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갖는 법적·역사적·외교적 함의는 매우 엄중하다.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과 법리적 공방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과 배치되는 판결이어서 정부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파장과 문제점을 논하기에 앞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을 한국의 최고법원이 명확히 재천명했다는 점이 이번 판결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판결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한반도 역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다.

 

한·일관계는 애초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정상화할 때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없었다. 안보·경제적 이유로 일본과의 수교가 시급했던 탓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이 미국의 주도로 이뤄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전후질서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에 있다.

 

13년이나 끌어 온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종 선고가 원고 승소 판결로 내려진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7년간의 일본 점령통치를 끝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국가가 됨과 동시에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다. 미·소 냉전에 대비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전범국 일본에 서둘러 면죄부를 준 것이다. 당시 국제적 존재감이 미미했던 한국은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의 중요한 부분들은 미해결 상태로 종료됐다.

 

그럼에도 한·일관계는 상호 필요성에 의존해 유지될 수 있었다. 냉전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는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냉전구도가 해체되면서 한·일은 서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강제징용 판결은 이 같은 한·일관계 변화 추세의 결정판이다. 판결의 핵심은 간명하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법이므로 강제징용도 불법이고 따라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 한·일이 외면하고 회피해왔던 한·일관계의 ‘태생적 모순’을 정조준하고 있다. 53년간 덮어놓았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1965년 체제’로는 더 이상 한·일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일관계를 파탄낼 수는 없다. 출발이 잘못됐으니 처음으로 돌아가 한·일관계를 근본부터 뒤집고 이미 국제적으로 뿌리내린 전후질서를 바꾸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은 미국 주도의 전후질서와 동아시아 전략의 희생물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만들어놓은 전후질서의 그늘 아래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는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싫든 좋든 현재의 체제 안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일은 이제 1965년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협력모델을 빨리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교적 해결 노력과 국내 여론 설득을 병행할 수 있는 양국 정부의 ‘용기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일본은 청구권협정과 한일기본조약의 문구 하나하나를 머리카락 쪼개듯 분석하고 법적 효력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한·일관계에는 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알면서도 ‘법적으로 다 끝난 일이니 책임질 일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한국은 일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일본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면 즉각 비현실적인 강경론 일색의 반응이 나오고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한국에는 국민적 반일감정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부류, 이 같은 선동에 자극받아 대책없는 대일 강경론에 목소리를 높이는 부류, 이 같은 악순환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분위기에 눌려 모른 척 침묵하는 비겁한 부류가 존재한다. 정치인·학자·언론·관료·시민단체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개인과 집단 대부분은 이 세 가지 부류 중 하나에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 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인 담론이 형성될 수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일 모두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 법리적·현실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소지가 충분한 판결이지만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의 근본적인 사안에 대해 양국 모두 진지하게 고민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기에 가치 있는 판결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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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있다. ‘통일비용 포비아’, 바로 통일비용에 대한 공포감이다. 젊은 세대들은 여기에 짓눌려 있는 듯하다. 남북 화해 무드에서도 세금을 또 걷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단언컨대 통일비용은 없다! 통일비용은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다. 더구나 독일 사례에서 서독의 경제적 부담이 과장되기 일쑤이다. ‘햇볕정책’에 대한 과거 보수정부의 반감으로 인해 오해와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온 측면이 적지 않다.

 

독일 통일비용 중 철도, 도로 건설 등 직접적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에 사용된 것은 약 12%에 불과하다. 50% 이상은 동독 주민의 소득보전에 쓰였다.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 흡수통일이 되다 보니, 동독 주민에게 서독과 동일한 수준의 소득과 복지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남북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번영의 길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실질적 해결과정이 진행되면 대북 경제제재도 풀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흡수통일은 망상에 불과하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적극 피해야 한다. 남북한의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한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 격차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바람직한 남북 통합은 우선 평화적 교류 협력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격차를 완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가 통일을 논할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결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흡수통일이 아니라고 해서 경제협력 비용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북한 SOC 개선과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지만 이를 통일비용으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오해다. 남북경협 과정에서 과연 어떤 비용이 필요한지 한번 따져보자.

 

우선 개별 기업의 투자는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우리 기업이 중국과 베트남에 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누구도 ‘퍼주기’라고 하지 않는다. 기업은 이익이 된다면 어디에든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가 이뤄지려면 인프라 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소한 산업단지에 전력과 용수, 교통, 통신 등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및 국제 자본이 함께 진출하는 컨소시엄도 해법이 될 수 있다.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 활용이 가치가 있음을 전제로 할 때, 초기 투자비용 부담만 감당할 수 있으면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 인프라 비용까지 투자하고 진출하는 기업에는 상당기간 사업 우선권 등 인센티브를 줄 수 있다. 초기 투자시점과 이익창출 시점 간의 시간차를 해결하기 위해 ‘패키지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큰 비용은 한반도의 ‘대동맥 구축’에 사용될 것이다. 철도, 도로, 에너지, 항만 등 주요 SOC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대기업 차원에서도 독자적으로 부담하기 어렵다. 그러면 이것은 과연 통일비용일까? 나는 이를 한국의 ‘유라시아 대륙경제 접속 비용’ 또는 ‘섬나라 신세 탈출 비용’으로 해석한다. 남북 네트워크 연결은 유라시아 대륙세력과 태평양 해양세력의 접점에 놓인 한반도에 지리경제학적 대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배로 부산항과 목포항에 와서 다시 기차로 서울, 평양, 베이징, 모스크바, 유럽까지 여행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한반도의 항만 도시들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복합물류 거점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 비용은 한반도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투자이다. 한국 자체 역량으로도 감당할 수 있다.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남북이 주도하는 ‘북한개발은행(가칭)’을 투자 플랫폼으로 설립하고 여기에 국제금융기구가 참여하는 구상도 가능하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국제자본이 물밀 듯이 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투자 수익을 우선시하는 탐욕적 자본에 주요 기간시설을 넘겨서는 안된다. 북한 경제개발 전략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며, 남북이 공동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갖추도록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무분별한 해외자본의 공략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한국의 교훈을 알려주어야 한다. 남한은 가장 믿을 만한 파트너임을 북한에 이해시켜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가 달린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젊은이들이 ‘통일비용 포비아’에 현혹되어 한반도의 원대한 꿈을 상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통일비용은 없다!

 

<민경태 여시재 한반도미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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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북·미 고위급회담의 연기가 단순한 일정 조율의 문제라며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재천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중간선거 후 첫 기자회견에서 “내년 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 팔라디노 국무부 부대변인도 회담 연기는 “순전히 일정을 다시 잡는 문제다. 일정이 허락할 때 다시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간 고위급회담이 돌연 연기된 데 대한 의구심을 미국 정부가 적극 나서 불식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간선거 패배 후에도 계속 외교적인 북핵 해법을 추구한다는 신호다.   

 

북측의 연기 사유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미 양측 간 심각한 이상기류는 보이지 않는다. 국무부는 회담 연기가 제재 해제와 관련돼 있느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 우리는 꽤 좋은 상황에 있다”고 단언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일정이 분주하니 연기하자는 통보를 받았다고 미국이 우리에게 설명해줬다”며 “양측이 회담 일정을 조정 중”이라고 밝혔다. 이전과 달리 북한이 먼저 회담 연기를 요청했다는 것인데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11월9일 (출처:경향신문DB)

 

북한이 회담을 연기한 것은 미국과의 약속을 무겁게 여긴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제재 완화와 핵리스트 신고의 선후를 둘러싸고 북·미 간 이견은 있는 듯하다. 북한이 조기 제재 완화 조치를 얻어내기 위해 미국을 압박하려는 시도라는 미국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제재를 없애고 싶지만 그들(북한) 역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회담 연기는 결정적 갈등이 아니라 북·미가 핵 협상에 앞서 마지막 호흡을 조절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위급회담 일정을 놓고 시간을 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미 모두 역지사지의 태도로 대화를 진척시켜야 한다. 미국은 북한이 핵리스트를 신고하면 공격지점을 다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을 새길 필요가 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면 미국도 제재 완화 등 실질적인 관계 정상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조속한 시일 내에 북·미 고위급회담 일정이 잡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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