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일본으로 부임할 때 새로 받아온 노트북 컴퓨터의 자판 중에 ‘ㅇ’과 ‘ㅂ’ 부분이 유난히 반질반질하다. 풋, 웃음이 나온다. ‘아베’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두드려댔으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부임 첫날 쓴 첫 기사에도 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렇다. 나는 ‘도쿄특파원’이 아니라 ‘아베특파원’이었다.

 

돌이켜보면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본은 ‘아베의 세상’이다. 2012년 말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른 그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2013년 말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아베 극장’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고노담화의 뼈를 발라낸 아베담화, ‘전쟁하는 나라’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그리고 이를 반영한 안보법 제정 등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때마다 한국 언론은 ‘아베의 폭주’를 운운하면서 떠들어댔고, 그 한복판에 나도 있었다. 한국 사회는 ‘아베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일본이 위험해지고 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자판의 ㅇ과 ㅂ은 그래서 날이 갈수록 반질반질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아베의 기세는 세계로 향했다. 지구를 부감(俯瞰)한다는, 그의 광폭 행보는 세계를 넘나들었다. 버락 오바마를 히로시마로 불렀고, 자신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가서 ‘화해의 제스처’를 연출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별장에 가서 골프를 치는 그를 세계는 주목했다.

 

그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는 도쿄 등 일부 대도시와 대기업을 위한 잔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학교 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의 취업률은 97%를 넘었다. 2015년 9월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는 경쟁 후보를 주저앉히고 ‘아베 1강’의 성을 쌓아갔다. 지난 3월 자민당은 아베가 3년 더 총리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당칙을 바꿔줬다. ‘아베의 세상’은 계속된다는 얘기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했고, 국민들의 꿈과 희망은 그 배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학교 문을 나선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헬조선’이었다. 얼마 전 ‘한국’이라는 배의 선장은 국민들의 힘에 의해 끌려 내려왔다.

 

요즘 일본에서는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결국은) 지는 벚꽃(散る櫻殘る櫻も散る櫻)’이라는 구절이 회자되곤 한다. 에도시대의 한 승려가 남긴 이 말은 고령사회의 아픔을 그린 소설 <끝난 사람(終わった人)>에 인용돼 화제가 됐다. ‘지금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이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진다’, 대략 그런 뜻이다.

 

그렇다. 결국 다 진다. 그리고 모든 권력자는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 5년 임기 정도는 무난하게 채울 것 같던 박근혜는 4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왔다.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진핑이나 블라디미르 푸틴도 결국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국제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아베는 어떨까. 60%대를 유지하던 그의 지지율이 ‘아키에 스캔들’ 이후 흔들리고 있다. 아베가 이 난관을 극복하고 2021년까지 총리 자리를 지킬 수도 있고, 그 전에 강판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아베를 뛰어넘어야 한다. 아베와 일본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우리는 그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된다. 일본을 통해 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일본 그 너머의 세상을 보고 걸어가야만 한다. ‘지금의 일본은 5년 후, 10년 후 한국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오래전 어떤 학자의 분석은 지금도 자주 맞아떨어진다. 아베에 매몰되지 않는 시각을 갖는다면, 지금의 일본을 통해 우리의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도쿄특파원들의 자판은 ㅇ과 ㅂ이 아닌, 다른 글자가 더 반질반질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아베특파원’은 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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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사인(私人)이다.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 몹시 불쾌하다.”

지난 1일 열린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버럭 화를 냈다. 자신의 부인인 아키에(昭惠)가 명예교장으로 있던 사립초등학교의 재단이 국유지를 헐값에 매입한 의혹과 관련해 야당 의원들이 아키에의 행동을 질타한 데 따른 것이다. 아베는 부인이 아무런 공직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내세우면서 아키에의 행동을 ‘사인’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일본 국민이나 야당 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퍼스트레이디인 아키에가 국제사회의 외교무대에까지 나가 활동하는 등 공인(公人)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소속 공무원 등이 아키에의 이런저런 일들을 거들고 있는 것도 그를 사인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아키에는 우익 성향의 이념을 주입시켜온 사학재단 소속 학교의 명예교장직으로 있으면서 강연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개교가 예정된 학교의 홈페이지에는 아키에의 인사말까지 올라와 있었다. 많은 일본 국민들은 아키에가 현직 총리의 부인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었다면 해당 재단이 아키에를 명예교장으로 임명했겠느냐고 묻는다. ‘총리 부인’이라는 아키에의 신분이 이 재단으로 하여금 9억5600만엔(약 96억3542만원)짜리 국유지를 1억3400만엔이라는 헐값에 살 수 있게 한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아키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의혹은 사실상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인’처럼 처신하면서 빚어진 것이다. 아키에가 일국의 총리 부인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 즉 ‘사인’이었다면 그가 명예교장으로 활동한 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왼쪽)가 11일(현지시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부인 아키에 여사와 함께 미국 플로리다주 딜레이비치에 조성된 일본식 정원 박물관인 모리카미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딜레이비치 _ AP연합뉴스

 

한국에서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국정을 농락한 최순실은 누가 봐도 ‘사인’이다. 그가 한때 유치원 원장으로 일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공인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오랜 기간 국정을 쥐고 흔들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행위나 정부 부처의 주요 인사를 임명하는 행위 등은 사인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 결과 등을 보면 최순실은 그런 행위를 한 것은 물론 국정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의 업무가 사인에 의해 좌지우지된 꼴이다.

 

아키에와 최순실의 사례를 자세히 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총리와 대통령이라는, 두 나라에서 최고의 책임을 요구받고 있는 공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아직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베 총리는 자신의 부인이 유치원생들에게 “아베 힘내라”라는 구호까지 외치게 하는 우익 사학재단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알고도 묵인했을 수 있다. 아니 은근히 즐겼을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최순실 국정농단의 피해자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국정을 최순실의 손에 넘겨주고 자신은 피부미용 등 엉뚱한 일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유명인 등을 공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디까지가 공인이고 어디까지가 사인인지에 대한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법적으로 딱 떨어지는 규정도 없다. 공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사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답은 분명하다. 공인은 가족이나 지인 등 측근들을 확실하게 관리하고, 사인은 공인의 영역을 넘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인을 위장한 공인, 안하무인의 사인들이 나라를 뒤흔드는 일 따위는 없어질 것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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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경제규모가 세계 1·3위인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캐나다·멕시코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TPP가 자국 경제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협정에 온갖 힘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핵심파트너인 미국 쪽의 상황이 급변했다. 오바마의 뒤를 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취임하자마자 TPP 탈퇴를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와 트럼프가 지난 주말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베는 이 자리에서 트럼프에게 강력한 항의를 해야 맞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12개 나라가 그 긴긴 나날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것을 하루아침에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말이라도 한번 해야 했다. 그러나 아베는 트럼프에게 TPP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두 정상은 결국 공동성명에서 ‘미국이 TPP에서 탈퇴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12개 나라가 목표점으로 하던 ‘골대’의 위치가 미국에 의해 바뀐 것이 분명한 데도 아베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 아베 신조(사진) 내각의 이나다 방위상은 5일 NHK 프로그램 '일요토론'에 출연, 전날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일본 주변 환경이나 아시아태평양 지역 현황에 대해 인식을 완벽하게 공유했다"며 "헌법의 범위에서 일본 자체 방위력의 질도 양도 공고하게 해 나가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나다 방위상은 전날 회담에서 미군에 의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지지한다고 표명했지만 "자위대가 거기에 가는 것은 아니다. 방위협력과 훈련에서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AP 연합뉴스

 

도쿄(東京)도 신주쿠(新宿)에는 도쿄한국학교가 있다. 일본 내 한국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이 학교는 공간이 부족해 입학 희망자를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안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도쿄도지사는 자국 고교가 쓰던 부지를 한국 측에 대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선거에서 당선된 후임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는 “여기는 도쿄이고 일본이다”라면서 부지 임대 계획을 백지상태로 돌려버렸다. 일본의 지자체 장이 바뀌면서 ‘골대’가 옮겨진 사례로 기록될 수 있지만, 한국 정부나 일본 내 한국인들은 고이케의 행위를 드러내놓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모처럼 개선 분위기를 보여온 한·일관계 등을 고려해 말을 아끼고 참았다.

 

그런데 아베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지난해 말 시민단체 등이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운 뒤 보여준 아베의 태도는 지극히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한·일 간에 진행되던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시켰고,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를 귀국시켜버렸다. 아베는 또 2015년 말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10억엔(약 101억원)을 한국 측에 낸 점을 내세우면서 소녀상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했다.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으로 온 지 1개월이 지났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베는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을 이전 또는 철거해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한국 정부가 아직까지 들어주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에 소녀상이 생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인 상황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부산소녀상 설치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다.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소녀상을 세운 것이다. 미국 정부가 TPP 탈퇴를 결정한 것이나 도쿄도가 학교부지 대여 방침을 백지화한 것은 골대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민단체의 부산소녀상 설치는 골대 이동과 상관이 없다. 주체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베가 보여준 강경 자세는 향후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 선거까지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한국에 새로 들어설 정권이 한·일 위안부 합의를 없었던 일로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본때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우익들의 역사수정주의적 태도가 위안부 문제를 키워왔다는 점에서 이런 막무가내식 조치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베는 알아야 한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측의 보다 명확한 사죄와 관련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소녀상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상황이라는 얘기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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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옛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의미와 함께 앞으로의 인류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같은 비극이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소녀상이 한국은 물론 미국·호주 등 해외 곳곳에 자꾸만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는 부산의 일본총영사관 앞에도 설치됐다. 일부 지방의원들은 독도에도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소녀상을 볼 수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일본에도 소녀상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조각가 김서경·김운성씨 부부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 때 맨 처음 제작한 소녀상이 현재 도쿄에 있다. 김씨 부부가 ‘소녀상의 원형’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소녀상은 그러나 언제 어디서 가해질지 모르는 테러의 우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채 누군가의 집 서재 등에 숨겨져 있다.

 

일본 정부가 철거를 요구한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7일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소녀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 일본이야말로 소녀상 건립이 꼭 필요한 곳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일으킨 당사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어디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의 뜻을 담은 메모리얼(기념물)을 만들겠다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독일이 베를린 도심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건립하고 자신들이 과거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계속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은 위안부 관련 메모리얼을 설치하기는커녕 피해국가인 한국 등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베 정권은 최근 부산 일본총영사관에 소녀상이 설치된 이후 주한 일본대사 등을 일시 귀국시키는 강공을 이어가고 있다. 아베 정권은 2015년 12월 한·일 합의대로 10억엔(약 103억원)을 출연한 것 이외에 과거 잘못에 대한 ‘사과의 뜻’을 담은 총리 명의의 편지 발송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아베 내각 각료들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이어가는 등 피해자들의 상처를 후벼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의 상당수 지식인들조차 위안부 문제의 가해국인 일본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거나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또 아베 정권의 그런 태도가 ‘새로운 소녀상’을 부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아베 정권이 소녀상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결국 소녀상이야말로 일본이 감추고자 하는 과거 잘못을 다시 들춰내고 반성을 촉구하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비인도성 등 역사가 담고 있는 진실을 아베 정권 측에 다시 각인시켜주는 데 소녀상만 한 것이 없다는 얘기다.

 

타국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에 골몰하고 있는 아베 정권이 자국에 위안부 관련 메모리얼을 세울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러나 과거 잘못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는 상태에서 소녀상 철거만 무작정 요구하는 아베 정권의 ‘야리카타’(일처리 방식)로는 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소녀상을 없앨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구상에 평화의 소녀상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일본이 먼저 나서서 반성의 뜻을 담은 메모리얼을 자국의 어딘가에 설치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한 시민운동가는 적합한 설치 장소로 우에노(上野)공원·도쿄(東京)역 앞·국회의사당 앞 등을 거명했다.

 

아베 총리 등 일본 지도자들이 그 메모리얼 앞에서 과거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이나 미국 등 각국에서 일고 있는 소녀상 건립 붐은 자연스럽게 누그러질 것이다. 그리고 일본대사관이나 총영사관 앞의 소녀상도 보다 안전한 장소로 옮겨져 ‘평화의 메신저’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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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2015년 1월1일 ‘신년소감’에서 내놓은 이 말은 일본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이 과거 일으킨 전쟁이 아시아 지역 국가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향후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거 역사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선명하게 드러내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대한 일종의 견제로 풀이되면서 한국·중국 등 주변 국가로부터도 큰 관심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왕이 일본의 패전 70주년이 되는 시점을 앞두고 만주사변을 언급한 것에 특히 주목했다.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할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류탸오후(柳條湖)에서 일본 군대가 철도를 폭파해 놓은 것을 일본은 중국의 짓이라 뒤집어씌우면서 전쟁을 벌였다. 일본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아시아 국가들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일본은 패전 이후 미국과 벌인 태평양전쟁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아시아 지역에 끼친 피해는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출처: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의 이런 발언을 접한 일본의 한 대학 교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일왕이 직접 거명하면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 것은 처음”이라면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을 무시한 채 전쟁의 길로 가려고 하는 아베 총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일왕의 의도가 느껴진다고까지 평가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그해 8월15일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된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직접 밝혀 다시 한 번 관심을 모았다. 일왕은 이날 “과거의 대전(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향후 전쟁의 참화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전날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아베담화)’에서 과거 총리들이 언급한 반성과 사죄로 자신의 뜻을 대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즉위 이듬해인 1990년부터 매년 신년소감을 발표하던 아키히토 일왕이 올해는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83세인 일왕은 지난 2일 황거(皇居)를 찾은 일반인 방문객들에게 “우리나라와 세계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신년인사를 했지만, 별도의 신년소감은 발표하지 않았다. 궁내청은 앞서 일왕의 업무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올해부터 신년소감을 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왕이 “점차 신체가 쇠약해져서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라면서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일본은 ‘아베 1강’ 체제로 완전히 굳어지고 있다. 아베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제1야당인 민진당이 10% 이하의 지지율 속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을 정도로 야당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언론도 ‘아베의 얼굴색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약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일본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일왕의 한마디 말은 아베 총리도 함부로 여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왕이 ‘평화’의 메시지를 가득 담아 발표해온 신년소감을 내지 않기로 함에 따라 아베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견제자’는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국민의 고령화 문제가 사회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왕실의 고령화가 일본 사회에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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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총리로서 진주만을 방문하는 것은 최초.”(5일 일본 정부 관계자)

“현직 총리로서 애리조나기념관에서 (희생자를) 위령(추도)하는 것이 최초.”(7일 외무성 외무보도관)

“(현직 총리가) 미국 대통령과 함께 진주만을 방문하는 것도 최초.”(26일 정부 대변인)

 

일본 정부가 27일(미국 시간)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사진)의 ‘업적 쌓기’로 분주하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 5일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이 결정된 이후 ‘현직 총리로서 최초’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허풍이었다. 1951년 9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한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총리(1956년 10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1957년 6월) 등이 잇따라 진주만을 찾은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자 외무성의 가와무라 야스히사(川村泰久) 외무보도관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현직 총리가 애리조나기념관에서 추도하는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26일 아베의 출국을 앞두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자신의 업적을 쌓기 위해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의 흔적마저 지우려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외조부의 과거 행적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최초’ 등의 업적에 매달리는 이유는, 개헌을 최종 목표로 설정한 그가 ‘역사적인 총리’임을 강조하고 싶어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6일로 출범 4주년을 맞은 아베 정권은 현재 6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58%로 나타났다. 한때는 기시 전 총리의 외손자로서 ‘가문 정치의 후계자’ 혹은 ‘도련님’ 이미지가 컸지만 이제 아베는 장기집권을 바라보며 외조부를 능가하는 치적을 쌓으려 애쓰고 있다. 자민당은 3년씩 2연임만 가능했던 총재 자리를 3년씩 3차례까지 연임할 수 있도록 최근 당규를 바꿔 아베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아베 1강(强)’의 리더십 구조 속에서 그가 내년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 이를 바탕으로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개헌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진주만 방문에 굳이 거짓말까지 보태가며 ‘최초’라는 타이틀을 붙이려 애쓴 데에서 보듯, 아베의 최대 치적은 외교다. 올해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평화기념공원 헌화를 이끌어냈고, 한국과는 논란 많은 위안부 합의를 이뤘다.

 

지난 16~1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숙원이던 북방영토 반환을 약속받지 못해 여론이 악화됐다. 그러나 푸틴이 10년 만에 도쿄를 방문하게 한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지금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아베 정권의 앞날은 경제에 달려 있다. 엔저를 기조로 한 아베노믹스 덕분에 기업 이익이 늘면서 대기업들이 임금인상과 고용 확대에 나선 것은 아베에게 힘이 됐다.

 

그러나 아베가 애써 끌어내린 엔화는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같은 국제적인 이슈가 불거질 때면 급반등한다. 주가는 회복됐지만 소비는 4년 내내 살아나지 못했다. 아베노믹스의 약발이 다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미국 덕에 안전을 누리는 일본이 주일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역 면에서도 보호주의로 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아베가 평화헌법을 뜯어고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겠지만, 전통적인 동맹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트럼프 시대 미·일 관계가 아베의 복병이 될 수 있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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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이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10월의 일이다. 일본의 공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은 정권의 방침에 따라 연금투자 기준을 대폭 바꿨다. GPIF는 당시 국내 및 해외의 주식투자 비율을 24%에서 50%로 올리는 대신 국채 등 국내 채권에 대한 투자비율을 60%에서 35%로 내렸다.

 

당시 일본의 상당수 언론과 국민들은 아베 정권과 GPIF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권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살리기 위해 국민의 노후자금에 손을 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엔저를 바탕으로 대기업의 수출을 늘리고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인 아베노믹스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연금 적립금을 주식시장에 쏟아붓게 됐다는 것이다.

 

언론과 국민들은 또 연금기금의 손실을 우려했다. 그런 우려는 GPIF가 2015년에 입은 운용손실만 5조엔(약 51조원)대에 이르는 등 현실로 나타났다. 이후 아베 정권이 연금기금의 주식 투자 비율을 대폭 높인 것이 손실의 주된 원인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국민들 사이에서 “아베 정권이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을 주식 투자로 날려버리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의 공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

 

GPIF의 운용실적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의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 등 시장상황의 변화와 이에 따른 주가의 등락으로 수시로 변하고 있지만, 일본 국민들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 중에 아베 정권이 특정 개인이나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연금 적립금에 손을 댔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가 부양’이라는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정책적 판단’이 연금에 손을 댄 이유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금 논란은 일본의 그것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이 최순실과 그 가족, 그리고 삼성이라는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했다고 보고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있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삼성 편을 들어준 배후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이 최순실을 지원한 것은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보답’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합병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등에 대한 지배력은 강화됐다. 합병 당시 최종 열쇠를 쥐고 있던 것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의 찬성 없이는 합병이 물 건너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국민들의 노후자금으로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사익을 챙기려 했던 것이 사실일까. 삼성 측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양사의 시너지 효과와 미래가치를 위해 한 것이므로 최순실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합병 후 국민연금이 보유한 삼성물산의 주식가치가 하락한 것도, 평가시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손실을 봤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구심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당사자들에게 분명한 답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의 노후자금에 누군가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라 바로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국가는, 사법당국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둘러싼 의혹을 분명하게 해소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건드리려 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것을 도운 사람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였는지를 밝혀내 처벌해야 한다.

 

그게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이 추운 날에도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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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에서 TV를 켜기가 무섭다.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이 나오는 화면에 ‘호스트바’ 출신으로 소개되는 남성의 얼굴이 함께 등장하고 그 사이에 최순실이 보인다. 정유라가 말을 타고 대학에 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기 위해 대형 도표가 동원된다. 진행자 등 출연자들은 기가 막혀서 말을 하지 못하겠다며 혀를 찬다. 대한민국이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화가 치민다. 특히 일본인들과 함께 TV를 볼 때는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은 ‘더러운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래서 채널을 돌려보지만, 5개 주요 민방은 물론 공영방송인 NHK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다루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2014년 4월 도쿄(東京)로 부임한 직후에도 그랬다. 304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이 방송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였다. 한 나라의 최고책임자가 그 엄청난 사고 발생 이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데 대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논조였다. 분(分)·초(秒) 단위로 공개되는 일본 총리의 움직임과 비교하는 보도가 쏟아진 것도 이때다.

 

“한국의 망신은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 시키는군요. 한국 국민들은 훌륭한데….”

 

얼마 전 일본에서 활동하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중국 등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외국 언론인이 최근 몇년 사이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피넛 리턴.’ 2014년 12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의해 발생한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을 일본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사건 당시 일본의 신문·방송 등 언론은 사건의 본질을 관행화된 경영세습, 그리고 오너들의 갑질 등 한국 대기업의 전근대성에서 찾았다. 방송 출연자의 말이나 기사의 행간에서 ‘형편없는 한국’에 대한 조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느낀 모멸감 역시 잊을 수가 없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동영상 파문 때는 또 어땠나. 사건의 진상을 묻는 일본인에게 파문에 대해 설명하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사무실을 찾은 일본 기자와 함께 늙은 재벌 오너의 그릇된 욕망을 마구 비판했지만, 쓰린 속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조현아, 이건희 그리고 박근혜….

최근 몇년 사이 해외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을 창피하게 만든 대한민국의 얼굴들이다. 해외의 생산현장에서, 무역현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묵묵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일그러진 리더들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정점에 박 대통령이 서 있다. 일본의 대표적 언론인 아사히신문은 최근 칼럼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권력·재벌·허영·무녀·남과 여·수험(대학입시) 등 한류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들로 점철됐다고 소개하면서 “이 나라(한국)가 안고 있는 병폐 그 자체”라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대통령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는, 우리 동포들의 그 간절한 호소를 못 들은 척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또 하나의 죄가 추가될 뿐이다.   

 

이런 상황을 그려본다. 박 대통령이 그동안의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세월호 7시간’에 대해서도 하나의 거짓 없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소상하게 밝힌 뒤 깨끗하게 물러난다. 그날 저녁, 한국을 걱정해온 외국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물러났으니, 상처받은 한국인들의 명예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겠네요. 박 대통령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국민과 법의 심판을 받고 나서 한국 국민의 한 명으로 여생을 잘 보내야죠.”

 

됴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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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상징하는 거리 풍경이 있다. 매년 4월1일과 10월1일, 일본의 거리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4월1일을 전후해 상당수 회사와 기관에서는 신입사원들의 ‘입사식’이 열린다. 새내기 사회인들은 이날 주로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아침 출근길, 그들의 얼굴이 미래에 대한 기대와 그에 따른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그날 저녁 거리도 우르르 몰려다니는 신입사원들로 북적거린다.

 

10월1일 전후에도 정장 차림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른바 ‘내정식’을 마친 사람들이다. 상당수 일본 기업들은 이듬해 4월1일부터 일할 신입사원을 6개월 전에 확정하는데 이를 ‘내정’이라고 한다. 입사 예정자들을 불러다 놓고 개최하는 ‘예비 입사식’이 바로 내정식이다. 봄부터 이어진 ‘슈카쓰(就活·취업활동)’를 통해 취업에 성공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시기부터 ‘즐거운 대학생활, 행복한 청춘’을 보내게 된다.

 

대학생의 경우 졸업논문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기가 종료될 때까지 수업에 충실하게 참가하면서 학창생활을 즐긴다. 시간을 내서 국내외로 여행을 가는 경우도 많다. 취업한 회사에 미리 출근하기 위해 교수에게 출석처리를 부탁하는 따위의 일은 흔하지 않다.

 

‘김영란법’으로 일컬어지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한국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운데 졸업 전에 조기 취업한 대학생들의 학점 부여나 출결처리 문제로 여러 가지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대학가는 취업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상당수 대학 교수들은 취업이 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출석을 안 해도 출석처리를 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어려운 취업시장에서 ‘승자’가 된 제자에게 그 정도 배려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곤 했다.

 

그런데 졸업 이전에 취업이 확정된 학생들이 담당 교수에게 출석 인정을 요구하는 행위가 부정한 청탁에 해당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학생에게나, 교수에게나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교육부가 취업한 학생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학칙 개정을 권유하고 나섰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교육부의 이런 움직임은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학원’으로 전락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학은 학기당 16주 전후의 수업을 해야만 한다고 규정해 놓은 교육부가 취업이 확정된 사람은 이 수업을 모두 이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해버린 꼴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이번 기회에 교육의 본령을 되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대학 문을 나서는 그날까지 학업에 충실하면서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청춘을 청춘답게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요 기업이나 기관의 신입사원 입사식을 졸업식 이후로 미루도록 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업·기관이, 최소한 주요 기업·기관만이라도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하는 시점을 각급 학교 졸업식 이후로 미루도록 조정해야만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취업 이전까지의 청춘은 너무나 가혹하다. 초·중·고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 취업을 하기까지 우리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된 학창생활이나 청춘은 없다. 그들에게 마지막 몇 개월이라도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준다는 측면에서라도 기업의 입사식을 졸업식 이후로 미루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청춘을 취업에 바친, 가련한 젊은이들이 고갈된 감성을 채우고 회사에 들어간다면 회사나 기관 측에서도 결코 손해날 일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도쿄|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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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 순수문학상 중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은 여류소설가 무라타 사야카(村田沙耶香·36)는 편의점 점원이다. 무라타는 18년 동안 같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오고 있는 36세 독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편의점 인간(コンビニ人間)>으로 이 상을 거머쥐었다. 편의점은 작가 무라타에게 삶의 터전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편의점에서 매주 3일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일본에는 무라타처럼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다. 정규직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 형태로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프리터’라는 용어까지 존재한다. 


무라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하다. 편의점 등에서 일을 해도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최저임금이 있고, 최저임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올려주려고 노력하는 정부가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2012년 12월 출범 이후 최저임금 인상에 많은 힘을 쏟아왔다. 최저임금을 매년 올려온 아베 정권은 올 들어 최저임금을 사상 최대폭으로 인상했다. 도쿄(東京)지역의 최저임금은 932엔(약 1만409원)이 됐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취업난’이라는 말이 없다.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대졸자와 고졸자의 취업률이 97%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졸업 예정자들은 2~3개 기업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받아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사는 나라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헬닛폰’과 같은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포함한 승자가 차지한 세상을 ‘천국’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세상을 ‘지옥’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도 없다. ‘취직활동’만 열심히 하면 마음에 드는 직장을 잡을 수 있고, 설사 직장을 얻지 못하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3일 서울 상명대학교에서 한 학생이 일자리 본부가 마련된 학생회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대학 졸업자의 절반 가까이가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어두운 나날을 보낸다. 대기업이나 공직·공사 등 안정된 직장을 잡은 사람들은 ‘천국행 티켓’이라도 확보한 듯 좋아하지만, 취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사실상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요즘의 취업시장에서 ‘내년을 기약하라’는 말처럼 잔혹한 말이 또 있을까. 용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 무라타처럼 시급을 받으면서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자리라도 있다면 어떻게 버텨보라고 하겠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천길 낭떠러지뿐이다.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마도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뜻하는 ‘헬조선’과 같은 말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연설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헬조선’ 등의 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질책에서는 이 세상 그 어디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절실하게 삶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에 대한 인식의 결여, 그리고 애정의 결여가 느껴진다.

 

대통령은, 그리고 정부는 ‘헬조선’과 같은 신조어를 비판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일할 곳을 늘리고 그들이 받아야 할 임금을 올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세계가 두려워하는 ‘진짜 헬조선’으로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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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살고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씨는 트램(노면전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194586일 아침,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씨는 당시 원폭 투하 지점에서 약 1.8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던 트램 안에 있었다. 12살이던 그는 트램 덕분에 살아났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씨는 트램을 아주 좋아한다. 트램이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존재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트램이 이용자들에게 최고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과 같은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더없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그는 오랜 삶을 통해서 알고 있다.

 

 

사실 히로시마는 대중교통수단의 전시장 같은 곳이다. 고속열차인 신칸센(新幹線)과 일반 열차가 도심을 지나는 히로시마에는 버스·택시 등 대중교통수단 이외에 트램은 물론 지하철과 고가 방식이 결합된 도시철도까지 있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이 중에서 트램을 최고로 꼽는다. 다른 대중교통수단에 비해 타고 내리거나 환승하기에 편리한 것이 주된 이유다. 무릎이 좋지 않은 씨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등 불편한 지하철과 고가 방식의 도시철도는 단 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구 117만명의 대도시인 히로시마에는 7개 노선에 35.1의 트램이 부설돼 있다. 트램의 연간 수송인원은 5500만명으로 수송인원과 노선 길이 모두 일본 최대 수준이다.

 

지난 5월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갔을 때 트램의 위력을 절감했다. 신칸센에서 내려 히로시마역을 나서자마자 시내를 실핏줄처럼 연결하는 트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거치지 않고 가볍게 걷는 기분으로 올라탄 트램은 오바마의 방문지인 히로시마평화공원까지 편안하게 데려다줬다. 트램은 레일이 설치된 도로를 버스·택시·자가용 승용차·화물차 등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동안 히로시마 이외에도 고치(高知), 마쓰야마(松山) 등 중소도시는 물론 대도시인 도쿄(東京),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트램을 직접 이용해 봤다. 그때마다 일본처럼 고령자가 급증하고 머지않아 인구가 줄어드는 한국에도 트램이 최적의 대중교통수단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절감하곤 했다.

 

최근 한국의 대전시가 시내의 순환형 도시철도를 트램으로 건설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인구 150만명이 넘는 대도시가 핵심 도시철도망을 트램으로 건설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미래를 내다본 결단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트램의 효용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고가 방식의 도시철도로 해야 한다는 등 반대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반대 논리의 핵심은 트램을 건설하는 경우 도로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트램을 설치하면 도로가 막혀서 난리가 날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기우이기도 하지만, 설사 트램 때문에 기존 도로 기능의 일부가 저하되고 차량 흐름이 나빠진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트램의 긍정적인 효과로 보고 싶다. 트램 때문에 도로가 막혀 자가용 운전대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정책의 효과가 되기 때문이다.

 

70년 전 씨의 목숨을 지켜준 히로시마의 트램이 지금은 씨 같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수많은 서민들의 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도시의 교통정책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고 결정해야 한다. 대전시의 이번 결정이 급속한 인구변동을 겪고 있는 한국의 도시들에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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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 기간 동안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연설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타고난 정치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연설은 대중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자민당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아베 총리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7월 3일 도쿄 시내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도쿄 _ 지지·AFP연합뉴스

 

그가 쏟아낸 말들은 청중의 가슴속을 팍팍 파고들었다. ‘아베노믹스 덕분에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늘어났다. 앞으로도 계속 밀어달라는 식의 연설문에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지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몇 마디 단어에 실어 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지난해 그가 미 의회에서 행한 외교용 연설과는 달랐다. 아베 총리의 당시 영어 연설은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다. 부인 아키에 여사에 따르면 그는 밤새 연설 원고를 외우면서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그가 보여준 연설은 여러모로 어색했고 힘도 없었다.

 

정치가 아베는 역시 정치연설회에서 빛이 났다. 노타이 차림으로 연단에 오른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손을 번쩍 치켜들기도 했고,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자신이 지원하는 후보를 소개할 때는 이름을 반복적으로 외치면서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의 연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강조하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과 공산당 등 남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정책과 이념이 다른 두 야당이 힘을 합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적을 공격할 때는 일국의 총리가 저래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 거칠어졌다.

 

어찌 보면 화려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연설을 아무리 듣고 있어도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다. 헌법 개정에 관한 말이 그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개헌 구상만 가득하고, 선거가 끝나면 개헌에 착수하려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유세에서 개헌의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유세를 듣고 나면 아베노믹스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으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개헌을 이루고 싶다면, 개헌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지고 개헌할 테니 밀어달라고도 말하게 된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개헌에 대한 언급은 철저하게 피했다. 개헌을 향한 그의 강한 집념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는 개헌에 반감을 갖는 국민이 다수인 상황에서 개헌 반대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개헌이 아닌 다른 이야기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돌렸다. 개헌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개헌을 이루어내겠다는, 어쩌면 국민의 귀를 속이는 것일 수 있는 그의 전략은 결국 적중했다. 자민·공명 등 연립여당이 대승하면서 개헌세력이 참의원에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해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의 이런 귀속임·눈속임 전략이 통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전후 70년 동안 일본을 지켜온 평화헌법을 한순간에 부숴버리겠다는 그의 구상을 일본 국민들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급해 그의 개헌 의도에 신경쓰지 않았을 수 있지만, 개헌 문제가 핵심 논제로 떠오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임기(20189) 안에 필생의 과업인 개헌을 이루기 위해 나설 것이다. 아베 총리가 중·참의원 3분의 2 찬성을 이끌어 개헌안을 발의할 수는 있지만, 헌법의 개정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국민이다.

 

아베 총리가 국민투표에서도 국민의 눈과 귀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트릭을 쓸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정치가 아베가 이번에는 또 어떤 수를 들고나올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도쿄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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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일본에서 인기 걸그룹 AKB48의 ‘총선거’가 열렸다. 이번 총선거에는 AKB48뿐 아니라 후쿠오카(福岡)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HKT48 등 일본의 각 지역 자매그룹 멤버 272명이 입후보했다. 후지TV의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번 선거에서는 HKT48의 멤버인 사시하라 리노(指原莉乃·24)가 24만3011표를 획득,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AKB48이 8월에 내는 싱글 앨범 곡을 부를 멤버를 뽑기 위해 열린 이번 선거에서는 이 그룹의 기존 싱글 앨범을 구매한 팬들이 투표했다. 득표수 상위 16명에게는 싱글 곡을 부를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됐다.

걸그룹 앨범의 노래를 부를 가수를 인기투표로 선정하는 데 대해 시비를 걸 수는 없다. 걸그룹이 소속된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팬들의 인기를 반영해 앨범을 내는 것은 하나의 마케팅 차원에서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번 ‘인기투표’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도쿄(東京)도지사 선거로 화제를 돌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인구 1300만명의 거대도시인 도쿄의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지사를 일종의 인기투표로 뽑아 오면서 그 폐해가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이후 도쿄도지사를 맡은 인사는 모두 4명인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아오시마 유키오(靑島行男),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이노세 나오키(猪瀨直樹) 등 3명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본의 유명 작가이다. 아오시마는 탤런트와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21일 지사직을 그만둔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는 도쿄대 교수 재직 시부터 TV 프로그램 해설자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알린 유명인이다.


친한파’ 마스조에 요이치 일본 도쿄 도지사_AP연합뉴스



당선될 당시 선거 고시 8~15일 전에 ‘깜짝 출마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경쟁 후보들이 일찌감치 출마의사를 표명하고 선거전에 나선 데 비해 이들 4명은 모두 선거 고시 직전에 출마 의사를 나타냈다. 이들은 결국 작가나 방송활동 등으로 쌓아 올린 유명세를 내세워 짧은 시간 안에 표심을 휘어잡는 방법으로 거대 도시의 수장이 됐다. 유명인의 ‘깜짝 출마’는 후보자의 능력이나 품성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고,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유명인이 나오면 당선된다’는 그릇된 공식만 만들어버렸다.


AKB48의 인기투표와 비슷하게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는 결국 ‘최악의 지사’를 뽑는 결과를 낳았다. 2012년 말 ‘유명작가’의 명성을 바탕으로 선거 고시 8일 전에 깜짝 출마했던 이노세 전 지사는 임기 2년여 만에 정치자금 수수 문제로 낙마했다. 2014년 초 ‘약자를 위한 정치’를 내세우며 선거 고시 9일 전에 출마선언을 했던 마스조에 지사 역시 임기를 절반만 채운 시점에 정치자금 의혹과 공사(公私)를 구분 못 한다는 비난 속에 지사직에서 내려왔다.

이들이 가져온 폐해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우선 선거 비용을 보자. 이들의 중도 사직으로 인해 추가로 실시하게 된 2차례의 선거비용만 100억엔(약 1109억원)에 이른다. 도쿄도의 행정은 어떤가.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 준비나 보육시설 확충 등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마스조에 지사의 돈 문제가 불거진 이후 도정은 사실상 멈춰 있다.

오는 7월31일 새 지사를 뽑기 위한 선거를 치르고, 새 지사가 업무를 파악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까지 도정 공백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4년 후 도쿄올림픽 개최 직전에 도지사 선거를 치러야 하는 혼란도 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새 지사를 뽑는 선거도 ‘인기투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당선 가능성’을 중시하는 각 정당이 지명도를 중심으로 후보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계와 도쿄도민들이 걸그룹 인기투표 같은 지사 선거를 또 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는 ‘학습능력’을 발휘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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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廣島)는 ‘오코노미야키(お好み燒き)’로 유명한 곳이다. ‘오코노미야키’라는 말은 자기가 좋아하는 재료를 자유롭게 넣어 부쳐 먹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이 음식은 우리나라의 부침개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넣는 재료와 만드는 방법, 뿌려 먹는 소스(양념)의 맛 등은 상당 부분 다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가 있는 동안 오코노미야키를 매일 먹었다. 바쁜 일정 속에 빨리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서 주문하면 바로 음식이 나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다녀간 지난 27일 밤에는 히로시마의 명소로 ‘오코노미야키 골목’을 뜻하는 ‘오코노미야키무라(村)’를 찾았다. 오코노미야키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떠올리던 중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라는 빅 이벤트가 만들어진 과정은 히로시마의 명물인 오코노미야키의 그것과 비슷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50분 동안 히로시마평화공원을 찾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안내로 원폭자료관을 10분 정도 돌아봤고, 위령비 앞에서 헌화한 뒤 17분간의 연설을 했다. 일본인 피폭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오바마 대통령은 강 건너에 있는 원폭돔을 잠시 바라본 뒤 귀국길에 올랐다.

‘현직 미국 대통령의 첫 히로시마 방문’이라는 ‘오코노미야키’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의 기획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코노미야키를 만들 때 좋아하는 것을 집어넣듯, 일본은 이번 방문 이벤트에 자신들이 원하는 아이템들을 골라 넣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_연합뉴스

오바마 대통령은 당초 원폭 피해지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폭자료관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측은 지난달 존 케리 국무장관이 거기를 둘러본 사실까지 거론하면서 자료관에는 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오코노미야키를 만들 때 쓰는 ‘주걱’은 일본이 쥐고 있었다. 일본 측은 “오바마 대통령이 참상의 현장을 봐야만 한다”고 우겼고, 관철시켰다. 일본 측은 오바마 대통령과 원폭 피해자들의 대면도 강력히 원했다. 결국 원폭 투하 국가의 대통령과 원폭 피해자들이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피해자를 꼭 껴안고 어깨를 두드리는 장면은 일본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중계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사죄한다’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을 본 상당수 사람들은 ‘사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에 들러 헌화할 것을 원했다. 피해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하는 당일 오전 위령비 앞에 나와 “꼭 들러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단 몇 분만 할애하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발길은 끝내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오코노미야키를 부치는 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위령비에 가지 않은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코노미야키의 주걱 자루를 쥐고 있는 아베 정권이 그것을 원했겠는가.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히로시마 방문은 일본의 전쟁 책임은 접어두고, 미국의 원폭 투하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위령비를 방문하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책임을 다시 들춰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오코노미야키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먹고 싶은 재료를 넣어 만들어먹는 음식이다. 아베 정권이 ‘히로시마 오코노미야키’에 넣고 싶어한 것, 빼고 싶어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단 50분 만에 만들어진 ‘히로시마 오코노미야키’의 맛은 한국인들에게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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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당연히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여기고 본 <엄마 찾아 3만리> <플랜더스의 개> 등 유명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일본제였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내가 느꼈던 배신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창 시절 읽은 상당수 서양 문학 작품이 일본어로 먼저 번역됐다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TV 등 가전제품은 일제가 최고였다. 삼성전자나 금성사(LG)의 TV가 일반적일 때 소니TV가 있는 집에 가면 기가 죽곤 했다. 당시 소니TV는 요즘 독일제 자동차 이상의 고급스러움으로 다가왔다. 2003~2004년 일본에서 생활할 때 일본 가전제품 매장에서 한국의 TV나 냉장고, 세탁기가 싸구려 특판행사에나 나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쓰렸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일본에서 드라마 <후유노소나타>, 그러니까 <겨울연가>가 크게 히트했지만, 일본인들이 한국 상품을 보는 눈은 여전히 싸늘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는 ‘욘사마’ 배용준을 모델로 기용해 일본에서 쏘나타 자동차를 팔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일본의 문화콘텐츠와 가전제품은 한때 자국과 세계시장을 지배했지만 그 힘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글로벌 시장의 소비자들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제품을 내놓고 있는 한국의 TV와 세탁기를 더 선호하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으로 시작된 스마트폰 경쟁에서 한국 제품은 세계 톱 자리에 올랐지만, 일본 제품은 자국 국민들조차 ‘2류’로 여기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일본 전자업계의 간판인 샤프가 해외(대만) 기업에 팔려나간 뒤 바로 1000여명의 노동자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의 가요·드라마·영화 등 문화콘텐츠도 한류에 밀려 맥을 못 춘다.

아베신조 일본총리_연합뉴스


하지만 요즘의 일본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자·문화콘텐츠 등에서 경쟁국에 시장을 내주는 뼈아픈 경험을 한 일본이 미래의 먹거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한발 앞서가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요즘 자율주행자동차, 드론, 인공지능(AI) 분야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올 재팬(all japan)’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자율주행자동차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영화세트장처럼 생긴 자율주행자동차 전용 시험주행도로까지 건설해 주겠다고 나섰다. 도요타·닛산·혼다 등 업계는 자동차의 자율운전에 꼭 필요한 8개 분야에서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일본 정부는 최근 지자체·업계 등과 함께 도쿄 인근에서 드론을 통한 상품 배달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개발에 관련된 국제규칙 제정을 일본이 주도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아직은 ‘블루오션’으로 여겨지는 자율주행자동차나 드론·인공지능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포석이다.

잃어버린 문화콘텐츠 시장을 되찾기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쿨 재팬’ 브랜드로 일본 문화콘텐츠의 르네상스를 노리고 있는 일본 정부는 한류의 세계화 과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세계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중국세에 점차 밀리면서 머지않아 최근의 일본과 비슷한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대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한국은 업계의 침몰과 함께 국가까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떠오르는 중국에 밀리고, 다시 일어서는 일본에 치여 침몰의 시기가 당겨질 수 있다는 경고는 그냥 경고로만 들리지 않는다. 업계는 물론 정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일본의 샤프가 요즘 겪는 어려움은 ‘기업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만, 한국의 삼성이나 LG에 닥쳐올 어려움은 ‘국가 차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 윤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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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4일이었지만, 정말로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지진은 하루에도 100차례 이상 반복됐다. 진동이 심할 때는 땅바닥에 앉아 기사를 써야 했다. 잠을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익숙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지진은 아무리 해도 내 몸과 친화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어지러웠고, 공포는 커졌다. 빨리 현장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의 일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멀리 이국 땅에서 온 취재진들을 반갑게 맞아줬다. 집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한 노부부는 슬픔을 애써 삼키면서 지진 당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현장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모든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피난소에서 만난 80대 여성은 “이게 다 자연의 조화이며 나의 운명”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피난소에서 목격한 질서정연함은 더욱 놀라웠다. 1000명이 몰려 있는 피난소에 400명분의 주먹밥만 왔는데도 이재민들은 조용히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릴 뿐이었다. 자신에게 주먹밥이 배정되지 않아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식량이 충분할 수 있겠느냐”고 했고, 어떤 이는 “이 정도 마련해준 것도 고마운 일”이라고 반응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현장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당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피해가 났지만 현장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 당시 쓰나미로 가족과 수많은 지인을 잃은 80대 할머니는 “한국에서 취재하러 왔다”는 나의 말 한마디를 듣고 2시간 동안 피난소 곳곳을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지진으로 붕괴된 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미아소의 '아소'교 _AP연합뉴스

도대체 왜? 이런 의문이 이번 취재기간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답은 “늘 있는 일”이라는 한 이재민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지진은 일본인들에게 생활 속의 일”이라고 했다. 지진은 절대로 특별한 것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진에 쓰나미, 태풍 심지어는 화산 분화까지 거의 모든 자연재해를 수시로 겪으면서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다.

이번 지진이 워낙 강해 주택의 피해가 컸지만 현장의 호텔이나 빌딩·관공서 등 상당수 건물은 진도 6~7의 강진에도 온전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꼼꼼하게 잘도 만들었다.

“그게 다 일본의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 정신’ 덕분 아니겠어요. 뭘 하나 만들어도 제대로,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현지에서 만난 한 60대 주민은 일본의 모노즈쿠리 정신은 지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했다. 수시로 지진이 발생하는 땅이기 때문에 물건을 확실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이룬 것도 따지고보면 지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지금 이 글은 19일 후쿠오카(福岡)에서 도쿄(東京)로 가는 고속철도 신칸센(新幹線) 안에서 쓰고 있다. 1964년 개통된 신칸센은 일본의 모노즈쿠리 기술과 장인정신이 결집된 것이다. 1174.9㎞ 구간을 열심히 내달리고 있는 신칸센이 오늘따라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대지진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의 일본관이 많이 바뀐 느낌이 든다.

여전히 한·일 양국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평화헌법 개정 등 일본을 둘러싼 무거운 주제들을 잠시 뒤로하고 재난현장에서 목격한 일본과 일본인들은 나에게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윤희일 기자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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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적으로 일본은 ‘치안이 좋은 나라’로 꼽힌다. 일본을 찾은 외국인들은 심야에도 별다른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일본의 거리를 좋은 점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의 치안이 실제로 좋기만 할까. 요즘 벌어지는 야쿠자(폭력조직) 사이의 분쟁 상황을 안다면, ‘치안이 좋은 일본’이라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바라기(茨城)현 미토(水戶)시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최근 경찰관·교직원·자원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집단등교를 했다. 통학로에 위치한 야쿠자의 사무실에서 조직 간 충돌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총격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의 사무실 건물에서는 5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됐고, 일부 총탄은 유리를 관통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건물 주차장에서는 경쟁 조직의 조직원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 주차돼 있던 다른 트럭을 들이받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해 효고(兵庫)현 고베(神戶)시의 한 초등학교 통학로에서도 어린이들이 야쿠자의 충돌을 우려해 먼 길을 돌아 통학하는 일이 벌어졌다.

야쿠자의 충돌 때문에 주민들이 대낮부터 공포에 떠는 일이 요즘 일본 전국 곳곳에서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일본 최대의 야쿠자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에서 고베야마구치구미(神戶山口組)가 떨어져나간 뒤 양측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 그 배경이다. 양측의 충돌이 총격전으로 번지면서 뒷골목의 권총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아직까지 일반인들이 피해를 입은 사례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언제 불상사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1980년대 발생한 야쿠자의 분열 당시 조직 간의 충돌로 야쿠자 조직 관계자 25명이 숨지고 시민·경찰관 등 70명이 다쳤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일반 시민의 희생은 막겠다’는 것이 기본 입장인 일본 경찰은 충돌 사고가 터지고 난 뒤 현장으로 달려가는 ‘뒷북치기’만 반복하고 있다.

많은 세계인들은 일본이 만든 물건은 무조건 좋고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일본인의 ‘장인정신’이 빚어낸 물건은 품질이 우수하고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2011년 3월 쓰나미로 후쿠시마(福島) 원전이 폭발하면서 그런 믿음은 완전히 깨졌다. 후쿠시마 원전을 운영해온 전력회사나 이를 관리해온 정부나 ‘적당주의’가 만연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고, 일본의 원전은 안전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신화’는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제70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_연합뉴스

전후 일본은 ‘헌법9조’로 대변되는 ‘평화헌법’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한국·중국 등 주변 국가들이 일본의 움직임에 끊임없이 우려의 눈길을 주는 상황인데도 국제사회는 일본이 ‘평화국가의 길’을 걷는 것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들어선 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해 타국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의 길로 접어드는 등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반영한 안보법이 29일 시행에 들어가면서 감춰져 있던 일본의 또 다른 얼굴이 보다 선명해지고 있다. 올여름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정권이 승리할 경우 일본은 개헌을 통해 군대를 보유하는 이른바 ‘보통국가’의 길로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겉으로 드러난 얼굴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얼굴’ 이면에 감춰진 얼굴을 파헤쳐 봐야 한다.

늘 조용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일본의 골목길에서 야쿠자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듯이, 지금은 조용한 양처럼 보이는 일본이 과거에도 그랬듯이 언젠가는 호랑이가 돼서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윤희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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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 5주년(11일)을 앞두고 일본 후쿠시마(福島) 지역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후쿠시마 사람들은 처음에 보통의 일본인들처럼 입을 잘 열지 않았고, 속마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정부나 도쿄전력 등 원전사고의 책임자들에 대한 비판은 한결같이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사능 오염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살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곧 좋아질 것”이라며 희망과 “곧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표시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후쿠시마 현지에서 반정부 시위 같은 것이 열린다는 소식은 없었다. 도쿄(東京) 등 대도시에서 환경단체 등에 의한 반원전, 반정부 시위가 가끔 열리지만 현지는 조용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이 지역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그런 궁금증이 풀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불만 같은 것은 당초부터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서로의 마음에 있는 빗장이 하나둘씩 풀리면서 그동안 하고 싶어하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머릿속에는 지금 도쿄올림픽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머리에서 우리 후쿠시마 사람들은 이미 잊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이고 정부와 도쿄전력은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그 가해자들이 ‘이제 오염물질이 대부분 제거됐으니 안심하고 고향으로 가서 살아라’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사능 오염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후쿠시마현 이타테무라 곳곳이 방사능 오염토를 담은 포대로 가득 차 있다._경향DB

후쿠시마현 가쓰라오무라(葛尾村)에 있는 자신의 집을 놔두고 외지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60대 주민은 말이 길어질수록 거칠어졌다. 그의 말에는 지난 5년 동안 쌓인 아베 정권에 대한 강한 반감이 담겨 있었다. “지금 후쿠시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방사능 오염물질 제거작업은 마치 이발을 하면서 이발기계로 목 주변 머리카락만 쭉 깎아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드넓은 야산의 오염물질은 그대로 놔둔 채 주거지나 도로에서 20m 떨어진 곳까지만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제염작업 흉내만 내고 있는 거죠.”

고향 이타테무라(飯館村)를 떠나 외지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한 주민은 일본 정부의 행태를 아주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서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본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혼네는 ‘본심’으로, 다테마에는 ‘겉으로 드러내는 마음’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혼네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일본인의 특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일본에서 살다보면 일본인들이 본심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아 당혹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이 큰 일본인들이 정부 등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에 인색한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번에 후쿠시마를 돌아보면서 원전사고라는 대재앙이 그런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자신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불합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그들은 낯선 외국 기자 앞에서 혼네를 쉽게 드러냈다. 그리고 말없이 믿고 따르던 정부에 대해서도 결국은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5년 전 후쿠시마를 덮친 쓰나미는 그곳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외지를 떠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긴 깊은 상처는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윤희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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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영국·독일·싱가포르 등 세계 각국 언론인들과 함께 일본인의 ‘사죄’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기회가 있었다. 요즘 들어 일본의 정치인과 연예인 등 유명인은 물론 기업들이 각종 ‘사건’을 일으킨 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잇따라 ‘사죄회견’을 열고 있는 것이 그 배경이었다. 다수의 참석자들이 내린 결론은 일본인들의 사죄는 지나치게 ‘형식’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으며, 알맹이나 진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받아오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66) 경제재생담당상이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 건설회사로부터 각료 재임 중 모두 100만엔(약 1091만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각료직을 사임했다. 아마리는 경제재생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의 업무를 맡아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측근이다. 그는 이날 회견을 통해 장관실 등에서 현금을 직접 받았다는 의혹을 상당 부분 시인했다.

그는 “국민에게 부끄러운 사태를 초래했다”며 고개를 숙였고, 회견 도중 눈물을 글썽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기자회견은 당일 오후 공영방송인 NHK의 전파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얼마 전까지 TPP 협상 대표로 활약하던 각료가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모습을 본 국민들 사이에서 동정론이 확산됐다. 뒤이어 TV에 등장한 아베 총리는 “임명 책임은 나에게 있다.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거들었다.

회견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기억나는 것은 아마리의 ‘눈물’밖에 없다”는 평가가 많이 나왔다. 그의 의혹이 사실상 알선수재성 범죄일 수 있다는 분석이나, 각료직은 내놓으면서도 국회의원직은 끝까지 유지하기로 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등의 비판은 눈물과 함께 휩쓸려갔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일본 경제산업상_AP연합뉴스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이번 기자회견이 총리 관저 쪽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됐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기획설’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눈물회견’의 효과만은 컸다. 당초 일본 언론들은 아마리의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 정권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회견 직후 실시된 각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일본의 ‘국민그룹’으로 일컬어지는 5인조 남성 그룹 스마프(SMAP) 해산설 소동 이후 진행된 일종의 사죄방송이 소속사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 등은 눈을 감은 채 ‘앞으로 잘하겠다’는 멤버들의 다짐으로 채워진 데 대해서도 ‘핵심 없는 사죄’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해 말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아베 총리의 ‘사죄와 반성’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의 대독으로 얼버무린 것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이 중시해온 ‘형식’조차도 무시된 사죄라는 혹평이 나왔다.

해외 언론인들의 논의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나온 한 독일 출신 언론인의 지적은 ‘형식적 사죄’로 당장의 위기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데만 급급해하는 일본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으로 관심을 모았다. “사죄는 상대방이 납득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독일이 과거 전쟁의 잘못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과하는 것을 하나의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지요.” 그는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사죄’를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보면서도, 사죄할 때는 잘못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고’를 치고도 이벤트성 사죄를 통해 대충 위기를 넘기려 하는 일본의 정치인·연예인·기업은 물론 역사수정주의의 길을 가면서 과거 역사의 잘못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를 피해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아베 정권까지 꼭 새겨들어야 할 충고로 느껴졌다.


윤희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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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화산·쓰나미·태풍 등 온갖 자연재해와 싸우는 것이 일상인 일본인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오랜 세월 재해와의 투쟁 속에서 쌓아온 일본의 안전의식과 안전시스템은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107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5년 4월의 JR후쿠치야마(福知山)선 열차 탈선 사고로 ‘안전대국 일본’의 신화는 무참하게 깨졌다. 일본 철도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JR후쿠치야마선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한 지 만 10년이 지나고도 다시 몇 개월이 흐른 이달 초 새로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사고 열차를 운행한 JR니시니혼(西日本)이 사고 당시 열차가 충돌한 아파트를 영구 보존하기 위한 공사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기억’이라는 단어였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한 달쯤 지나 JR후쿠치야마선 열차 탈선사고 현장을 찾았다. 일본인들은 대형 사고를 겪고난 뒤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사고가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현장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텅 빈 9층 아파트가 ‘사고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현장에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지요.”

당시 만난 JR니시니혼 관계자나, 사고 피해자 유족이나 텅 빈 아파트를 그대로 보존하는 이유를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잊지 않아야만 비슷한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그들은 입을 모았다.

2005년 4월 25일 107명의 희생자를 낸 JR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사고 당시 탈선 열차가 충돌한 아파트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가운데 열차가 철로 위를 지나가고 있다. JR니시니혼은 이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의 운행시간을 조정, 기관사들이 여유를 갖고 열차를 몰 수 있도록 해다._경향DB


JR니시니혼은 2018년 여름까지 9층 아파트 중 4층 이상은 깎아내고 그 아랫부분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남겨지는 시설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대형 지붕을 덮는 공사도 한다. 현장에는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는 헌화대와 위령비, 관리인과 경비원이 상주하는 관리동 등을 만들고 사고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전시물도 설치할 예정이다. 모두 사고의 기억을 보다 선명하게 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나는 이 아파트에 ‘기억아파트’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한국의 ‘기억교실’ 논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억교실’은 세월호 참사 전까지 단원고 2학년 희생 학생들이 사용하던 교실을 말한다. 참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고, ‘416교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 유족과 시민단체 등은 ‘기억교실’의 장기적인 보존책을 제시할 것을 당국에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기억교실을 지켜야 한다는 글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다 안다. 세월호 사고와 같은 참사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사고를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교훈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대한민국 어디선가는 ‘언제까지나 아픈 기억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다 잊고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애써 외면해온 사람들, 사고의 책임에서 교묘하게 빠져나온 사람들, 그들은 다 잊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다 잊는다면, 그 엄청난 사고의 교훈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속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는 한발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제2, 제3의 세월호 사고가 잇따르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다 잊고 다시 출발하는 악순환만 반복될 것이다.

“사고의 교훈을 결코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안전의 시작이지요.”

JR열차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뒤 10년 넘게 사고재발 방지를 위한 시민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70대의 일본인이 강조한 것 역시 ‘기억’이었다.


윤희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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