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본 사람들 상당수는 그것이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여준 파격적인 언행은 장삼이사의 이야기 소재로 오래 회자됐다. 한반도에 핵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바야흐로 열릴 것으로 모두 가슴이 부풀었다. 그땐 그랬다. 


이젠 한·미동맹이 위기라고들 수군거린다. 비핵화를 놓고 북한과 샅바를 잡고 혈투를 벌이는 데 ‘아마추어’ 인사들이 국가안보 주요 자리를 꿰차고 있어 한·미 간 의견조율이 제대로 되질 않아 핵협상 교착을 자초했다는 게 주장의 골자다. 외교부 ‘워싱턴스쿨’로 대변되는 인물들의 대거 퇴진이 동맹위기 지표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불이 났는데도 유능한 소방수가 없다는 장탄식도 함께 터져 나온다. 진실의 실체에 얼마나 근접한 주장인지 알 수는 없지만 미국통으로 불리는 외교부 고위급 인사 다수가 약속이나 한 듯 세종로 청사를 떠났거나 한직으로 밀려난 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1·2차장 모두 이전부터 북핵과 한·미 문제에 천착한 전문가들이 아니기에 ‘청와대 정부’에 미국통이 없다는 주장을 억견(臆見)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더라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전성시대를 향유한 ‘워싱턴스쿨’이 당시 한·미관계를 얼마나 견고하고 촘촘하게 다져놓았던가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판 내지 검증의 잣대가 적용되어야 이치에 맞다. 이 시기에만 무려 다섯 차례의 북한 핵실험이 실시됐다.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를 추수(追隨)한 것 이외에 비핵화 관련해서 어떤 진전을 이루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의 재정립은 워싱턴스쿨의 유무와 관계없이 ‘기후변화’처럼 불가피하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정의와 공정성 등 미국의 전통적 가치와 이상을 무시하고 미국 우선주의 깃발만 높이 치켜든 트럼프시대에 일방주의가 강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 전망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전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문제 등이 어떻게 결말을 짓든 트럼프 외교정책은 예비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 방향은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이다.


역외균형은 고립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지역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당국이 스스로 해결할 것을 주문한다. 정글로 불리는 국제 문제에 미국이 사사건건 해결사로 나서주길 기대하지 말고 자국의 안보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것이다. 동맹이라도 안보 무임승차를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장사꾼 트럼프는 동맹국들에 주는 방위비 보조금을 ‘부자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에 비유했다.


주류 외교정책 엘리트들에게 적대적인 트럼프는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하는 막대한 자원을 국내 인프라, 교육 그리고 연구·개발 분야 등에 투자하는 것이 자신의 미국 우선주의 가치에 부합한다고 여긴다. 그래야 미국의 우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스티븐 월트 교수처럼 역외균형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미군의 해외 주둔 역시 특정 국가가 해당 지역 패권국가에 의해 중대한 안보위협을 받을 경우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국익을 철저히 따져 극단적 위기상황이나 전쟁이 이미 발발한 경우가 아니라면 선택적 개입만 하자는 입장이다. ‘원칙에 입각한 현실주의’ 접근법이다. 


또한 역외균형론자들의 주된 관심이 새로운 패권국가의 등장임을 감안할 때, 미국에는 중국의 부상이 가장 큰 도전이자 위협요소이다. 중국을 여타 국가들과 연합내지 동맹을 유인할 경제·군사적 능력을 갖춘 잠재적 패권국가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처럼 중국을 견제할 감제고지(瞰制高地) 역할을 한국이 나서서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시대 한·미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담대한 결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100쪽이 넘는 ‘문재인 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을 정독하면서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오롯이 문재인 정부가 떠안고 가야 할 형틀일 수 있겠다는 비감(悲感)이 새해 벽두부터 떠올랐기에 하는 말이다.


<이병철 평화협력원 부원장>

Posted by KHross

한·일 갈등이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한국 함정과 일본 초계기의 기동을 둘러싼 신경전이 보름간 이어지던 끝에 지난 6일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법적 대응을 지시했다.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을 상대로 재산 압류를 신청하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한 것이다. 최근에는 양국 누리꾼들까지 상대방에 대한 댓글공세로 가세하고 있다. 군사적 사안을 놓고 양국이 충돌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양국 간 갈등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한·일 갈등이 고조되는 데는 국내외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 정권이 숙원인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화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과의 갈등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는 레이더 문제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공세를 아베 총리가 직접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일제 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 자산 압류 신청에 대한 국제재판소 제소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한일청구권협정과 무관하게 개인배상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사법부의 독자 판단을 무시한 채 행정부에 책임을 묻고 있다. 과거 사례에서 보듯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할 때 한·일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떨어지는 지지율을 독도 방문으로 만회하려다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정부와 정면충돌해 최악의 갈등을 노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금 아베 총리 내각의 지지도가 40%를 턱걸이하는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 오는 7월 개헌을 좌우할 참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갈등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면 양국관계를 결정적으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전 정부와 달리 양국 간 갈등 중재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유관순(뒷줄 맨 오른쪽)을 비롯한 이화학당 학생과 교사의 사진. 3·1운동에는 이화학당 등 여학교 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어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한·일 양국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갈등이 더 이상 심화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양국 모두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우선 군사당국은 추가적인 공세를 자제한 뒤 증거를 토대로 초계기 근접 비행과 레이더 조사 여부에 대한 진상을 가릴 필요가 있다. 외교 채널도 적극 가동해야 한다. 특히 아베 정부가 외국 법원의 판결까지 부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공세가 한·일관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을 아베 정부는 유념해야 한다.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