 만한 전술이다. 말 한마디, 정책 하나가 전 세계 정치·경제 질서에 영향력을 미치는 초강대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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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토마호크미사일 59발이면 충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자신의 리조트로 불러놓고 지중해 함대에서 시리아로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이미 50만명이 넘게 희생됐지만 개입을 거부해온 트럼프였다. 이슬람국가(IS)를 척결하려면 시리아 정부와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트럼프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화학무기 공격 후 63시간 만에 트럼프의 정책은 180도 달라졌다.

 

대외 정책의 급변이나 전쟁은 국제 정세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도 북한 변수는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하지만 전쟁과 정치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에서 대통령의 결심은 실제 전쟁으로 이어진다.

 

트럼프의 시리아 공습은 다양한 정치적 효과를 내고 있다. 대외적으로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으로 미국을 위협하고 있는 북한을 향한 시위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집권 초반 지지율 추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 시리아 공습으로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 관계자들이 해킹으로 대선에 개입한 러시아와 공모했다는 의혹은 뒷전으로 밀렸다. 토마호크미사일이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앗아갔다. 반이슬람 행정명령 무산, 오바마케어 폐지 실패 등 헛발질도 잊혀졌다. 공습 직후 여론은 긍정적이다. CBS가 10일(현지시간)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공습 지지는 57%로 반대 36%보다 많았다. 트럼프에게 ‘까칠하던’ 존 매케인 등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그의 결단을 칭찬한다. 국정 발목잡기의 대표 선수였던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도 이번만은 반대할 수 없었다. 트럼프가 ‘가짜뉴스’라고 비판했던 CNN마저 “트럼프가 처음으로 대통령다웠다”고 평가했다.

 

미·중 정상회담을 위해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가 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트럼프의 외손주 아라벨라(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조지프(세번째)가 중국 민요와 당시를 암송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짓고 있다. 팜비치 _ 신화연합뉴스

 

이번 공습이 역대 최저로 추락한 트럼프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전쟁을 통해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현상은 ‘안보결집효과(rally round the flag effect)’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깃발 주변으로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은다는 의미로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불리던 노래 가사의 일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를 지낸 윌리엄 사파이어의 정치학 용어사전에 따르면 미국의 7대 대통령을 지낸 앤드루 잭슨이 남북전쟁 당시 했던 말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트럼프가 집무실에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로 존경한다는 잭슨이 위기의 트럼프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준 셈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전쟁은 애국심을 자극하고, 야당의 반대를 무력화함으로써 결집효과를 내왔다. 물론 전쟁이 모두 대통령들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갤럽에 따르면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들 부시(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은 갤럽 역사상 최대폭인 35%포인트 급등, 86%를 기록했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정보까지 조작하며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도 지지율은 13%포인트 올랐다. 아버지 부시(조지 H W 부시)의 지지율도 걸프전 직후 미국 역대 최고인 89%를 기록했다. 빌 클린턴은 섹스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렸던 1998년 아프가니스탄, 수단의 알카에다 조직과 이라크를 잇따라 폭격했지만 미국인의 관심을 돌리는 데는 실패했다. 로널드 레이건의 1983년 그레나다 침공도 지지율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트럼프가 이번 공습으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이득을 취할지는 예단하기 이르다. 공습이 일회성으로 그칠지, 중동정책의 큰 그림이 마련될지, 야당의 초당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지 등등 변수가 많다. 아사드 정권 응징은 통쾌해 보였지만 시리아 내전의 늪에 빠져 헤맨다면 지지율은 더 추락할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찰스 블로의 말처럼 시리아는 러시아, 아사드 정권, 이슬람국가(IS), 이란 등 미국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모여 있는 ‘말벌 둥지’일 수 있다. 버락 오바마가 건드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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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 정권에서 ‘엉망진창’을 물려받았다고 변명한다. 트럼프의 이 말이 유일하게 사실로 적용될 수 있는 분야는 아마 북핵 문제일 듯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정권을 거치면서 점점 향상됐다. 미국인들에게 북핵은 이제 ‘임박한 위협’이 됐다.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 찾기는 절박한 과제다.

 

지도자가 어떤 정책을 선택할 때 좋은 대안들 중에서 최선을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현실 국제정치에서 외교 정책은 최악의 선택을 피하면서 가장 덜 나쁜 대안을 고르는 과정일 때가 많다. 북핵 해법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하지만 지금과 다른 북핵 해법을 나눠보면 세 가지 범주 안에 들어간다. 폭격, 인정 그리고 협상이다. 최근 미국에서 현상유지를 타파하겠다며 유행처럼 거론되는 해법이 선제타격 같은 군사적 해법이다. 방사능 오염 위험이나 작전이 성공할 희박한 확률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화약고인 한반도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최악 중 최악의 선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간)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연설하고 있다. 내쉬빌|AP연합뉴스

 

군사적 해법은 한국 입장에서는 마치 솔로몬 왕의 시험과 같다.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다투는 두 여인에게 공평하게 나눠가지라고 판결할 때 진짜 엄마라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저 여인에게 주라”며 스스로 포기할 것이다. 선제타격론은 아직은 중국과 북한에 대한 협박용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인, 전문가들이 군사적 선택을 쉽게 입에 올리는 이유는 한국의 희생보다는 미국의 안전이 우선이란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윤병세 외교장관이 군사적 억지가 북핵을 저지할 외교적 노력의 기둥이라며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군사적 해법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체 어느 나라 장관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새로운 접근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북핵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겠다는 것으로 선택 불가능하다. 국내는 물론 일본 등 주변국들의 핵무장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의 해법은 중국 역할론에 집중되고 있다. 북한의 핵 야망을 저지할 영향력을 가진 중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상이다. 중국 역할론은 사실 새로운 해법이 아니다. 강력한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핵포기를 전제하지 않는 대화는 거부하겠다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 북한이 가장 많은 핵·미사일 실험으로 화답한 지난 8년이 증명하듯이 효과를 내기도 어렵다. 중국이 북한 체제의 붕괴를 감수할 정도로 김정은 정권을 압박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북한 정권이 곧 무너질 테니 물 샐 틈 없는 제재로 이를 재촉하며 기다리자는 정책만큼 나쁜 선택이다.

 

결국 남는 새 접근법은 협상이다. 협상은 나쁜 선택이다. 합의를 밥 먹듯 뒤집은 북한에 또 기회를 주는 것은 잘못이다. 어쩌면 북한은 대화하면서 뒤에서 딴짓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반도에 재앙을 가져올 군사작전을 협박하거나, 중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덜 나쁘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 그렇다. 제대로 된 협상 단계로 가기 위한 조건 없는 대화를 우선 시작해야 한다. 눈감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정신 나간 북한을 일단 멈춰 세워야 한다.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과 미국을 위해서다. 외교적 해법 찾기의 정도는 협상이고 그 과정은 지루하고 짜증날 수밖에 없다. 틸러슨의 말처럼 전략적 인내는 이제 끝내야 한다. 동시에 북핵 문제에서 한국과 미국이 완승할 수 있는 해법은 없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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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의 북서부를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인 스티브 킹은 최근 서슴없이 인종주의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백인만의 미국’을 강조하는 킹의 발언과 이에 대한 백악관과 공화당의 둔감한 반응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들어 빨간불이 켜진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적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극우 정치인 헤이르트 빌더르스를 지지하면서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빌더르스는 문화와 인구가 우리의 운명임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자식들과 함께 우리 문명을 복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서구인 즉 백인을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민자들을 지칭한다. 이민자들이 없는 백인만의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미국의 백인들 자체가 원주민이 살던 땅에 온 이민자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 쿠클럭스클랜(KKK)의 대표였던 데이비드 듀크는 곧바로 트위터에서 “스티브 킹에게 은총을”이라고 화답했다. 킹은 13일에는 “출산율을 높이지 않으면 유럽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고 말했고, 14일에는 곧 백인 인종이 소수가 될 것이란 지적에 “히스패닉과 흑인들이 서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맞받았다.

 

킹의 화법에서 주목되는 표현은 바로 ‘문화’와 ‘문명’이다. 그가 말하는 문명은 서구, 즉 백인의 미국을 말한다. 그는 지난해 대선 당시 “백인들이 다른 어떤 인종보다 문명 발전에 더 많이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인식에는 백인은 문명이고 이민자들은 반문명이란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출산율 발언은 현대판 우생학에 다름아니다. 아리안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인식이다.

 

킹이 말하는 ‘문명의 회복’은 트럼프가 대선에서 강조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구호와 그대로 겹친다. 보수 백인 유권자들에게 트럼프의 구호는 “잃어버린 백인의 미국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트럼프는 취임 연설에서 ‘자유 세계’라는 관례적인 표현 대신 이슬람과 대결할 “문명화된 세계”를 언급했다. 킹 같은 인물이 백인우월주의를 내놓고 주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트럼프 정권 출범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언론이 연일 문제 삼자 정치인들도 킹 비판에 동참하고 있지만 공화당과 백악관의 반응은 영 뜨뜻미지근하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킹의 발언을 인종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하원 법사위 소위원장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백악관 입장은 션 스파이서 대변인이 기자의 질문에 “트럼프가 공유하는 관점이 아니다”라고 밝힌 게 전부다.

 

온갖 일에 참견하던 트럼프의 트위터가 이럴 때는 조용하다. 공화당 1인자 폴 라이언은 대변인을 통해 “동의하지 않는다”고만 밝혔다. 이러다가 정말 미국에서도 인종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활개를 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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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라는 ‘버서 논란’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과반 득표를 못한 이유는 ‘투표 조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측근들이 줄줄이 연루되면서 러시아 스캔들이 권력의 정당성을 흔들자 이번에 꺼내든 카드 역시 ‘오바마의 도청’이란 음모론이다.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오바마의 도청 의혹을 꺼내자, 백악관은 이튿날인 5일(현지시간) 의회 차원의 조사를 요청했다.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에서 “2016년 대선 직전 정치적 목적의 수사가 있었을 수 있다는 우려에 관한 보도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라면서, 지난해 대선 때 행정부가 수사권을 남용했는지 의회 정보위가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공화당 소속 데빈 누네스 하원 정보위원장은 “대선 때 정부가 특정 정당의 캠페인, 혹은 측근들을 감시했는지 조사하겠다”며 호응했다. 러시아 스캔들과 도청 의혹을 같은 비중으로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백악관은 도청 의혹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워터게이트감”이라며 제기한 의혹의 근거는 극우 매체 브레이트바트의 엉성한 보도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 보도에서도 도청이 있었는지, 오바마가 지시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백악관은 의혹만 터뜨린 후 조사가 이뤄질 때까지는 이 사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5일 트위터에서 오바마도 과거 대선 전에 러시아 측과 뒷거래를 했다는 식의 글을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 연합뉴스

 

트럼프의 백악관은 아무 증거 없이 ‘도청’이 ‘보도됐다’며 ‘수사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전임 행정부를 향한 밑도 끝도 없는 비방은 수사·정보당국의 권위까지 뒤흔들고 있다. 연방수사국(FBI) 제임스 코미 국장은 트럼프의 도청 주장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공표해줄 것을 법무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트럼프 측근 제프 세션스 장관이 이끄는 법무부는 이를 거절했다. 정작 세션스는 트럼프가 물타기하려는 러시아 스캔들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규범과 전통을 무시하는 트럼프의 낯익은 전술”이라며 “트럼프는 화제를 바꾸고 싶을 때면 자주 앙상한 음모론의 마른 가지에 성냥불을 댕기곤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음모론에 불을 댕길수록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대중의 의혹은 오히려 커질 수밖에 없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은 NBC 인터뷰에서 “대선 때 어떤 도청도 없었다”고 일축했다. 오바마 백악관의 대변인을 지낸 조시 어니스트는 방송에 나와 “스캔들이 커질수록 (트럼프의) 트위터는 점점 더 터무니없어진다”고 비난했다. 공화당의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NBC에서 “나는 마녀사냥은 물론 은폐공작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잇단 음모론 속에 미국 정치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음모론 정치는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흐리고, 유권자들의 정치 불신을 조장한다. 정치 전략가 매튜 다우드는 워싱턴포스트에서 “우리는 초현실 세계에 있다”고 꼬집었다.

 

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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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가 연일 퇴행하고 있다. 인종주의, 반시장주의,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쉽게 등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신임 대통령이 역주행의 주역이지만 따져보면 그만의 책임은 아니다. 미국은 3권분립이 엄연한 국가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트럼프의 독주를 견제할 권력을 가졌다. 제임스 로바트 시애틀 연방지법 판사는 반이민 행정명령의 시행을 중단시키며 3권분립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다. 문제는 비겁한 의회다. 민주당은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끊임없이 번민하는 햄릿의 모습이다. 독살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현실 앞에서는 회의하고 주저한다. “백일몽이나 꾸는 얼간이 바보처럼 악당에게 아버지를 살해당한 채 가만히 서서 속수무책이구나.” 햄릿의 자책이 들리는 듯하다. 백악관에 상원까지 한 손에 쥘 줄 알았다가 길거리 야당을 하라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시국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민주당의 무능과 우유부단함은 실망스럽다.

 

민주당은 정체성 혼란 상태다. 민주주의와 진보를 외쳤지만 노동자 계급은 그들을 외면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월스트리트 큰손들의 돈을 좇아다니면서도 ‘노동자 계급의 음유시인’이라는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읊조림에서 진보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칼바람과 맨몸으로 싸울 때 민주당은 곁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익숙한 컨트리뮤직을 택했다. ‘미국우선주의’를 외치며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것은 트럼프였다. 민주당은 이제 길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민주당은 이제 버락 오바마라는 인기 있는 대통령을 가진 여당도 아니다. 민주당은 소수당(minority)이란 현실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트럼프를 견제할 야당(opposition party)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민주당은 비겁하다. 트럼프의 억만장자, 인종주의자, 무경력자 내각 후보들 중 누구 하나 막아낼 힘도 용기도 없다. 민주당 전략가 밥 슈럼은 “지금은 역사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돌아보고 당신은 무엇을 했는지 물을 것이다”라고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경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운 게 아주 많다. 당장 공화당이 1년 넘게 청문회 개최조차 거부하던 연방대법관 후보를 이제 트럼프가 지명했는데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반대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있다.

 

2018년 상원 중간선거에 나설 민주당 현역 의원은 25명이고, 이들 중 10명의 지역구는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곳이다. 트럼프의 채찍이 자신을 향할까 조마조마하다. “기도하는 적을 죽이면 천국으로 보내주는 것”이라며 칼을 뽑지 못하는 자신을 변명하는 햄릿과 다를 바 없다. “내 생각의 속을 넷으로 갈라보면 지혜는 고작 4분의 1이고 나머지 세 쪽은 겁쟁이가 아닐까.”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4일(현지시간) 한 시민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독일 주간지 슈피겔의 최신호 표지를 그린 팻말을 들고 있다. 슈피겔은 이날자 잡지 표지에 참수한 자유의 여신상 머리와 피 묻은 칼을 든 트럼프의 만화 이미지를 실어 논쟁의 중심에 섰다. 슈피겔과 만평가는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트럼프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트럼프와 이슬람 극단주의를 단순하게 동일시하면서 테러 희생자들에게 2차 가해를 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덴버 _ AP연합뉴스

 

공화당은 권력을 위해 사탄과 거래한 파우스트의 모습이다. 대선 내내 트럼프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았던 공화당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의 권력 앞에서 무릎 꿇었다. 트럼프의 문제투성이 내각 인사에도 인종주의 반이민 행정명령에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한심한 사람들(deplorables)’의 힘에 매료됐다. 자신들의 핵심 정강인 시장주의를 흔들고 반무역주의를 밀어붙여도 한마디 말이 없다. 이 기회에 트럼프의 힘을 빌려 금융·환경 규제 철폐, 조세 감면 등 자신들의 버킷리스트를 지우느라 바쁘다. 언제 이런 힘을 가져봤던가. 오바마 정부에서 여당의 독단을 비판하던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제 “상원의 혼란은 모두 민주당(야당) 때문”이라며 트럼프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속도전의 선봉에 섰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트럼프의 ‘무슬림 입국금지’ 행정명령 서명마저도 “미국에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들어오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라며 방어한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도 경고했다. “공화당 파우스트들은 악마와 너무 값비싼 거래를 했다. 그들은 영혼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위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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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신임 대통령의 선임고문 켈리앤 콘웨이가 ‘대안 사실(alternative fact)’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대통령 취임식 참석 인원에 대한 백악관 대변인의 거짓말 브리핑을 포장하기 위해 동원한 용어다. 대선 캠페인 기간 내내 사실을 무시하거나 왜곡, ‘탈진실(post truth)’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트럼프 측이 집권 뒤에도 비슷한 행태를 이어갈 것임을 보여준다.

 

콘웨이는 22일(현지시간) NBC 방송에 출연해, 전날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의 발언을 옹호했다. 스파이서는 트럼프 취임식 관람객이 “역대 가장 많았다”고 브리핑을 했다. 이 말이 거짓말 아니냐고 사회자가 지적하자 콘웨이는 “대변인은 대안 사실을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안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거짓말이다”라고 비판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는 이 사건을 꼬집는 ‘대안 사실’ 항목이 생겼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온라인에 “‘사실’은 통상 실제로 존재하거나 객관적 현실로 여겨지는 것을 가리킨다”는 설명을 게시했다.

 

22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 중인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마알레아두밈 정착촌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건축자재를 옮기고 있다. 친이스라엘 성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인 동예루살렘에 600가구 규모의 새 정착촌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마알레아두밈 _ AP연합뉴스

 

논란의 출발점은 트럼프였다. 그는 취임 이틀째인 21일 중앙정보국(CIA)을 방문, 자신의 취임식 인파가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취임 때보다 적었다는 언론 보도를 비판하며 “100만명이나 150만명은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시간 후 스파이서가 백악관 브리핑룸 첫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주장을 편든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 전철 승객 통계나 텔레비전 시청자 집계 등을 종합해보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항공사진과 각종 영상을 분석한 학자들의 추산치를 보면 20일 취임식 인파는 16만명이었고, 이튿날 트럼프에 반대하는 여성행진 참여자는 47만명이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콘웨이는 거짓말을 ‘대안 사실’이라는 궤변으로 포장했다. 인종주의 극우파들이 스스로를 ‘알트라이트(대안 우파)’라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CBS뉴스 앵커 출신인 댄 래더는 페이스북에서 “미국 대통령 대변인이 ‘대안 팩트’란 오웰적 표현으로 거짓말을 덮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명백한 거짓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브리핑해 세계를 웃긴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대변인 ‘바그다드 밥(무하마드 사에드 알샤하프)’을 연상시킨다는 말도 나온다. 공화당 전략가 스티브 스미트는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서 “정부의 의도적인 속임수와 거짓말은 전체주의,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이며 민주주의에는 치명적”이라고 지적했다.

 

켈리앤 콘웨이 선임고문

 

검증 사이트 ‘폴리팩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대선 때 200개가 넘는 명백한 거짓말을 했다. 트럼프 정부 4년 내내 거짓말과 자의적 주장이 이어지고 언론 담당들은 이를 ‘대안 사실’이라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억지 용어로 포장한들, 거짓말은 결국 정부의 신뢰를 추락시킬 수밖에 없다. 경제통계나 안보협상에 대한 정부의 주장조차 ‘대안 사실’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언론과 전쟁 중”이라고 했으나, 정부 주장을 검증하고 대중에 알리는 언론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워싱턴포스트는 백악관 언론 브리핑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보도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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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틀간 워싱턴의 모습은 분열된 미국의 미래를 예고했다. 설레임과 기대보다는 다가올 낯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이 넘쳤다.

 

트럼프가 취임한 지난 20일(현지시간)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아침 7시쯤 도착한 워싱턴 외곽의 전철역. 예상 밖으로 취임식이 열리는 연방의회 의사당 앞마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의회 앞마당에 모여든 축하객들 중에는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글을 세긴 빨간 모자를 쓴 이들이 여럿 보였다. 조지 워싱턴의 고향 버지니아주 마운트버논에서 왔다는 제리 피츠제럴드(49)는 “오늘은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라며 “트럼프는 미국의 일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장담했다.

 

10시가 넘으면서 뒷편 내셔널몰이 인파로 채워졌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 첫번째 취임식도 취재했다는 한 외국 기자는 “8년 전의 절반”이라고 귀띔했다. 광장 양쪽 대형 스크린에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이 비쳤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가 소개되자 ‘우’하는 야유가 나왔다.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녀를 가둬라’는 외쳤다. 낮 12시, 21발의 예포가 새 정권의 출발을 알렸다. 트럼프는 취임연설에서 “공장은 묘지처럼 흩어졌고, 갱단과 범죄와 마약이 미국인의 생명과 잠재력을 앗아가고 있다”며 미국의 현실을 “학살”이라고 했다. 이제 “미국 것만 사고 미국인만 고용하자”고 말했다. 겨울비를 맞으며 백인 민족주의에 열광하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트럼프의 연설을 듣자니 한기가 느껴졌다.

 

시내에는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집결했다. 15번가 근처에서 만난 제임스 라이트(32)는 “인종주의자 트럼프는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이민은 미국을 강하게 한다. 바보같은 벽은 쌓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밤까지 반(反)트럼프 시위가 계속됐고, 2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다음날에는 ‘위민스마치(여성들의 행진)’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50만명이 거리를 활보했다. 이들은 “나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지 말해달라”는 선창에 “이것이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화답했다. 미국 언론들은 곳곳의 집회에 참석한 인원이 100만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8시20분쯤 내셔널몰에 가까운 랑팡플라자 지하철역에서는 행진 참가자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나왔다. 시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지하철 이용객은 27만5000명, 전날 취임식 때의 19만3000명보다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도 걷혔다. 영화배우이자 활동가인 아메리카 페레라가 무대에 등장했다. “우리의 존엄과 인격, 권리가 공격받고 있으며 증오와 분열의 집단이 어제 권력을 이양받았다!” 영화배우 스칼릿 요한슨, 가수 마돈나도 뒤따라 무대에 올랐다.

 

오후부터 시작된 거리 행진은 의사당 부근 3번가를 따라 백악관 방향으로 몇 ㎞에 걸쳐 이어졌고 골목마다 인파가 넘쳤다. 전날 트럼프가 축하 퍼레이드를 한 페실베이니아애비뉴는 분홍색 물결이 흘렀다. 트럼프인터내셔널호텔 앞에는 시민들의 메시지를 담은 팻말들이 쌓였다. ‘용감한 사람은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시위 참가자 캐서린 레일리(55)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여성권과 평등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라고 했다. 스타벅스 매장 유리창을 깬 시위대도 있었다지만 시위는 대체로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가족 단위 참가자들과 어린 학생들도 많았다. 고등학생 에린 벨(16)과 매들린 래이포드(15)는 “미국이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보여준 날”이라며 “함께 하면 강해진다. 우리는 함께 저항할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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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의 시대가 지나갔다. 제44대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오는 20일 백악관을 떠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간다. 워싱턴의 길도 잘 모르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오바마는 ‘담대한 희망’이란 메시지와 페르소나만으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백인 주류에 전혀 주눅들지 않는 40대 흑인 정치신인의 생명력 넘치는 연설은 미국인들을 매료시켰다. 오바마는 미국의 통합, 평등 그리고 정의의 상징이 됐다. 오바마는 2008년 대선 승리 후 이렇게 약속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게 하고, 아이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번영을 회복하고 평화의 대의를 증진하고, 아메리칸드림을 다시 요구하고, 우리는 하나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재확인할 때다.”

 

8년이 지난 미국의 현실을 보자. 금융위기 상황에서 집권한 오바마는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았고, 파산 직전의 자동차산업 등 미국 제조업도 살려냈다. 2009년 1월 7.8%였던 실업률은 2016년 12월 4.7%로 떨어졌다. 소비자신뢰지수는 같은 기간 37.4에서 113.7로 급증했다. 마이너스 2.8%였던 경제성장률은 3.5%로 올라갔다. 건강보험 개혁으로 보험 미가입자는 4900만명에서 2980만명으로 줄었다. 14만명이 넘던 이라크 파병 규모를 5200명으로 줄였다. 경제는 좋아졌고 평화는 늘어났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왜 정권교체를 선택했을까. 왜 민주당을 버렸을까.

 

지난해 미국프로야구(MLB) 월드시리즈에서 108년 만에 우승의 한(恨)을 푼 시카고 컵스 선수단이 16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 있는 백악관을 방문한 가운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컵스 구단이 선물한 숫자 '44'(제44대 대통령임을 의미)가 박힌 유니폼을 들어 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갤럽은 지난 9일 오바마 정부 8년의 성과를 평가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놨다. 미국인들은 오바마 집권 동안 19개 정책 분야 중 14개가 후퇴했다고 답했다. 경제가 개선됐다는 답변은 42%로 퇴보했다는 응답 36%보다 조금 많았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늘었다는 답변은 48%로 개선됐다는 응답 14%의 3배를 넘었다. 인종갈등은 심해졌다는 답변이 52%로 완화됐다는 응답 25%의 두 배를 넘었다. 세계 속 미국의 위상도 퇴보했다는 평가가 높아졌다는 평가보다 19%포인트나 많았다. 실제 통계를 봐도 오바마 정부에서 실업률이 줄어든 것은 구직포기자가 늘면서 경제활동참가율이 역대 최저로 떨어진 데 기인한 면이 적지 않고, 소득불평등 지니계수는 역대 최고인 0.48로 올라갔다.

 

오바마의 약속은 미완이다. 그가 말한 희망과 변화는 미국인들의 삶에 녹아들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을 오바마의 실패와 연결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 광풍에서 약자들을 보호하지 못했고 결국 반동주의의 파도가 유럽을 지나 미국까지 밀려오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디언의 개리 영은 “투표장으로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오바마 동맹’인 흑인, 젊은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희망이 충족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런던리뷰오브북스의 편집자 애덤 샤츠는 뉴욕타임스에서 “오바마의 계몽주의적 세계주의는 점점 더 아나키즘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어렵게 제도화한 성과마저 트럼프에 의해 초토화될 처지다. 자신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기반은 미약하다. 집권 초기 2년을 제외하면 줄곧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시달리느라 협치의 전통을 만들지도 못했다. 유산을 지켜줘야 할 민주당은 역대 가장 무기력해졌다. 오바마 집권 기간 민주당의 하원 의석은 62석, 상원은 10석이 줄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도 10명 줄었다.

 

오바마는 그래도 낙관적이다. 그는 지난 14일 퇴임연설에서 자신이 물러나는 정치의 무대 위로 민주주의의 수호자 ‘시민’을 불러올렸다. 그는 특히 “이타적이고 창조적이고 애국적인 젊은이들, 공정하고 정의롭고 포용적인 미국을 믿는 그들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당파주의와 인종주의에 물들지 않은 정의로운 젊은 세대가 미국의 퇴행을 막고 진보의 이상을 지켜줄 것이란 희망이다. 오바마의 진정한 유산은 어쩌면 희망 그 자체일지 모르겠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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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슈머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9일(현지시간) 다수당이자 곧 집권당이 될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다. 8년 전인 2009년 2월 버락 오바마 정권 초대 내각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매코널이 집권당인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속도전으로 밀어붙이지 말라며 보냈던 편지를 수신자와 발신자 이름만 바꿔서 되돌려보낸 것이다. 공화당이 야당 시절 요구한 원칙은 지켜달라는 뜻이다.

 

매코널의 편지에는 인사청문회를 열기 위한 조건 8가지가 담겨 있다. 후보들에 대한 연방수사국(FBI)의 배경 조사와 정부윤리청(OGE)의 서류심사 결과가 청문회 개최 공지 전에 위원회에 전달돼야 한다는 게 1·2번이다. 내실 있는 청문회를 열기 위한 야당의 요구 조건들이었다.

공화당은 이제 입장이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 출범에 맞춰 최대한 많은 각료를 임명해야 한다. 매코널은 민주당의 요구를 “백악관과 상원까지 잃어버린 절망감 때문”이라고 깎아내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시카고의 대형 컨벤션센터 매코믹 플레이스에서 고별 연설을 하고 있다. (시카고 AP=연합뉴스)

 

공화당의 일방통행은 민주당의 반발을 살 만하다. 10일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 후보자 등을 시작으로 이번주에만 9명의 청문회가 몰려 있다. 게다가 9명 중 4명이 핵심 금융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OGE의 검증이 이뤄지지 못했다.

 

인사청문회 속도전은 민주당이 자기 발등을 찍은 결과이기도 하다. 2009년 당시 소수당이 인사청문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건 필리버스터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당이 필리버스터로 인사에 계속 딴지를 걸자 민주당은 다수 의석으로 2013년 내각 인사 관련 필리버스터를 금지시켰다. 다수당의 일방통행을 막을 수단을 스스로 없앤 것이다. 슈머의 편지는 공화당에 ‘불만’으로 묵살당해도 뾰족한 수가 없는 민주당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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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미국 대선을 지켜본 입장에서 올해의 상징을 꼽는다면 당연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다. 트럼프는 그 어떤 검증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됐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라며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트럼프와 함께 또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언론의 실패다. 언론의 실패는 트럼프 승리와 동전의 다른 면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들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측했으니 민심을 읽지 못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없이 실패했다. 주류 언론들은 백인 노동자 계급의 저변에 흐르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민주당 지지자들이 클린턴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몰랐다.

 

언론의 실패는 이것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99%의 언론이 주장하고 근거를 제시했지만 유권자들은 듣지 않았다. 언론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진짜 실패’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의 편집장 수전 글래서는 대선 후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발표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널리즘의 미래와 민주주의에서의 역할에 대해 존재론적 두려움을 갖게 됐다. 2016년 미디어 스캔들은 기자들이 미국 대중에게 전달하지 못한 데 있지 않다. 스캔들은 그들이 보도를 했고,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유권자들이 사실(facts)에 근거한 기성 언론들의 보도를 무시하고 사실을 무시하는 악의적 짜깁기인 ‘가짜뉴스(fake news)’를 더 잘 믿는다면 민주주의 과정 특히 정치에서 언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뒤편 왼쪽에서 두번째)가 선거본부장을 맡았던 켈리언 콘웨이(뒤편 왼쪽) 등과 함께 11월 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본사를 방문해 경영진과 칼럼니스트,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뉴욕 _ AP연합뉴스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말하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사전은 그 개념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객관적 사실이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에 대한 호소보다 영향력을 더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실검증(fact checking) 블로그에서 트럼프는 4점 기준 ‘피노키오 척도’에 3.4를 받아 역대 최고 기록을 깰 정도로 거짓말과 근거없는 주장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선택받았다. 언론이 트럼프의 성추행 자랑 발언을 공개하고 소득세 회피 사실을 고발했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에는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1967년 발표한 에세이 ‘진실과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쟁이는 대중의 이익과 기쁨 그리고 기대에 맞게 사실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설득력 있을 수 있다.” 트럼프는 기후변화가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기 위한 중국의 날조라고 주장했다. 자유무역협정을 미국에 유리하게 다 바꿔놓고, 자동화로 사라진 일자리도 되돌려놓겠다고 허풍을 쳤다. 유권자들은 현실화할 수 없는 그의 약속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자의 관점만이 유효하다고 설파한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까지 등장시켰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 진실과 거짓을 가를 신의 관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동화가 가혹한 현실을 이긴다.

 

탈진실의 시대에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나. 시민의 진실 판단을 돕기 위한 사실 제공 역할을 못한다면 저널리즘의 존재 근거는 뭔가. 언론은 어떻게 시민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폴리티코의 베테랑 기자 글렌 스러시는 한 토론회에서 트럼프가 거짓을 무기화했듯이 언론은 사실을 무기화해야 한다며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는 사실로 감싼 벽돌을 사람들의 창문 안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 2017년은 어느 때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존재 이유를 시험하는 한 해가 될 듯하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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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께 드린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민생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때 한 약속이다.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살아온 그가 민생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최소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대통령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대통령이었다. 국가와 국민만 생각하면서 일할 줄 알았다. 생각의 올바름과 능력의 뛰어남은 의심했지만 노력하려는 마음만은 인정하려 했다.

 

그는 이제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국민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쫓겨날 처지다. 전국에서 200만 촛불이 그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4년 만에 상황이 천양지차로 뒤집어졌다. 무슨 짓을 해도 지지하던 영남지역 어르신들의 마음도 돌아섰다. 신뢰가 추락했다. 믿었다가 배신당한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간 후 관저 히키코모리형 근무를 하고, 대통령의 권능은 최순실이 시키는 심부름을 하는 데 쓰면서 지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돌아선 민심은 무섭다. 지지율 4%라는 신기록도 수립했다. 이제 그의 표정에서는 사이비종교 신자 같은 불편한 독선만 보인다. 

 

지지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순회연설을 시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연설하고 있다. Getty Images이매진스

 

미국인들은 최근 새 대통령으로 부동산 개발업자 도널드 트럼프를 뽑았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결과였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구호를 앞세워 미국 주류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세계화의 피해자인 백인 노동자계급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주겠다는 약속의 힘은 강했다. 성폭행 시도를 자랑하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속물이란 소리를 들을까봐 조용히 투표장에 나간 숨은 트럼프 지지자(샤이 트럼프)도 많았다.

 

대선 캠페인 기간에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의 쇠락한 작은 도시 문타운십에서 만났던 50대 트럼프 지지자 제프 레이는 “이번이 미국의 마지막 기회”라며 트럼프가 자신들을 구원할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레이의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다수다. 트럼프가 운영하는 미국의 미래 예측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미국인들, 특히 트럼프를 열렬 지지한 백인 노동자계급은 대통령에게 배신당할 가능성이 높다.

 

배신은 이미 시작됐다. 초대 내각은 장관들의 재산을 합하면 40조원이 넘는 ‘갑부 내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수천억원을 가진 갑부들이 노동자들의 간난한 삶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워싱턴과 월스트리트의 기득권을 정리하겠다던 ‘고인 물 빼기’ 약속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 자녀들에게 재산관리를 맡긴다지만 그들이 권력을 사업에 활용하지 못하게 막을 방화벽은 전혀 없다. 건강보험개혁법 ‘오바마케어’ 폐지는 노동자들의 발등을 찍을 것이다.

 

2013~2015년 오바마케어 덕분에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1300만명이 구제됐고, 그중 800만명 정도가 대졸 미만의 백인들이었다. 이들 다수는 트럼프를 지지했고, 내년부터는 보험 없이 불안하게 지내거나 더 비싼 새 보험에 들어야 한다.

 

트럼프는 기업의 해외 이전을 막겠다며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지금 같은 방식으로 2000년 이후 사라진 제조업 일자리를 회복하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꼬집는다. 트럼프 승리를 맞힌 앨런 릭트먼 아메리칸대 교수는 탄핵 가능성도 제기했다. 그는 “트럼프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거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탄핵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지자들이 대통령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게 안팎으로 갈등을 키우고, 분노를 표출할 공공의 적을 찾아내는 분열의 정치를 하게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주연 리얼리티쇼는 이제 막 시작됐고, 결말은 아직 열려 있다. 정치권과 시민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트럼프 정권의 운명은 지금 생각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이번에도 전문가들의 예측이 빗나가기를 바란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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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북한 핵 문제는 대선후보 TV토론의 질문으로 등장할 정도로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꽤 중요한 이슈로 다뤄졌다.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만큼 대선을 앞둔 워싱턴 조야에서도 다양한 대북정책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전환기 신드롬’이라 부를 만하다. 정권교체기를 맞아 전문가들과 당국자들이 차기 정부 대북정책 방향에 대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말이다.

 

한쪽 극단에서는 북한 핵미사일 등에 대한 선제타격론이 꿈틀거린다. 지난 9월16일 마이클 멀린 전 합참의장이 “북한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에 접근하고 미국을 위협한다면 자위적 측면에서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시작됐다. 힐러리 클린턴 집권 시 국방장관으로 유력 거론되는 미셸 플루노이도 “북한이 핵·미사일로 위협한다면 모든 선택지를 검토하는 방안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대쪽에서는 대화론이 제기된다. 우드로윌슨센터의 제인 하먼 소장은 지난달 2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동결을 목표로 미국이 직접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특사는 북한은 2020년까지 1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라며 북·미 간 “대화의 실마리를 찾는 게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선제타격’ 대 ‘북·미대화’로 방향은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이들 제안의 공통점은 대북정책의 변화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만간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반영이자, 대북 제재와 중국 역할론에 기댄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는 북한 핵개발을 막을 수 없다는 성찰의 결과다. 오바마 정부 8년간 북한은 4번의 핵실험을 하며 핵능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미국 외교협회(CFR)가 지난 9월 발표한 정책보고서는 “전략적 인내 정책은 북한 도발의 위험한 악순환을 제지하지도, 동북아 안정을 확보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와중에 한국 정부는 느긋하기만 하다.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의에서 한국 정부의 초점은 미국의 확장억제력 구체화에 맞춰졌다. 미국의 방위 공약으로 한국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대북 제재와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서 전환기에 대한 긴박감은 찾아볼 수 없다. 외교부는 대북 대화론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선제타격론은 원론적 차원의 전략적 발언일 뿐이란 태도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음에도 한국 정부는 기존 정책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관성에만 매달리고 있다. 오소리 굴 앞에서 연기만 피우며 오소리가 못 참고 뛰쳐나오기를 기다리는 식의 구태의연한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통령 말처럼 정말 머리에 핵을 이고 살 수 없다면 좀 더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제재 수위는 높이면서 대화 창구도 열어가는 복합적인 접근은 왜 안되는가. 언제까지 중국에만 기댈 것인가. 제재 효과가 없는 것은 중국의 비협조 때문이라며 중국 역할론만 외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일 뿐이다.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금 교차로에 서 있다. 물론 정권이 바뀐다고 미국의 대북정책이 한순간에 90도로 방향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항공모함은 방향을 한번에 틀 수 없다. 서서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진로를 바꾼다.

 

미국이 대화 기조를 선택하고 압박만 강조하던 한국 정부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구도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최악은 미국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포기하는 경우다. 한번 방향을 튼 항공모함은 되돌리기 어렵다. 미국 신정부의 대북정책이 자리 잡는 과정을 정밀하게 살피고 그 방향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맞춰질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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