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일본으로 부임할 때 새로 받아온 노트북 컴퓨터의 자판 중에 ‘ㅇ’과 ‘ㅂ’ 부분이 유난히 반질반질하다. 풋, 웃음이 나온다. ‘아베’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두드려댔으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부임 첫날 쓴 첫 기사에도 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렇다. 나는 ‘도쿄특파원’이 아니라 ‘아베특파원’이었다.

 

돌이켜보면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본은 ‘아베의 세상’이다. 2012년 말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른 그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2013년 말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아베 극장’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고노담화의 뼈를 발라낸 아베담화, ‘전쟁하는 나라’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그리고 이를 반영한 안보법 제정 등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때마다 한국 언론은 ‘아베의 폭주’를 운운하면서 떠들어댔고, 그 한복판에 나도 있었다. 한국 사회는 ‘아베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일본이 위험해지고 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자판의 ㅇ과 ㅂ은 그래서 날이 갈수록 반질반질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아베의 기세는 세계로 향했다. 지구를 부감(俯瞰)한다는, 그의 광폭 행보는 세계를 넘나들었다. 버락 오바마를 히로시마로 불렀고, 자신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가서 ‘화해의 제스처’를 연출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별장에 가서 골프를 치는 그를 세계는 주목했다.

 

그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는 도쿄 등 일부 대도시와 대기업을 위한 잔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학교 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의 취업률은 97%를 넘었다. 2015년 9월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는 경쟁 후보를 주저앉히고 ‘아베 1강’의 성을 쌓아갔다. 지난 3월 자민당은 아베가 3년 더 총리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당칙을 바꿔줬다. ‘아베의 세상’은 계속된다는 얘기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했고, 국민들의 꿈과 희망은 그 배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학교 문을 나선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헬조선’이었다. 얼마 전 ‘한국’이라는 배의 선장은 국민들의 힘에 의해 끌려 내려왔다.

 

요즘 일본에서는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결국은) 지는 벚꽃(散る櫻殘る櫻も散る櫻)’이라는 구절이 회자되곤 한다. 에도시대의 한 승려가 남긴 이 말은 고령사회의 아픔을 그린 소설 <끝난 사람(終わった人)>에 인용돼 화제가 됐다. ‘지금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이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진다’, 대략 그런 뜻이다.

 

그렇다. 결국 다 진다. 그리고 모든 권력자는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 5년 임기 정도는 무난하게 채울 것 같던 박근혜는 4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왔다.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진핑이나 블라디미르 푸틴도 결국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국제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아베는 어떨까. 60%대를 유지하던 그의 지지율이 ‘아키에 스캔들’ 이후 흔들리고 있다. 아베가 이 난관을 극복하고 2021년까지 총리 자리를 지킬 수도 있고, 그 전에 강판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아베를 뛰어넘어야 한다. 아베와 일본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우리는 그 테두리 안에 갇히게 된다. 일본을 통해 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일본 그 너머의 세상을 보고 걸어가야만 한다. ‘지금의 일본은 5년 후, 10년 후 한국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오래전 어떤 학자의 분석은 지금도 자주 맞아떨어진다. 아베에 매몰되지 않는 시각을 갖는다면, 지금의 일본을 통해 우리의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도쿄특파원들의 자판은 ㅇ과 ㅂ이 아닌, 다른 글자가 더 반질반질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아베특파원’은 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아내는 사인(私人)이다.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 몹시 불쾌하다.”

지난 1일 열린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버럭 화를 냈다. 자신의 부인인 아키에(昭惠)가 명예교장으로 있던 사립초등학교의 재단이 국유지를 헐값에 매입한 의혹과 관련해 야당 의원들이 아키에의 행동을 질타한 데 따른 것이다. 아베는 부인이 아무런 공직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내세우면서 아키에의 행동을 ‘사인’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일본 국민이나 야당 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퍼스트레이디인 아키에가 국제사회의 외교무대에까지 나가 활동하는 등 공인(公人)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소속 공무원 등이 아키에의 이런저런 일들을 거들고 있는 것도 그를 사인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아키에는 우익 성향의 이념을 주입시켜온 사학재단 소속 학교의 명예교장직으로 있으면서 강연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개교가 예정된 학교의 홈페이지에는 아키에의 인사말까지 올라와 있었다. 많은 일본 국민들은 아키에가 현직 총리의 부인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었다면 해당 재단이 아키에를 명예교장으로 임명했겠느냐고 묻는다. ‘총리 부인’이라는 아키에의 신분이 이 재단으로 하여금 9억5600만엔(약 96억3542만원)짜리 국유지를 1억3400만엔이라는 헐값에 살 수 있게 한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아키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의혹은 사실상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인’처럼 처신하면서 빚어진 것이다. 아키에가 일국의 총리 부인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 즉 ‘사인’이었다면 그가 명예교장으로 활동한 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왼쪽)가 11일(현지시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부인 아키에 여사와 함께 미국 플로리다주 딜레이비치에 조성된 일본식 정원 박물관인 모리카미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딜레이비치 _ AP연합뉴스

 

한국에서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국정을 농락한 최순실은 누가 봐도 ‘사인’이다. 그가 한때 유치원 원장으로 일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공인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오랜 기간 국정을 쥐고 흔들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행위나 정부 부처의 주요 인사를 임명하는 행위 등은 사인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 결과 등을 보면 최순실은 그런 행위를 한 것은 물론 국정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의 업무가 사인에 의해 좌지우지된 꼴이다.

 

아키에와 최순실의 사례를 자세히 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총리와 대통령이라는, 두 나라에서 최고의 책임을 요구받고 있는 공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아직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베 총리는 자신의 부인이 유치원생들에게 “아베 힘내라”라는 구호까지 외치게 하는 우익 사학재단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알고도 묵인했을 수 있다. 아니 은근히 즐겼을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최순실 국정농단의 피해자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국정을 최순실의 손에 넘겨주고 자신은 피부미용 등 엉뚱한 일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유명인 등을 공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디까지가 공인이고 어디까지가 사인인지에 대한 구별은 명확하지 않다. 법적으로 딱 떨어지는 규정도 없다. 공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사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답은 분명하다. 공인은 가족이나 지인 등 측근들을 확실하게 관리하고, 사인은 공인의 영역을 넘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인을 위장한 공인, 안하무인의 사인들이 나라를 뒤흔드는 일 따위는 없어질 것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경제규모가 세계 1·3위인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캐나다·멕시코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TPP가 자국 경제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협정에 온갖 힘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핵심파트너인 미국 쪽의 상황이 급변했다. 오바마의 뒤를 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취임하자마자 TPP 탈퇴를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와 트럼프가 지난 주말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베는 이 자리에서 트럼프에게 강력한 항의를 해야 맞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12개 나라가 그 긴긴 나날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것을 하루아침에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말이라도 한번 해야 했다. 그러나 아베는 트럼프에게 TPP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두 정상은 결국 공동성명에서 ‘미국이 TPP에서 탈퇴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12개 나라가 목표점으로 하던 ‘골대’의 위치가 미국에 의해 바뀐 것이 분명한 데도 아베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 아베 신조(사진) 내각의 이나다 방위상은 5일 NHK 프로그램 '일요토론'에 출연, 전날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일본 주변 환경이나 아시아태평양 지역 현황에 대해 인식을 완벽하게 공유했다"며 "헌법의 범위에서 일본 자체 방위력의 질도 양도 공고하게 해 나가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나다 방위상은 전날 회담에서 미군에 의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지지한다고 표명했지만 "자위대가 거기에 가는 것은 아니다. 방위협력과 훈련에서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AP 연합뉴스

 

도쿄(東京)도 신주쿠(新宿)에는 도쿄한국학교가 있다. 일본 내 한국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이 학교는 공간이 부족해 입학 희망자를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안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도쿄도지사는 자국 고교가 쓰던 부지를 한국 측에 대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선거에서 당선된 후임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는 “여기는 도쿄이고 일본이다”라면서 부지 임대 계획을 백지상태로 돌려버렸다. 일본의 지자체 장이 바뀌면서 ‘골대’가 옮겨진 사례로 기록될 수 있지만, 한국 정부나 일본 내 한국인들은 고이케의 행위를 드러내놓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모처럼 개선 분위기를 보여온 한·일관계 등을 고려해 말을 아끼고 참았다.

 

그런데 아베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지난해 말 시민단체 등이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운 뒤 보여준 아베의 태도는 지극히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한·일 간에 진행되던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시켰고,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를 귀국시켜버렸다. 아베는 또 2015년 말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10억엔(약 101억원)을 한국 측에 낸 점을 내세우면서 소녀상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했다.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으로 온 지 1개월이 지났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베는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을 이전 또는 철거해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한국 정부가 아직까지 들어주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에 소녀상이 생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인 상황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부산소녀상 설치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다.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소녀상을 세운 것이다. 미국 정부가 TPP 탈퇴를 결정한 것이나 도쿄도가 학교부지 대여 방침을 백지화한 것은 골대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민단체의 부산소녀상 설치는 골대 이동과 상관이 없다. 주체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베가 보여준 강경 자세는 향후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 선거까지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한국에 새로 들어설 정권이 한·일 위안부 합의를 없었던 일로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본때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우익들의 역사수정주의적 태도가 위안부 문제를 키워왔다는 점에서 이런 막무가내식 조치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베는 알아야 한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측의 보다 명확한 사죄와 관련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소녀상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상황이라는 얘기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평화의 소녀상. 옛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의미와 함께 앞으로의 인류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같은 비극이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소녀상이 한국은 물론 미국·호주 등 해외 곳곳에 자꾸만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는 부산의 일본총영사관 앞에도 설치됐다. 일부 지방의원들은 독도에도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소녀상을 볼 수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일본에도 소녀상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조각가 김서경·김운성씨 부부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 때 맨 처음 제작한 소녀상이 현재 도쿄에 있다. 김씨 부부가 ‘소녀상의 원형’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소녀상은 그러나 언제 어디서 가해질지 모르는 테러의 우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채 누군가의 집 서재 등에 숨겨져 있다.

 

일본 정부가 철거를 요구한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7일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소녀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 일본이야말로 소녀상 건립이 꼭 필요한 곳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일으킨 당사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어디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의 뜻을 담은 메모리얼(기념물)을 만들겠다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독일이 베를린 도심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건립하고 자신들이 과거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계속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은 위안부 관련 메모리얼을 설치하기는커녕 피해국가인 한국 등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베 정권은 최근 부산 일본총영사관에 소녀상이 설치된 이후 주한 일본대사 등을 일시 귀국시키는 강공을 이어가고 있다. 아베 정권은 2015년 12월 한·일 합의대로 10억엔(약 103억원)을 출연한 것 이외에 과거 잘못에 대한 ‘사과의 뜻’을 담은 총리 명의의 편지 발송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아베 내각 각료들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이어가는 등 피해자들의 상처를 후벼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의 상당수 지식인들조차 위안부 문제의 가해국인 일본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거나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또 아베 정권의 그런 태도가 ‘새로운 소녀상’을 부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아베 정권이 소녀상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결국 소녀상이야말로 일본이 감추고자 하는 과거 잘못을 다시 들춰내고 반성을 촉구하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비인도성 등 역사가 담고 있는 진실을 아베 정권 측에 다시 각인시켜주는 데 소녀상만 한 것이 없다는 얘기다.

 

타국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에 골몰하고 있는 아베 정권이 자국에 위안부 관련 메모리얼을 세울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러나 과거 잘못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는 상태에서 소녀상 철거만 무작정 요구하는 아베 정권의 ‘야리카타’(일처리 방식)로는 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소녀상을 없앨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구상에 평화의 소녀상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일본이 먼저 나서서 반성의 뜻을 담은 메모리얼을 자국의 어딘가에 설치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한 시민운동가는 적합한 설치 장소로 우에노(上野)공원·도쿄(東京)역 앞·국회의사당 앞 등을 거명했다.

 

아베 총리 등 일본 지도자들이 그 메모리얼 앞에서 과거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이나 미국 등 각국에서 일고 있는 소녀상 건립 붐은 자연스럽게 누그러질 것이다. 그리고 일본대사관이나 총영사관 앞의 소녀상도 보다 안전한 장소로 옮겨져 ‘평화의 메신저’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2015년 1월1일 ‘신년소감’에서 내놓은 이 말은 일본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이 과거 일으킨 전쟁이 아시아 지역 국가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향후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거 역사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선명하게 드러내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대한 일종의 견제로 풀이되면서 한국·중국 등 주변 국가로부터도 큰 관심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왕이 일본의 패전 70주년이 되는 시점을 앞두고 만주사변을 언급한 것에 특히 주목했다.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할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류탸오후(柳條湖)에서 일본 군대가 철도를 폭파해 놓은 것을 일본은 중국의 짓이라 뒤집어씌우면서 전쟁을 벌였다. 일본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아시아 국가들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일본은 패전 이후 미국과 벌인 태평양전쟁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아시아 지역에 끼친 피해는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출처: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의 이런 발언을 접한 일본의 한 대학 교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일왕이 직접 거명하면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 것은 처음”이라면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을 무시한 채 전쟁의 길로 가려고 하는 아베 총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일왕의 의도가 느껴진다고까지 평가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그해 8월15일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된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직접 밝혀 다시 한 번 관심을 모았다. 일왕은 이날 “과거의 대전(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향후 전쟁의 참화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전날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아베담화)’에서 과거 총리들이 언급한 반성과 사죄로 자신의 뜻을 대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즉위 이듬해인 1990년부터 매년 신년소감을 발표하던 아키히토 일왕이 올해는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83세인 일왕은 지난 2일 황거(皇居)를 찾은 일반인 방문객들에게 “우리나라와 세계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신년인사를 했지만, 별도의 신년소감은 발표하지 않았다. 궁내청은 앞서 일왕의 업무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올해부터 신년소감을 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왕이 “점차 신체가 쇠약해져서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라면서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일본은 ‘아베 1강’ 체제로 완전히 굳어지고 있다. 아베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제1야당인 민진당이 10% 이하의 지지율 속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을 정도로 야당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언론도 ‘아베의 얼굴색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약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일본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일왕의 한마디 말은 아베 총리도 함부로 여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왕이 ‘평화’의 메시지를 가득 담아 발표해온 신년소감을 내지 않기로 함에 따라 아베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견제자’는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국민의 고령화 문제가 사회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왕실의 고령화가 일본 사회에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현직 총리로서 진주만을 방문하는 것은 최초.”(5일 일본 정부 관계자)

“현직 총리로서 애리조나기념관에서 (희생자를) 위령(추도)하는 것이 최초.”(7일 외무성 외무보도관)

“(현직 총리가) 미국 대통령과 함께 진주만을 방문하는 것도 최초.”(26일 정부 대변인)

 

일본 정부가 27일(미국 시간)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사진)의 ‘업적 쌓기’로 분주하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 5일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이 결정된 이후 ‘현직 총리로서 최초’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허풍이었다. 1951년 9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한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총리(1956년 10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1957년 6월) 등이 잇따라 진주만을 찾은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자 외무성의 가와무라 야스히사(川村泰久) 외무보도관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현직 총리가 애리조나기념관에서 추도하는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26일 아베의 출국을 앞두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자신의 업적을 쌓기 위해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의 흔적마저 지우려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외조부의 과거 행적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최초’ 등의 업적에 매달리는 이유는, 개헌을 최종 목표로 설정한 그가 ‘역사적인 총리’임을 강조하고 싶어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26일로 출범 4주년을 맞은 아베 정권은 현재 6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58%로 나타났다. 한때는 기시 전 총리의 외손자로서 ‘가문 정치의 후계자’ 혹은 ‘도련님’ 이미지가 컸지만 이제 아베는 장기집권을 바라보며 외조부를 능가하는 치적을 쌓으려 애쓰고 있다. 자민당은 3년씩 2연임만 가능했던 총재 자리를 3년씩 3차례까지 연임할 수 있도록 최근 당규를 바꿔 아베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아베 1강(强)’의 리더십 구조 속에서 그가 내년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 이를 바탕으로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개헌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진주만 방문에 굳이 거짓말까지 보태가며 ‘최초’라는 타이틀을 붙이려 애쓴 데에서 보듯, 아베의 최대 치적은 외교다. 올해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평화기념공원 헌화를 이끌어냈고, 한국과는 논란 많은 위안부 합의를 이뤘다.

 

지난 16~1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숙원이던 북방영토 반환을 약속받지 못해 여론이 악화됐다. 그러나 푸틴이 10년 만에 도쿄를 방문하게 한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지금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아베 정권의 앞날은 경제에 달려 있다. 엔저를 기조로 한 아베노믹스 덕분에 기업 이익이 늘면서 대기업들이 임금인상과 고용 확대에 나선 것은 아베에게 힘이 됐다.

 

그러나 아베가 애써 끌어내린 엔화는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같은 국제적인 이슈가 불거질 때면 급반등한다. 주가는 회복됐지만 소비는 4년 내내 살아나지 못했다. 아베노믹스의 약발이 다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미국 덕에 안전을 누리는 일본이 주일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역 면에서도 보호주의로 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아베가 평화헌법을 뜯어고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겠지만, 전통적인 동맹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트럼프 시대 미·일 관계가 아베의 복병이 될 수 있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이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10월의 일이다. 일본의 공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은 정권의 방침에 따라 연금투자 기준을 대폭 바꿨다. GPIF는 당시 국내 및 해외의 주식투자 비율을 24%에서 50%로 올리는 대신 국채 등 국내 채권에 대한 투자비율을 60%에서 35%로 내렸다.

 

당시 일본의 상당수 언론과 국민들은 아베 정권과 GPIF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권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살리기 위해 국민의 노후자금에 손을 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엔저를 바탕으로 대기업의 수출을 늘리고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인 아베노믹스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연금 적립금을 주식시장에 쏟아붓게 됐다는 것이다.

 

언론과 국민들은 또 연금기금의 손실을 우려했다. 그런 우려는 GPIF가 2015년에 입은 운용손실만 5조엔(약 51조원)대에 이르는 등 현실로 나타났다. 이후 아베 정권이 연금기금의 주식 투자 비율을 대폭 높인 것이 손실의 주된 원인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국민들 사이에서 “아베 정권이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을 주식 투자로 날려버리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의 공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

 

GPIF의 운용실적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의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 등 시장상황의 변화와 이에 따른 주가의 등락으로 수시로 변하고 있지만, 일본 국민들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 중에 아베 정권이 특정 개인이나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연금 적립금에 손을 댔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가 부양’이라는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정책적 판단’이 연금에 손을 댄 이유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금 논란은 일본의 그것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이 최순실과 그 가족, 그리고 삼성이라는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했다고 보고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있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삼성 편을 들어준 배후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이 최순실을 지원한 것은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보답’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합병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등에 대한 지배력은 강화됐다. 합병 당시 최종 열쇠를 쥐고 있던 것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의 찬성 없이는 합병이 물 건너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국민들의 노후자금으로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사익을 챙기려 했던 것이 사실일까. 삼성 측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양사의 시너지 효과와 미래가치를 위해 한 것이므로 최순실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합병 후 국민연금이 보유한 삼성물산의 주식가치가 하락한 것도, 평가시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손실을 봤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구심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당사자들에게 분명한 답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의 노후자금에 누군가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라 바로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국가는, 사법당국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둘러싼 의혹을 분명하게 해소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건드리려 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것을 도운 사람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였는지를 밝혀내 처벌해야 한다.

 

그게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이 추운 날에도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요즘 일본에서 TV를 켜기가 무섭다.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이 나오는 화면에 ‘호스트바’ 출신으로 소개되는 남성의 얼굴이 함께 등장하고 그 사이에 최순실이 보인다. 정유라가 말을 타고 대학에 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기 위해 대형 도표가 동원된다. 진행자 등 출연자들은 기가 막혀서 말을 하지 못하겠다며 혀를 찬다. 대한민국이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화가 치민다. 특히 일본인들과 함께 TV를 볼 때는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은 ‘더러운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래서 채널을 돌려보지만, 5개 주요 민방은 물론 공영방송인 NHK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다루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2014년 4월 도쿄(東京)로 부임한 직후에도 그랬다. 304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이 방송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였다. 한 나라의 최고책임자가 그 엄청난 사고 발생 이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데 대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논조였다. 분(分)·초(秒) 단위로 공개되는 일본 총리의 움직임과 비교하는 보도가 쏟아진 것도 이때다.

 

“한국의 망신은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 시키는군요. 한국 국민들은 훌륭한데….”

 

얼마 전 일본에서 활동하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중국 등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외국 언론인이 최근 몇년 사이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피넛 리턴.’ 2014년 12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의해 발생한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을 일본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사건 당시 일본의 신문·방송 등 언론은 사건의 본질을 관행화된 경영세습, 그리고 오너들의 갑질 등 한국 대기업의 전근대성에서 찾았다. 방송 출연자의 말이나 기사의 행간에서 ‘형편없는 한국’에 대한 조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느낀 모멸감 역시 잊을 수가 없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동영상 파문 때는 또 어땠나. 사건의 진상을 묻는 일본인에게 파문에 대해 설명하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사무실을 찾은 일본 기자와 함께 늙은 재벌 오너의 그릇된 욕망을 마구 비판했지만, 쓰린 속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조현아, 이건희 그리고 박근혜….

최근 몇년 사이 해외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을 창피하게 만든 대한민국의 얼굴들이다. 해외의 생산현장에서, 무역현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묵묵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일그러진 리더들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정점에 박 대통령이 서 있다. 일본의 대표적 언론인 아사히신문은 최근 칼럼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권력·재벌·허영·무녀·남과 여·수험(대학입시) 등 한류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들로 점철됐다고 소개하면서 “이 나라(한국)가 안고 있는 병폐 그 자체”라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대통령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는, 우리 동포들의 그 간절한 호소를 못 들은 척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또 하나의 죄가 추가될 뿐이다.   

 

이런 상황을 그려본다. 박 대통령이 그동안의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세월호 7시간’에 대해서도 하나의 거짓 없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소상하게 밝힌 뒤 깨끗하게 물러난다. 그날 저녁, 한국을 걱정해온 외국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물러났으니, 상처받은 한국인들의 명예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겠네요. 박 대통령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국민과 법의 심판을 받고 나서 한국 국민의 한 명으로 여생을 잘 보내야죠.”

 

됴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미국 사람들이 보기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는 괴이한 사건이다. 2005년 아프리카 말라위의 대통령이 유령 때문에 대통령궁에서 피신했다는 해외토픽성 뉴스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빗대면 될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네팔, 스리랑카, 그리고 서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이번의 한국처럼 요승 또는 미신적 종교에 의해 국정이 농락당한 유사 사례가 있었다면서 박 대통령 뉴스를 소개했다.

 

이 문제를 가십거리로 논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여섯번이나 정상회담을 했을 정도로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중요한 파트너였다. 대미 외교를 담당하는 한국 외교관들은 박 대통령과 오바마의 ‘케미스트리’가 매우 좋은 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해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임기 내 마지막 국빈만찬이 열린 10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에게 건배를 제안하고 있다. 워싱턴 _ AP연합뉴스

 

하지만 국내적 위기에 직면한 박 대통령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는 냉정해 보인다. 백악관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기 바라느냐, 거리를 두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대통령 자리에 누가 있더라도 한·미동맹은 강고하다”는 논평을 냈다. 타국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 정부가 표방하는 원칙이기는 하지만 박 대통령으로서는 섭섭하게 느껴졌을 반응이다.

 

하지만 백악관은 이 논평에 사드 배치처럼 동맹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 예정대로 추진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도 담았다. 군당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주한미군사령관은 8~10개월 이내에 사드 포대를 한국에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도 “가능한 한 빨리 사드를 배치하고 싶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를 접한 한국 시민들의 반응은 분노에 가깝다. 최순실씨가 F-35 전투기 같은 무기 도입 사업에까지 손을 댔다는 의혹이 나온 상황에서 사드 배치 결정도 당연히 검증의 대상이다. 내막을 모를 리 없는 미군과 국방부 관계자들의 발언은 혹여 사드 배치가 무산될까 하는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드가 북한 미사일을 막아내는 데 꼭 필요하다는 한국 국방부와 미국 군산복합체의 설명에 납득하지 않는 한국 시민들이 아직 많다. 사드 배치 예정지인 김천에서는 80일 가까이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한 주민은 오바마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주민 동의도 없이 인간 존중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 사드 배치를 서두르고, 미국에서는 외딴곳에 설치돼 있는 사드의 전자파를 대한민국 국민들은 바로 앞에서 맞고 살아야 하느냐.”

 

오바마는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한미군과 방산업체들이 사드 배치에 적극적이었으며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한국 국방부와 박 대통령이 구애하다시피 요청해 오바마가 수용한 모양새처럼 돼 있다.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되거나 미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리지 않으면 동맹국 정권의 요구는 대부분 들어주고 챙길 것을 챙기는 것이 그의 접근 방식이기도 했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에 많은 촛불을 켜게 만든 사건들 중에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미선·효순이 사건, 광우병 쇠고기 수입 조치에 대한 반발 등이 있었다. 미선·효순이 사건 때 주한 미대사관에 근무한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자신의 책 <민주화하는 한국에서의 반미주의>에서 “북한도 아닌 남한에서 그 같은 강렬한 반미시위를 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당히 노력해왔고, 실제로 오바마 임기 동안 미국에 대한 한국민들의 호감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서두를 경우 박근혜 정권을 향하는 한국 시민들의 비난 여론은 자칫 미국을 향할 수도 있다. 미국은 사드 배치를 서두르는 대신에 두 나라 차기 정부가 안보전문가들과 신중하게 협의해 추진하도록 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그녀(클린턴)보다는 천치(트럼프)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우편투표로 미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찍었다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스티브 윌리엄스(70)는 “30년 동안 미국은 여러 측면에서 나빠졌고, 거기에 책임질 사람들이 표를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 세대로 갈수록 삶이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그 이유로 ‘이민자의 권리를 내국인들과 동일시하는 엘리트 정치인들’을 들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지만 40%에 가까운 ‘콘크리트 지지층’이 존재한다. 트럼프를 위해 발 벗고 뛰는 온라인 매체 브라이트바트는 22일(현지시간)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친이슬람적인 이민 정책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 매체는 공화당 소속 라이언 의장이 사실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라이언 의장이 트럼프의 여성·무슬림 비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친이슬람적이라거나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3차 TV토론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라이언에게 ‘친이슬람’ 딱지를 붙인 브라이트바트는 기업가 출신의 보수 우파 앤드루 브라이트바트가 2007년 만들었다. 2012년 그가 사망한 뒤에는 해군 장교 출신의 기업가 스티븐 배넌이 경영을 물려받았고, 30세의 알렉산더 맬런이 편집장을 맡고 있다.

 

온라인 매체와 라디오방송 등을 운영하는 브라이트바트는 주류 언론과 다른 ‘대안 우파(알트라이트)’를 자처한다. 배넌은 지난달 트럼프 캠프의 선거본부장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매체를 “우파 변두리의 신기한 구경거리”라 칭했고, 내셔널리뷰는 “파시스트 지망자들의 모임”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변두리’에 머물지 않았다. 여성·이슬람·이민자·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논조는 트럼프의 입을 통해 대선의 이슈가 됐다.

 

브라이트바트 식의 음모론은 트럼프 캠페인의 뼈대를 이루고 있고, 그런 얘기에 솔깃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2일 발표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들 중 70%가 클린턴이 승리한다면 투표 조작 덕일 것이라고 했고 50%가 클린턴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선동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 불신, 정치 불신의 뿌리는 깊다. 폭스뉴스를 비롯한 우파 언론과 러시 림보, 글렌 벡 같은 우익 논객들은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로 죽은 사람이 투표했다거나, 미등록 이민자가 투표했다는 낭설을 유포했다. ‘오바마는 케냐 태생’이라는 ‘버서(birther)’ 논란을 부추긴 것도 그들이었다.

 

턱없는 음모론을 미국인 30% 이상이 믿는 것은 이들이 꾸준히 유포한 음모론 탓이 크다. 백인 우월주의, 반(反)페미니즘, 인종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우익 매체와 논객들은 2008년 공화당 경선 때 론 폴 주위에 모였으나 힘을 받지 못했다가 이번에 트럼프를 밀어주며 존재를 과시했다.

 

오바마는 21일 마이애미의 클린턴 지지 행사에 참석해 “트럼프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라며 “수년간 공화당 정치인들과 우파 매체들이 온갖 종류의 해롭고 미친 얘기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 따르면 나는 허리케인도 만들어낼 만큼 권력이 강하고, 어느 날 밤 모든 사람들의 총을 수거한 뒤 계엄령을 선포하려는 사람”이라고 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그런 음모론이 나쁘지 않다고 보고 방조해왔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정치가 민심을 읽지 못하고 시민의 정서와 괴리될수록 음모론의 토양이 두터워지고 트럼프 같은 선동가가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직원들의 아기를 어르는 사진을 보노라면 그의 소탈한 이미지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지적이고, 사회문화적 진보 성향인 오바마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임기 말 대통령으로는 이례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가 중요한 어떤 측면에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일본 등 12개국이 타결한 거대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오바마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의 핵심이라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FTA에 대한 반감이 강한 상황에서 TPP 처리는 불투명하다. 2008년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발벗고 나섰던 노조, 환경단체들은 실망을 표하며 상당수 돌아섰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등 민주당 정치인들도 강하게 비판했다. 오바마 밑에서 TPP를 추진했던 힐러리 클린턴마저 지난 3월 미시간 경선에서 샌더스에게 패한 뒤 TPP 반대로 돌아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국립 흑인역사문화박물관 개관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럼에도 오바마는 모든 FTA가 나쁜 것은 아니며 특히 TPP는 노동자 권리, 환경보호 등에서 어떤 FTA보다 진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상 타결 후 공개된 TPP 조항에서 확인됐듯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 조항 등 본질적으로 거대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집중 반영됐다.

 

미국 내 반FTA 정서는 무역적자 증가, 제조업 일자리 감소 문제로 치부되지만 어떤 나라가 무역수지 흑자를 보고 적자를 보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해외 직접투자, 지적재산권, 국가의 공공정책 제약 등을 규정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규범이다. 강한 로비력을 가진 금융·법률·제약 회사 등 거대 기업들과 부자들의 이해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중산층, 노동자, 농민들에 우선한다. 오바마는 그런 협정을 대선 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유권자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기를 기다린 뒤 의회 비준을 받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다.

 

나는 오바마가 어쩌다 지지층을 배반하면서 TPP를 추진하게 됐는지 늘 궁금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돌연 한·미 FTA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들고나온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의 일부가 최근 공개된 클린턴 선거본부의 좌장 존 포데스타의 e메일에서 풀렸다. 오바마 정권인수팀 팀장이던 포데스타가 대선 한 달 전인 2008년 10월 마이클 프로먼 당시 인수위원으로부터 받은 e메일에는 오바마 집권 시 각료, 참모로 기용할 리스트가 포함됐다. 프로먼은 소수계, 여성, 각료 후보를 각각 작성해 보고했다. 래리 서머스와 티머시 가이트너(재무장관), 아니 던컨(교육장관), 캐슬린 시벨리우스(보건장관), 에릭 홀더(법무장관), 에릭 신세키(보훈장관), 람 이매뉴얼(비서실장) 등은 대부분 기용됐다.

 

당시 프로먼은 시티그룹 경영자 자격으로 인수위에 참여했다. 오바마 행정부 고위직 인사의 밑그림을 월가 인사가 짰던 것이다. 프로먼은 오바마의 국제경제보좌관을 거쳐 2기 때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맡아 TPP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오바마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 냉정히 말해 그는 특수 이해관계를 모두의 이익인 것처럼 좋게 포장해 전파하는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다. 이는 오바마가 사회문화 현안에는 진보적 입장을 취한 것에 비해 경제적 측면에서는 공화당과 구별되는 대안 집권 플랜이 허약했음을 방증한다.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한국의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을 생각한다. 인지도와 지지율 수치를 재가며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기 앞서 사회문화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진보적 집권 플랜을 만들지 않으면, 정권을 잡더라도 그럴싸한 국정 구상을 그려온 재벌의 뜻에 기울어져 버리기 쉽고 빠르게 지지층의 열망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일본을 상징하는 거리 풍경이 있다. 매년 4월1일과 10월1일, 일본의 거리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4월1일을 전후해 상당수 회사와 기관에서는 신입사원들의 ‘입사식’이 열린다. 새내기 사회인들은 이날 주로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아침 출근길, 그들의 얼굴이 미래에 대한 기대와 그에 따른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그날 저녁 거리도 우르르 몰려다니는 신입사원들로 북적거린다.

 

10월1일 전후에도 정장 차림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른바 ‘내정식’을 마친 사람들이다. 상당수 일본 기업들은 이듬해 4월1일부터 일할 신입사원을 6개월 전에 확정하는데 이를 ‘내정’이라고 한다. 입사 예정자들을 불러다 놓고 개최하는 ‘예비 입사식’이 바로 내정식이다. 봄부터 이어진 ‘슈카쓰(就活·취업활동)’를 통해 취업에 성공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시기부터 ‘즐거운 대학생활, 행복한 청춘’을 보내게 된다.

 

대학생의 경우 졸업논문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기가 종료될 때까지 수업에 충실하게 참가하면서 학창생활을 즐긴다. 시간을 내서 국내외로 여행을 가는 경우도 많다. 취업한 회사에 미리 출근하기 위해 교수에게 출석처리를 부탁하는 따위의 일은 흔하지 않다.

 

‘김영란법’으로 일컬어지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한국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운데 졸업 전에 조기 취업한 대학생들의 학점 부여나 출결처리 문제로 여러 가지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대학가는 취업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것이 사실이다. 상당수 대학 교수들은 취업이 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출석을 안 해도 출석처리를 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어려운 취업시장에서 ‘승자’가 된 제자에게 그 정도 배려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곤 했다.

 

그런데 졸업 이전에 취업이 확정된 학생들이 담당 교수에게 출석 인정을 요구하는 행위가 부정한 청탁에 해당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학생에게나, 교수에게나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교육부가 취업한 학생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학칙 개정을 권유하고 나섰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교육부의 이런 움직임은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학원’으로 전락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학은 학기당 16주 전후의 수업을 해야만 한다고 규정해 놓은 교육부가 취업이 확정된 사람은 이 수업을 모두 이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해버린 꼴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이번 기회에 교육의 본령을 되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대학 문을 나서는 그날까지 학업에 충실하면서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청춘을 청춘답게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요 기업이나 기관의 신입사원 입사식을 졸업식 이후로 미루도록 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업·기관이, 최소한 주요 기업·기관만이라도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하는 시점을 각급 학교 졸업식 이후로 미루도록 조정해야만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취업 이전까지의 청춘은 너무나 가혹하다. 초·중·고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 취업을 하기까지 우리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된 학창생활이나 청춘은 없다. 그들에게 마지막 몇 개월이라도 잃어버린 청춘을 돌려준다는 측면에서라도 기업의 입사식을 졸업식 이후로 미루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청춘을 취업에 바친, 가련한 젊은이들이 고갈된 감성을 채우고 회사에 들어간다면 회사나 기관 측에서도 결코 손해날 일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도쿄|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미국 은행에서 볼일을 보다보면 마지막 순간에 창구 직원들이 꺼내는 얘기가 있다. 새 계좌를 만들면 100달러를 넣어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의무는 없고 일정 금액 이상만 유지하면 수수료를 물지 않는다고 했다. 100달러를 거저 준다는 말에 잠시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판촉하는 것이 미심쩍기도 했고, 많지도 않은 돈을 이곳저곳 나눠 담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정중히 사양하고 나온다.

 

최근에 은행 직원들이 왜 그렇게 절실하게 판촉을 했는지 궁금증이 풀렸다. 미국의 3대 은행 웰스파고 은행의 ‘유령계좌’ 파문 때문이다. 이 사건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금융회사들이 얼마나 금융 노동자들을 닦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20일(현지시간) 열린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에서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이 존 스텀프 웰스파고 회장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웰스파고는 최근 몇년 동안 직원들에게 공격적인 판촉 실적 경쟁을 강요했고, 기준에 미달한 직원은 해고했다. 결국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직원들은 기존 고객정보를 활용해 약 200만건의 유령계좌를 만들어냈다. 고객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진 계좌에 수수료를 낸 경우도 있었다.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등 금융감독당국은 이달 초 이러한 사실을 공개하며 웰스파고에 1억8500만달러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웰스파고는 이 일로 해고한 노동자가 530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존 스텀프 웰스파고 회장은 20일(현지시간)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우리 고객들과 직원들, 미국 국민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매우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이날 의원들은 스텀프 회장을 비롯해 고위 임원진 중 단 한 명도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성과에 기대 수백억원대 연봉을 받아갔다는 점을 질타했다. 스텀프 회장은 지난해 연봉으로 1900만달러(약 210억원)를 받았다.

 

민주당 소속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당신이 정의하는 ‘책임진다’는 말은 곧 잘못을 아래 직원에게 미루는 것이냐”며 “회사로부터 받은 급여를 반납하고 당장 사임하라”고 했다. CFPB 같은 규제기관의 폐지를 주장해온 공화당 소속 리처드 셸비 상원 은행위원장조차 “은행업은 신뢰에 기초하는데 그 신뢰가 웰스파고에서는 무너졌다”고 말했다.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이번 파문이 웰스파고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웰스파고의 성과주의 경영은 한국 금융지주회사들이 본보기로 삼는 사례라고 하는데 이런 일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한국은 최근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액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설을 장려했는데 그것이 은행의 실적 경쟁과 맞물리며 1만원 이하의 ‘깡통계좌’가 급증했다.

금융노조는 잘못된 정책과 실적 경쟁으로 인한 폐해라고 지적했지만 금융감독당국은 노조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것 같다. 금융당국의 조사가 이뤄지고 의회에서 은행 경영진을 불러 책임을 추궁하는 미국이 그나마 ‘자본주의’라도 제대로 운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워싱턴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5~6년쯤 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한 대학교수와 사석에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주도적으로 입안한 전문가다. 그의 논리는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해군의 투사력을 확보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제주에 군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 일변도로 가는 바람에 이 군항이 미국의 중국 견제의 최전선으로 인식되면서 당초 의도가 왜곡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기지가 필요하다는 소신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나는 안보 프레임 안에서 그의 주장을 논박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이런 얘기를 했다. 세상을 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기지 건설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지 않으냐. 당신 스스로 말하듯이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안보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오래 터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 자연의 보전, 나아가 평화라는 가치도 중요하지 않으냐. 그 대화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하며 끝났다.

 

미국인 수천명이 2013년 2월 17일 워싱턴에 모여 캐나다에서 미 본토를 거쳐 멕시코만까지 연결하는 키스톤 XL 송유관 건설계획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 _ AP연합뉴스

 

그 후의 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지역 주민들, 종교·시민단체의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시작됐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에는 이제 되돌리기 어렵다는 이유도 동원됐다. 해군은 공사를 강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사가 지연돼 손해를 입었다며 주민들을 상대로 구상권 청구소송까지 벌이고 있다.

 

그 교수와의 대화가 이따금 떠오르는 것은 밀양 송전탑 건설, 성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포대 배치 등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안보 논리로 정당화하고, 어떨 때는 경제 논리를 내세우는 것만 다를 뿐이다. 주민 의사를 수렴하는 절차를 경시하고 보상 문제로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나, 그 현장이 서울이 아니라 지방인 점도 비슷하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다. 하지만 전개 방식이 늘 같지는 않다. 최근 노스다코타에서 일리노이까지 이어지는 1900㎞ 길이의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건설이 60%가량 진행됐음에도 공사가 일시 중단됐다. 송유관이 지나는 지역에 사는 원주민 ‘스탠딩록 수’ 부족은 조그마한 기름 유출사고에도 식수원이 오염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원주민 성지들이 파괴된다며 송유관 건설에 반대한다. 환경단체들은 온실가스 배출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도 거론한다. 반면 개발업자들은 경제 논리를 내세운다. 외국산 원유 의존을 줄이는 데다, 철로에 다른 농산품과 공산품을 실을 여유가 생기며, 토목사업에 따른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경제 논리가 단연 압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법원이 공사중단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날 정부 소유 부지 내의 공사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영향평가가 이뤄질 때까지 잠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수 부족의 외로운 싸움에 힘을 불어넣었다. 지난 4월 부족민 수십명이 시작한 싸움은 워싱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전국적 연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 어쩌면 이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이 많고, 앵글로색슨 국가가 원주민에게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는 오바마 정부하에서 예외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성격의 노무현 정부하에서는 그것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정부 정책의 문제를 제기하며 끈질기게 저항하는 당사자들이 결국 어느 시점에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생각보다 많이 있으며, 자신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거대 토목사업인 키스톤 송유관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워싱턴 연방의회 앞에 온 수 부족의 한 여성이 말했다. 다코타(Dakota)는 부족어로 ‘동맹(ally)’이라는 의미라고. 동맹은 워싱턴과 서울의 관계에만 쓰는 말이 아니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미국 신문들은 오래전부터 사설을 통해 선거에서 특정 후보 지지 선언을 해오고 있다. 이번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뉴욕타임스가 이미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고,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에 반대한다’는 사설을 통해 클린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말 사설에서 ‘둘 다 대통령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 와중에 가장 임팩트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한 신문의 지지 선언이 나왔다. 공화당 텃밭인 텍사스에서 보수적 논조를 고집해온 댈러스모닝뉴스가 7일(현지시간) 사설을 통해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댈러스모닝뉴스 사설. 댈러스모닝뉴스 웹사이트 캡처

 

미국 20대 일간지 중 하나로 구독자 수가 40만명가량인 이 신문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면서 75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민주당의 큰 정부론과 규제 강화 공약이 개인의 자유와 자유시장에 대한 자사의 신념과 맞지 않고, 클린턴의 정직성과 판단력 등에 개인적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충동조절 장애”를 겪는 트럼프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또 클린턴이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잘 알려진 사람(a known quantity)”이 됐다며, 초당적 문제 해결 노력과 외교 역량을 인정했다.

 

트럼프는 아직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대선은 기성 정당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들의 수난 시대로 기록되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주류 언론의 예측은 대부분 틀렸고, 기득권의 일부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게다가 신문 독자 수의 감소로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다. 신문의 지지 선언이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신문의 사설을 보고 텍사스주가 38명의 선거인단을 클린턴에게 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신문의 선언은 다른 일간지, 방송뿐만 아니라 복스나 허핑턴포스트 등 온라인 매체를 통해 널리 전파되면서 이날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뉴스 중 하나가 됐다. 내용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댈러스모닝뉴스는 1940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한 뒤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한 적이 없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온 미국이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며 압도적으로 루스벨트의 3연임을 지지했다. 미국 역사상 3연임 대통령은 루스벨트가 유일하다.

 

그 이후 이 신문이 공화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지 않은 경우는 딱 한번이다.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와 민주당의 린든 존슨이 맞붙은 1964년 선거 때 이 신문은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다. 골드워터는 트럼프에 맞먹는 포퓰리스트였다. 결과는 현직 대통령 존슨의 승리였다. 댈러스모닝뉴스의 논설위원들은 52년 만에 비장의 카드를 쓴 셈이다. 그들의 의도가 적중했는지는 두 달 뒤에 알 수 있다.

 

손제민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최근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 순수문학상 중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은 여류소설가 무라타 사야카(村田沙耶香·36)는 편의점 점원이다. 무라타는 18년 동안 같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오고 있는 36세 독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편의점 인간(コンビニ人間)>으로 이 상을 거머쥐었다. 편의점은 작가 무라타에게 삶의 터전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편의점에서 매주 3일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일본에는 무라타처럼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다. 정규직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 형태로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프리터’라는 용어까지 존재한다. 


무라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하다. 편의점 등에서 일을 해도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최저임금이 있고, 최저임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올려주려고 노력하는 정부가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2012년 12월 출범 이후 최저임금 인상에 많은 힘을 쏟아왔다. 최저임금을 매년 올려온 아베 정권은 올 들어 최저임금을 사상 최대폭으로 인상했다. 도쿄(東京)지역의 최저임금은 932엔(약 1만409원)이 됐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취업난’이라는 말이 없다.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대졸자와 고졸자의 취업률이 97%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졸업 예정자들은 2~3개 기업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받아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사는 나라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헬닛폰’과 같은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포함한 승자가 차지한 세상을 ‘천국’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세상을 ‘지옥’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도 없다. ‘취직활동’만 열심히 하면 마음에 드는 직장을 잡을 수 있고, 설사 직장을 얻지 못하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3일 서울 상명대학교에서 한 학생이 일자리 본부가 마련된 학생회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대학 졸업자의 절반 가까이가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어두운 나날을 보낸다. 대기업이나 공직·공사 등 안정된 직장을 잡은 사람들은 ‘천국행 티켓’이라도 확보한 듯 좋아하지만, 취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사실상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한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요즘의 취업시장에서 ‘내년을 기약하라’는 말처럼 잔혹한 말이 또 있을까. 용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 무라타처럼 시급을 받으면서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자리라도 있다면 어떻게 버텨보라고 하겠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천길 낭떠러지뿐이다.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마도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뜻하는 ‘헬조선’과 같은 말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연설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헬조선’ 등의 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질책에서는 이 세상 그 어디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절실하게 삶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에 대한 인식의 결여, 그리고 애정의 결여가 느껴진다.

 

대통령은, 그리고 정부는 ‘헬조선’과 같은 신조어를 비판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일할 곳을 늘리고 그들이 받아야 할 임금을 올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세계가 두려워하는 ‘진짜 헬조선’으로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미국 공화당의 경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 지명에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그처럼 불안정한 기질의 소유자에게 핵무기 코드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한 외교 전문가의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미국은 이토록 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는 일화는 그런 우려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처음으로 제재 대상에 올린 7월 6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임기를 마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미군 8400명을 철수시키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 _ UPI연합뉴스

 

그런데 트럼프의 우문은 많은 전임 미국 대통령들이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때,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전쟁 때 핵무기를 사용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강경한 매파 딕 체니조차도 1989년 국방장관이 되어 전략사령부의 핵 타격 개념을 브리핑받는 자리에서 그랬다고 한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은 핵무기의 역설에 있다. 결코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핵무기를 현대식으로 유지해야 하는 역설. 미국 본토 방어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의 많은 동맹국들에 대한 핵우산도 이러한 억지(抑止) 개념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말에 핵무기 선제 불사용원칙을 천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안팎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동맹국이 핵 위협을 받지 않는 한 핵무기를 먼저 쓰지 않겠다는 것으로, 지난 70년간 유지된 핵 선제타격 정책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논리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시기에 핵 억지력을 약화시킨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동맹국뿐만 아니라 미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관련 부처 각료들에게서도 나왔다. 이들은 핵 선제타격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재래식 무기에 의한 무력 충돌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핵 선제타격 원칙이 핵 억지력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보유국의 핵무장 명분이 될 수 있고, 무력 충돌 시 우발적 핵 사용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세상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이 정책 변경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그렇더라도 주요 부처와 동맹국들이 반대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 뜻을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북한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실패했고, ·러관계 악화로 핵무기감축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천명하려 하는 것은 임기 말 업적 욕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정책 변경을 추진하는 오바마 대통령 등 미국의 핵비확산론자들이 이상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한 뒤로 핵전쟁이 없었던 것은 핵무기 자체에 그 사용을 막는 마법의 힘이 있어서라기보다 우리가 억세게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 단추는 대통령이 결정하면 지상배치 미사일은 5, 잠수함 미사일은 15분 안에 발사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면 발사되는 방아쇠(hair trigger)’에 비유된다.

 

누군가 은행을 털면 경찰이 도시 전체를 폭파시킬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경우에 비유해보자. 도둑이 그 협박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긴다면 감히 은행을 털지 않을 것이고, 은행 관리인과 예금주들은 안심할지 모른다. 대다수 주민들은 도시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안전, 평화라고 믿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는 핵무기의 역설, 핵 억지력의 신화에 너무 중독돼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도 망각한 것 아닌가. 정답에 매몰된 모범생이 되기보다 대안을 찾아보려고 시도한 오바마 대통령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현실적이라고 보는 이유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한국과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은 중국의 강한 외교적 반응을 낳았다. 한국과 중국이 해법을 찾지 못하면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사드 배치가 결정되기 전 한국과 중국은 미사일 및 미사일방어 활동을 서로 자제해왔다. 한국은 최근까지도 사드를 설치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꺼렸다. 사드가 중국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중국은 대개 미사일 발사 실험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다. 동쪽으로 쏠 경우 한국이 위협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양국이 신중하게 자제하면서 양국관계는 지난 수십년 동안 안정됐고, 경제 교역과 문화 교류가 촉진될 수 있었다. 사드 배치 결정은 안정적 한·중관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출처: 경향신문DB)

 

한국과 미국 정부는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TPY-2 레이더는 중국 미사일 탄두의 비행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한국에 설치된 사드 레이더로 미국이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중국 핵탄두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면서 중국은 핵 억지력이 손상되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레이더의 식별 범위는 전자기파의 강도와 목표물에 머무르는 시간 등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레이더의 특정 모드에서 식별 범위는 전자기파가 목표물을 얼마나 비출 수 있느냐(RCS)에 따라 달라진다. 목표물이 레이더에 비치는 단면이 작으면 레이더는 매우 적은 양의 전자기파 에너지를 받게 되고 그 목표물을 짧은 범위 내에서만 볼 수 있다.

 

미사일 탄두는 보통 원추형이며 표면이 부드러워 레이더가 정면에서 비추면 단면이 매우 작다. 불가피하게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야 할 표면은 탄두 뒤쪽에 배치된다. 탄두를 뒤쪽에서 바라보면 레이더는 훨씬 넓은 단면을 잡아낼 수 있다. 레이더가 전자기파 스텔스 처리된 탄두의 앞면을 비추면 반사되어 오는 전자기파가 거의 없지만 같은 탄두의 뒷면을 보면 전자기파 반사량은 훨씬 커진다. 따라서 레이더가 탄두 뒷면을 보는 위치에 놓이면 훨씬 큰 식별 범위를 갖게 된다.

 

한국에 배치될 사드 레이더가 북한 미사일을 보기 위해 배치된다고 해도 중국 동북부를 날아가게 될 중국 탄두들의 뒷부분을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동북부가 사드 레이더의 최대 식별 범위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탄두를 정면에서 봤을 때를 가정해 사드 레이더의 식별 범위를 축소해 계산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탄두의 뒤를 비추는 사드 레이더의 범위는 아래 두 가지 상황에서 중국 탄두를 식별할 정도로 충분히 넓다.

 

첫번째 상황은 중국이 동북부에서 서쪽으로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할 때다. 미사일은 로켓의 가속 단계 이후 탄두와 유인용 가짜탄두를 내놓는다. 탄두와 유인용 가짜탄두를 앞쪽에서 보면 레이더에 나타난 신호는 대체로 구별이 불가능하게 고안돼 있다. 탄두와 유인용 가짜탄두를 뒤에서 비췄을 때 잡힌 레이더 신호는 체계적인 차이가 있다. 즉 사드 레이더가 중국 미사일의 탄두와 가짜탄두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두번째 상황은 중국이 미국에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보복을 위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발사하는 상황이다. 사드 레이더는 그 미사일과 탄두를 매우 초기 단계에서 추적해 궤적 정보를 미국 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에 전달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 탄두를 요격하는 데 더 많은 시간 여유를 갖게 된다. 사드 레이더는 미사일을 뒤에서 본 정보를 토대로 유인용 가짜탄두와 진짜 탄두를 식별해낼 것이다.

 

사드 레이더가 한국에 배치되면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높은 출력, 센티미터까지 측정하는 능력 때문에 중국의 핵 억지력은 손상된다. 중국이 생각할 수 있는 대응은 탄두의 뒷모습을 숨기기 위해 미사일 실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미사일은 동중국해로 향하게 된다. 이는 한국에 또 다른 위협이 된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 사이의 안보 딜레마다. 서로 위협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사드 결정은 양측 어디에도 이롭지 않은 부정적인 상황을 낳았다. 그러한 안보 딜레마를 풀기 위한 몇 가지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가지는 한국이 사드의 TPY-2 레이더를 배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그린파인(Green Pine) 레이더나 사드 요격미사일들을 인도할 비슷한 능력을 가진 다른 레이더를 설치할 수 있다. 한국을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서 보호하는 데 TPY-2 레이더는 그린파인급 레이더보다 나은 게 없다. TPY-2 레이더의 식별 범위는 북한 영토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사드 레이더다. 만약 한국이 TPY-2 레이더 대신 그린파인 레이더를 배치하기로 결정한다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면서도 중국의 우려를 불식시켜 한·중 양국 관계를 바로잡아줄 것이다. 양국은 건설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번역 | 손제민 특파원

 

리빈(李彬) 칭화대 교수·카네기-칭화 글로벌센터 선임연구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살고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씨는 트램(노면전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194586일 아침,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씨는 당시 원폭 투하 지점에서 약 1.8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던 트램 안에 있었다. 12살이던 그는 트램 덕분에 살아났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씨는 트램을 아주 좋아한다. 트램이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존재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트램이 이용자들에게 최고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과 같은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더없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그는 오랜 삶을 통해서 알고 있다.

 

 

사실 히로시마는 대중교통수단의 전시장 같은 곳이다. 고속열차인 신칸센(新幹線)과 일반 열차가 도심을 지나는 히로시마에는 버스·택시 등 대중교통수단 이외에 트램은 물론 지하철과 고가 방식이 결합된 도시철도까지 있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이 중에서 트램을 최고로 꼽는다. 다른 대중교통수단에 비해 타고 내리거나 환승하기에 편리한 것이 주된 이유다. 무릎이 좋지 않은 씨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등 불편한 지하철과 고가 방식의 도시철도는 단 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구 117만명의 대도시인 히로시마에는 7개 노선에 35.1의 트램이 부설돼 있다. 트램의 연간 수송인원은 5500만명으로 수송인원과 노선 길이 모두 일본 최대 수준이다.

 

지난 5월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갔을 때 트램의 위력을 절감했다. 신칸센에서 내려 히로시마역을 나서자마자 시내를 실핏줄처럼 연결하는 트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거치지 않고 가볍게 걷는 기분으로 올라탄 트램은 오바마의 방문지인 히로시마평화공원까지 편안하게 데려다줬다. 트램은 레일이 설치된 도로를 버스·택시·자가용 승용차·화물차 등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동안 히로시마 이외에도 고치(高知), 마쓰야마(松山) 등 중소도시는 물론 대도시인 도쿄(東京),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트램을 직접 이용해 봤다. 그때마다 일본처럼 고령자가 급증하고 머지않아 인구가 줄어드는 한국에도 트램이 최적의 대중교통수단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절감하곤 했다.

 

최근 한국의 대전시가 시내의 순환형 도시철도를 트램으로 건설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인구 150만명이 넘는 대도시가 핵심 도시철도망을 트램으로 건설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미래를 내다본 결단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트램의 효용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고가 방식의 도시철도로 해야 한다는 등 반대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반대 논리의 핵심은 트램을 건설하는 경우 도로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트램을 설치하면 도로가 막혀서 난리가 날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기우이기도 하지만, 설사 트램 때문에 기존 도로 기능의 일부가 저하되고 차량 흐름이 나빠진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트램의 긍정적인 효과로 보고 싶다. 트램 때문에 도로가 막혀 자가용 운전대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정책의 효과가 되기 때문이다.

 

70년 전 씨의 목숨을 지켜준 히로시마의 트램이 지금은 씨 같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수많은 서민들의 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도시의 교통정책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고 결정해야 한다. 대전시의 이번 결정이 급속한 인구변동을 겪고 있는 한국의 도시들에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한국 언론 보도를 보고 있으면 성주 군민들이 제2의 세월호 유가족들, 2의 밀양 송전탑 건설지역 주민들처럼 비국민으로 고립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의 한국 배치를 결정한 뒤 논의가 지역민의 안전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흐르고 있다. ‘외부세력의 개입’ ‘종북딱지를 붙이는 것까지 정권 담당자들과 보수 언론의 구도짜기는 이제 지겨울 지경이다. 주민 안전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하고, 끈질기게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수천만명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다며 국가안보를 얘기하는 쪽에서 님비로 손쉽게 치부해버리고 마는 논리로는 이기기 어렵다.

 

23일 오후 서울 세종로 공원에서 사드 한국 배치 결정 철회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급기야 성주 참외를 내 자식에게 먹이겠다고 거드는 미국 정치인까지 등장했다. 국방연구원 연구원 출신 여당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트렌트 프랭스 하원의원의 발언이 전해졌다. 그 뒤 프랭스는 공화당 전당대회가 진행되던 바쁜 와중에 한국 특파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다. 군이 허락한다면 애리조나의 자기 집 뒷마당에라도 사드를 배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그가 잘 안다.

 

사드가 한국 방어를 위해 얼마나 효과적인지, 탄두 재진입체와 유인용 가짜 탄두를 구분하는 데 얼마나 유능한지 그에게 물었다. 프랭스는 2005년에 11번 모두 성공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언급하며 사드의 요격 확률이 99%에 달한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사드가 아직 유인용 가짜 탄두를 구별해낼 능력이 떨어지는 점을 한계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기술 발전이 결함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했다. 사드를 배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미사일방어 역학에 정통한 미국 과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여기서 과학자들이란 미국 군산복합체로부터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려하는 과학자들의 모임테드 포스톨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석좌교수와 조지 루이스 코넬대 연구원은 적이 유인용 가짜 탄두로 교란하기는 너무 쉬운 반면, 아군이 그것을 막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적외선 감지기상에 똑같아 보이는 진짜 탄두 진입체와 유인용 가짜 탄두 세트를 설계하는 것은 간단한 반면 둘을 구별해낼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은 없다는 것이다. 사드 포대를 성주에 배치해도 북한이 마음먹고 쏘는 노동·스커드 미사일을 잡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물리학을 전공한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 본인이 연구원 시절이던 1981년 논문에서 내렸던 결론이기도 하다. 포스톨 교수는 카터 장관이 35년이 지나도록 그 결론을 뒤집을 만한 어떠한 근본적인 기술적 진보도 없는 상황에서 사드 세일즈에 열을 올리는 것은 과학자로서 부도덕하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핵·미사일 확산방지 문제에 대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높은 식견을 갖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포스톨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과학자 출신 보좌관들이 많다. 이들은 왜 사드 배치에 제동을 걸지 않았을까. 오바마 행정부의 논의 과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사드 배치는 오바마가 밀어붙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 때문에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조르고, 펜타곤과 무기 제조업체들 그리고 공화당이 이를 기회로 활용했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한국이 나중에 사드 배치 결정을 번복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서운해할 이유는 많이 없는 셈이다. 사드가 기술적 측면에서도 한국 방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미국 과학자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미사일방어 맹신론자조차 솔직히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무기를 동북아 긴장 고조의 최전선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배치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