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종전선언 서명을 약속했으나 이후 입장을 바꿨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미 인터넷 언론 ‘복스’는 29일(현지시간) 보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이후 곧바로 종전선언에 서명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정상회담 이후 태도를 바꿔 종전선언 전에 북한이 먼저 핵무기를 폐기할 것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북·미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북·미 후속협상이 왜 답보하고 있는지 비로소 설명된다.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아낸 느낌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8월 31일 (출처:경향신문DB)

 

돌이켜 보자. 북·미 고위급회담을 위해 7월6~7일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갔다. 북한은 그 직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내고 미국이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고 비난했다. 특히 종전선언에 대해 “조·미 수뇌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더 열의를 보였던 문제”라며 미국이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 문제까지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어 놓으려는 입장을 취했다”고 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볼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미국 언론들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짐 매티스 국방장관이 종전선언에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로 종전선언 후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당치 않다. 종전선언은 전쟁상태를 끝내자는 정치적 선언으로 구속력이 없다. 더구나 북한은 1992년부터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겠다’는 메시지를 미국과 국제사회에 전해왔다. 북한이 비핵화에 진지한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터무니없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르니 약속을 깨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식이라면 애초부터 협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백악관은 ‘트럼프 종전선언 서명 약속’ 보도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다. 미 국무부도 즉답을 회피했다. 그러나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약속한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지키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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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비핵화 협상의 정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태도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돌연 취소하더니 이번엔 북한이 가장 예민해하는 한·미 연합훈련 재개 가능성을 시사했다. 우려스러운 상황 전개인 데다 가까운 시일 내 교착국면이 풀릴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28일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현재로선 더는 중단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한·미가 중단키로 한 것이 8월 훈련이고 이후의 훈련은 정해진 바 없다는 기존 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핵화협상 답보 상황에서 이 카드를 꺼낸 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북한이 비핵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언제든 강경 대응으로 선회할 수 있다는 경고로 비치기 때문이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 AP연합뉴스

 

매티스 장관의 발언은 트럼프 행정부 내의 대북 협상에 대한 회의적인 기류를 반영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4일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취소하면서 비핵화에 충분한 진전이 없다고 밝혔다. 북·미 협상에 대해 시종 낙관론을 펴던 입장을 바꾼 것이다. 강경파로 분류되는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도 같은 날 “북한이 어쩌면 비핵화에 대한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며 회의론을 꺼낸 것도 좋은 흐름은 아니다. 북한은 폼페이오의 방북 취소에 대해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권수립 70주년인 9·9절을 맞아 외교성과를 자랑해야 할 시점에서 미국이 보이고 있는 태도에 당혹감이 클 것 같다. 

 

문재인 정부 운신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미국 조야와 한국 내 일각에서는 북·미 협상이 답보상태인데 남북관계만 앞서 나가서는 안된다는 속도조절론이 나온다. 9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북·미 협상은 최종적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지에 따라 성사됐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가 메신저 역할과 분위기 조성 노력을 펴지 않았다면 애초 대화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북·미관계가 한반도 정세를 규정지어온 역사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처신에 따라 북·미관계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이 이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할수록 한반도 문제 당사자로서 운신의 폭이 커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를 복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북·미관계가 답보상태라고 한국마저 손놓고 있는다면 어렵사리 만든 비핵화와 평화구축의 기회가 날아가버릴 수 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29일 “북·미 교착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난관을 돌파하는 데 남북정상회담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정부가 현 시점에서 해야 할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미 입장을 중재하고, 전략을 가다듬어 9월 남북정상회담을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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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등이 잇따라 개최되면서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최근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아시안게임 단일팀이 구성되는 등 남북한 교류와 협력도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미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아직 통일은 먼나라 얘기인 것 같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19.8%가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답했다. 2008년 본원이 동일 문항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31.2%가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답했다.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청소년 비율이 점차 줄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는 청소년 3명 중 1명(35.6%)이 북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핵무기’를 꼽았다. 5명 중 1명(22.1%)은 ‘독재정권’을 꼽았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들이 통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의 통일교육이 국가안보나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 청소년들은 통일이 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로 ‘전쟁 위험 해소’(43.6%)를 가장 많이 들었다. ‘국가경쟁력 강화’(21.9%), ‘같은 민족이어서’(18.0%), ‘이산가족 아픔 해결’(12.9%) 순이었다.

 

2008년 조사에서는 ‘국가경쟁력 강화’가 31.5%로 가장 높았다. ‘같은 민족이어서’ 22.9%, ‘전쟁 위험 없어짐’ 19.7%, ‘이산가족 아픔 해결’ 17.0%, ‘북한 문제 해결’ 4.0% 순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을 해야 한다는 차원을 떠나 통일이 청소년들에게 왜 필요하며 어떤 의미와 이익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청소년들은 통일교육을 통해 ‘통일의 필요성과 통일 후 국가미래’(39.2%)를 가장 많이 알고 싶어 했다. ‘북한의 실상’(23.9%)은 그 뒤를 이었다. 

흥미롭게도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들의 경우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통일의 당위성에도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이들의 정치참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북한 사회의 모습을 충분히 소개할 수 있는 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강화될 필요가 있다.

 

한편 청소년들은 또래 북한 청소년들에 대해 높은 친밀감을 보였다. 관광, 수학여행, 야영, 스포츠활동 등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따라서 남북 수학여행이나 남북 청소년축구대회 같은 스포츠 교류, 남북 청소년이 함께 공연을 할 수 있는 예술 교류 같은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통일교육의 방향은 남북 청소년 간의 우애를 다지는 교류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끝으로 2023년 전북 새만금에서 개최되는 세계잼버리대회에 북한 청소년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남북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이창호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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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에서 일본 극우 세력의 동영상 채널들을 잇달아 폐쇄하고 있다. 그들의 우리나라와 중국에 대한 도를 넘은 혐오 발언(Hate Speech) 때문이다.

 

2018년 8월15일, 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영화 <카운터스(Counters)>가 개봉되었다. ‘카운터(counter)’는 영어로 ‘반대하다’ ‘받아치다’라는 뜻이다. 일본의 혐한 시위나 혐오 발언에 반기를 들고 행동으로 나선 사람들을 칭하는 카운터스는 일본에서 2013년에 등장한 시민단체이다.   

 

다큐영화 '카운터스'의 한 장면

 

혐한은 한국 혹은 한국인에 대해 혐오 발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언론에서의 혐한 담론 출현 경위를 살펴보면, 1990년대 초에 등장한 글로벌 시대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면에 노출됨으로써 일본과 우리나라 언론에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피해를 증언한 이후, 일본의 최대 유력 종합월간지인 ‘문예춘추(文藝春秋)’(1992년 3월호)의 특집대담 기사에 실린 혐한 담론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이 특집대담 기사가 우리나라 일간지에 보도되고, 한국에서의 보도 사실이 다시 일본 일간지에 게재되었다. 이후 혐한 담론은 일본 언론에서 현재까지 반복 재생되고 있다.

 

헤이트 스피치, 즉 혐오 발언이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며, 지구촌 세계화가 시작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혐오 발언은 특정 집단이나 사람들을 배척하기 위해 편견과 폭력을 부추기는 차별 발언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입견과 편견이 거치는 단계들에 대해 증오범죄 연구자인 브라이언 레빈은 ‘증오의 피라미드’ 5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1단계는 편견, 2단계는 편견에 의한 행동, 3단계는 차별 행위, 4단계는 폭력 행위, 마지막인 5단계는 제노사이드(인종학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과 한국인을 향한 일본의 혐한과 혐오 발언에 대해, 1·2단계인 편견과 편견에 의한 행동을 계속해서 묵인하고 내버려둔다면 3·4단계인 차별과 폭력 행위는 과격한 시위 양상으로 계속해서 발전될 것이고, 5단계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유사한 사건이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다. GDP는 미국의 70%에 육박했고, 인구도 1억2000만명인 큰 나라였다. 이러한 일본이 장기침체에 빠졌다. 한순간에 무너져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지금 잃어버린 30년을 걱정하고 있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기업을 이끈 지도자들이 미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하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시스템을 고치지 못한 것이 주요인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왜곡된 민족주의와 애국심 고취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결국 이는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는 인색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역사미화라는 또 다른 잘못된 의사결정들을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혐한은 일본 자국민들의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저하시키는 것들에 대한 강력한 거부반응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고, 이 혐한은 다시 혐한 시위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극우 세력이 한국과 한국인을 증오하는 데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과 한국인을 이토록 멸시하고 모욕하고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혐오와 증오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성이며, 느닷없이 폭발한 것이 아닌 훈련되고 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의 혐한을 절대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오히려 혐한을 이루는 성분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넘어 작동하고 있는 혐한의 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고찰해야 할 것이다.

 

<노윤선 | 고려대 인문역량강화 사업단 연구보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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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4일(현지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한반도 비핵화가 충분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폼페이오 장관에게 북한에 가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의 중국에 대한 더 강경해진 무역 입장 때문에 중국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비핵화 협상에 진전이 없고, 북·중 밀착이 강화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방북 취소의 이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불과 며칠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한 점에서 보면 방북 취소는 당혹스럽다. ‘성추문 의혹’과 관련해 측근들이 유죄를 받고, 미·중 무역협상이 성과없이 끝나는 등 국내외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확실한 방북 성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한 처신일 수 있다. 판을 흔들어 북한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트럼프 특유의 협상전술일 가능성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건 한 나라의 외교장관이 공식 발표한 외교일정을 하루 만에 번복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당사국들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통행식 외교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북한의 대미 불신이 커지면서 비핵화 의지가 약화될까 우려된다. 북·미 협상 진전을 학수고대해온 한국인들을 낙담시킨 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방북 취소는 임박한 한반도 외교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중국의 비협조에 불만을 터뜨린 상황에서 북한 정권수립 70주년인 9·9절에 즈음해 이뤄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이 자칫 사태를 더 꼬이게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폼페이오의 방북 성공을 전제로 거론돼온 ‘유엔총회 종전선언’ 구상도 불투명해졌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 트럼프가 “김 위원장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곧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며 북·미대화의 흐름을 이어갈 뜻을 내비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반응을 지켜봐야 하지만 이번 사태는 한반도 비핵화 여정에서 벌어질 수많은 해프닝 중 하나일 뿐이다. ‘북·미 협상’ 구도 자체가 변질됐다고 볼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와 9월 정상회담 등 남북 간 일정을 예정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물론 신중하게 상황을 평가하고 전략을 좀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지만, 우물쭈물하다 보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칠 수 있다. 북·미 기상도에 휩쓸리다간 한반도 정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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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협상이 종전선언에 가로막혔다.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와 미국의 비핵화 요구가 팽팽하게 맞서 있다. 형식 논리상 북한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북·미 협상의 최종 목표는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다. 그런데 체제보장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북·미 수교로 달성된다. 그 과정에서 종전선언은 체제보장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에 해당한다. 따라서 종전선언을 최종적 조치인 비핵화와 교환하자는 요구는 불공평하다. 1만원 걸 테니 10만원 걸라는 식 아닌가. 더구나 미국은 8개월 내 핵탄두의 60~70%를 없애야 종전선언에 응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이 “강도적 요구”라고 발끈할 만하다.

 

미국은 종전선언의 개념과 방향에 대한 의견을 밝힌 적이 없다. 하지만 고위 인사들의 발언을 통해 드러난 인식을 보면 매우 완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종전선언을 하면 후퇴할 수 없다”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종전선언을 대단히 무겁게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먼저 종전선언은 후퇴할 수 없는 조치가 아니다. 통상적인 의미의 종전선언은 한반도 전쟁을 종료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 종전선언 후 북한이 상응하는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는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편익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비핵화 협상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미국은 북한이 종전선언 후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동맹 역할 변화 등의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우려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나 다룰 사안이지, 그전 단계인 종전선언 과정에서 거론할 이유가 없다. 특히 주한미군의 경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 주둔을 용인하는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 불안하다면 종전선언에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일정표를 담는 것이다. 아예 종전선언 명칭에 ‘한반도 비핵화’를 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예컨대 ‘한반도 전쟁종식과 비핵화를 위한 선언’은 어떤가. 북한과 미국의 요구가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종전선언을 “한갓 정치적 선언”이라며 의미를 낮춘 바 있으니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종전선언은 ‘한갓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지구상 최후의 냉전 지역인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종료시킬 이 선언은 정치·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전쟁 종결을 선언함과 동시에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효과도 각별하다. 먼저 미국이 북한을 외교관계를 맺고 경제협력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인정하는 수단이 된다. 북한 체제보장의 증표가 될 수 있다. ‘비핵화-체제보장 프로세스’ 도중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종전선언이 그 과도기의 안전을 보장하는 담보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북한에 비핵화의 명분도 제공해줄 것이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9·9절을 맞아 김정은 위원장의 성과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9·9절 방북을 검토 중이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행보가 주목된다. 시 주석 스스로 선물이 된다면 김 위원장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 미국에도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사실 종전선언의 ‘저작권’은 미국에 있다. 2006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 덕에 노무현·김정일의 ‘10·4 남북공동선언’에도 담을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종전선언에 합의했다. 앞서 미국은 ‘연내 종전선언’을 담은 4·27 판문점선언을 지지했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수락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미국이 멈칫거리는 것은 주류 정치인 등이 진을 친 반트럼프, 반북 세력의 반발과 공세 탓이 크다. 여야, 진보·보수를 넘어서는 이들은 북한과의 협상이 아니라 완전항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북·미 간의 불신 때문이다. 상대가 더 큰 이익을 보게 될 것이란 생각, 상대가 속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국가 간 협력을 어렵게 만든다는 미어샤이머의 법칙이 북·미 간에도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식 또는 비공식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북·미는 핵실험장 폐기와 군사훈련 중단 등 신뢰조치들을 교환해왔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조치들을 지속적으로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종전선언도 그중 하나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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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거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추가 회담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이고 시기와 장소 등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임박한 시점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은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비핵화 협상이 중대 고비를 맞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폼페이오가 지난 12일 “머지않아 큰 도약을 만들어내길 희망한다”고 밝힌 것을 비롯해 최근 미 행정부 안팎에선 긍정적인 신호들이 감지된다. 폼페이오의 이번 방북에서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이 성사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양측 간 ‘빅딜’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대로 핵리스트 제출 등 비핵화 초기 조치에 나서고 미국은 북한이 희망하는 종전선언을 수용하는 형태가 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의 발언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은 이런 기대감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오의 방북으로 북·미 협상이 타결되면서 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놓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다. 설사 폼페이오의 방북 성과가 미흡하다고 해도 정상 간의 ‘큰 거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올 들어 본격화된 북·미대화가 ‘톱다운’ 방식으로 움직여온 데다 실무협상의 교착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은 ‘친서외교’를 통해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정상외교가 교착국면을 해소하고 실무협상에 추동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어떤 맥락에서건 북·미 정상이 다시 만나 꼬인 매듭을 풀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 힘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발언은 9월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상외교가 다시 한번 숨가쁘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도 읽힌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정상외교 시즌2’가 펼쳐질 수 있다는 뜻이다. 9월 중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도 예상되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으로 ‘핵신고·종전선언 교환’이 타결되고, 시진핑 주석의 방북과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시나리오도 예상해볼 수 있다. 하반기 정상외교가 ‘종전선언’으로 귀결된다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크게 진전하게 된다. 폼페이오 방북이 성과를 내 하반기 정상외교의 시동이 힘차게 걸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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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경협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 15일 제73주년 광복절 축사에서 나온 동북아 6개국(남·북·중·일·러·몽)에 미국까지 참여하는 ‘동아시아 철도공동체’와 ‘통일경제특구’ 구상이 그것이다. 지루한 교착국면에 들어선 북·미 협상을 견인하기 위한 승부수로 보인다. 한반도 주변 4대국 모두가 참여하는 방안을 구체화했다는 점이 기존 경협 구상과는 다르다. 그런데 실현 가능 여부를 떠나 뭔가 불안하고 서두르는 감이 있다. 

 

사실 남북 및 동북아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4·27 남북정상회담, 6·12 북·미 정상회담으로 남·북·미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면서 한반도 주변 정치·군사적 긴장 완화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와 안보의 교환, 즉 ‘평화교역’ 구상이 착실하게만 진행된다면 침체된 한국 경제의 돌파구가 될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경제 동반성장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핵 관련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내놓은 이번 구상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지 아니면 국면을 전환하는 카드가 될지 모르지만, 다듬고 숙고한 구상이길 바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런데 정부 관계자들이 북한을 새로운 투자처나 시장으로만 인식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크다. 그러한 관점에 내재한 자본과 시장 중심의 ‘성장주의’ ‘우월주의’에 대한 우려다. 국회에 제출한 관련 법안들도 단순히 기존의 법 일부를 수정한 ‘일부개정법률안’이 대부분이다. ‘어떤 경제공동체인가’에 대한 담대한 고민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실천정책이 부족하다.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킨 승자독식, 무한경쟁의 남한 경제 질서가 북한까지 확장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통일은 남한과 북한의 영토와 주민 결합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남한과 북한 주민 모두에게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 남북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삶을 보장하는 새로운 국가 질서로 나타나야 한다. 남북경제공동체 질서도 이러한 새로운 국가 질서를 실현하는 방향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면적 전환의 기회를 맞았다.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동북아 정치·군사 질서의 평화적 재편과 남북 및 동북아 경제 공동번영을 위한 협력적 질서구축의 기회다. 그 과정에서 남과 북의 이익을 실현하려면 남북경제공동체에 대한 담대한 구상과 함께 남북의 컨센서스가 꼭 필요하다. 그러려면 남한 사회에 대한 냉정한 성찰과 우리 경제 질서가 작동하는 사회작동원리(또는 토대)부터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남한이 통일과 남북경제공동체를 주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작동원리는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양식을 규정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어떤 원칙 또는 철학·이념인 사회작동원리는 공동체 구성원 절대다수가 생활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다. 그 이유는 사회작동원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따르면 자기 삶의 질을 높이고,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역으로 현재 작동하는 법과 제도가 불공평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사회작동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법과 제도를 요구한다. 지난 촛불민심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사회작동원리는 ‘신자유주의’였다. 그리고 사회작동원리로서 신자유주의 핵심이 ‘시장만능’과 ‘무한경쟁’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확인하듯이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구조화였다. 2016년 광장의 촛불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사회작동원리에 기반한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장하는 새로운 대한민국도 그러한 촛불민심의 요구를 수용한 것일 터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사회작동원리는 무엇일까? 바로 ‘지속적인 공동체 발전’이 가능한 원칙과 철학이다. 나는 그것을 동반성장 사회라고 생각한다. 동반성장 사회를 만드는 요소는 다양하게 구성된다. 자유로운 경쟁은 보장하되 소수 대기업으로만 과실이 집중되는 시장구조는 제약된다. 국가는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기업이 공정한 경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다. 취약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과, 시장에서 실패한 이들에게 재진입의 기회를 주기 위해 사회안전망과 재교육 시스템도 촘촘하게 구축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경쟁과 성장을 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신북방경제’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구상이 남북경제공동체와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동하는 경제 질서로 작동하려면 북한을 성장의 대상으로만 보면 안 된다. ‘성장 수치의 증가’만을 목표로 하면 대기업 중심의 경협이 되어 한반도 차원의 불평등·불균형 경제 질서를 조성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남과 북의 지속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경제 질서를 만드는 사회작동원리에 기반해야 한다. 성장주의, 신자유주의 기조에서 상실된 남한의 가계와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동시에 북한의 경제주체들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질서가 아닌 함께 성장하는 경제 질서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방향이 맞는다고 정책이 다 적절한 처방인 건 아니다. 근래 문재인 정부는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다. 북핵 협상이 교착상태에 있고,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 논란과 거세지는 젠더 이슈에 해묵은 노동문제까지 민생과 사회적 이슈가 분출하면서 사회적 갈등과 논쟁이 거칠어지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정부의 시그널이 종잡을 수 없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정권이나 정부 내 정책조율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해보길 바란다. 정권에 대한 ‘신뢰’와 ‘안정’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내용과 별개로 이번 ‘동아시아 철도공동체’와 ‘통일경제특구’ 구상을 그리 썩 기껍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유가 이것이다. 제2의 ‘통일 대박’론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정부의 일관된 남북 경제협력 정책기조가 성장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 공정하게 나누는 통일경제의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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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타계한 ‘미스터 유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을 기억하려면 잊혀진 이름 하나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난의 전임자이자 아프리카·아랍권 출신 첫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1922~2016)다. 이집트 외무차관을 지낸 그는 이슬람권 출신답지 않은 스펙의 소유자였다. 프랑스에서 국제법을 공부한 데다 이슬람 신자가 아닌 콥트 기독교도였다. 아내 또한 유대인이었다. 1991년 그가 프랑스에 의해 유엔 사무총장으로 추천됐을 때 미국이 반대하지 않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하지만 갈리가 취임 후 유엔의 독립성을 강조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제3세계 회원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맞서 오는 갈리를 미국은 좌시하지 않았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유엔 분담금 10억달러를 고의로 체납한 것은 전조일 뿐이었다. 1996년 미국은 재선에 나선 갈리를 노골적으로 막아섰다. 유엔 안보리의 비공식 투표에서 갈리는 14표 중 13표를 얻었는데 미국이 홀로 반대했다. 미국은 이후에도 프랑스의 중재를 4차례나 거부했고, 결국 그는 역대 유엔 사무총장 중 유일하게 연임하지 못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사람이 아난이다. 그는 갈리가 남긴 아프리카 몫 5년을 채울 수 있는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그러면서 영어권인 가나 태생에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공부해 친미 성향이었다. 유엔 사무처 출신으로 방만한 유엔 조직을 개혁할 적임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미국이 원하는 ‘친미·관리형’ 사무총장 카드였던 셈이다. 

 

아난은 임기 내내 친미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친미주의자의 길만 걷지는 않았다. 1998년 바그다드를 방문해 사담 후세인과 협상을 벌이는 등 미국의 독주를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불법”이라고 비판했다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당시 그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바로 지금의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가장 위대한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아난의 서거를 전 세계가 애도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 흔한 트윗조차 날리지 않았다. 잠시라도 미국을 거스르면 ‘사망한 친미주의자’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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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조심스러운 낙관론에서 냉소적인 회의론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이 반응들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것은 이른바 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스스로 가진 모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한 수 뒤졌고” “속았다”고 결론내림으로써 이러한 반응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대화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상회담이 왜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설명하며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 총리를 무참히 공격한 지 며칠 뒤 세계에서 가장 전체주의적인 국가의 정상을 껴안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솔직히 이상했다”고 썼다. 사실 공화당 매파 존 볼턴과 민주당 상원의원인 척 슈머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색한 조합이다. 슈머는 트럼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핵개발에 대한 북한의 양보를 포함하지 않는 어떠한 합의에도 반대할 것이라며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의심되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사찰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위협과 주권 침해를 우려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초장부터 이를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했다.

 

볼턴을 지지하는 진보인사들은 트럼프가 김정은이 독재자로서 가진 절대권위를 부러워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트럼프가 악마와 악수를 했으며 1945년에 악을 물리친 뒤 70년 이상 이어온 미국의 세계에 대한 관리에서 후퇴했다고 믿는다. 이들은 트럼프의 대북 화해는 세계사의 전환점, 자유주의적 질서의 종언을 뜻한다고 본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질서는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민주주의 증진, 가치 공유국에 대한 지원, 동맹 보호, 자유무역 증진 등으로 미국의 힘을 정당화하면서 만든 일련의 국제 규범, 규칙에 기반한 질서이다.

 

이들은 미국이 벌인 많은 전쟁이 안보와 번영을 확대하고, 자유주의적 질서를 공고히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보와 번영이 과연 무엇이고,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갔으며,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엔 관심이 없다. 이 질서를 유지한다는 미명하에 국내적으론 인종주의, 성차별, 계급적 배제 정책을 펴고 국제적으론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으로 아시아에서만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해악은 외면한다.

 

코미디쇼 <SNL>은 트럼프 당선 직후 뉴욕시민들의 선거 결과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잘 보여줬다. 진보 성향 백인들은 트럼프 당선에 “악몽 같은 시나리오” “미국이 보여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두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에 비해 흑인들은 제도에 뿌리내린 인종주의, 구조화된 불평등, 해외 군사개입 등 유권자들의 역사에 대한 미국 사회의 무지에 고개를 저으면서 별로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 외교정책은 군사력을 이용해 다국적기업들을 이롭게 하는 ‘포함(砲艦)외교’ 형태를 띠어왔다. 과거엔 적어도 이러한 정부-기업 유착을 숨기려는 시도라도 있었지만, 트럼프하에서 이 공모관계는 노골화됐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질서가 서있는 토대이다.

 

미국인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김정은의 정상회담 첫마디는 집단적으로 경험한 과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렸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가 싸웠던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만 3대가 걸렸다는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팍스아메리카나와 미국 예외주의라는 자부심이 해체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애도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끝자락에 느끼는 이러한 상실감을 제대로 된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지난 70년은 한반도에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반도는 바로 그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948년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화된 북쪽에 대항하는 방어벽으로 정확히 70년 전인 1948년 8월15일 수립됐고 그다음 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 남북한이 자신의 미래를 가꿔나가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 할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그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와 작별할 때이다.

 

※ 이 글은 8월13일 미국역사학회 온라인 잡지 퍼스펙티브데일리에 실린 것을 요약·번역한 것이다. 김 교수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제자로 한국현대사 전공자이다.

 

<수지 김 럿거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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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북·미 정상 공동선언을 역사적 의미나 상징성을 제외한 ‘북핵 협상’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논의해야 할 의제의 순서를 바꾸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신뢰구축을 통해 북·미 간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 결과물로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진전시키면 이에 상응하는 경제·정치적 조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던 그동안의 ‘선(先) 비핵화’ 논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2008년 12월 6자회담이 중단된 이후 북한이 줄곧 요구해왔던 것이었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합의를 해도 이행이 안된다는 것이 증명됐으니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해보자는 주장이었다. 북한은 2010년 1월11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이 같은 제안을 공식화했다. 당시 북한은 성명에서 “조선반도 비핵화 과정을 다시 궤도 위에 올려세우기 위해서는 조·미 사이의 신뢰를 조성하는 데 선차적인 주목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미 사이에 신뢰를 조성하자면 적대관계의 근원인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부터 체결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지금 주장도 8년 전 이 성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미는 ‘비핵화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어 궤도에 오르고,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해도 비핵화 진행이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면 평화체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싱가포르 합의에서 미국은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앞세워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북한의 입장에서 싱가포르 합의는 외교적 승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독특한 방식’이라고 표현하면서 “훌륭한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한 것은 비핵화보다 신뢰구축과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하기로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싱가포르 합의 이후 진행되는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에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이 같은 태도는 약속 위반이다. 지난달 7일 북한 외무성이 평양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싱가포르 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고 거칠게 쏘아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신뢰구축 조치를 비핵화보다 앞세우기로 한 ‘조·미 수뇌분들의 약속’을 미국이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를 할 때 북한의 요구를 ‘통 크게’ 수용하고 새로운 협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기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협상 방식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간과한 채 합의를 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함으로써 북한이 비난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구축 작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비핵화가 먼저냐 신뢰구축이 먼저냐’의 논쟁이 아니다. 이 같은 논쟁은 현재 한반도 현실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비핵화와 신뢰구축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상호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비핵화 진전이 있어야만 생긴다. 애초부터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시작한 이유도 북한의 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종전선언 문제만 봐도, 신뢰구축과 비핵화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이 신뢰구축을 위한 선차적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이 종전선언을 강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미국의 비핵화 요구도 강해진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된 지금 ‘선 비핵화’를 내세운 협상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북한 핵미사일이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위협으로 떠오른 상태에서 핵문제를 그대로 두고 북·미 간 신뢰를 조성하겠다는 것도 비현실적 발상이다. 결국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를 낮은 단계부터 병행추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해법이 없다. 국제정세와 동북아시아 역학 구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응축된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매우 길고 험난한 여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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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색깔만으로 특권을 누렸던 시대를 그리워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을 멈춰야 한다.” 지난 12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에서 만난 50대 백인 여성인 수전의 말이다. 그는 ‘당신의 인종주의를 애국주의인 척하지 말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수전은 이날 오후 라파예트 광장을 채운 1000여명의 시위대 중 한 명이었다.

 

시민들이 휴일 오후 백악관 앞에 모인 이유는 극우단체의 집회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시민들의 “부끄러움을 알라”는 야유는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우파 단결2’라는 제목의 집회를 열고 있는 20여명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향했다. “나치는 꺼져라” “당신들은 소수지만 우리는 다수다”라는 구호가 이어졌다. 압도적인 반대 시위에 눌린 데다 때마침 천둥까지 치며 내린 비로 극우단체의 집회는 30여분 만에 마무리됐다. 집회를 조직한 제이슨 케슬러는 확성기로 연설을 했지만 반대 시위대의 함성에 눌렸다. 결국 이들은 준비된 차량에 나눠 타고 광장을 빠져나갔고 시위대는 환호했다. 경찰은 극우단체가 집회장에 등장할 때부터 주변을 둘러싸며 반대 시위대와의 충돌을 저지했다.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에는 수백m 간격으로 경찰차가 배치돼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날은 백인 극우단체 청년의 폭력에 의해 반대 시위대 여성 한 명이 사망한 샬러츠빌 사태 1주년이었다.

 

라파예트 광장의 풍경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인종주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가 표출되고 있고 이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백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집권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주의 행태에 미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광장에서 만난 그레그란 이름의 70대 백인 남성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점점 우익화되고 있다. 인종주의는 미국의 정신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퇴행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BBC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32세 여성은 경찰에게 “나는 깨끗한 순수혈통 백인”이라며 석방을 요구했다. 한편에서는 흑인에 대한 노골적 차별이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프로풋볼(NFL) 선수들은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 행사를 비판하며 무릎꿇기 시위를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태생적으로 인종주의 문제를 안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9일 발표한 2016년 대선 유권자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얻은 표의 88%는 백인 표였다. 특히 지지자의 절반이 넘는 63%가 대졸 미만 백인들이었다. 대졸 미만 비백인은 7%, 대졸 이상 비백인은 4%에 불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든 절대 다수가 백인이고,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강한 대졸 미만 백인들이 최대 주주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대선 구호가 사실은 ‘미국을 다시 하얗게’를 의미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런 탓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샬러츠빌 폭력 사태를 두고 양비론을 펴는 등 인종주의 논란에 명확히 선을 긋지 못한다. 흑인 하원의원을 “IQ가 낮다”고 비난하고, 아프리카 국가는 “거지소굴”이라고 말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잇따른 커밍아웃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견제하려는 시민들이 다수라는 점이다. 퓨리서치의 지난달 조사에서 백인들 중에서도 57%는 인종적 다양성 증가로 미국이 살기 좋아지고 있다고 답했다. 나빠지고 있다는 답은 10%에 불과했다. 트럼프 정부는 저소득 백인 계층의 향수를 자극한 게 지난 대선에선 승리 공식이었을 수 있지만 다음에는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노골적인 백인 중심주의는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백인들을 자극하고, 비백인 유권자들의 연대를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라파예트 광장 시위는 이를 증명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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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스바흐와 배스케즈는 개별국가의 제안이나 요구가 글로벌 의제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 의제가 강대국에 아주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을 의제정치(agenda politics)로 명명했다. 북한 비핵화에 앞서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문제가 미국, 중국에 주요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종전선언의 주체로 휴전협정 당사국인 중국을 포함시킬 것인가를 두고 이해 당사국들 간 밀고 당기는 물밑 외교전이 치열하다.

 

평화협정이 결혼식이라면 종전선언은 약혼식이다. 연내까지 종전선언을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약혼식이 여차하면 무산될 기미도 보인다. 그렇다면 결혼식도 장담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실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선언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끝내자’는 평화선언이 적확하다. 미래 어느 시점에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체제의 평화협정만 체결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리선권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13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진행된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이 미국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처음 제시한 때는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 5기 3차 회의에서 채택된 ‘미국 의회에 보내는 편지’에서였다. 내용을 보면 당시 북한은 닉슨 독트린 발표(1969) 이후 주한 7사단 철수와 닉슨의 방중(1972) 및 일본·중공 국교수립(1972), 그리고 미국이 월맹과 파리평화협정 체결(1973)에 따라 베트남 주둔 미군을 철수한 후 베트남이 공산화된 것 등에 고무됐다.

 

이후 북한은 1984년 1월에 ‘남북불가침공동선언 및 대미 평화협정의 동시 체결’이라는 3자회담을 제시했다. 이는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한 파리회담 방식을 원용한 것으로 북한이 미국과 회담의 주당사자가 되어 평화협정 문제를 처리하고 그 과정에서 ‘종속적 당사자’인 한국과는 불가침 체결로 돌파하겠다는 책략이었다. 이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정전협정을 항구적 평화체제로 대체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평화협정에 대한 한국 정부 최초의 공식제안이었다.

 

북한이 종전선언에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과 무관치 않다.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여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동맹의 문제로 종전선언과 무관한 것으로 선을 그었지만 북한이 현상타파 차원에서 종전선언 후 끈질기게 이를 문제 삼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이 여의치 않을 경우 미군 철수를 고려할 수 있다고 언급한 사실을 북한이 잊을 리가 없다.

 

여기에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 9일 이란에 가서 ‘핵 지식은 보존하겠다’고 했다. 이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 해체 이외에 6·12 북·미 공동합의문 4항 미군 유해 일부를 송환했으니 선행 조항인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1항)과 평화체제 구축(2항)을 미국이 준수하라는 압박차원의 대미(對美) 메시지로 해석됐다. 그럼에도 핵 지식 보존 운운은 해서는 안될 이야기였다. 민감한 시점에 고위 당국자가 할 말 못할 말을 모두 내뱉을 경우 신뢰구축은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정리하자. 중국을 포함하는 4자 형태의 종전선언이 금상첨화지만 미국의 중국 견제가 만만치 않다면 차선책으로 북한과 미국 간 양자 종전선언도 고려해봄 직하다. 북한의 등거리 외교노선을 감안하면 김정은이 중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관건은 미국이 중국의 대체재가 될 수 있음을 어떻게 선명하게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종전선언을 없던 일로 하는 것이다. 신뢰구축 후 군축을 하고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통상적인 평화체제 순서이기 때문이다.

 

서울, 평양, 워싱턴 모두 조바심이 나있다. 북·미는 비핵화라는 같은 책을 갖고 서로 다른 쪽만 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서둘러 북·미가 같은 쪽을 보도록 유도해야 한다. 미국의 11월 중간선거를 감안하면 시간이 많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문에 따라 과감하게 톱다운 조치를 취하는 게 꼬일 때로 꼬인 매듭을 푸는 최선의 방법인 듯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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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은 13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고위급회담을 열어 9월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남북은 공동보도문에서 “회담에서 쌍방은 판문점선언의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협의했다”면서 “남북정상회담을 9월 안에 평양에서 가지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날짜가 공동보도문에 담기지 않은 것은 심각한 이견이라기보다는 미세 조정이 추가로 필요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판문점선언에도 담겨있는 ‘가을, 평양 정상회담’을 남북이 차질 없이 이행키로 한 것을 환영한다.

 

‘정상외교의 계절’인 9월에 남북이 정상회담을 열기로 한 것은 답보 중인 한반도 정세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9월에는 러시아 동방경제포럼(9월11~13일), 유엔총회(9월18일~10월1일) 등 정상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많다.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 등 한반도 문제 당사국 정상들이 어느 자리에서든 만나 협의를 벌일 개연성이 높다. 9월9일은 북한이 대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북한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하다.

 

상반기 숨 가쁘게 달려온 한반도 정세는 하반기 들어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6·12 북·미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하면서 북·미관계의 틀을 바꿔놨음에도 과거 관성이 남아 후속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비핵화의 첫 조처로 핵·미사일 시설 목록을 요구하고 있고, 북한은 체제안전 보장 조치로 종전선언을 먼저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지켜볼 일이다. 북·미 협상의 교착이 남북관계에 영향을 주면서 판문점선언의 이행도 차질을 빚고 있는 형국이다.

 

관건은 북·미 협상의 의미있는 진전이다. 그러나 이를 북·미 양측에만 맡겨서는 개선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교착국면이 장기화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느 때보다 문재인 정부의 촉진자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북한이 고위급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도 문재인 정부의 중재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남북 정상은 5월26일 판문점에서 전격적으로 만나 좌초위기에 빠진 북·미 정상회담을 살려낸 바 있다. 이번에도 남북 정상이 지혜와 의지를 모아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비핵화협상의 추동력을 살려낼 것을 기대한다.

 

리선권 위원장은 이날 회담에서 “회담과 개별 접촉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않았던 문제들이 탄생될 수 있고, 일정에 오른 문제들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정부가 미국 눈치를 보느라 남북관계 개선작업이 겉돌고 있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통일부는 2년반째 가동중단 중인 개성공단의 설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입주기업인들의 방북조차 막고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차제에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제한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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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푸른빛이었다.” 구소련의 공군 중위 유리 가가린이 1961년 4월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에 나가 지구를 본 뒤 한 말이다. 소련이 1957년 10월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을 때 미국인들이 받았던 충격(스푸트니크 쇼크)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련은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까지 성공한 것이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우주 개발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였다. 우주 개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군사기술에 활용할 수 있고, 국민들의 사기를 제고하며 나라의 기술과 경제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초반은 소련의 승리가 이어졌다. 인공위성 발사에서 소련에 3개월 뒤진(1958년 1월, 익스플로러 1호) 미국은 유인 우주선에서 설욕을 노렸지만 이 또한 10개월(1962년 2월, 존 글렌) 뒤처졌다. 인류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1963년 6월,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최초의 우주 유영(1965년 3월, 알렉세이 레오노프) 등도 모조리 소련의 몫이었다.

 

양대 강국의 우주전쟁은 달 탐사로 이어졌다. 여기서도 시작은 소련이 좋았다. 1959년 9월 달 표면에 최초로 우주선(루나 2호)을 날려보낸 소련은 달 뒷면 촬영(1959년 10월, 루나 3호), 달 착륙(1966년 2월 루나 9호) 등에서도 미국에 앞섰다.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미·소의 우주전쟁은 달에 사람을 보내는 데서 역전됐다. 잇단 발사 실패 등으로 소련이 주춤하는 사이 1969년 7월21일 아폴로 11호를 탄 미국인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겼다. 이후 미국은 우주왕복선 개발 등에서도 소련에 앞서 나갔고 냉전이 끝나면서 우주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우주군’ 창설을 선언하면서 30여년 만에 강대국들 간의 우주전쟁이 다시 시작될 조짐이다. 이번에는 중국이 상대다. 중국은 2045년까지 세계 최고의 우주 기술 강국이 되겠다는 로드맵을 지난해 11월 발표한 바 있다. 미국의 우주군 창설에 대해 중국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는 지난 11일 “미국이 우주에서 절대 패권을 거머쥐려 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서는 등 제2차 우주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김준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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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현지시간) 예멘 북부 사다주의 자흐얀 지역에서 어린이들이 탄 통학버스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국제연합군에 폭격당해 어린이 29명 등 최소 50명이 숨지고 77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아이들을 태운 통학버스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학습하는 여름캠프를 마치고 모스크로 향하던 길에 시장에서 잠시 멈춘 사이에 폭격을 당했다. 현장에 흩어진 주인 잃은 책가방과 트럭 짐칸에 엉켜 있는 어린이들의 주검, 피투성이가 된 아이들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장면들이 뉴스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전파되면서 국제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6월 27일, 예멘 수도 사나에서 한 어린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에 서 있다. 유엔에 따르면 수년간 계속된 예멘 내전으로 1316명의 어린이가 죽거나 다쳤다. EPA연합뉴스

 

학교버스를 겨냥한 폭격은 반인도적 전쟁범죄로, 국제사회가 반드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보면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구성 요구 없이 사우디가 자체 조사하도록 해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받았다. 공습 직후 “예멘 반군 후티가 어린이를 인간방패로 삼았다”며 적법한 작전이라고 강변하던 사우디에 조사를 맡기는 것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격’과 다를 바 없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유엔 안보리 순회 의장국인 영국의 카렌 피어스 유엔주재 대사가 “믿을 수 있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안보리가 직접 조사하겠다”고 밝혔지만 그렇게 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안보리가 좌고우면하지 말고 직접 조사에 나서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근절하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3년반째 접어들며 장기화되고 있는 예멘 내전으로 수많은 어린이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유니세프가 9일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내전 이후 어린이 2400여명이 숨졌고, 3600여명이 부상했다. 병원과 학교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습 때문에 희생이 커질 뿐 아니라 구호가 필요한 어린이들에게 국제단체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헨리에타 포어 유니세프 총재는 “유엔 안보리와 국제사회는 교전세력들이 어린이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하도록, 전쟁을 끝내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말대로 전쟁을 멈추는 것만이 어린이들의 추가 희생을 막는 길이다. 

 

희생을 추모하는 트위터 글들에는 ‘어린이는 타깃이 아니다(#Children#Notatarget)’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되고 있다. 말 그대로다. 어른들 간의 추악한 전쟁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이 더 이상 벌어져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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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오는 13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했다. 북측은 9일 오전 통지문을 통해 판문점선언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관련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고, 정부가 이에 즉각 동의해 회담이 성사됐다. 정부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구성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조속히 개최돼 북·미 간 협상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전기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최근 북·미 간 북핵 협상은 교착국면이 길어지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 리스트 제출 등을 압박하는 미국에 맞서 제재 완화 및 체제안전 보장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동력이 없으면 헤쳐나가기 어려울 만큼 협상이 수렁에 빠져 있다는 말이 나온다. 게다가 미국은 최근 북한이 유엔 제재를 교묘하게 위반하고 있다며 제재를 강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친서를 교환하며 대화의 끈을 유지했지만 불안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을에 평양을 방문하기로 한 계획을 앞당겨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면 북·미대화의 큰 동력이 될 것이다. 오는 9월 말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를 계기로 북·미가 협상을 진척시킬 수 있도록 문 대통령이 중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북한이 고위급회담을 먼저 제안한 점이 특히 주목된다. 그만큼 북·미 간 중재가 절실하며, 따라서 북·미 교착 상황을 타개할 의지가 강하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이 판문점선언을 속도감 있게 이행하면서 연내 종전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남북정상회담은 절실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회담에 성실히 임할 뿐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시기는 이를수록 좋다. 의전을 갖춘 평양 방문이 아니라 실무형 판문점 회담도 좋다. 문 대통령의 이번 중재역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북·미 양측을 모두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제안을 만들어야 한다. 종전선언과 핵무기 리스트 제출을 동시에 하는 방안도 제안해봄 직하다.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합의하고, 궁극적으로 북·미 양국 정상이 담대한 결정을 주고받는 장이 마련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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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벽에 부딪혔다. 올해 벽두부터 숨 가쁘게 달려왔던 변화가 교착상태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70년 고착된 분단의 갈등체제를 감안하면 난항은 당연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움까지 감추기는 힘들다. 2013년 이래 수년간 악화일로의 전쟁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전격성만큼 엄청난 기대를 주었고, 전쟁위기는 평화의 소중함을 배가시켰다. 북·미의 두 정상도 싱가포르 조우가 가진 역사의 무게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게임을 했다. 반세기 이상 묵은 불신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신뢰관계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한 이상 상호신뢰 없는 비핵화는 불가능하다. 핵무기 완성 이전에는 대북 불신 속에서도 핵사찰로 비핵화를 검증할 방법이 있었지만, 완성 이후에는 신뢰만이 비핵화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새판 짜기’에 대한 헤드라인만 제시됐을 뿐인데 양국은 너무 낙관적이었던 같다. 정상회담에서 구체적 실천사항 합의는 미군유해 송환 외엔 없었고, 고위급회담으로 미뤄졌었다. 하지만 김영철과 폼페이오의 만남에서도 상대의 양보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자국의 양보에 대한 과대평가로 말미암아 빈손으로 끝나버렸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모라토리엄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단행했고, 유해 송환과 동창리 미사일실험장 폐쇄를 실행했으므로 미국이 양보할 차례라고 보지만, 미국은 한·미 군사훈련 취소는 물론이고, 세계최강의 패권국이 북한 정상을 만나준 것 자체가 엄청난 양보이며, 북한의 조치들은 미흡하며 전혀 등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교착이 성공을 위한 진통일 수도 있으나 오랜 불신구조의 관성으로 인해 실패의 수렁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 미국은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를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부재로 몰고, 북한은 미국의 종전선언 거부를 체제보장 약속에 대한 불신으로 몰면서 지난 사반세기의 실패 구도로 복원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상 김정은 체제는 미국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트럼프는 북한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다. 북한으로서는 트럼프의 결심으로 가능한 몇 안되는 조치인 종전선언마저 얻어낼 수 없다면 제재해제는 꿈도 꿀 수 없고, 용어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리비아모델과 다름없다고 여길 수 있다.

 

트럼프는 9개월 이상 북한의 도발 중단과 유해 송환을 업적으로 내세우는 동시에,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에 단호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내 비판을 피해가는 방식으로 중간선거까지 끌고 갈 심산인 것 같다. 중국도 미국의 군사공격 가능성이 없어지고, 북·중관계가 회복된 국면에서 서두를 이유가 없다. 급해진 것은 다시 남북이다. 판문점에서 종전선언의 연내 실현에 합의했을 뿐 아니라, 중간선거 이후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중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으며, 선거 후 미국의 국내정치에 따라 장기 교착 또는 파국을 배제할 수 없다.

 

미사용 카드가 남아있다. 북·미 고위급회담이 풀지 못한 것은 다시 정상의 결단으로 풀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순서는 북한의 요구대로, 비핵화조치의 규모는 미국의 요구대로 맞교환하는 방식, 즉 종전선언이 먼저 나오되, 거의 동시적으로 북한은 검증과 사찰 및 핵무기 일부 폐기를 포함한 과감한 선제조치를 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결심에 달렸다. 트럼프에 과도한 의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설득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미국의 벽을 넘어야 풀린다.

 

‘진정한 평화는 강자의 양보로만 가능하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통일이 평화로만 느껴지지 않았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교실의 환경미화로 항상 붙어있던 남북군사력비교표, 숫자상 압도적이었던 북한의 무기들을 보며 적화통일의 위협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보다 수십배의 국력을 갖게 된 후, 통일은 아마도 북한에 위협적이었을 거다. 보수정부는 대놓고 흡수통일을, 진보정부는 개방·개혁으로 포장했지만, 위협은 같다. 비핵화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 위협이 되는 비핵화는 실패한다. 약자에 대한 일방적 항복요구는 북한이 핵개발에 집착했던 이유만 재생시킬 뿐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결심을 실현하는 건 ‘진정성’이란 신기루에 매달리기보다는, 비핵화를 유도해 낼 교환에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강자의 항복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위협을 제거하는 교환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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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이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는 세계 3위의 석탄 수출국이다. 작년에 1억8000만t의 석탄을 수출했다. 이 중 한국은 유연탄과 무연탄을 합해 2600만t을 수입했다. 러시아산 석탄은 러시아 관세법에 따라 러시아 연방 상공회의소가 발급한 러시아 원산지 증명서과 함께 한국으로 수입된다. 러시아산 석탄을 수입하는 한국 수입업자로서는 러시아 기관이 발급한 원산지 증명서를 신뢰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안에 북한산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수입업체가 북한산 석탄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러시아산 원산지 증명서를 제출해 관세청에 신고했다면 이는 관세법 위반 사건이다. 보통의 원산지 위반 사건으로, 관세청이 조사해서 밝히면 된다. 러시아도 자신의 석탄산업에 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석탄 원산지 증명서 발급 절차를 대대적으로 점검할 것이다. 석탄 문제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세당국이 철저하게 조사해서 막으면 된다. 특히 러시아 연방 상공회의소가 원산지 증명서 발급을 제대로 하도록 하면 된다.

 

그러니 지금은 석탄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자. 바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이다.

공동연락사무소 설치는 군인들의 ‘판문점 체제’를 넘어서는 일이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드는 상시적인 상호 신뢰의 틀이다. 남과 북이 상시적 공동연락사무소 조직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함께 포괄적 교류 협력과 신뢰 구축을 치밀하게 상시적으로 마련하고 실천하는 일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올해의 판문점선언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숙원이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국제법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틀을 넘어 한국이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그 국제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유엔 안보리 제재 자체가 ‘외교관계 빈 협약’에 따라 대사관 등 외교시설을 북한에 설치할 권리를 인정한다(안보리 2375호, 27항). 국제법적으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외교관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유엔 회원국인 한국은 이 조항을 적극 원용할 수 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위해 설비를 북한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유엔 제재 대상이 아니라 한국의 국제법적 권리다. 마치 유엔 제재상 불가능한 것인데 예외를 인정받는다는 식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회원국으로서의 외교권에 포함된 권리라는 기본 인식이 필요하다.

 

둘째, 미국의 단독 대북 제재 대상도 아니다. 미국 연방 법령도 정부 활동은 처음부터 대북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를 ‘보편적인 허가 사항’이라고 한다(미 연방 법령집 83 FR 9182, § 510.513). 미국 법이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허용하는 ‘미 연방정부의 업무’는 매우 광범위하다. 정부 기관이 권한이 있거나, 행정적 의무가 있거나 또는 자문을 할 수 있는 일체의 업무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 지역에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설하기 위하여 하는 일체의 활동은 한국 정부 업무에 해당한다.

 

한국이 북한과 함께 북한 지역에 공동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은 유엔 제재와 미국 단독 제재와 하등 관계없이 주권국가로서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11월의 미국 중간선거를 앞둔 엄중한 시기다.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모든 일을 톱니바퀴가 서로 잘 맞물려 선순환을 이루도록 치밀하게, 적극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유엔 제재는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제재만으로는 충분히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진정한 평화는 제재가 아니라 신뢰와 정의에 기초해야 한다.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가지는 권한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야말로 평화를 만드는 신뢰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한방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앞으로 나갈 톱니바퀴 체계를 잘 마련해야 한다. 선순환의 톱니바퀴를 생산하는 공간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한국이 주도해서 설치해야 한다. 석탄이 문제가 아니다.

 

<송기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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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탕(錢塘)강은 중국 항저우시를 가로질러 흐른다. 굴곡이 심하고 조석 차이가 크다. 교량을 건설하기엔 악조건이다. 중국이 자국 기술로 설계·완공한 첫 복층대교는 1937년 첸탕강에 세워졌다. 1453m 길이의 첸탕대교는 상층부에는 차량이, 하층부에는 기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류허(六合)탑과 시후(西湖)의 풍경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했다.

 

37개월간 공사 끝에 완공을 앞둔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전에 돌입하면서 전화가 상하이로 확대됐다. 항저우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천탕대교는 그해 11월17일 전면 개통하면서 교량 밑에는 100여개의 폭발물을 설치했다. 일본군의 항저우 침략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안타깝게도 개통 한 달여 만에 폭파되고 말았다. 첸탕대교를 지은 ‘중국 교량의 아버지’ 마오이성(茅以升)은 제 손으로 만든 다리를 스스로 폭파시키면서 “항일전쟁에 반드시 승리하고, 이 다리도 복구한다”고 다짐했다. 이 다짐은 일본이 패망한 후 1946년 실현된다.

 

첸탕대교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항일의 역사가 됐다. 중국인들의 항일 정신을 일깨우는 상징이자,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국 기술로 만들었다는 자부심까지 안겨줬다. 중국의 교량은 육지와 육지뿐 아니라 역사와 역사를 연결하곤 한다. 이런 이유로 중국 지도자들에게 대교 건설은 리더십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과업이다.

 

중국에서 가장 긴 강줄기인 창(長)강에는 1950~1970년대 경쟁적으로 교량이 들어섰다. 이 대교들은 대약진 운동의 고난을 견디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희망이 됐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1957년 개통된 우한의 창강대교는 신중국 성립 후 창강에 건설된 첫 교량이다. ‘만리창강 제1교’라고도 부른다. 마오쩌둥은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調歌頭)’를 본떠 지은 ‘수조가두·유영(游泳)’에서 “창강대교가 남북을 가로지르니 천연의 요새가 탄탄대로로 변했다”고 칭송했다. 이 다리의 건설은 제1차 5개년 계획의 중요한 성과로 기록됐다. 1968년이 돼서야 창강에 순 중국 기술로 만든 다리가 건설됐다. 난징의 창강대교다. 이 다리는 냉전시대에 중국의 기술적 자부심을 높였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체면을 세운 교량은 샤먼대교다. 중국의 첫 해상교량으로 1991년 개통됐다. 푸젠성 지메이와 샤먼섬을 연결하면서 샤먼 경제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장쩌민은 대교 현판을 친필로 썼고, 개통식에 직접 참석해 테이프를 잘랐다. 경제특구인 샤먼에 들어선 해상 교량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성과를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다리’는 홍콩과 광둥성 주하이(珠海)를 거쳐 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港珠澳)대교가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 다리는 전체 길이 55㎞에 달해 완공되면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교량으로 기록된다. 2009년 12월부터 약 9년간 건설했지만 기술적 문제, 예산 초과, 건설 인부 사망 등 악재로 지난해 12월 예정이던 개통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 다리는 시 주석의 중국몽(中國夢)과도 맞닿아 있다. 개통되면 주하이에서 홍콩까지 가는 시간이 기존 3시간에서 30분으로 줄어든다. 주하이, 홍콩, 마카오뿐 아니라 선전, 광저우까지 하루 생활권으로 묶어 경제 파워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시 주석이 2030년까지 광둥성과 홍콩 및 마카오를 하나로 묶는 세계 최대의 경제 허브를 건설하려는 계획의 핵심이다. 강주아오대교는 이르면 다음달 말 개통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중국 성향의 홍콩 매체를 중심으로 시 주석의 영향력 약화를 계속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강주아오대교가 시 주석에게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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