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람들이 보기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는 괴이한 사건이다. 2005년 아프리카 말라위의 대통령이 유령 때문에 대통령궁에서 피신했다는 해외토픽성 뉴스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빗대면 될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네팔, 스리랑카, 그리고 서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이번의 한국처럼 요승 또는 미신적 종교에 의해 국정이 농락당한 유사 사례가 있었다면서 박 대통령 뉴스를 소개했다.

 

이 문제를 가십거리로 논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여섯번이나 정상회담을 했을 정도로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중요한 파트너였다. 대미 외교를 담당하는 한국 외교관들은 박 대통령과 오바마의 ‘케미스트리’가 매우 좋은 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해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임기 내 마지막 국빈만찬이 열린 10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에게 건배를 제안하고 있다. 워싱턴 _ AP연합뉴스

 

하지만 국내적 위기에 직면한 박 대통령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는 냉정해 보인다. 백악관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기 바라느냐, 거리를 두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대통령 자리에 누가 있더라도 한·미동맹은 강고하다”는 논평을 냈다. 타국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 정부가 표방하는 원칙이기는 하지만 박 대통령으로서는 섭섭하게 느껴졌을 반응이다.

 

하지만 백악관은 이 논평에 사드 배치처럼 동맹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 예정대로 추진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도 담았다. 군당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주한미군사령관은 8~10개월 이내에 사드 포대를 한국에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도 “가능한 한 빨리 사드를 배치하고 싶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를 접한 한국 시민들의 반응은 분노에 가깝다. 최순실씨가 F-35 전투기 같은 무기 도입 사업에까지 손을 댔다는 의혹이 나온 상황에서 사드 배치 결정도 당연히 검증의 대상이다. 내막을 모를 리 없는 미군과 국방부 관계자들의 발언은 혹여 사드 배치가 무산될까 하는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드가 북한 미사일을 막아내는 데 꼭 필요하다는 한국 국방부와 미국 군산복합체의 설명에 납득하지 않는 한국 시민들이 아직 많다. 사드 배치 예정지인 김천에서는 80일 가까이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한 주민은 오바마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주민 동의도 없이 인간 존중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 사드 배치를 서두르고, 미국에서는 외딴곳에 설치돼 있는 사드의 전자파를 대한민국 국민들은 바로 앞에서 맞고 살아야 하느냐.”

 

오바마는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한미군과 방산업체들이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었으며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한국 국방부와 박 대통령이 구애하다시피 요청해 오바마가 수용한 모양새처럼 돼 있다.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되거나 미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리지 않으면 동맹국 정권의 요구는 대부분 들어주고 챙길 것을 챙기는 것이 그의 접근 방식이기도 했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에 많은 촛불을 켜게 만든 사건들 중에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미선·효순이 사건, 광우병 쇠고기 수입 조치에 대한 반발 등이 있었다. 미선·효순이 사건 때 주한 미대사관에 근무한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자신의 책 <민주화하는 한국에서의 반미주의>에서 “북한도 아닌 남한에서 그 같은 강렬한 반미시위를 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당히 노력해왔고, 실제로 오바마 임기 동안 미국에 대한 한국민들의 호감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서두를 경우 박근혜 정권을 향하는 한국 시민들의 비난 여론은 자칫 미국을 향할 수도 있다. 미국은 사드 배치를 서두르는 대신에 두 나라 차기 정부가 안보전문가들과 신중하게 협의해 추진하도록 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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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클린턴)보다는 천치(트럼프)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우편투표로 미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찍었다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스티브 윌리엄스(70)는 “30년 동안 미국은 여러 측면에서 나빠졌고, 거기에 책임질 사람들이 표를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 세대로 갈수록 삶이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그 이유로 ‘이민자의 권리를 내국인들과 동일시하는 엘리트 정치인들’을 들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지만 40%에 가까운 ‘콘크리트 지지층’이 존재한다. 트럼프를 위해 발 벗고 뛰는 온라인 매체 브라이트바트는 22일(현지시간)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친이슬람적인 이민 정책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 매체는 공화당 소속 라이언 의장이 사실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라이언 의장이 트럼프의 여성·무슬림 비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친이슬람적이라거나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3차 TV토론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라이언에게 ‘친이슬람’ 딱지를 붙인 브라이트바트는 기업가 출신의 보수 우파 앤드루 브라이트바트가 2007년 만들었다. 2012년 그가 사망한 뒤에는 해군 장교 출신의 기업가 스티븐 배넌이 경영을 물려받았고, 30세의 알렉산더 맬런이 편집장을 맡고 있다.

 

온라인 매체와 라디오방송 등을 운영하는 브라이트바트는 주류 언론과 다른 ‘대안 우파(알트라이트)’를 자처한다. 배넌은 지난달 트럼프 캠프의 선거본부장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매체를 “우파 변두리의 신기한 구경거리”라 칭했고, 내셔널리뷰는 “파시스트 지망자들의 모임”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변두리’에 머물지 않았다. 여성·이슬람·이민자·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논조는 트럼프의 입을 통해 대선의 이슈가 됐다.

 

브라이트바트 식의 음모론은 트럼프 캠페인의 뼈대를 이루고 있고, 그런 얘기에 솔깃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2일 발표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들 중 70%가 클린턴이 승리한다면 투표 조작 덕일 것이라고 했고 50%가 클린턴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선동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 불신, 정치 불신의 뿌리는 깊다. 폭스뉴스를 비롯한 우파 언론과 러시 림보, 글렌 벡 같은 우익 논객들은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로 죽은 사람이 투표했다거나, 미등록 이민자가 투표했다는 낭설을 유포했다. ‘오바마는 케냐 태생’이라는 ‘버서(birther)’ 논란을 부추긴 것도 그들이었다.

 

턱없는 음모론을 미국인 30% 이상이 믿는 것은 이들이 꾸준히 유포한 음모론 탓이 크다. 백인 우월주의, 반(反)페미니즘, 인종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우익 매체와 논객들은 2008년 공화당 경선 때 론 폴 주위에 모였으나 힘을 받지 못했다가 이번에 트럼프를 밀어주며 존재를 과시했다.

 

오바마는 21일 마이애미의 클린턴 지지 행사에 참석해 “트럼프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라며 “수년간 공화당 정치인들과 우파 매체들이 온갖 종류의 해롭고 미친 얘기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 따르면 나는 허리케인도 만들어낼 만큼 권력이 강하고, 어느 날 밤 모든 사람들의 총을 수거한 뒤 계엄령을 선포하려는 사람”이라고 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그런 음모론이 나쁘지 않다고 보고 방조해왔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정치가 민심을 읽지 못하고 시민의 정서와 괴리될수록 음모론의 토양이 두터워지고 트럼프 같은 선동가가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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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직원들의 아기를 어르는 사진을 보노라면 그의 소탈한 이미지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지적이고, 사회문화적 진보 성향인 오바마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임기 말 대통령으로는 이례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가 중요한 어떤 측면에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일본 등 12개국이 타결한 거대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오바마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의 핵심이라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FTA에 대한 반감이 강한 상황에서 TPP 처리는 불투명하다. 2008년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발벗고 나섰던 노조, 환경단체들은 실망을 표하며 상당수 돌아섰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등 민주당 정치인들도 강하게 비판했다. 오바마 밑에서 TPP를 추진했던 힐러리 클린턴마저 지난 3월 미시간 경선에서 샌더스에게 패한 뒤 TPP 반대로 돌아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국립 흑인역사문화박물관 개관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럼에도 오바마는 모든 FTA가 나쁜 것은 아니며 특히 TPP는 노동자 권리, 환경보호 등에서 어떤 FTA보다 진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상 타결 후 공개된 TPP 조항에서 확인됐듯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 조항 등 본질적으로 거대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집중 반영됐다.

 

미국 내 반FTA 정서는 무역적자 증가, 제조업 일자리 감소 문제로 치부되지만 어떤 나라가 무역수지 흑자를 보고 적자를 보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해외 직접투자, 지적재산권, 국가의 공공정책 제약 등을 규정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규범이다. 강한 로비력을 가진 금융·법률·제약 회사 등 거대 기업들과 부자들의 이해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중산층, 노동자, 농민들에 우선한다. 오바마는 그런 협정을 대선 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유권자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기를 기다린 뒤 의회 비준을 받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다.

 

나는 오바마가 어쩌다 지지층을 배반하면서 TPP를 추진하게 됐는지 늘 궁금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돌연 한·미 FTA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들고나온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의 일부가 최근 공개된 클린턴 선거본부의 좌장 존 포데스타의 e메일에서 풀렸다. 오바마 정권인수팀 팀장이던 포데스타가 대선 한 달 전인 2008년 10월 마이클 프로먼 당시 인수위원으로부터 받은 e메일에는 오바마 집권 시 각료, 참모로 기용할 리스트가 포함됐다. 프로먼은 소수계, 여성, 각료 후보를 각각 작성해 보고했다. 래리 서머스와 티머시 가이트너(재무장관), 아니 던컨(교육장관), 캐슬린 시벨리우스(보건장관), 에릭 홀더(법무장관), 에릭 신세키(보훈장관), 람 이매뉴얼(비서실장) 등은 대부분 기용됐다.

 

당시 프로먼은 시티그룹 경영자 자격으로 인수위에 참여했다. 오바마 행정부 고위직 인사의 밑그림을 월가 인사가 짰던 것이다. 프로먼은 오바마의 국제경제보좌관을 거쳐 2기 때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맡아 TPP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오바마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 냉정히 말해 그는 특수 이해관계를 모두의 이익인 것처럼 좋게 포장해 전파하는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다. 이는 오바마가 사회문화 현안에는 진보적 입장을 취한 것에 비해 경제적 측면에서는 공화당과 구별되는 대안 집권 플랜이 허약했음을 방증한다.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한국의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을 생각한다. 인지도와 지지율 수치를 재가며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기 앞서 사회문화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진보적 집권 플랜을 만들지 않으면, 정권을 잡더라도 그럴싸한 국정 구상을 그려온 재벌의 뜻에 기울어져 버리기 쉽고 빠르게 지지층의 열망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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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은행에서 볼일을 보다보면 마지막 순간에 창구 직원들이 꺼내는 얘기가 있다. 새 계좌를 만들면 100달러를 넣어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의무는 없고 일정 금액 이상만 유지하면 수수료를 물지 않는다고 했다. 100달러를 거저 준다는 말에 잠시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판촉하는 것이 미심쩍기도 했고, 많지도 않은 돈을 이곳저곳 나눠 담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정중히 사양하고 나온다.

 

최근에 은행 직원들이 왜 그렇게 절실하게 판촉을 했는지 궁금증이 풀렸다. 미국의 3대 은행 웰스파고 은행의 ‘유령계좌’ 파문 때문이다. 이 사건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금융회사들이 얼마나 금융 노동자들을 닦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20일(현지시간) 열린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에서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이 존 스텀프 웰스파고 회장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웰스파고는 최근 몇년 동안 직원들에게 공격적인 판촉 실적 경쟁을 강요했고, 기준에 미달한 직원은 해고했다. 결국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직원들은 기존 고객정보를 활용해 약 200만건의 유령계좌를 만들어냈다. 고객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진 계좌에 수수료를 낸 경우도 있었다.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등 금융감독당국은 이달 초 이러한 사실을 공개하며 웰스파고에 1억8500만달러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웰스파고는 이 일로 해고한 노동자가 530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존 스텀프 웰스파고 회장은 20일(현지시간)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우리 고객들과 직원들, 미국 국민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매우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이날 의원들은 스텀프 회장을 비롯해 고위 임원진 중 단 한 명도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성과에 기대 수백억원대 연봉을 받아갔다는 점을 질타했다. 스텀프 회장은 지난해 연봉으로 1900만달러(약 210억원)를 받았다.

 

민주당 소속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당신이 정의하는 ‘책임진다’는 말은 곧 잘못을 아래 직원에게 미루는 것이냐”며 “회사로부터 받은 급여를 반납하고 당장 사임하라”고 했다. CFPB 같은 규제기관의 폐지를 주장해온 공화당 소속 리처드 셸비 상원 은행위원장조차 “은행업은 신뢰에 기초하는데 그 신뢰가 웰스파고에서는 무너졌다”고 말했다.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이번 파문이 웰스파고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웰스파고의 성과주의 경영은 한국 금융지주회사들이 본보기로 삼는 사례라고 하는데 이런 일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한국은 최근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액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설을 장려했는데 그것이 은행의 실적 경쟁과 맞물리며 1만원 이하의 ‘깡통계좌’가 급증했다.

금융노조는 잘못된 정책과 실적 경쟁으로 인한 폐해라고 지적했지만 금융감독당국은 노조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것 같다. 금융당국의 조사가 이뤄지고 의회에서 은행 경영진을 불러 책임을 추궁하는 미국이 그나마 ‘자본주의’라도 제대로 운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워싱턴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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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쯤 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한 대학교수와 사석에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주도적으로 입안한 전문가다. 그의 논리는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해군의 투사력을 확보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제주에 군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 일변도로 가는 바람에 이 군항이 미국의 중국 견제의 최전선으로 인식되면서 당초 의도가 왜곡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기지가 필요하다는 소신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나는 안보 프레임 안에서 그의 주장을 논박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이런 얘기를 했다. 세상을 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기지 건설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지 않으냐. 당신 스스로 말하듯이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안보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오래 터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 자연의 보전, 나아가 평화라는 가치도 중요하지 않으냐. 그 대화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하며 끝났다.

 

미국인 수천명이 2013년 2월 17일 워싱턴에 모여 캐나다에서 미 본토를 거쳐 멕시코만까지 연결하는 키스톤 XL 송유관 건설계획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 _ AP연합뉴스

 

그 후의 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지역 주민들, 종교·시민단체의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시작됐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에는 이제 되돌리기 어렵다는 이유도 동원됐다. 해군은 공사를 강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사가 지연돼 손해를 입었다며 주민들을 상대로 구상권 청구소송까지 벌이고 있다.

 

그 교수와의 대화가 이따금 떠오르는 것은 밀양 송전탑 건설, 성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포대 배치 등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안보 논리로 정당화하고, 어떨 때는 경제 논리를 내세우는 것만 다를 뿐이다. 주민 의사를 수렴하는 절차를 경시하고 보상 문제로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나, 그 현장이 서울이 아니라 지방인 점도 비슷하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다. 하지만 전개 방식이 늘 같지는 않다. 최근 노스다코타에서 일리노이까지 이어지는 1900㎞ 길이의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건설이 60%가량 진행됐음에도 공사가 일시 중단됐다. 송유관이 지나는 지역에 사는 원주민 ‘스탠딩록 수’ 부족은 조그마한 기름 유출사고에도 식수원이 오염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원주민 성지들이 파괴된다며 송유관 건설에 반대한다. 환경단체들은 온실가스 배출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도 거론한다. 반면 개발업자들은 경제 논리를 내세운다. 외국산 원유 의존을 줄이는 데다, 철로에 다른 농산품과 공산품을 실을 여유가 생기며, 토목사업에 따른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경제 논리가 단연 압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법원이 공사중단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날 정부 소유 부지 내의 공사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영향평가가 이뤄질 때까지 잠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수 부족의 외로운 싸움에 힘을 불어넣었다. 지난 4월 부족민 수십명이 시작한 싸움은 워싱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전국적 연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 어쩌면 이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이 많고, 앵글로색슨 국가가 원주민에게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는 오바마 정부하에서 예외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성격의 노무현 정부하에서는 그것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정부 정책의 문제를 제기하며 끈질기게 저항하는 당사자들이 결국 어느 시점에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생각보다 많이 있으며, 자신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거대 토목사업인 키스톤 송유관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워싱턴 연방의회 앞에 온 수 부족의 한 여성이 말했다. 다코타(Dakota)는 부족어로 ‘동맹(ally)’이라는 의미라고. 동맹은 워싱턴과 서울의 관계에만 쓰는 말이 아니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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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신문들은 오래전부터 사설을 통해 선거에서 특정 후보 지지 선언을 해오고 있다. 이번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뉴욕타임스가 이미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고,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에 반대한다’는 사설을 통해 클린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말 사설에서 ‘둘 다 대통령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 와중에 가장 임팩트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한 신문의 지지 선언이 나왔다. 공화당 텃밭인 텍사스에서 보수적 논조를 고집해온 댈러스모닝뉴스가 7일(현지시간) 사설을 통해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댈러스모닝뉴스 사설. 댈러스모닝뉴스 웹사이트 캡처

 

미국 20대 일간지 중 하나로 구독자 수가 40만명가량인 이 신문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면서 75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민주당의 큰 정부론과 규제 강화 공약이 개인의 자유와 자유시장에 대한 자사의 신념과 맞지 않고, 클린턴의 정직성과 판단력 등에 개인적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충동조절 장애”를 겪는 트럼프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또 클린턴이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잘 알려진 사람(a known quantity)”이 됐다며, 초당적 문제 해결 노력과 외교 역량을 인정했다.

 

트럼프는 아직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대선은 기성 정당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들의 수난 시대로 기록되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주류 언론의 예측은 대부분 틀렸고, 기득권의 일부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게다가 신문 독자 수의 감소로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다. 신문의 지지 선언이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신문의 사설을 보고 텍사스주가 38명의 선거인단을 클린턴에게 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신문의 선언은 다른 일간지, 방송뿐만 아니라 복스나 허핑턴포스트 등 온라인 매체를 통해 널리 전파되면서 이날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뉴스 중 하나가 됐다. 내용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댈러스모닝뉴스는 1940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한 뒤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한 적이 없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온 미국이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며 압도적으로 루스벨트의 3연임을 지지했다. 미국 역사상 3연임 대통령은 루스벨트가 유일하다.

 

그 이후 이 신문이 공화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지 않은 경우는 딱 한번이다.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와 민주당의 린든 존슨이 맞붙은 1964년 선거 때 이 신문은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다. 골드워터는 트럼프에 맞먹는 포퓰리스트였다. 결과는 현직 대통령 존슨의 승리였다. 댈러스모닝뉴스의 논설위원들은 52년 만에 비장의 카드를 쓴 셈이다. 그들의 의도가 적중했는지는 두 달 뒤에 알 수 있다.

 

손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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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의 경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 지명에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그처럼 불안정한 기질의 소유자에게 핵무기 코드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한 외교 전문가의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미국은 이토록 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는 일화는 그런 우려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처음으로 제재 대상에 올린 7월 6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임기를 마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미군 8400명을 철수시키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 _ UPI연합뉴스

 

그런데 트럼프의 우문은 많은 전임 미국 대통령들이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때,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전쟁 때 핵무기를 사용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강경한 매파 딕 체니조차도 1989년 국방장관이 되어 전략사령부의 핵 타격 개념을 브리핑받는 자리에서 그랬다고 한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은 핵무기의 역설에 있다. 결코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핵무기를 현대식으로 유지해야 하는 역설. 미국 본토 방어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의 많은 동맹국들에 대한 핵우산도 이러한 억지(抑止) 개념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말에 핵무기 선제 불사용원칙을 천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안팎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동맹국이 핵 위협을 받지 않는 한 핵무기를 먼저 쓰지 않겠다는 것으로, 지난 70년간 유지된 핵 선제타격 정책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논리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시기에 핵 억지력을 약화시킨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동맹국뿐만 아니라 미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관련 부처 각료들에게서도 나왔다. 이들은 핵 선제타격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재래식 무기에 의한 무력 충돌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핵 선제타격 원칙이 핵 억지력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보유국의 핵무장 명분이 될 수 있고, 무력 충돌 시 우발적 핵 사용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세상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이 정책 변경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그렇더라도 주요 부처와 동맹국들이 반대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 뜻을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북한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실패했고, ·러관계 악화로 핵무기감축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천명하려 하는 것은 임기 말 업적 욕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정책 변경을 추진하는 오바마 대통령 등 미국의 핵비확산론자들이 이상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한 뒤로 핵전쟁이 없었던 것은 핵무기 자체에 그 사용을 막는 마법의 힘이 있어서라기보다 우리가 억세게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 단추는 대통령이 결정하면 지상배치 미사일은 5, 잠수함 미사일은 15분 안에 발사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면 발사되는 방아쇠(hair trigger)’에 비유된다.

 

누군가 은행을 털면 경찰이 도시 전체를 폭파시킬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경우에 비유해보자. 도둑이 그 협박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긴다면 감히 은행을 털지 않을 것이고, 은행 관리인과 예금주들은 안심할지 모른다. 대다수 주민들은 도시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안전, 평화라고 믿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는 핵무기의 역설, 핵 억지력의 신화에 너무 중독돼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도 망각한 것 아닌가. 정답에 매몰된 모범생이 되기보다 대안을 찾아보려고 시도한 오바마 대통령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현실적이라고 보는 이유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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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은 중국의 강한 외교적 반응을 낳았다. 한국과 중국이 해법을 찾지 못하면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사드 배치가 결정되기 전 한국과 중국은 미사일 및 미사일방어 활동을 서로 자제해왔다. 한국은 최근까지도 사드를 설치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꺼렸다. 사드가 중국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중국은 대개 미사일 발사 실험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다. 동쪽으로 쏠 경우 한국이 위협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양국이 신중하게 자제하면서 양국관계는 지난 수십년 동안 안정됐고, 경제 교역과 문화 교류가 촉진될 수 있었다. 사드 배치 결정은 안정적 한·중관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출처: 경향신문DB)

 

한국과 미국 정부는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TPY-2 레이더는 중국 미사일 탄두의 비행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한국에 설치된 사드 레이더로 미국이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중국 핵탄두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면서 중국은 핵 억지력이 손상되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레이더의 식별 범위는 전자기파의 강도와 목표물에 머무르는 시간 등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레이더의 특정 모드에서 식별 범위는 전자기파가 목표물을 얼마나 비출 수 있느냐(RCS)에 따라 달라진다. 목표물이 레이더에 비치는 단면이 작으면 레이더는 매우 적은 양의 전자기파 에너지를 받게 되고 그 목표물을 짧은 범위 내에서만 볼 수 있다.

 

미사일 탄두는 보통 원추형이며 표면이 부드러워 레이더가 정면에서 비추면 단면이 매우 작다. 불가피하게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야 할 표면은 탄두 뒤쪽에 배치된다. 탄두를 뒤쪽에서 바라보면 레이더는 훨씬 넓은 단면을 잡아낼 수 있다. 레이더가 전자기파 스텔스 처리된 탄두의 앞면을 비추면 반사되어 오는 전자기파가 거의 없지만 같은 탄두의 뒷면을 보면 전자기파 반사량은 훨씬 커진다. 따라서 레이더가 탄두 뒷면을 보는 위치에 놓이면 훨씬 큰 식별 범위를 갖게 된다.

 

한국에 배치될 사드 레이더가 북한 미사일을 보기 위해 배치된다고 해도 중국 동북부를 날아가게 될 중국 탄두들의 뒷부분을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동북부가 사드 레이더의 최대 식별 범위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탄두를 정면에서 봤을 때를 가정해 사드 레이더의 식별 범위를 축소해 계산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탄두의 뒤를 비추는 사드 레이더의 범위는 아래 두 가지 상황에서 중국 탄두를 식별할 정도로 충분히 넓다.

 

첫번째 상황은 중국이 동북부에서 서쪽으로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할 때다. 미사일은 로켓의 가속 단계 이후 탄두와 유인용 가짜탄두를 내놓는다. 탄두와 유인용 가짜탄두를 앞쪽에서 보면 레이더에 나타난 신호는 대체로 구별이 불가능하게 고안돼 있다. 탄두와 유인용 가짜탄두를 뒤에서 비췄을 때 잡힌 레이더 신호는 체계적인 차이가 있다. 즉 사드 레이더가 중국 미사일의 탄두와 가짜탄두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두번째 상황은 중국이 미국에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보복을 위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발사하는 상황이다. 사드 레이더는 그 미사일과 탄두를 매우 초기 단계에서 추적해 궤적 정보를 미국 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에 전달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 탄두를 요격하는 데 더 많은 시간 여유를 갖게 된다. 사드 레이더는 미사일을 뒤에서 본 정보를 토대로 유인용 가짜탄두와 진짜 탄두를 식별해낼 것이다.

 

사드 레이더가 한국에 배치되면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높은 출력, 센티미터까지 측정하는 능력 때문에 중국의 핵 억지력은 손상된다. 중국이 생각할 수 있는 대응은 탄두의 뒷모습을 숨기기 위해 미사일 실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미사일은 동중국해로 향하게 된다. 이는 한국에 또 다른 위협이 된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 사이의 안보 딜레마다. 서로 위협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사드 결정은 양측 어디에도 이롭지 않은 부정적인 상황을 낳았다. 그러한 안보 딜레마를 풀기 위한 몇 가지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가지는 한국이 사드의 TPY-2 레이더를 배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그린파인(Green Pine) 레이더나 사드 요격미사일들을 인도할 비슷한 능력을 가진 다른 레이더를 설치할 수 있다. 한국을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서 보호하는 데 TPY-2 레이더는 그린파인급 레이더보다 나은 게 없다. TPY-2 레이더의 식별 범위는 북한 영토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사드 레이더다. 만약 한국이 TPY-2 레이더 대신 그린파인 레이더를 배치하기로 결정한다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면서도 중국의 우려를 불식시켜 한·중 양국 관계를 바로잡아줄 것이다. 양국은 건설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번역 | 손제민 특파원

 

리빈(李彬) 칭화대 교수·카네기-칭화 글로벌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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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 보도를 보고 있으면 성주 군민들이 제2의 세월호 유가족들, 2의 밀양 송전탑 건설지역 주민들처럼 비국민으로 고립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의 한국 배치를 결정한 뒤 논의가 지역민의 안전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흐르고 있다. ‘외부세력의 개입’ ‘종북딱지를 붙이는 것까지 정권 담당자들과 보수 언론의 구도짜기는 이제 지겨울 지경이다. 주민 안전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하고, 끈질기게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수천만명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다며 국가안보를 얘기하는 쪽에서 님비로 손쉽게 치부해버리고 마는 논리로는 이기기 어렵다.

 

23일 오후 서울 세종로 공원에서 사드 한국 배치 결정 철회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급기야 성주 참외를 내 자식에게 먹이겠다고 거드는 미국 정치인까지 등장했다. 국방연구원 연구원 출신 여당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트렌트 프랭스 하원의원의 발언이 전해졌다. 그 뒤 프랭스는 공화당 전당대회가 진행되던 바쁜 와중에 한국 특파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다. 군이 허락한다면 애리조나의 자기 집 뒷마당에라도 사드를 배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그가 잘 안다.

 

사드가 한국 방어를 위해 얼마나 효과적인지, 탄두 재진입체와 유인용 가짜 탄두를 구분하는 데 얼마나 유능한지 그에게 물었다. 프랭스는 2005년에 11번 모두 성공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언급하며 사드의 요격 확률이 99%에 달한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사드가 아직 유인용 가짜 탄두를 구별해낼 능력이 떨어지는 점을 한계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기술 발전이 결함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했다. 사드를 배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미사일방어 역학에 정통한 미국 과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여기서 과학자들이란 미국 군산복합체로부터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려하는 과학자들의 모임테드 포스톨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석좌교수와 조지 루이스 코넬대 연구원은 적이 유인용 가짜 탄두로 교란하기는 너무 쉬운 반면, 아군이 그것을 막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적외선 감지기상에 똑같아 보이는 진짜 탄두 진입체와 유인용 가짜 탄두 세트를 설계하는 것은 간단한 반면 둘을 구별해낼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은 없다는 것이다. 사드 포대를 성주에 배치해도 북한이 마음먹고 쏘는 노동·스커드 미사일을 잡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물리학을 전공한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 본인이 연구원 시절이던 1981년 논문에서 내렸던 결론이기도 하다. 포스톨 교수는 카터 장관이 35년이 지나도록 그 결론을 뒤집을 만한 어떠한 근본적인 기술적 진보도 없는 상황에서 사드 세일즈에 열을 올리는 것은 과학자로서 부도덕하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핵·미사일 확산방지 문제에 대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높은 식견을 갖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포스톨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과학자 출신 보좌관들이 많다. 이들은 왜 사드 배치에 제동을 걸지 않았을까. 오바마 행정부의 논의 과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사드 배치는 오바마가 밀어붙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 때문에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조르고, 펜타곤과 무기 제조업체들 그리고 공화당이 이를 기회로 활용했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한국이 나중에 사드 배치 결정을 번복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서운해할 이유는 많이 없는 셈이다. 사드가 기술적 측면에서도 한국 방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미국 과학자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미사일방어 맹신론자조차 솔직히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무기를 동북아 긴장 고조의 최전선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배치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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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 다마스쿠스의 공동묘지에는 이름 없는 무덤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면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의사가 매장 후 꽂아둔 작은 식별 명찰이 풀에 둘러싸여 있다.

 

이름: 매덕 현수 오캘러핸, 출생: 2010517, 사망: 2014214, 나이: 3.”

 

한국인 입양아 김현수군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입양부모의 결정에 따라 장기를 기증하고 가벼운 몸을 이곳에 뉘었다. 장례식은 없었다. 현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뒤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졌고 위탁모 손에서 자랐다. 한국인 위탁모는 현수가 장애 때문에 국내에서 입양되지 못한다면 자신이라도 입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홀트아동복지회는 해외입양을 택했다.

 

연합뉴스

 

 

201310월 그를 입양한 부모는 미 국가안보국(NSA) 한국과장 브라이언 오캘러핸 부부다. 현수는 양모인 제니퍼 오캘러핸과 애착관계가 형성됐지만 양부와는 그러지 못했다. 양부는 경찰 조사에서 아기가 욕조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고 진술했으나 부검 결과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판단돼 1급 살인, 1급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2년여 재판 과정에서 플리바겐(양형협상)으로 1급 살인죄를 벗는 대신 1급 아동학대 유죄를 인정했다. 1급 아동학대는 최고 40년형에 처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결심에서 변호인은 그가 국가안보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게 됐다며 감형을 요청했다.

 

오캘러핸은 NSA 근무 전에 1997~2004년 해병대로 복무하며 이라크전에 9개월 동안 참전했다. 그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참전미군 250만명 중 PTSD 진단을 받은 50만명에 속한다. 감형 요인들은 정상 참작될 가능성이 높다. 변호인은 정신병력 입증 자료를 제출하겠다며 선고를 늦춰달라고 했고 4월로 예정됐던 선고는 19일로 미뤄진 상태다.

 

어릴 때 미국에 입양돼 자란 애나레이 애머로스(한국명 이난희)는 현수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운 좋게 좋은 양부모 밑에서 자란 입양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현수의 묘에 작은 비석이라도 세워주기 위해 분투 중이다. 입양인 커뮤니티에서 약 1400달러를 모았다. 하지만 묘비 설치는 입양부모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들은 지난 1월부터 오캘러핸 부부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 주미 한국대사관까지 나서 주선하고 있지만 부부는 아직 답이 없다.

 

현수는 어쩌다 이라크전의 상처를 가진 부모에게 입양되었을까. 미국 검찰은 입양 과정의 적절성은 수사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홀트아동복지회 한국사무소는 현수 사망 후 2주 만에 내놓은 애도성명 이외에 어떠한 물음에도 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들은 이 사건으로 보건복지부의 특별감사를 받는 등 이미 대가를 치렀다는 취지의 설명도 따랐다.

 

2009~2011년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인은 세계 3위인 37623명이다. 미국 입양은 선교사 해리 홀트가 1955년 한국전쟁 고아 8명을 입양하며 시작됐다. 지금까지 해외 입양된 17만명 중 12만명이 미국으로 향했다. 60년이 지나며 전쟁고아라는 원인이 사라졌음에도 거대한 입양 흐름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만들어진 제도의 이해당사자들이 해외입양이 줄어들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캐서린 조이스는 <구원과 밀매>에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선의로 포장한 입양이라는 미션이 어떻게 국제입양 산업으로 이어졌는지 보여준다.

 

아동복지 업무를 담당한 한 정부 관리의 얘기다. “한국은 해외입양 중단 선언을 이미 했어야 한다. 국내입양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장애아동 입양도 핑계이다. 우리 보호체계가 너무 허술하기 때문에 그들을 해외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들을 밀어낼수록 우리의 보호체계는 그만큼 개선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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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의 펄스 클럽 총격 사건에 대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성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총격범이 겨냥한 곳은 단순한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생각을 나누며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는 연대와 주체화의 장소였다.” 어둠 속에서 밤새 마시고 떠들고 춤추는 나이트클럽은 어떻게 “연대와 주체화의 장소”가 될 수 있었을까?

주간지 ‘더네이션’ 편집국장 리처드 김은 “부디 음악을 멈추지 말아주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게이바는 치료를 부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치료이고, 종교를 잃어버리거나 종교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는 성소이며, 가족 없는 사람들에게는 집이다.”

이번 사건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 집안의 한 젊은이가 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성소수자(LGBT)에 대한 증오범죄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벌어져왔다.

연방수사국(FBI)의 2015년 통계에 따르면 5479건의 증오범죄 중 성소수자들을 겨냥한 것이 20%에 달한다. 이번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사살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증오범죄의 대부분은 백인 우파나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의 소행이다. 일부 남부 주들은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 합헌 판단을 내린 뒤에도 성소수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이성애자들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들어 이들의 권리를 억압한다. 주 정부의 권한으로 동성부부에게 결혼허가증을 내주지 않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데에서까지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제약하기도 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성소수자 혐오, 여성 혐오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사건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적, 인종, 종교를 초월하는 가부장주의, 이성애자 중심의 권력 구조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제한적 총기 소유 권리가 보장된 미국이기 때문에 대규모 참사로 이어졌을 뿐이다.


가족·친구 잃은 올랜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게이 클럽 총기난사로 숨진 아만다 알베어(25)와 메르세데즈 플로레스(26)의 친구들이 13일(현지시간) 올랜도 시내에 마련된 임시 추모시설에서 두 사람을 기리며 손을 맞잡고 있다._AP연합뉴스


1969년 6월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의 스톤월 인이라는 바는 게이, 레즈비언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이 바는 마피아가 운영하는 곳으로 주류판매 허가나 화재 비상 탈출구, 청결한 상수시설 등이 없는 열악한 곳이었지만 가장 가난하고 주변화된 성소수자들을 유일하게 받아주는 공간이었다. 이들에게 스톤월은 곧 치료이고 성소이며 집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툭하면 스톤월을 단속하고 뇌물을 요구했다. 그날도 새벽 1시가 넘어 경찰이 급습했고, 안에 있던 200여명의 성소수자들은 체포될 상황에 처했다. 경찰이 이들의 몸을 수색하고 호송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이후 뉴욕을 시작으로 동성애자 단체가 만들어져 세계로 퍼졌다. 매년 6월을 ‘LGBT 긍지의 달’로 기념하게 만든 스톤월 항쟁이다.

올랜도 총격 사건 이후 워싱턴, 뉴욕 등 미국 각지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의 홍대 앞에서도 올랜도 출신 한 성소수자의 제안으로 집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47년 전과 달리 경찰은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뮤리엘 바우저 워싱턴 시장은 12일 “언제나 그랬듯이 사랑을 축복하기 위한 오늘의 모임이 증오에 의해 좌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경찰력을 추가로 동원해 성소수자 집회를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노예제 폐지 후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될 때까지 100년 이상 더 걸렸듯이, 성소수자 권리도 갈 길이 먼 것만은 분명하다. 여전히 치료, 성소, 집을 필요로 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장소가 게이 클럽이기 때문에 한국인 피해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일부 국내 언론 보도 뒤에 깔린 편견이나 아이돌그룹 가수들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가 악성 댓글 때문에 자진 삭제한 해프닝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치료, 성소, 집과 같은 곳이라도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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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부가 되려는 것인가?” 미국 대선의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를 며칠 앞두고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CNN 방송 진행자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물었다. 샌더스의 복지, 교육 공약들을 실현하려면 많은 재원이 필요하고, 정책 집행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 확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그렇다’고 답하는 대신 맥락을 설명했다. 미국 사회의 불평등 정도가 대공황기인 1928년 이래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 중산층, 노동계급 복지 강화를 위해 월가와 거대 기업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행자는 ‘예, 아니요’의 대답을 요구하며 집요하게 ‘큰 정부’란 말을 끌어내려고 했다. 샌더스는 넘어가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게 나에 대한 비판이라면 얼마든지 하라. 내가 하려는 일은 ‘기업국가 미국’과 월가의 탐욕에 맞서고 중산층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큰 정부’는 금기어나 다름없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3권 분립과 주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식 등으로 권력집중 방지 장치를 헌법에 담아놓은 것도 이와 관계 있다. 이는 공화당 보수파뿐만 아니라 언젠가부터 민주당에서도 깊이 내면화됐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은 1981년 ‘정부는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이다’라고 했다. 민주당 빌 클린턴은 1996년 ‘큰 정부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그로 인한 경제성장이 곧 복지 강화로 가는 핵심이라는 취지였다. 레이건 이래 각종 규제 완화와 자유무역 정책이 더 강화됐다. 미국 기업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임금이 낮은 해외로 공장을 옮겼다. 1999~2011년 600만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월가의 금융산업과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 산업이 붐을 이뤘지만 중산층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_AP연합뉴스

클린턴의 민주당은 레이건에게 블루칼라의 지지를 빼앗긴 이후 레이건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서 개혁을 했다. 시카고대 로스쿨의 브라이언 라이터 교수는 버락 오바마라고 해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는 그런 점에서 1980년 시작된 레이건 시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샌더스의 입장은 힐러리 클린턴 진영과 주류 언론에게 ‘급진적’이라고 비판받는다. 샌더스는 그런 비판을 받으면 늘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다. 그는 한 토론회에서 아이젠하워 시대에 최상위 한계소득세율이 90%를 넘었다며 “그에 비하면 나는 사회주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했다. 샌더스는 대공황기에 집권해 미국인의 사회안전망을 최우선시한 루스벨트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루스벨트의 집권기간은 1933~1945년이지만 아이젠하워, 닉슨, 포드의 공화당 정부가 그의 진보적 조세제도, 사회안전망, 규제 정책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루스벨트 시대’는 1980년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샌더스가 레이건 이래 36년간 계속되어온 미국 정치·경제의 문법을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접근은 ‘급진적’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역사를 보면 사회주의 문패만 달지 않았을 뿐 그보다 더 급진적인 시대가 많았다. 게다가 최근 캘리포니아, 뉴욕주가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인상하기로 하는 등 수요와 공급 원칙에 의한 주류 시장경제학 이론이 현실에서 계속 깨지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 주류 언론들은 샌더스의 정책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며 그의 지지자들이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점잖게 조언한다. 민주당 내에서는 대의원 표 계산을 고려하면 샌더스가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으므로 힐러리의 본선 대비를 위해 샌더스가 조기 승복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하지만 샌더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싸움을 접을 생각이 없다. 경선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들이 역사의 큰 흐름을 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손제민 기자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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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인기를 얻는 요인 중 하나는 ‘좋았던 옛 시절(good old days)’에 대한 향수이다. 트럼프 스스로 그 좋았던 옛 시절을 자주 언급한다. 그는 최근 한 유세에서 흑인 시위대가 경찰에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았던 옛 시절에는 법 집행이 이보다 더 신속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가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한다. 우리나라는 완전 지옥이 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다.”

또 다른 유세에서도 그는 시위대가 끌려나가자 “옛날에는 저런 사람들은 걸어나가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갔다. 그냥 얼굴에 펀치를 한 방 먹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백인인 청중들에게는 이런 얘기가 그렇게 통쾌한 모양이다. 무엇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기괴하게 만들어 버렸을까. 답을 하려면 좋았던 옛 시절과 트럼프 지지자들의 정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유튜브에 ‘트럼프와 좋았던 옛 시절’을 검색하면 흑백분리가 당연시되고 백인이 흑인을 두들겨패는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이들은 정말 흑인들을 마음껏 패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트럼프뿐 아니라 모든 공화당 후보들이 좋았던 옛 시절로 꼽는 때는 로널드 레이건 시대이다. 트럼프 말처럼 그때 미국은 위대했고,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있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도 살아 있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자본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바닥으로의 경쟁’을 본격화한 장본인이다. 레이건이 만든 경로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 정부 때 각종 무역협정 등 제도로 확립되면서 강화됐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외국인 기자 입장에서 막상 인터뷰를 하려고 하면 트럼프 지지자들 중 우호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미국 주류 언론들에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연구과제인 것 같다. 뉴욕타임스 필진 데이비드 브룩스는 트럼프에 강하게 반대한다면서도 언론인으로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분노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_AP연합뉴스

트럼프 지지자들을 거칠게 요약하면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 남성들로, 자기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해밀턴프로젝트 조사에 따르면 1990년에 대학 졸업장 없는 남성들의 정규직 비율은 76%였지만 2013년에는 68%로 떨어졌다. 랜드연구소 조사 결과 ‘나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중 86.5%가 테드 크루즈보다 트럼프를 더 지지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응답도 더 많았다. 따져 보면 트럼프의 공약이 부자 증세는 아니지만 크루즈에 비해 부유층 감세 폭이 훨씬 작다.

이들에게 좋았던 옛 시절이 흑인, 여성, 성소수자에게도 좋았던 시절은 아니다. 다만 트럼프 지지자들이 지난 30년간 제조업 일자리의 개도국 유출 등으로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이 하락한 집단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들에게 좋았던 옛 시절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일할 기회가 많고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마저도 점점 어려워지니 소수자들을 희생양 삼아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어 복지를 강화하겠다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트럼프와 샌더스 사이에서 고민하는 미국인들을 많이 봤다.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열세이지만 경선을 완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는 호시절에 좋은 집안 출신 백인 남성으로 교육 잘 받고, 각종 연줄과 로비력을 활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0.1% 이내 부자다. 그런 그가 서민의 분노와 공포를 읽어내 분출하게 만드는 것은 비상한 능력이다. 그렇다고 그가 좋았던 옛 시절을 얘기하며 분노할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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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어느날 미국 버지니아의 버니 샌더스 선거사무실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던 자원봉사자는 한국계였다. 30대 중반인 그는 연방수사국(FBI) 직원이라는 신분상 제약 때문에 자세한 신원 정보를 명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돈을 모금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집에서 전화로 샌더스에 대한 투표를 독려하는 ‘폰뱅크’ 행사를 열기도 하고, 비번인 날 선거사무실에 나와 몸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온 다른 한인 이민자들처럼 어렵게 살았다. 그는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라크 전장에 배치됐다. 뒤늦게 동부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했다. 서른 살이 넘어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얻었지만 20만달러의 등록금 빚을 갚느라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말이라고는 ‘해병대’ ‘미역국’ 등 몇 단어밖에 모르는 그는 한국에서 ‘흙수저(dirt spoon)’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설명에 “거기도 정치혁명이 필요한 것 같다”며 웃었다. 정치혁명은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하러 나옴으로써 1%를 위한 정부가 아니라 99%를 위한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샌더스의 슬로건이다.

이 청년은 대학을 마쳤고, 정규직 직장이라도 있기에 나은 편이다. 지난달 뉴햄프셔에서 만난 23세 여성 퀸란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식당 종업원 일을 하고 있다. 전날 밤까지 일한 탓에 피곤해 보이는 그는 ‘공립 대학교육 무상화’를 진지하게 거론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투표장에 나왔다고 했다. 처음으로 해보는 투표였다. 아이오와에서 만난 트럭운전사 존 터너는 대학 졸업 후 15년이 넘도록 빚을 다 갚지 못해 자식들에게 그 빚을 넘겨주지나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학비 빚은 ‘흙수저’에 해당하는 대다수 미국 젊은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 됐다. 결혼을 미루는 요인이며, 자기 자녀들의 미래에 낙관적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지자와 사진을 찍고 있는 버니 샌더스 미 상원의원_AP연합뉴스

주로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정치적으로 조직되기 어려운 세대로 여겨져왔다. 관심 분야가 다양한 데다 대부분 생활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이 세대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젊은층 투표 참여율은 역대 어느 때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을 모아낸 사람이 74세 최고령 대선후보인 샌더스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이 세대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보다 샌더스를 더 지지한다. 힐러리는 ‘왜 젊은층이 당신보다 샌더스를 더 좋아한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즉답하지 않은 채 자신도 젊은층의 마음을 얻고 싶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하버드대 정치연구소가 지난해 11월 18~29세 연령대 2011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1년 전만 해도 이들 사이에 샌더스는 인지도가 없어 지지율이 1%에 그쳤다. 불과 1년 사이 힐러리 지지율을 앞질렀다. 이들은 ‘사회주의’라는 말도 개의치 않았다. 그 말 때문에 샌더스를 더 좋아한다(24%)는 사람도 있었고, 사회주의라도 아무 상관 없다(66%)고 한 사람도 많았다. 이들이 꼽은 좋은 대통령의 덕목은 진실성, 침착함, 진정성이었다. 정치나 사업 경험은 후순위였다.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주류에 대한 강한 불신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첫 TV토론회 직후 샌더스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힐러리가 말을 잘했다는 이유로 주류언론들이 재빨리 힐러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샌더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영향이 컸다. 힐러리를 지지하는 흑인이 많은 남부 주들의 경선이 치러지는 슈퍼화요일 이후 이런 분위기는 다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샌더스 캠페인 자원봉사를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뉴햄프셔까지 온 심리치료사 도널드 슈베르트(65)는 자신도 참여한 197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 당시 대학가의 열기를 떠올렸다. “당시 기성세대와 주류언론은 우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길게 보면 미국을 바꾼 것은 그 젊은이들이다.”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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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3월 컬럼비아대 졸업을 앞둔 한 국제정치학도는 학내 잡지 기고에서 “대부분 학생들은 전쟁에 대한 직접적 지식이 없다”며 “군대의 폭력은 언제나 TV, 영화, 인쇄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이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학내의 반핵 논의가 ‘최초공격’ ‘반격’ 같은 협소한 기술적 논의에 머물러 있다고 질타했다. 이는 “질병 자체보다 증상에 더 치중하는 것”이라며 핵문제는 결국 “미국의 경제와 정치, 나아가 군사주의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이 학생은 버락 오바마이다. 젊은 오바마는 문제의 본질이 미국의 군사주의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취임 첫 해 ‘핵 없는 세계’ 선언에는 그런 연원이 있다. 20대 때 꿈에 비해 중년의 오바마가 재임기간 이뤄낸 성취는 실망스럽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철학이라도 있었기에 군산복합체의 온갖 훼방을 뚫고 이란 핵합의를 타결할 수 있었다. 군사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견해는 해외분쟁 개입을 최소화하는 ‘오바마 독트린’으로 남았다. 하지만 또 다른 과제인 북한의 핵개발이 오바마 임기 중 가장 많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오점이다.

이제 시선은 차기 대통령에게 쏠린다. 오바마 독트린을 계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의외로 버니 샌더스이다. 오바마의 불개입 노선에 좌절감을 느끼는 공화당 안보전략가들 상당수는 설사 공화당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좀 더 군사주의적 미국으로 회귀할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샌더스는 ‘레짐체인지’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에 반대하고 군사개입은 최후수단으로 남겨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샌더스는 외교독트린이랄 수 있는 지난해 11월 조지타운대 연설에서 “해외에서 무모한 모험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국내적 역량을 재건하기 위해 선거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당면 과제인 이슬람국가(IS) 대응에 있어 그는 미국이 주도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중동 국가들에 더 많은 역할을 하게 할 생각이다. 이 과정에 러시아, 이란과도 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다._AP연합뉴스

힐러리는 최근 토론에서 샌더스가 외교에 문외한이고 누구 조언을 듣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경멸했다. 샌더스는 힐러리가 존경하는 헨리 키신저의 조언을 듣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키신저 디스’의 방점은 힐러리와 달리 샌더스가 워싱턴 주류와의 연결 끈이 없다는 점을 부각한 데 있다. 그는 대선주자라면 필수코스라 할 수 있는 워싱턴 안보전략가들 면담을 하지 않고 있다. 주류언론은 그에게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십자포화를 퍼붓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샌더스의 ‘비주류’ 차별화 전략은 먹혀들고 있다.

샌더스는 걸프전이 한창이던 1990년 의회에 입성한 뒤 25년간 외교 관련 표결에 많이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후보 시절 조지 W 부시나 오바마에 비해 경험이 적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시선은 키신저 같은 이들의 결정으로 캄보디아,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등에서 숨진 무고한 민간인들과 미국 젊은이들에게 있다. 더 이상 20세기의 미국처럼 행동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샌더스는 대북제재법안 관련 성명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힐 기회가 있었다. 북한이 10년간 핵능력을 키워왔고 위성발사가 탄도미사일 기술개발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중요 기술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제재에 찬성했다. 하지만 선제타격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중국 등과 함께 외교적 수단을 모두 동원해 한반도 분쟁 해결을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이라는 점에서 나는 힐러리보다 샌더스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 후보시절 외교에 전문성이 있다고 자랑했던 한 대통령이 지금 어떤 재앙을 만들고 있는지 보는 입장에서 더 그렇다.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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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에 ‘역사적인’ 눈폭풍이 상륙하기 몇시간 전인 22일 오전 11시(현지시간) 버지니아 페어팩스의 한 상점은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표정에서 근심을 읽기는 어려웠다. 카트마다 물과 빵, 스낵 같은 비상식량 외에도 술이 빠지지 않았다. 대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쉬어야 할 향후 수십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주유소에는 차량뿐만 아니라 드럼통에 기름을 담아 가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취학연령 이하 아이를 셋이나 둔 나는 전기가 끊어질 것이 가장 걱정됐다. 물과 라면, 땔감용 나무를 장만했다.

기상 캐스터들이 사흘 전부터 반복해서 ‘역사적인 눈폭풍이 온다’고 경고하며 대비하라고 할 때 ‘너무 겁을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막상 대단치 않은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으니.

23일 출장을 떠날 일정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이틀 전 이미 항공사로부터 비행기가 뜰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기간에 1만건 가까운 항공편이 취소됐다. 대부분 여행을 취소하거나 대안을 마련했기 때문인지 워싱턴 인근 세 곳의 공항에서 큰 혼란은 없었다. 아이들 학교는 눈폭풍이 오기도 전인 21일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며 휴교령이 내려졌다(대부분 학교는 도로에 눈이 완전히 치워지는 26일까지 쉰다).

미국 뉴욕 지하철 펜 역사가 10일 눈으로 뒤덮여 있다. 이날 폭설의 여파로 미 동부 관공서는 문을 닫았고 며칠째 눈이 쏟아진 워싱턴 지역의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렸다. 중서부 일대는 폭설과 한파까지 겹치면서 11명이 숨지고 1000여편의 항공기 운항이 중단됐다. _AP연합뉴스


22일 오후가 되면서 예고대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뮤리엘 바우저 워싱턴 시장은 시 경찰청장, 교육감 등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눈폭풍은 사활이 걸린 문제(life and death implications)”라며 오후 3시까지는 길 위에 차들이 남아 있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취임 1년 된 40대 초반 흑인 여성 시장 바우저는 눈폭풍 예보가 내려진 일주일 전부터 “내린 눈은 치우면 된다. 전기가 끊어지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며 빈민가에서 전기가 나갈 경우 사람들을 따뜻한 곳으로 옮길 대책을 마련해둔 터였다.

방송들은 페어팩스 카운티 교통운수국 소금창고 앞에 기자를 상주시키며 제설 준비 상황을 매시간 보여줬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 시장과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차량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제설 작업이나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용 차량 이외에 일반 차량이 도로에 나오면 체포될 수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한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자기 주가 눈폭풍의 직접적 영향권에 든다는 소식에 선거운동을 접고 뉴저지로 돌아갔다. “내가 주지사로 있는 동안 눈으로 인한 비상사태가 17번째다. 우리는 매뉴얼대로만 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22일 저녁부터 굵어진 눈발은 그 후 약 30시간 동안 11개 주 8500만명이 사는 지역을 덮어버렸다. 적게는 50㎝ 많게는 1m가량의 눈이 쌓였다. 23일 내내 사람들은 정말 거의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옥외 경제 활동은 전면 중단됐다. 돈 한 푼 더 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무시무시한 독재자가 밖에 나오지 말라고 겁을 주어도 그랬을까.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24일 아침 거짓말같이 눈이 멎었고 파란 하늘과 화창한 햇빛이 사람들을 밖으로 인도했다. 아파트에 세워둔 차량들은 누구 차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뒤덮였다. 평소 데면데면하던 이웃들은 저마다 나와서 하루 종일 삽질을 하며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떠한 의무에서도 자유로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눈 위에서 뒹굴었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났지만, 지나칠 정도로 미리 경고하고 대비한 덕인지 ‘역대급’ 눈폭풍에도 인명피해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재난에 관한 한, 미국 지방정부는 혹한과 혹서에 취약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에 돈보다 우선 가치를 둔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던 며칠이었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대자연이 강제하는 비상사태가 점점 잦아진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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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기시다 합의’ 직후 미국 국무부 당국자는 익명을 전제로 미국 정부 입장을 전화회의 방식으로 언론에 설명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기뻐하는 미국 정부의 표정은 전화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는데 시민단체나 피해자 본인들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영향을 받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나는 국무부 당국자가 ‘양국 정부와 시민들이 결정할 문제’라 대답하고 그칠 줄 알았다. 의외로 답변이 계속 이어졌다.

“민주적인 두 정부가 합의한 어떠한 것도 표현·집회의 자유라는 보편적 인권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인 합의의 중요성을 양국 시민들이 놓쳐서는 안되고, 양국 화해를 독려하고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자극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제 양국민들이 정부 시책에 따라 국제무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출한 것이다. 아시아정책포인트의 민디 코틀러는 “미국이 표방해온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스스로 중시하는 표현의 자유나 인권의 가치를 제약할 여지를 무릅쓰고 양국 시민들에게 지침까지 제시한 것은 이번 합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준다. 미국이 한·일 양측에 이번 합의를 압박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몇년간 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다양한 급에서 한·일에 화해를 권유했다. 양국이 이 문제에 가로막혀 군사정보공유나 미사일방어(MD) 등에서 충분히 협력하지 못하는 것을 미국은 불만스러워했다. 미국은 한·일관계 경색을 중국의 부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장애물로 여겼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의 후과를 이해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이런 셈법은 반세기 전 한일기본조약 때도 비슷했다.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던 때였지만 한국인들의 감정은 중요한 고려 요인이 아니었다. 협상 착수 후 13년이 되도록 진전이 없자 미국은 1964년 박정희-사토 에이사쿠 정권을 압박해 협상 타결에 역할을 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빅터 차의 ‘한·일관계 정상화의 배경’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이 한·일 화해를 종용했던 것은 공산 중국의 위협과 베트남전의 교착 상태 등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부담이 늘어가던 전략적 상황 때문이었다.

1965년과 2015년 합의의 주체는 한국, 일본 정부이지만 두 경우 모두 미국이 연출자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동북아에 대한 군사주의적인 접근이 계속되고 한·일이 미국이 지어놓은 건축물 속에 사는 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2차대전과 전후 처리에서 생겨난 과거사 문제들이 해결되기 어렵다고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미 국방부 입장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국의 일본사연구 권위자 존 다우어가 패전 직후 미군의 일본점령기를 다룬 저서 <패배를 껴안고>에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내용이 나온다.

미군 점령군의 진주 직후 일본 내무성은 비밀리에 전국 경찰에 무전을 보내 각지에 점령군 전용 특수위안시설을 설치하라고 지시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미·일은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만들어 미군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RAA의 한 여성은 하루에만 스물세 명의 미군을 상대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2차대전 후 미군이 참가한 전쟁들을 생각하면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합의가 ‘주어진 조건하에서 양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합의’였다는 일각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했던 ‘우리’들이 순진했던 것일까.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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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언론들이 버니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것이 느껴져요.” 버니 샌더스 지지자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는 간호사 레슬리 크레이거를 다시 마주친 것은 열흘쯤 전 크리스마스트리를 사기 위해 들른 동네 벼룩시장에서였다. 크레이거는 비싼 의료비와 간호사들의 노동조건을 비판하며 샌더스를 지지한다. 지난 10월 중순 민주당 첫 TV토론회가 펼쳐지던 날 밤 자신의 집에서 ‘하우스파티’를 열 당시의 그는 들뜬 열의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는 좀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의 불만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미국 3대 방송사(ABC, CBS, NBC)의 황금시간대 뉴스를 모니터하는 블로그 ‘틴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3사가 지난 1년간 메인뉴스에서 트럼프를 별도 꼭지로 다룬 시간은 모두 234분에 달한 반면, 샌더스는 10분에 그쳤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될지도 모르는 공화당 1위 주자이고 샌더스는 힐러리 클린턴에 이어 민주당 내 2위를 달리는 주자여서 관심도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프라이머리 유권자들에게 받는 지지율이 20~30%대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렇게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다. 샌더스는 자신보다 지지도가 낮은 테드 크루즈, 젭 부시, 크리스 크리스티 등 상대 정당의 다른 후보들보다 보도 시간이 짧았다. 샌더스 캠프는 이를 인용해 “거대기업이 소유한 미디어가 버니의 반(反)기득권적 견해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민주주의를 위해 버니에 대해서도 다른 후보들만큼 보도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버니 샌더스_AP연합뉴스


기업 광고에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주류 언론이 반기득권적 견해를 가진 정치인을 좋아할 리는 없다. 하지만 반기득권이라는 점에서는 트럼프도 뒤지지 않는 사람 아닌가. 트럼프는 공화당 주류에 반기를 든 아웃사이더로서 연설할 때마다 직업 정치인들을 조롱한다. 다만 두 사람의 반기득권론이 이들의 정치적 지향만큼이나 정반대에 있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민자, 무슬림, 여성에 대한 극우적 발언 때문에 ‘걸어다니는 헤드라인’으로 불릴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그는 TV 리얼리티쇼를 11년간 진행한 감각으로 어떤 얘기가 대중의 말초적 본능을 자극할 것인지 잘 안다. 그가 공화당 주류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6개월째 1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미국 사회의 기득권에 제기하는 가장 큰 위협은 기껏해야 공화당의 대선 패배일 뿐 가진자들에게 위험한 존재는 결코 아니다.


반면 샌더스는 일반적으로 대중이 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얘기를 의식적으로 경계한다. 그는 흑인 폭동이 일어났던 볼티모어 빈민가를 찾은 자리에서 이슬람국가(IS)나 테러 관련 질문에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 미국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는 테러 공포가 과도하게 부풀려져 얘기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본질적인 문제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얘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지난 40년간 직업정치인들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 0.1% 부자, 소득 불평등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 미국 정치의 문제라고 비판해왔다.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는 정치인이 지난여름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메시지의 일관성 때문이다. 그 일관성이 테러 국면에서는 득보다는 실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샌더스는 자기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샌더스가 혜성같이 나타난 것이 아니듯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정당이 몇 년도 안돼 흩어졌다 다시 합쳐지고 이름을 바꾸는 일이 다반사인 정치 현실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한 정치인이 40년간 일관된 메시지를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오지 않을 뿐이다.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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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총영사관 관계자는 6일(현지시간)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을 비판한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와 주간지 더네이션의 보도에 반론 게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두 언론사와 반론문 게재를 협의하고 있다”며 “만나서 우리 입장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더네이션 쪽에서 e메일로 보내주면 게재를 검토해보겠다고 해서 작성 중”이라고 말했다.

팀 셔록 기자는 지난 1일 더네이션 블로그에 올린 ‘한국에서 독재자의 딸이 노동을 탄압하다’라는 글에서 박근혜 정부가 노동자와 농민들의 정당한 집회를 과도하게 탄압하고 재벌이 원하는 노동시장 개혁을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셔록 기자는 7일 통화에서 “그들은 편집자에게 내 기사의 사실관계가 틀렸는지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고 기사가 좀 부정확하다며 만나서 설명하겠다고 했다”며 “보도에 이견이 있으면 서면으로 반론을 요청하면 될 텐데, 어리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에 뉴욕총영사관 관계자는 이 기사의 사실관계를 다투기보다 ‘서구 국가들이 몇백년 걸린 것을 한국이 40년 만에 성취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취지로 해명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런 풍경은 박근혜 정부 들어 미국 내에서 한층 노골화된 대일본 공공외교 경쟁에서 ‘도덕적 우위’가 사라진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뉴욕과 호놀룰루 총영사관의 자국 외교관들을 동원해 미국의 한 교과서 출판사와 저자에게 일본군 위안부, 난징대학살 관련 기술의 사실관계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드러나 국제적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기자가 이와 관련된 내용을 취재하고 기사를 쓸 때의 심정은 ‘일본 우익정권이 막 나가는구나’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한국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미국 취재원들에게 한국에서 온 기자라 소개하면서 부끄러운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도대체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같이 비판해야 할지,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외교관이라고 해서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손제민 | 워싱턴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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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어느 날 영국 서남부의 맘스버리라는 내륙 시골마을에서 한 여성이 스페인 무적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놀라 아기를 조산했다. 아기는 훗날 “나와 공포(fear)는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한 토머스 홉스다. 홉스는 ‘길 가다가 누가 뒤에서 돌로 내려치면 어떡하나’ 같은 상상에서 시작해 평생 공포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에게 가장 큰 공포를 안겨준 것은 영국 왕당파와 공화파의 내전이었다. 안정적 정치체제가 필요했고, 결과물이 <리바이어던>이다. 시민들의 계약에 의한 근대 주권국가 개념은 결국 공포와 함께 태어난 셈이다.

다시 공포가 배회하고 있다. 파리 테러 이후 벨기에에서 테러 모의가 적발돼 거리가 온통 얼어붙고, 추수감사절과 블랙프라이데이 연휴를 앞둔 미국 대도시 행인들의 표정에서도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공포를 만든 세력은 스스로 국가임을 선포한 이슬람국가(IS)이다. IS는 중세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하는 칼리프왕조를 표방한다. 근대국가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해 은밀하게 사용하는 폭력을 이 준(準)국가는 보란 듯이 잔인하게 쓴다. 그게 국가 건설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IS 입장에서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이슬람 세계가 친서구 대(對) 반서구로 분열되는 것이 좋다. 지난 2월 IS는 자신들의 선전잡지인 ‘다비크’에 올린 글에서 급진적 이슬람에 동조하지 않지만 자신들이 사는 서구국가에도 충분히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슬림들의 ‘회색지대’를 없애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과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IS의 이런 전략에 부응하고 있다. 난민들 속에 테러리스트들이 섞여들어온다고 공포를 조장하며 난민 수용을 중단하고, 이슬람 사원을 감시하며 무슬림 등록명부를 만들어 관리하자는 목소리가 인기를 얻는 것은 IS의 전략이 의도한 바다. 미국에 사는 무슬림들은 그들대로 이러한 반이슬람 정서에 공포를 느낀다. 대선을 앞둔 미국과 프랑스는 비합리적인 공포가 힘을 발휘하기 좋은 여건이다.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현황_경향DB


그런데 파리 테러 공격을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 벨기에 국적으로 유럽에서 성장한 20대 또는 30대 청년들이었다. IS 표현에 따르자면 ‘회색지대’ 무슬림 청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5년 파리 교외의 방화 사태 때 무슬림 청년들의 프랑스 주류사회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확인한 바 있다. 그 후 프랑스 사회는 우파가 오랫동안 집권하고 금융위기를 겪으며 그런 문제들을 풀기는커녕 사태가 더 악화됐다. 언젠가 미국, 프랑스 등의 군대가 IS 지도부를 궤멸시키는 날이 온다고 가정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젊은이들의 좌절과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극단주의와 손잡을 가능성이 높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국 내에서 테러 공격이 일어나지 않는 한 IS 격퇴를 위해 미 지상군을 대규모로 투입하지 않으려 한다. 시리아·이라크에서 군사적 전략뿐만 아니라 시리아 난민 수용까지 국내 보수층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지만 개의치 않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 오바마가 아니라 존 매케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미국이 지금보다 안전해졌을지는 심히 의문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고삐 풀린 공포 속에 살아야 했을지 모른다.

공포의 정치는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군 간부들을 계속 숙청하는 김정은 정권뿐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원동력은 북한이 남한을 적화할지 모른다는 일부 사람들의 두려움에 있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체제 생존을 제일 걱정해야 하는 나라를 꼽으라면 바로 북한 아닌가.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79년 한 외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부독재를 끝내고 더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이룸으로써만 북한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 독재정권의 공포 조장이 근거 없었음은 결국 역사가 확인했다. 하지만 공포는 죽지 않고 언제든 되살아난다. 근대국가의 태생이 그렇기 때문이다.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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