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북서쪽 13번가 1500번지. 원형 교차로 길가의 빅토리안 양식 3층짜리 갈색 벽돌 건물이 보였다. 복원 공사를 마치고 오는 22일(현지시간) 개관식을 앞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다. 22일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일이다. 개관식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 건물에 국기 게양이 중단된지 113년만에 처음으로 국기 게양식이 열린다.

 

개관을 앞둔 공사관을 14일 미리 찾아갔다. 돌계단을 따라 현관에 들어가니 왼쪽으로 손님들을 맞았던 객당, 오른쪽으로 연회공간인 식당이 보였다. 관계자는 사진 자료와 고문서를 바탕으로 1880년대 공사관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객당에는 서양식 카페트와 한국 전통의 병풍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사 집무실과 공관원 사무공간이 나온다. 한복 차림에 수염을 기르고 갓을 쓴 채 서양식 탁자에 앉아 있는 공사관 직원들을 상상해봤다. 숙소로 사용했던 3층은 전시관으로 꾸며놨다.

 

복원공사를 마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외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전시관에서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아픈 과거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1888년 1월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 일행은 피셔하우스를 임대해 업무를 시작했다. 조선왕조는 이듬해인 1889년 2월 당시 정부 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2만5000달러를 투자해 이 공사관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 공관은 1897년 10월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외교 활동의 중심 무대가 됐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 건물 관리권도 일제로 넘어갔고, 일제는 이 곳을 단돈 5달러에 강제로 매입해 미국인에게 10달러에 팔아넘겼다. 이후 공사관은 되찾아야 할 독립의 상징으로 남았고, 102년 만인 2012년에서야 문화재청이 350만달러에 매입해 원형 복원 공사에 착수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1층의 객당. 문화재청 제공

 

공사관을 사용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더 생생하다. 초대 공사 박정양은 고종의 명을 받고 2개월에 걸쳐 미국 군함과 일본 여객선을 갈아타며 39,215리 길을 달려 워싱턴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던 청나라는 그에게 영약삼단이란 해괴한 원칙을 요구했다. 주재국에 가면 먼저 청나라 공사관에 알린 뒤 청나라 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교부를 방문하고, 외교 모임에서는 청나라 공사의 아랫자리에 앉고,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 공사와 합의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청나라 관계자 없이 스티븐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고 “양국의 우위가 돈독하며 영원히 화평하여 피차 인민이 균등하게 권리를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요청했다.

 

박정양과 함께 근무했던 초대 서기관이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월남 이상재다. 1896년부터 주미 공사를 지낸 이범진은 이후 러시아 공사로 자리를 옮긴 후 1910년 나라를 잃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의 미국 근무 당시 초등학생으로 아버지의 백악관 방문에 동행해 통역을 해줬다는 아들 이위종은 고종의 헤이그특사 중 한 명이 됐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2층의 공사 집무실. 박영환 특파원

 

전시관까지 살펴보고 되돌아 내려오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구한말 준비 없이 열강의 힘싸움에 휘말려 일본에 나라를 잃었고, 독립 후에는 다시 냉전 대결의 최전방이 되면서 전쟁과 분단이란 비극을 되풀한 우리의 역사가 스쳐지나갔다. 한반도의 현재 상황을 구한말과 비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국은 궐기를 선언했고, 미·중 대결 구도가 심화되면 한국은 또다시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라 이날 방문이 더 특별했는지 모르겠다. 북핵 문제 해결과 종전 선언은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미국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는 평화체제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는 세기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역사적인 순간에 서 있는 것이다. 오는 22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찾는 문재인 대통령도 대미 외교 개척의 현장인 이 곳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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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을 둘러싼 기싸움 과정에서 북한의 대응은 인상적이었다. 그 백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다롄 방문이었다. 미국이 비핵화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인권문제까지 거론하며 압박해오자 맞불카드를 꺼낸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월 중국을 방문해 소원했던 관계를 복원함으로써 미국과의 담판을 앞둔 상황에서 뒷배를 든든히 다져놓은 바 있다. 그런 그가 불과 40일 만에 다시 중국을 찾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을 버팀목 삼아 미국에 맞선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미국은 비핵화 요건을 원래 수준으로 완화했고, 추가적인 요구사항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북한이 정상회담의 판을 깨지 않으면서 실리를 챙기는 성과를 거둔 셈이다. 과거 북한의 등거리외교를 연상시킨다.

 

싱가포르 유력 일간 스트레이츠타임스가 11일자 신문 1면 톱기사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12일 싱가포르에서 회담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싱가포르 _ AP연합뉴스

 

중·소 분쟁 시절 균형외교는 북한의 생존전략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중국과 소련 사이를 오가며 막대한 원조와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소련이 6·25전쟁 차입금을 탕감하고 화력발전소와 정유공장을 지어주면, 중국도 뒤질세라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고무타이어공장을 건설해주는 식이었다. 공산권 패권과 이념을 놓고 갈등하던 중국과 소련은 우군확보를 위해 빚을 내면서까지 북한 지원에 매달렸다. “북한이 외교 하나는 잘한다”는 외교 속설이 나올 정도였다. ‘줄타기외교’란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탁월한 외교술이 북한의 생존과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북한은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공산권이 붕괴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서방과 수교하면서 균형외교를 펼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1994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집권 기간 내내 그럴 기회를 아예 갖지 못했다. 이때 북한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비롯된 피해를 떠안아야 했다. 서방의 제재가 집중되고 공산권으로부터는 지원이 끊기는 이중의 곤경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국력 쇠퇴와 체제 위협의 가중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핵개발도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선보인 전략은 ‘신균형외교’라 할 만하다. 중국과 소련의 경쟁 구도가 사라진 상황에서 핵폐기를 수단으로 균형외교를 할 수 있는 국제적 환경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대를 건너뛰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외교재능 DNA를 물려받았는지 모른다. 북한에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 60년간 균형외교를 이끌어온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란 외교자산이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김영남은 1928년생으로 올해 만 90세의 고령이지만 김정은의 외교 가정교사로 부족함이 없을 터이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때 김여정과 방남한 그는 꼿꼿한 자세와 조리 있는 말솜씨로 녹록지 않은 존재감을 알렸다. 북한이 40여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가장 잘했던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된 셈이다.

 

사실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은 어느 한 국가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등거리외교가 필수다. 특히 북한으로서는 대륙세력과 해양 세력,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접점에 자리한 지정학적 위치 탓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본디 반도국가는 지정적학 위치에 따른 득과 실의 잠재적 가치를 갖지만, 남북은 전략 요충지나 교두보로서의 이익보다는 오히려 완충역할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남북이 미국과 중국 및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중 상당 몫을 반목과 갈등 비용으로 도로 지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6·25나 각종 군사 충돌로 인한 인적 피해를 고려하면 결코 제대로 실리를 챙겼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김정은의 신균형외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비단 북·미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70년간 남북한 7000만 민족을 옥죄어온 적대와 군사적 대결을 제거하고 한반도 평화가 조성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중국이 아닌,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견제와 균형을 주조로 하는 균형외교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북한은 중국의 완충국가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친미국가, 미국의 우방국이 될 수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국제사회와 조화롭게 지내는 정상국가 북한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북한이 어느 길을 선택하든 한반도 평화, 남북 화해 및 공동 번영을 기반으로 할 것이라는 믿음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반도 정세의 근본틀이 깨지는 과정에서 고통과 혼란이 있겠지만 그것은 즐거운 혼란일 터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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