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하수관이 터져 오물이 온 동네로 쏟아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먼저 오물이 퍼지지 않게 펜스를 쳐야 한다. 그리고 터진 곳을 막고 펜스 안에 고인 오물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확실히 막았는지 점검하고 재발방지 조치까지 마쳐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북핵 6자회담이 한창이던 10여년 전 미국의 북핵담당 고위 관료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비핵화’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비핵화는 핵물질·기술 이전 차단-동결-핵무기·핵물질·장비 폐기-검증-핵 재무장 방지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완전한’ ‘비가역적인’ 등의 수식어를 앞에 주렁주렁 붙이는 것은 사족일 뿐이다.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라는 용어를 ‘시간 부족으로’ 북·미 합의문에 명시하지 못한 미국은 지금 PVID, FFVD 등으로 표현을 바꿔가며 북한의 동의를 받아내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어떤 용어를 쓰느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같은 개념인지 여부가 핵심이다.

 

북·미는 정상회담에서 “4·27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판문점선언에도 남과 북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의미는 다르다. 한국 정부가 번역한 판문점선언 영문본은 ‘핵 없는 한반도(nuclear-free Korean Peninsula)’라고 되어 있지만 북한 외무성은 ‘한반도 비핵지대화(turning the Korean peninsula into a nuclear-free zone)’라고 번역했다.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나 ‘핵우산’까지 염두에 둔 표현이다. 미국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판문점선언을 원용했다.

 

비핵화 용어 논란은 미국의 허술한 준비를 드러낸 단편이다. 싱가포르 북·미 합의가 불안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방향이 틀렸거나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협상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와 미국의 협상력 부족 등이 드러나고 이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비핵화를 이끌어낼 역량이 있는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약탈적 거래’에 능한 트럼프 대통령이 이처럼 허술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북핵 문제를 지나치게 정략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한 것은 준비가 완료됐기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정치 일정에 맞춘 결정이었다. 북·미 회담 성과가 급한 쪽은 오히려 트럼프였다. 실질적 내용보다는 정치적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외형에 집착했다. 상대에 대한 분석도, 전문 인력도 갖추지 못한 채 날짜를 먼저 정해놓고 협상을 시작했으니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합의문에 서명하자 북한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음이 더욱 명확해졌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재촉하고 있지만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양국 수뇌분들께서 합의한 대로’ 비핵화보다 신뢰구축 조치가 먼저라고 맞서고 있다. 실제로 북·미 정상이 서명한 합의문은 신뢰를 구축해 새로운 북·미관계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비핵화에 이르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에 북한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다. 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은 이미 북한과 밀착하고 있고 미·중은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트럼프는 정상 간 합의를 통한 톱다운 방식의 접근으로 돌파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논하는 각론에 들어가면 상황이 다르다. 돌파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최고 권력자들의 ‘통 큰 합의’로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절대권력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쯤 트럼프는 전임자들이 왜 북핵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싱가포르 북·미 합의가 유지되려면 트럼프가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북한도 선(先)신뢰구축만을 주장하며 비핵화 논의를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비핵화 진전을 통해 신뢰를 만들어가는 조치를 병행해 미국 내 여론의 반대로 북·미 합의가 좌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북·미 모두 합의를 유지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타협점을 찾기 위한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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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이 2016년 4월 한국에 온 중국 내 북한식당 종업원들을 면담한 뒤 “종업원이 한국에 오게 된 경위에서 여러 가지 결점이 있음을 파악했다”며 “이들 중 일부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한국에 오게 됐다고 진술했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특별보고관은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나의 제언은 최대한 신속하게 철저하고 독립적인 진상규명과 조사를 통해 책임자가 누구인지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들이 중국에서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납치된 거라면 범죄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간 국내에서 제기돼온 ‘기획탈북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유엔 조사를 통해 공식 확인한 셈이다.

 

킨타나 보고관은 이번 방한에서 파악한 내용과 권고사항 등을 유엔총회에 제출할 보고서에 담을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가 이 문제를 한국 인권수준의 잣대로 삼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통일부 당국자는 ‘자유의사에 따른 탈북’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킨타나 보고관은 종업원들의 북한 귀환 여부에 대해 “그들의 의사가 존중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고 책임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실마리가 풀려나갈 것”이라는 종업원들의 의견을 소개했다. 귀담아야 할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일부만 돌아갈 경우 남측에 남는 종업원들의 가족들이 북에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논리로 송환에 반대하고 있지만, 원칙에 입각해 풀어가면 해법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종업원들은 킨타나 보고관에게 “딸처럼, 가족처럼 생각하고 이 문제에 접근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지적이다. 정부와 관계당국, 정치권은 그간 정략적·정치공학적으로만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았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나의 가족이 자기 의사에 반해 원치 않는 타국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정부가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게 됐다. 철저하고 신속한 진상규명에 나서 결과를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 이런 ‘부정의(不正義)’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남북관계는 물론 인권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기획탈북’이 당시 정부와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확인될 경우 엄정한 법적 책임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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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10일(현지시간) 2000억달러(약 223조원)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 6031개 품목에 대해 10%의 추가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오는 9월부터 발효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미국은 500억달러 규모의 중국 제품에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뒤 지난 6일부터 이 중 340억달러어치 품목을 우선 적용했다. 이에 중국도 즉각 같은 규모의 미국산 수입품에 관세를 물리기 시작하면서 양대 경제 대국의 무역전쟁이 시작된 바 있다. 여기에 이날 조치가 추가되면 미국은 대중국 수입액(지난해 5055억달러)의 절반(2500억달러)에 고율관세를 매기게 된다. 가히 ‘핵폭탄급’ 무역보복이다. 이에 중국 상무부도 “필요한 보복을 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 양국의 무역전쟁은 더욱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이날 발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경고했던 것을 현실화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등 해외는 물론 국내 제조업계와 소비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역전쟁을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번 사태가 단기간에 해결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방증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서 촉발된 무역보복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 동맹국으로 향할 개연성도 높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유럽연합(EU)과 일본, 한국 등의 불공정 무역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세계 금융시장은 크게 흔들렸다. 11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증시는 일제히 급락했고, 미국 증시의 지수 선물도 하락했다. 한국도 코스피지수가 전날보다 1.3% 넘게 급락했다가 간신히 회복해 13.54포인트(0.59%) 내린 2280.62로 마감했고, 원·달러 환율은 4.0원 오른 달러당 1120.0원을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미·중 무역전쟁이 가시화된 지난 6월 이후 35원이 급등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의 대응책은 미온적이다. 미·중의 고율관세 부과가 발효된 지난 6일 이후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경제 부처들은 아직 합동대책회의 한번 열지 않았다. 정부가 단기적으로는 흔들리는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장기적으로 미·중에 대한 무역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당장 미국의 칼끝이 한국으로 직접 향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외교·경제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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