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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선언 이행 논의를 위한 남북 고위급회담이 6월1일 열린다. 고위급회담은 당초 지난 16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당일 새벽 북한의 일방적 연기 조치로 무산되면서 보름 늦게 열리게 됐다. 회담에 참석하는 남북 대표단 면면을 보면 남북은 철도연결을 비롯한 경제협력과 8·15 이산가족 상봉행사, 6·15 남북공동행사,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8월 아시안게임 공동 참가 등 ‘4·27 판문점선언’에 담긴 여러 의제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반도 정세는 북한과 미국이 다음달 12일로 예정된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과 싱가포르, 뉴욕에서 고위급 및 실무회담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는 상황이다. 흐름은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될지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인 비핵화를 위한 북·미대화의 중요성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북·미관계가 뒷받침하지 못할 경우 남북관계의 근본적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북·미관계가 진전될 때까지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의 종속변수로만 간주할 경우 대전환기에 들어선 한반도 정세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지난 26일 열린 남북 2차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대화의 추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방침을 밝힌 지 이틀 만에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재차 확인함으로써 미국에 대화 복귀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북·미대화가 실패한다고 해서, 남북관계마저 중단될 경우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설 동력을 잃게 된다.

 

올 들어 남북관계는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전후로 짧은 시간에 다양한 교류가 전개됐고, 두 차례 정상회담으로 신뢰의 기초를 쌓았다. 이 모멘텀을 살려 다양한 교류·협력을 통해 관계 발전을 꾀해야 한다. 경의선·동해선 연결이나 남북경협은 비핵화의 진전에 맞춰야 하겠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재개, 8월 아시안게임 남북공동 참가, 6·15 남북공동행사 등은 협의를 서둘러야 할 사안들이다. 이번 고위급회담이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를 구축하는 첫걸음이 될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KHross

벌써 8년 전이지만 생생한 TV 화면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연평도는 그렇게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개인적 기준으로 남북 사이에 가장 섬뜩했던 사건은 2010년 11월23일 북한의 ‘느닷없는’ 연평도 포격이었다. 한국전 휴전 후 처음 영토가 포격당한 일대 사변이다. 언제든 이 땅에 다시 포성이 울릴 수 있다는 일촉즉발의 위험을 보여준 신호다. 연평도 사건은 김일성군사종합대 포병과 출신으로 핵을 가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담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런 김정은의 최측근인 여동생 김여정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지난 2월 서울과 강원 평창에 나타나자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를 비롯해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언행은 당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서도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백두혈통의 자신감 같은 게 묻어나 원래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 그가 지난달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2차 중국 방문에 동행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인사하는 장면에서 사뭇 다른 모습이 포착됐다. 악수하며 머리를 크게 숙였다. 의외였다. 이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북·미 간 정상회담을 놓고 불협화음이 커진 것은 수순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이 시진핑을 만난 뒤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드러난 이유는 한·미 군사훈련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북한 핵무기 반출 발언이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일 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럼 남은 문제는 뭘까. 아마 돈 문제가 아닐까 싶다. 트럼프에게 양보를 더 끌어내기 위해 친중 정책을 편 결과로 보인다.

 

북한이 핵을 진짜로 폐기할지를 두고는 전문가들 평가가 엇갈린다. 무엇보다 검증 문제가 남는다. 그럼에도 필자는 북한이 폐기로 나아갈 것이란 데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이유는 역시 먹고사는 문제이며, 이번에는 확실히 한몫 두둑이 받아낼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서다.

 

지난 수년간 김 위원장의 행보에는 경제문제가 들어 있다. 2012년 최고권력자가 된 김정은은 그동안 백성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는 ‘반성문’까지 썼다. 이른바 ‘6·28 방침’ 등이 나왔다. 결국 김정은이 북·미 회담에 나선 것도 ‘인민생활 향상은 빗장을 풀지 않고는 사실상 불가하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내달 12일 북·미 정상회담은 일단은 성공적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잡음이 들린다면 원인은 따로 있을 것이다. 검증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우라늄 원심분리 기술 등은 원천적으로 막기 어렵다는 건 미국이 더 잘 안다. 결국 얼마나 적극 경제지원을 하느냐가 열쇠다. 과거 9·19 공동성명 때처럼 ‘중유 20만t 지원’ 따위로는 성에 찰 김정은이 아니다. 미국, 남한은 물론 중국, 일본 등도 북한에 훨씬 두툼한 지갑을 열어줄 준비가 됐느냐 문제다. 빼어난 장사꾼이자 협상가인 트럼프가 미국 정부 돈을 쓰기보다 민간기업 투자로 ‘퉁치려고’ 하면 이번 판은 깨질 수 있다.

 

김정은은 수차례 닫히기를 반복한 개성공단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북한은 언제든 보따리를 싸들고 튀어야 할 곳’이란 걱정이 앞서면 한계가 뚜렷하다. 남한 사회는 장밋빛 기대에 빠지기보다 담담히 준비해야 한다. 경제학자인 한 대학교수는 “통일은 대박이라던 누구 말처럼 남북 교류협력이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올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나친 신기루를 만들기보다는 평화협력 자체의 의미를 더 되새겨야 한다.

 

이번 회담 국면은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보상 차원이어서 우리로선 불편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와버려서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연평도 포격전보다 더 험악한 상태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역사를 잊어선 안되겠지만, 거기에만 집착하는 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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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북한에 미국은 금단의 땅이다. 외교관계가 없어 북한 주민의 미국 입국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외교관들의 미국 내 이동도 엄격히 제한된다. 일정한 지역을 벗어나려면 일일이 미 국무부 승인을 받아야 한다. 2000년 9월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망신살이 뻗쳤다.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아메리칸항공이 신체보안검색에 응하라고 요구하자 항공기에 탑승하지 않았다. 국가원수에 상응하는 예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였다.

 

불과 한 달 뒤 조명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북한 최고위급 인사의 첫번째 방미였다. 미국은 항공사 측에 협조를 요청해 이민·세관·검역 절차를 생략하는 등 특별 예우를 했다. 조 부위원장은 군복 차림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지난 29일 미국을 전격 방문했다. 북한 고위인사로는 18년 만의 일이다. 미국은 제재 대상인 그를 위해 여행제한 조치를 일시 면제했다. 김 부위원장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의제인 비핵화와 체제 안전보장 문제를 논의한다. 양측 간극이 큰 상황에서 두 사람의 담판은 회담 성사의 마지막 시험대나 다름없다.

 

김 부위원장이 방미 기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접견한다면 일이 잘 풀렸다는 의미가 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내는 친서를 전달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편지·전화하라”고 썼던 트럼프는 김 부위원장의 방미에 대해 “나의 편지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라며 환영했다.

 

18년 전 조 부위원장의 방미는 성공적이었다. 핵카드가 없었는데도 상호주권 인정과 적대관계 청산이라는 합의를 끌어냈다. 핵보다는 평화를 향한 양국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 부위원장은 항일투쟁 때 연락병으로 시작해 평생을 군에서 봉직한 천생 군인이었다. 김 부위원장은 군인이지만 수십년간 대남군사당국대화에 종사해온 회담전문가이기도 하다. 김 부위원장의 방미가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가까스로 봉합되는 듯했던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이 재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백악관은 2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어 “무역법 301조에 따라 5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첨단 기술제품에 대해 25%의 고율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기존 계획을 원래대로 실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중 협상단이 워싱턴에서 제2차 무역협상을 벌인 뒤 지난 19일 합의한 ‘상호관세 부과 보류’ 방침을 열흘 만에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다음달 15일 고율관세가 부과되는 품목을 공표하기로 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달 고율관세 부과 대상으로 바이오 신약·통신장비·항공우주·산업로봇·반도체 등 1300개 품목을 지목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또 주요 산업기술을 획득하려는 중국 기업과 개인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고, 수출을 통제하겠다는 조치까지 내놨다. 아울러 중국의 차별적인 기술허가 요건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3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기한 분쟁해결 절차를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이 중국산 첨단기술 제품에 대한 관세 장벽을 높이고, 기술이전을 막으려는 것은 중국의 이른바 ‘기술굴기’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그동안 ‘중국 제조 2025’ 로드맵에 따라 인공지능·산업로봇·전기차 등 미래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해외 기업의 첨단기술에 눈독을 들여온 게 사실이다. 백악관은 이날 고율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하면서 “ ‘중국 제조 2025’ 로드맵과 같은 산업정책이 미국과 전 세계 기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중국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 상무부는 담화문을 통해 “미국 백악관의 ‘책략성 성명’은 워싱턴에서 이룬 합의에 위배된다”며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 세계 경기에 찬물을 끼얹고, 교역을 위축시킬 수 있다. 한국 경제에도 직격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전체 수출에서 중국은 25%, 미국은 12%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산 중간재로 완성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기도 한다. 중국의 대미 수출이 줄면 한국의 대중 수출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역협회는 미국이 중국산 첨단기술 제품에 25%의 고율관세를 부과하면 한국의 총수출은 2억달러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치밀한 대응 전략을 짜는 데 주력해야 한다.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편중되지 않는 통상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칠 필요도 있다.

 

Posted by KHross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둘러싼 의혹과 불상사가 끊이지 않는 일본에서 최근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사건이 있다. 대학 미식축구 라이벌전의 ‘악질 태클’ 파문이다. 사건은 지난 6일 미식축구 명문인 니혼(日本)대와 간세가쿠인(關西學院)대의 라이벌전에서 일어났다. 니혼대 수비수가 볼과 상관없는 곳에서 무방비 상태인 간세가쿠인대 쿼터백에게 백태클을 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힌 것이다.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해당 니혼대 선수는 지난 22일 사죄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과 코치가 ‘악질 태클’을 하라고 사실상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선수는 “의욕이 부족하다고 연습에서 제외됐다가 코치로부터 ‘상대팀 쿼터백을 첫 플레이에서 부숴버리면 (경기에) 내보내겠다고 감독이 얘기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감독에게 “상대팀 쿼터백을 부수겠다. 써달라”고 말했고, 감독은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해당 감독과 코치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지시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또 “‘부숴라’는 미식축구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니혼대도 같은 내용의 답변서를 간세가쿠인대에 보냈다.

 

하지만 간세가쿠인대 측은 “답변서에 모순이 많다”면서 수사기관 등에 의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전문가들도 해당 수비수가 경기를 계속했고, 감독의 질책이나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코치진이 사실상 ‘악질 태클’을 유도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건 추이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치부를 드러낸 대학 스포츠계가 일본 사회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적지 않은 이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는 도쿄신문 칼럼에서 이번 사건이 ①감독이 전체적인 방향을 지시 ②코치가 ‘상대방 쿼터백을 부숴라’ 등 구체적 지시 ③ 다른 선택지가 없이 내몰린 선수가 ‘부술 테니 써달라’고 자청하는 구조라고 분석하면서 과거 일본 군대와 닮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에는 지금도 일본 군대의 명령 계통과 역할 분담으로 움직이고 있는 곳이 많다고 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군은 사라졌지만, 일본군의 조직 원리나 문화는 기업이나 학교 등에 그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2015년 도시바의 대규모 분식회계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던 2008년 도시바의 사장은 임원회의에서 120억엔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분식회계를 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무리한 지시가 떨어져도 어떻게든 완수해야 하는 것이 도시바의 조직문화였다.

 

아베 총리가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학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총리의 의도를 공무원들이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행동)한다.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명령한 적이 없다”고 하면 된다.

 

한 일본 언론인은 이번 사건에서 전후 일본 사회의 ‘무책임의 구조’를 본다고 했다. 일본은 주변국에 심대한 고통을 안겼던 전쟁 책임 문제를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다. 기업으로 치면 회장이라 할 일왕부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퇴위도 하지 않았고, 전쟁 책임에 대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었다.

 

역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政則)는 <일본 전후사>에서 이런 일왕의 태도가 “전후 일본인의 정신사에 헤아릴 수 없는 마이너스 영향을 끼쳤다”면서 “전쟁 책임의식을 희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도자의 정치적 책임, 도의적 책임을 지는 방식에 맺고 끊는 것이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악질 태클’ 사건에 일본 사회의 이런 무책임 구조를 대입하는 것이 이 언론인만의 과대 해석은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Posted by KHross

북·미 정상회담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건 5월12일이었다. 정상회담을 정확히 한 달 앞둔 시점에서다. 어느 호텔이냐, 판문점 도보다리 같은 곳이 있느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용기는 한번에 날아올 수 있느냐…. 세계가 들썩거렸다. 이후가 문제다. 북·미 고위 당국자들이 거친 말을 주고받았다. 실무자들은 연락이 되지 않았고 만나지도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회담 취소 편지를 보내고, 북한이 손 내밀고, 양측이 다시 만나기로 하면서 갈등은 봉합됐다. ‘회담 열차’는 다시 6월12일을 향해 트랙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회담까지 절반인 2주가 속절없이 지나갔다. 준비 측면에서 진척된 게 없으니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그렇지만 남겨준 시사점도 크다. ‘세기의 담판’이라며 구름 위를 걷는 듯 들뜬 발걸음을 현실의 땅 위로 옮겨놓았다. 회담을 연다는 사실 자체가 낙관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한반도 평화를 향한 과정이 험난할 것임을 확인시켜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베네수엘라에 억류됐다가 2년 만에 풀려난 조슈아 홀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워싱턴 _ 로이터연합뉴스

 

우선, 이제 엄밀한 의미에서 ‘리비아 모델’이란 말 자체는 필요없어졌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 모델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선 비핵화, 후 보상’ 방식으로 이해된다. 북한이 완전히 비핵화하기 전에는 미국이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리비아 모델 적용을 주장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정조준해 “일방적 핵포기 강요” 등으로 비난한 걸 보면 북한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북한은 리비아 모델과 다르다”고 약속했다. 큰 틀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의미도 작지 않다. 북한 비핵화 과정이 ‘트럼프 모델’로 불리건 ‘코리아 모델’로 불리건, 한반도의 상황에 근거한 해법이 나올 것임을 예고한다.

 

북·미가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양측 모두 대화를 강하게 원하고 있고, 성공적 회담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가 아닌 공개 서한을 통해 회담 취소를 알리면서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라”고 했다. 북한이 하루 만에 ‘정중하게’ 응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회담을 매우 많이 원한다. 우리도 그러기를 원한다”고 화답했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더 절실한 건 북한이고, 회담이 안돼도 미국은 나쁠 게 없다고 말해왔다. 미국 내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북·미 회담에 드라이브를 걸어온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대화 포기를 선언한다면 후폭풍을 감당해야 한다. 회담 취소와 번복 과정은 북·미는 물론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도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잠시 멈췄지만 대화 의지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협상은 적극적으로 진행될 것이란 기대를 낳는다.

 

무엇보다 비핵화와 보상을 둘러싼 내용과 이행 순서에 대한 북·미 간 입장차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비핵화와 보상 간 주고받기가 난제임을 확인시킨 것이다. 미국이 ‘선 비핵화’에선 한발 물러섰다 해도, 북한이 그에 버금가는 큼지막한 것을 내놔야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는 입장은 여전하다. 최단기간 내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를 마무리하자는 것이다. 남한도 그러기를 바란다. 이행 과정이 길어지면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고, 과거처럼 실패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

 

북한도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만 북한은 미국이 그 속도를 감당할 만한 조치를 취할 수 있냐고 되묻는다.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마지막 단계에서, 동시에 마무리돼야 할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데 미국도 속전속결로 끝낼 자신이 있냐는 것이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 즉 안보 위협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했는데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핵을 포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북·미 간 신뢰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신뢰는 일방적이지 않다. 가는 말이 곱지 않은데 오는 말이 곱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나는 하기 싫지만 너는 해야 한다고 할 수도 없다. 상호적이다. 실상 한반도의 구조적 위기도 양측이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 크다. 서로가 70년을 적으로 살아왔다.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 북·미 정상이 만나 다짐을 해도 이행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으면 허사다. 회담보다 중요한 것은 이후다. 북한의 비핵화도, 미국에 의한 체제보장도 결국 불신을 신뢰로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 여정의 ‘시작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홍욱 국제부장>

Posted by KHross

연일 한반도와 미국의 정세가 극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한·미연합 군사훈련 등의 이유로 갑자기 냉각되었던 남북관계 국면은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담에서 체제안정과 경제지원에 대한 미국의 직간접적 보장이 북한 측에 제시되면서 다시 진정 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나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시민’으로서 또 여자로서(즉 시민이라는 위상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아직도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자면 두 겹의 시선으로 전례 없는 이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비핵화와 평화의 전망에 감격하면서도, 이른바 ‘정상’의 지위에 있는 남성들을 주체이자 매개로 삼는 이 일련의 정치상황이 그들의 남성성 및 국가의 남성적 성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현실정치란 개인의 성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조직적 기획이고, 정치가의 공적 인격은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트럼프나 김정은 위원장의 충동적, 독단적, 폭력적 특성은 권력의 과시, 유지를 위한 연출이기도 하다.

 

풍계리 핵실험 관리 지휘소 시설의 폭파 순간. 목조 건물들이 폭파되며 산산조각 나고 있다. 북한은 이날 지휘소 시설 7개동을 폭파했다. 사진공동취재단

 

군사력을 대규모로 조직화하고 타자, 타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 세계 권력의 위계질서를 형성한 근대의 역사는 공격적 남성성을 규범으로 여겨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 권력은 구조나 실천의 측면에서 여전히 남성적이다. 제국주의의 팽창, 실제로 일어났던 식민 정복과 세계대전, 아직도 진행 중인 세계 각지의 전쟁은 지극히 남성적인 수사법과 행위방식을 통해 수행되는 폭력을 드러낸다. 물론 그러한 폭력의 희생자에는 그 폭력의 행위자인 남성들이 포함된다.

 

북한이 그토록 공들여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 마침내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유는 물론 강대국 특히 미국에 위협이 될 정도의 존재감을 무력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핵무기를 폐기하고 그 대가로 정상국가로 인정받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거래의 시나리오에는 묘한 오이디푸스적 역설이 있다.

 

이미 권위를 가진 존재인 아버지, 가부장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결국 거세의 가능성, 즉 아버지가 나를 거세할 권위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가부장적 권위를 공유할 자격을 인정받게 된다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설명하는 오이디푸스적 남성성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핵실험장 폐기가 세계의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거세를 통한 남근적 권력의 공유라는 오이디푸스적 남성성의 역설이 일종의 퍼포먼스로 실현되는 셈이다.

 

북한의 비핵화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물론 나는 비핵화를 전격 지지하며, 그것을 기점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정말 우리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핵무기로 대표되는 파괴적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이 모종의 패권을 의미하는 한, 세계의 권력 구도에서 고립, 삭제되지 않기 위해 북한과 같은 경로를 택하는 국가나 단체들이 계속 생겨날 가능성은 남는다. 그리고 핵을 보유하는 소수를 대표하여 미국이 핵 확산을 방지하고 억제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한, 핵무기의 남근적 권력을 둘러싼 이 소모적인 거래는 반복될 것이다.

 

선거운동을 하던 시절에 트럼프가 장애를 가진 기자를 흉내내며 조롱하던 장면을, 또 그가 여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성기를 움켜쥐면” 된다고 다른 남자에게 자랑 삼아 이야기했던 대화의 녹취파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의 문제들이 언론에서 수없이 공개되었어도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런 그의 정치적 계산에 호소해야 하다니 두렵고 난감한 일이다.

 

충동적, 독단적, 폭력적인 특성이 공통점인 두 지도자들 사이에서, 또 자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공적 임무와 자신의 개인적 위상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욕망으로 추동되는 여러 정상들 사이에서, 협상가이자 중재자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과 역량은 매우 중요하다. 공격적 남성성이 각축하는 국제정치의 한가운데서 문 대통령은 공격성이나 나르시시즘과는 다른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새로운 남성 지도자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로써 평화와 상생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정치를 더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는 커다란 관심사이다. 또한 그가 그러한 지도자적 역량을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 어떻게 발휘할지에도 귀추가 주목된다.

 

미투의 시대에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낙인처럼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는 온화한 가부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정책이 필요하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요청하는 청와대 청원이 이제 어떠한 정책과 실천으로 이어질지 기대하는 마음은, 세계의 비핵화와 평화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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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을 열고 6월 북·미 정상회담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회담에서 “북한의 의지를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북·미 간 실질적·구체적 비핵화와 체제안전에 대한 협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수용하면 정권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색된 비핵화 정세 속에서 나온 두 정상의 발언에 주목한다. 마침 북한도 태도를 바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취재할 남측 취재단의 방북을 허가했다. 이를 계기로 비핵화와 남북교류 시계가 다시 작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워싱턴 _ 연합뉴스

 

물론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을 둘러싼 우려가 완전히 해소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트럼프의 발언부터 모호하다. 회담에 대한 기대를 내비치면서도 취소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비핵화) 조건들이 충족될 것으로 생각한다”면서도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비핵화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체적인 체제안전 보장책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CVID를 거듭 천명한 것도 거슬린다. 북한이 절대적 안보자산인 핵을 포기하겠다고 나선 상황임을 고려하면 좀 더 진지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에 대해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방안을 수용할 것처럼 시사한 것은 청신호다. “일괄타결이 바람직하다”면서도 “한꺼번에 이뤄진다는 것은 물리적인 여건으로 봤을 때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 단시간에 거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두 정상이 기대와 달리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의 구체적 로드맵을 깊이 있게 논의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북한의 강경한 태도로 경색된 국면을 타개하고 북·미 정상회담의 동력을 되살리는 게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목표였다. 회담 결과 북·미 정상회담의 모멘텀을 유지할 수는 있게 됐지만 성공적인 회담을 보장할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향후 회담 성공을 위한 남북한, 미국의 매진이 중요한 이유다. 신뢰 기반이 취약한 남북 및 북·미관계에서는 긍정적인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 엇갈리는 신호들 가운데 부정적인 것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적극 살리는 실용적 태도가 필요하다. 이번에 논의되지 않았거나 미진한 대목이 있더라도 향후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다. 낙관주의가 성공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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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걱정이 많다. 완전한 비핵화 협상이 제대로 타결될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담이 열리더라도 성과가 나올지 불확실한 탓이다. 게다가 회담 성과가 좋더라도 추후 제대로 이행될지 안심할 수 없다. 충분히 우려할 만하다. 근거도 있다. 70년간 분단된 남북이 그 시간 동안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신중한 행동으로 시행착오를 줄이고, 결정적 실수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협상의 실패 이유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거나 손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약속 위반에 대해 국제기구는 제재를 강화했다. 상호 감내할 만한 수준의 이러한 흐름이 장기간 반복, 순환됐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북한의 핵보유 위협이 국제사회를 실질적으로 위협하고, 북한에 대한 제재로 북한의 경제 취약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협상 성공의 시급한 여건이 형성됐다.

 

미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오전 워싱턴 백악관 영빈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가운데)과 만나 대화하고 있다. 워싱턴 _ 연합뉴스

 

상호 윈윈(win-win)의 내용이라면 국제사회와 북한이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호 혜택의 폭이 클수록 성공 가능성도 커진다. 완전한 비핵화는 표면상 북한에 불리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이 핵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경제 성장의 가능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제사회의 핵 불안이 감소한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유리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 성공으로 미국 내외에서 얻게 될 긍정적 평가는 외면하기 어려운 막대한 보너스다. 그래서 북·미 모두에 충분히 매력적인 협상이다.

 

역사의 진보는 걱정과 협상의 조화로 이루어졌다. 상대를 의심만 하면 다음 협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어떤 의심도 완전히 해소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 것을 요구해서도 안된다. 걱정 없는 협상은 흔히 실수와 실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것은 충분히 우려하면서 협상하는 것이다. 그럴 때 협상에서 실수와 실패를 줄이고 신뢰와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북·미 정상회담의 목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공감했다. 협상의 관건은 방법이다. 선 폐기, 후 제제해제 또는 폐기와 제재해제의 동시 진행 등이 논의된다. 갈등의 여지가 있다. 이유는 신뢰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 모두 서로를 믿기 어렵다. 걱정만 하면 현 상태가 지속된다. 걱정하지 않고 협상하면 실패의 역사가 반복된다. 그렇다면 걱정과 협상의 병행이 요구된다. 걱정한 내용을 협상에 반영하는 것. 걱정한 내용을 국제기구나 주변국이 보증하는 것. 사고에 대한 걱정을 해결하는 보험 시스템, 계약의 불안감을 줄여주는 담보 시스템의 활용 등.

 

물론 양측 다 속을 것을 걱정해서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주저한다.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신용사회다. 약속 위반자와 사기꾼은 적발되고, 비난받고, 처벌받는다. 그 피해가 이익보다 크므로 약속을 지키려 한다. 국제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약속 이행으로 큰 도움을 얻는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주변국의 역할이 크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가져오고,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여 북한의 핵보유 필요성이 없도록 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진로 | 영산대 교수·정치평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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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취재하기 위한 남한 기자단 방북이 무산됐다.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등 4개국 외신기자단은 23~25일 진행될 핵실험장 폐기 현장 취재를 위해 22일 베이징에서 고려항공 전세기를 타고 원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북측이 남측 취재진 8명의 명단을 접수하지 않아 동행하지 못했다. 북한이 비핵화의 첫발을 떼는 역사적인 행사 취재에 당사국인 한국이 제외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더구나 핵실험장 폐기 행사 취재는 남북 정상 간의 약속이기도 했다. 북한의 약속 위반은 ‘남북 간 모든 합의들을 반드시 이행함으로써 과거의 대결과 반목을 끝내자’는 판문점선언의 취지를 훼손하는 행위다.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초대받은 외신 기자들이 22일 원산 갈마비행장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은 지난달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핵실험장 폐기 방침을 천명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일주일 뒤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5월 중 핵실험장 폐기를 진행할 것이며 남한과 미국의 전문가와 언론인을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북한은 지난 15일 통신사와 방송사 기자를 각각 4명씩 초청하겠다는 통지문을 보냈다. 그러다 16일 돌연 남북 고위급회담을 취소하며 남측을 압박하더니 취재진 방북마저 불허한 것이다. 북한은 올 들어 남북관계에서 과거와 달리 신의·성실에 기초한 태도로 임했고, 그 때문에 남측 여론의 호평을 받았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합의한 판문점선언에 남측 여론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짧은 기간이지만 남북 간에 상당한 신뢰관계가 조성됐고, 이를 의심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약속 위반은 여론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번 약속 파기는 남북관계에서 상당기간 후유증으로 남을 수 있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진전을 반기지 않는 세력들이 기회있을 때마다 이를 끄집어내면서 남남갈등을 유발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남측 여론의 지지가 약화될 경우 남북관계가 삐걱거려 왔음은 북한 당국도 익히 경험한 사실이다. 향후 남북관계에서 이런 약속 위반이 재발돼선 안된다.  

 

한가지 짚을 것은 핵실험장 폐기행사를 ‘정치쇼’로 깎아내리거나 북한이 취재비로 1인당 1만달러(1100만원)라는 거액을 요구했다는 근거 없는 보도를 한 보수언론들의 태도다. 이날 방북한 외신기자들은 북한이 통상적인 금액의 항공·숙박비를 요구했다고 했다. ‘1인당 1만달러’는 허위보도였던 셈이다. 방북 취재가 무산된 데는 북한이 하는 일이라면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보수언론들도 원인 제공을 한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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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廣安)시는 중국 쓰촨(四川)성 동북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충칭(重慶)시의 위세에 기 한번 펴지 못하는 처지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고향이라는 말만 나오면 어깨에 힘을 준다. 최근 이 작은 소도시의 부서기가 중국에서 덩샤오핑 못지않은 ‘유명인’이 됐다. 다만 명성이 아닌 오명이라는 점이 문제다.

 

오명의 시작은 지난 11일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청두의 한 유치원 교사와 학부모 간 단톡방 대화가 공개되면서부터다. 대화 내용은 그야말로 ‘갑질’의 전형이다. 교사는 단톡방에서 옌(嚴)모 원생이 잘못을 저질러 혼자 앉아 있게 하는 벌을 줬다고 알렸다. 그러자 옌 원생 엄마는 “당장 유치원 전체 원생들과 교사들이 있는 앞에서 우리 딸에게 공개 사과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장에게 당신이 옌 부서기 딸을 어떻게 대했는지 다 이르겠다”고 흥분했다. 원장과 직접 전화하는 사이라며 친분을 과시했다. 다른 학부모가 옌 원생의 엄마에게 진정하라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 엄마는 단톡방에 유치원 측에서 교사를 ‘처리’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이 갑질 단톡이 공개되자 중국 누리꾼들은 분노했다. 옌 원생의 엄마가 교사에게 무리한 사과를 요구하며 공개 망신을 준 것에도 흥분했지만, 유치원 측이 고위 공직자 부인의 말만 듣고 정당한 절차 없이 교사를 처벌했다는 데 훨씬 더 분노했다. 갑질에 흥분한 중국 누리꾼들은 ‘옌 부서기’라는 단어만으로 광안시 부서기로 재직 중인 옌춘펑(嚴春風)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옌 부서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쓰촨성 기율위는 14일부터 이 사건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나흘 후인 18일 옌 부서기가 중대한 규율 위반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중국 누리꾼 수사대가 고위 공직자의 부패를 잡아낸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난징(南京)시 장닝(江寧)구의 부동산 국장이었던 저우주겅은 2009년 공식석상에서 손목에 차고 나타난 명품시계가 문제가 됐다. 결국 뇌물수수 혐의까지 드러나 사법처리됐다. 산시(陝西)성에서는 양다차이 안전감독국 국장이 교통사고 참사현장에서 웃는가 하면 명품시계를 바꿔 차고 다니는 장면이 누리꾼들에게 공분을 사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미소국장’이라는 오명을 얻은 양다차이는 결국 수뢰 혐의로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옌 부서기 갑질 사건 해결에는 중국 ‘을’들의 단결과 팩트체크가 큰 힘이 됐다.

 

유치원 측에서는 교사를 쫓아낸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갑질에 흥분한 다른 학부모는 교사가 퇴출당한 사실을 꼼꼼하게 증언했다. 권력을 부당하게 휘두른 갑질에 흥분한 ‘을’들은 소도시의 부서기 월급으로는 고가의 유치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예측과 주장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의 비리를 거미줄 치듯 촘촘히 추적했다. 옌 부서기가 소유한 호화 주택, 고급 자동차, 공직 외에 따로 운영하고 있던 회사 상황까지 파헤치며 옌 부서기를 압박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옌 부서기가 내부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을 공개했다. 그는 이 조사에서 갑질을 한 ‘옌모 원생 엄마’와는 5년 전 이혼했다고 밝혔지만 이웃 주민들은 옌 부서기와 계속 왕래가 있다면서 증거 사진을 올렸다. 옌 부서기는 조사에서는 1남1녀를 두고 있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또 다른 3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사실도 누리꾼 증언으로 밝혀졌다.

 

당사자가 아무리 거짓 해명으로 도망가려고 해도 수많은 ‘을’들의 힘까지 넘어설 수 없었다. 갑질이 강해질수록 ‘을’들은 더 정확해져야 한다. 옌 부서기와 관련한 ‘을’들의 제보는 정확했고, 이 덕분에 옌 부서기에게 갑의 지위를 뺏는 데는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갑질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을’들이 적극적으로 뭉쳐야 한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마찬가지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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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돌고 돌다 싱가포르로 결정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외교무대 데뷔가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셈이다. 극비리에 중국을 다녀오곤 했던 ‘잠행 순방’이 아니라 회담 장소와 일정 등이 미리 공개된 ‘정상적인’ 해외순방이다. 북한이 돌연 적대적인 입장으로 되돌아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 국무장관이 두 번이나 방북하고, 때를 맞춰 억류되어 있던 미국시민을 북한이 석방한 것 등에서 볼 때 비핵화의 큰 흐름은 만들어졌다. 비핵화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8년5월23일 (출처:경향신문DB)

 

비핵화는 북한의 미래를 어디로 돌려보낼 것이냐와 직결된다. 정상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이 구명조끼가 아니라 대형 구조선이기 때문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완전 비핵화가 이루어지면 제재 완화 또는 해제를 통해 미국 민간자본의 대북 직접 투자를 허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환상을 가져서도 안되겠지만 큰 판돈을 내걸고 치열한 외교전이 예고된 셈이다. 가보지 않은 비핵화라는 긴 여정을 앞에 두고서 트럼프, 김정은 모두 승자가 되는 해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어떤 모델 경로를 밟든지 간에 비핵화 진입 자체가 야심찬 계획임은 분명하다. 물론 회담 개최 전까지 각자 장외에서 주고받는 수싸움(외교전)이 치열할 것이다.

 

북한은 공언한 대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는 ‘세리머니’에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몇몇 국가의 기자들만 초청하면서 비핵화 선전을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이는 비핵화가 한반도의 미래에서 부인할 수 없는 진보의 원칙임을 과시하면서 한·미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김정은의 영리한 포석이다. 그렇다면 2003년에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북한이 전격적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복귀 자격을 두고 논란이 있겠지만 ‘돌아온 탕아’를 내치기도 쉽지 않다.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전문가들의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북한의 행위와 의도에 대해 컨센서스가 형성됐다. 김정은이 할아버지, 아버지보다 비핵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에게서 젊은 독재자에게 비핵화라는 쓴 약을 삼키도록 했다는 자신감이 읽힌다. 미국이 북한의 ‘번영’을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승부수를 던진 배경이다.

 

하지만 속기바둑처럼 신속하고도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불신의 구조를 곧바로 해체할지는 불분명하다. 은닉이 가능한 핵무기와 관련 물질들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가 간단치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찰이 ‘과학적’으로 실시된다면 검증은 ‘정치적’이다. 환자의 건강상태를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 등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검사하는 행위가 사찰이라면, 검사 후 자료를 놓고서 외과, 방사선과 등 의료진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검증인 셈이다. 의사들의 소견이 일치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실제 핵무기와 군사시설에 대한 사찰과 검증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들은 원칙적으로 핵무기와 군사시설 등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없다. 이들의 조사활동 범위는 널리 알려진 영변 원자로, 핵물리연구소, 김일성대학교 내 교육용 준임계시설, 우라늄 광산, 폐기물 시설, 원자로, 정련 시설 등에 국한된다. 따라서 연구시설 규모와 위치, 시료 채취 등을 통한 원자로 가동 기록, 수출입 통제 품목에 대한 수입 경로 파악, 연구자들과의 인터뷰, 기타 정보 자산 등을 통한 광범위한 활동이 부수적으로 이어져야만 북핵 퍼즐의 윤곽이라도 그릴 수가 있다.

 

2년 전 이맘때 트럼프는 애틀랜타 유세에서 “김정은이 미국에 온다면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면서 핵협상을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면서 “나는 오직 나은 협상을 할 것”이라고 했다. 평양에서 날아온 ‘로켓맨’과의 역사적 대좌는 트럼프 자신이 뱉은 말들 중에서 극히 드문 실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지뢰가 깔려있을 세기적 회담이 ‘낫싱버거’(속 빈 강정)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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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중국의 천지개벽을 이끌어낸 덩샤오핑 같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될 수 있을까. 그가 비핵화를 통해 개혁개방에 적극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이 같은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상당 기간 안개 자욱한 시간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지만 북한이 중국과 체제 동질성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은 김 위원장이 간과할 수 없는 롤모델임에 틀림없다.

 

덩샤오핑은 청년 시절 프랑스 유학, 대장정 참여를 거쳐 군·지방정부·외교 등 다방면에서 경험을 쌓은 뒤 70세가 넘어 최고 지도자가 됐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실각, ‘광야의 경험’을 거치며 자신을 단련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 역시 해외 유학 경험이 있고 절대 권력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과 일부 공통점이 있다.

 

그가 향후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점치기엔 아직 시기상조란 의견이 많지만 덩샤오핑은 덩샤오핑이고, 김정은은 김정은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교훈 삼아,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린다면 북한식 모델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모든 건 그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다.

 

중국 개혁개방 원년인 1978년 10월 미국 GM이 중국 정부와 자동차 생산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했다. 토머스 머피 GM 단장은 중국 측과 협상에서 합자 형식을 제안하며 자신의 지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중국 인사에게도 지갑을 꺼내달라 요구했다. 이어 합자란 양측이 낸 돈을 합해 기업을 경영하되 이익이 나면 나누고, 손해가 나면 함께 부담하는 형태라 설명했다. 중국 측 인사는 “어떻게 공산당과 자본가가 손을 잡는단 말인가”라며 일단 거부한 채 덩샤오핑에게 보고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합자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허락했고, 중·외 제조업 협력의 물꼬를 텄다. <중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움직이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회주의체제 국가들이 개혁개방에 나설 때 최고 지도자의 결단력과 예지가 그만큼 중요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덩샤오핑은 공산당이 독단과 극단주의에 빠지면 반드시 실패하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취할 때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내내 보수파 반발에 직면했지만 남순강화로 돌파했으며 때로는 보수세력과 타협하고, 심지어 관료들의 부패를 일정 부분 용인해가며 개혁동력을 이끌어냈다. 만약 김 위원장이 덩샤오핑과 같은 결단력과 유연성을 보여준다면 북한의 개혁개방은 힘차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본격 나설 수 있었던 데는 대외환경 개선도 크게 작용했다. 1972년 일본과 수교했으며 미국과는 1979년 국교정상화를 이뤄냈다. 다음달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의 개혁개방에 중대한 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은 1978년 11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연결해 대륙으로 확대하는 점→선→면 전략을 취했다. 북한도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개혁개방을 추진하려는 태도를 취했지만 과단성 있는 조치를 내놓진 못했다. 심각한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의 경제적 지원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시장경제체제 도입에는 소극적이었다. 지난해 말 현재 북한에는 중앙급 경제특구 5개, 지방급 경제개발구 19개가 지정돼 있다. 1991년 나선경제무역지대를 특구로 지정한 후 2000년대 들어 개성, 금강산, 신의주, 황금평·위화도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지역별로 중복지정되는 등 종합적 계획하에 추진된 건 아니다. 예컨대 신의주 인근에는 황금평·위화도경제특구, 신의주경제특구, 압록강경제개발구가 지정돼 있다. 시장을 대하는 기본 입장에서 중국과 달랐고 제도적 뒷받침도 미흡했다.

 

물론 북한과 중국은 다르고, 덩샤오핑의 전략이 흠결이 없는 건 아니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로 제한된 지역에서 실험을 거친 뒤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이 가능하나 북한은 특정 지역에 국한해 개혁개방을 실험하기가 쉽지 않다. 체제동요에 대한 지도층의 불안감도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누구든지 부자가 되라”는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은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나라 중 하나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이루고 생존과 발전을 위해 거대한 실험에 적극 나선다면 주변국들은 아마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2500만명의 내수시장과 중국 동북3성 및 유라시아 대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인 북한의 경제적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산이라면 덩샤오핑은 길에 비유된다. 김 위원장이 북한의 길이 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오관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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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을 전격 연기한 데 이어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비판하며 ‘북·미 정상회담 재고려’를 거론하며 반발하자 미국이 진화에 나섰다. 새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16일(현지시간) 리비아 모델이 미국의 공식 방침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것이 우리가 적용 중인 모델인지 알지 못한다”면서 “정해진 틀은 없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모델”이라고 했다. ‘트럼프 모델’이라는 언급은 과거의 특정한 비핵화 방식을 답습하는 대신 북한의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비핵화 방식을 모색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북·미 정상회담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가운데 북한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상황을 추스르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판단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17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어 “북·미 정상회담이 상호존중의 정신하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한·미, 남북 간 여러 채널을 통해 긴밀히 입장을 조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상호존중의 정신’은 이 시점에서 북·미 양측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3월 방북한 정의용 안보실장 등 특사단에 북·미대화에 나서는 조건으로 “대화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상호존중의 자세로 대화하자는 뜻이다. 사실 국가 간의 외교는 상호존중의 정신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덕목에 비춰볼 때 트럼프 행정부 일부 관리들의 최근 대북 발언이 상대방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수준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북핵 반출 및 미국 이송을 거론하고, 북한이 줄곧 반대의사를 밝혀온 ‘리비아식 해법’을 가이드라인인 양 제시하며 굴복을 강요하는 듯한 언행을 했다. 역사적 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시기라는 점은 안중에도 없고,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듯한, 오만방자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체제안전 보장 약속이 ‘불가역적인’ 것인지를 가장 우려한다. 그런 북한에 무조건 완전 폐기만을 요구하며 정권 붕괴로 이어진 리비아 모델을 꺼내드는 볼턴의 의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협상을 앞두고 기싸움을 벌일 수는 있다. 하지만 기싸움이 상궤를 벗어나 협상 상대에게 불안이나 모멸감을 준다면 판 자체를 깰 수도 있다. 백악관 대변인이 거론한 ‘트럼프 모델’이 어떤 방식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트럼프 모델에는 상호존중의 가치가 담길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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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두 정상이 판문점선언에 합의하고, 6월12일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라는 구체적 사항에 대한 합의 여부가 중심에 놓여있지만 기저에는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동북아국제정치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스케일과 스피드로 역사 대변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이 급작스럽게 열리다보니 기대감도 상승하지만, 놀라움은 물론이고 생경함과 불안감까지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다. 변화의 국면에 도사린 3개의 악마는 성공적 결말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살얼음 같은 아슬아슬함을 주고, 실패를 예측하는 이들에게는 의심의 근거를 주며, 그리고 성공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첫 번째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그 유명한 ‘악마’다. 중요한 일에서 실패는 작은 것에서 나온다거나 또는 합의나 계약에서 세부조항 때문에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는 함정이 있을 때를 비유하는 이 표현은 진부할 정도로 많이 사용되지만, 여전히 강력한 제동력을 가진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으니 돌다리도 두드려봐야 하고, 유리그릇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말로 무게를 싣고 있는 이유다.

 

한반도 분단체제로 인한 적대관계 70년과 북핵 위기 사반세기로 말미암은 불신의 구조화는 언제든지 디테일의 악마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일괄타결의 빅딜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물론이고, 합의 이후의 실행과정에서 디테일의 악마는 순간순간 위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따라서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그러나 숨어있는 악마와 숨어든 악마는 구별해야 한다. 악마가 디테일에 숨은 것인데 문재인 정부가 찾지 못하는 것이라면 무능이겠지만, 권력보존이라는 사익을 위해 평화의 역사를 바꾸는 일을 방해하는 일부세력들은 디테일에 숨어든 악마다. 디테일이 원칙과 목표를 흔들지 못하도록 치밀함과 유연함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숨어든 악마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게 가속도를 올리는 것도 필요하다.

 

두 번째는 상대방을 악마로 모는 것인데, 특히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악마화가 가진 문제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 사회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미국 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극도의 대북 불신에다 자국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더해지면서 실패를 예단한다. 미국 내 뿌리 깊은 도덕적 근본주의는 외교적 협상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다. 악마와는 협상할 수 없고, 협상은 오직 적이 굴복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북한의 이례적인 선제적 양보조치들을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으로 해석하지 않고, 도리어 합의에 대한 조건의 문턱을 높이고, 골대를 뒤로 물리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는 회고록의 말미에서 미국대외정책의 최대 문제점을 ‘악마화 전략’이라고 규정하면서, 특히 북한에 대해 왜 그렇게도 혹독하게 대하는지, 악의 축 같은 심한 용어를 사용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한반도의 분단은 끝낼 수 있고 또 반드시 끝내야 하는 비극이다. 그것은 서로 계속하고 있는 악마화가 대화로 바뀌고 화해가 이뤄질 때만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악마는 관성이다. 한번 경로가 정해지면 그것이 아주 부조리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경로의존의 기성질서가 변화를 거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른바 물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70년 냉전 및 분단체제를 살다보니 뿌리 깊은 관성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전쟁가설>로 유명한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현재 시점의 결과가 미래의 시점에서 가능한 결과를 제약하기 때문에, 변화보다 현상유지를 고집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혁명이 일어나기 힘든 것인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보다, 익숙해진 현재의 고통을 참는 것을 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디테일의 악마, 상대에 대한 악마화, 그리고 관성의 물귀신을 극복해야만 분단체제는 해소되고 평화의 시대가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70년 묵은 엄청난 불신구조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그것도 단기간에 만들어내야만 변화가 가능한 기막힌 역설이 놓여있다. 북한은 30여년에 걸쳐 전력을 쏟아 개발한 핵을 포기해도 체제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미국은 그런 핵을 북한이 정말 포기했다는 신뢰가 매우 짧은 시간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도 실패해서는 안될 마지막 기회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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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남북 정상의 합의문에 중국과 미국 등 제3국이 등장하고 이들의 역할과 시한까지 명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중과 사전에 협의된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남북 모두 매우 빨리 일을 진행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정전체제가 끝났음을 확인하는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으로 가는 로드맵을 상정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전에 관련국 정상들이 모여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고 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절차다.

 

문재인 정부가 법적 구속력도 없고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 종전선언을 그것도 비핵화 협상이 본격화하기 전인 ‘입구’에서 하려는 이유는 이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진작시키고 미국을 이 정치적 약속에 묶어두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비록 구속력은 없지만 정상들의 공개적 약속이어서 그 무게감은 결코 작지 않고 북·미 모두 이탈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제외한 미 행정부의 참모들은 모두 조기 종전선언에 부정적이다. 현실은 여전히 정전체제에 머물고 있는데 각국 정상이 이미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커다란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태도변화가 미국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군사적 행동 가능성에 대한 우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종전선언은 협상 과정에서 대북 군사적 옵션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종전선언이 비핵화 과정에 극적 효과를 발휘하려면 ‘입구’가 아닌 ‘출구 직전’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비핵화·관계정상화·평화협정 발효를 마지막 순간에 동시에 한다고 해도 기술적으로는 일정한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으로서는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핵무기를 버리는 순간이므로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단계다. 이때 각국 정상이 종전선언이라는 정치적 약속으로 ‘마지막 고개’를 넘을 수 있는 탄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종전선언에 누가 참여하느냐도 문제다. 판문점선언에서는 평화협정 논의 과정에서 가급적 중국은 마지막 순간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속내가 드러난다. 중국이 개입하면 일을 빠르게 진척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평화협정 논의에서 중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강하게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 매우 부담스럽다.

 

하지만 정상 간 합의 문서에 ‘3자 또는 4자’라는 표현을 적시한 것은 문제다. 이에 자극받은 중국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8일 다롄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유관 각국과 함께 역내 영구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중국이 1994년 판문점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당사국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지만 이 같은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중국은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의해 쫓겨났다. 한·중 수교를 했으니 군사정전위에 남아 있으면 안된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로도 중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 지위를 포기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법적 지위 여부와 무관하게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적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 것도 중요하고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한 정치인들이 만들어가는 일인 만큼 관련국 모두 국내 정치적 계산이 없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정치적 효과는 일을 추동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극도로 세밀하고 신중하게 다뤄나가야 한다. 조급함과 정치적 욕심을 조금 자제하고 차분하게 한발씩 전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빠른 진전이 아니라 다시 뒷걸음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견고한 진전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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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16일 한국과 미국에 강도 높은 경고 조치를 취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한·미 공군의 연합공중훈련인 ‘맥스선더’ 훈련을 비난하며 이날로 예정된 남북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담화를 통해 일방적인 핵포기만 강요한다면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하겠다고 압박했다.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 담판에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낙관적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남북 고위급회담을 제의한 지 하루도 안돼 일방적으로 회담을 연기한 북한의 행태는 대단히 유감스럽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판을 깨지는 않겠지만 한·미에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맥스선더’ 훈련을 거론했지만 전적으로 이것 때문에 회담을 연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훈련은 ‘4·27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이미 공표됐고, 지난 11일부터 시작해 한창 훈련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훈련이 장애물이라고 인식했다면 사전에 문제 삼거나, 훈련 중 회담 제안을 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더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여러 차례 한국과 미국이 연합훈련을 계속할 필요성과 유용성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한 바도 있다.

 

그렇다고 ‘맥스선더’ 훈련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미는 전과 달리 스텔스 기능을 갖춘 최첨단 F-22 랩터 전투기 8대를 동원했고, 이 사실을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표했다. 북한은 이번 훈련에 대해 통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판단했을 법하다. 판문점선언을 통해 군사적 긴장완화를 약속해놓고 군사훈련을 강화한 것에 대한 실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과 선의에 남조선과 미국이 무례무도한 도발로 대답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이해된다. 한국과 미국은 이 같은 북한의 우려를 경시하면 안된다.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핵이라는 유일한 자산을 내세워 정권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북한의 입장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북한이 비록 한·미 양국에 동시에 경고를 날렸지만 실질적인 겨냥점은 미국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김 부상의 성명에 잘 나타난다. 그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미 고위관리들이 ‘선 핵포기, 후 보상’이나 ‘리비아식 핵포기 방식’, ‘핵·미사일·생화학무기 완전 폐기’ 등을 밝히고 있다면서 “이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국들에 나라를 통째로 내맡기고 붕괴된 리비아의 운명을 우리 국가에 강요하려는 불순한 기도”라고 규정했다.

 

북한 입장에서 볼턴의 발언은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북한의 반발로 후퇴했던 비핵화 요건을 다시 강화한 것은 물론 북핵 반출 및 미국 이송을 강요하고 북한 인권 개선까지 주장하는 등 잇단 강경 발언으로 북한을 압박해왔다. 북한으로서는 비핵화가 완료된 후에야 국제사회와의 경제 교류가 가능하며, 그것도 미국의 지원 형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교역을 통해야 할 것이라고 못 박은 대목에서는 모멸감까지 느꼈을 법하다.

 

볼턴의 발언이 조율된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에 기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 사전조율 과정상의 기싸움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데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볼턴의 언행만으로는 회담을 하자는 것인지, 북한 정권을 굴복시키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북·미 정상회담은 비핵화와 북 체제안전 보장이 핵심의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북·미 현안을 앞세우면 북·미 정상회담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북·미 정상회담은 70년 만에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소중한 기회이다. 누구든 회담을 흔든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설령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각별히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직접 회담에 관여하는 남·북·미 당국자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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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만9000명의 소도시 미 테네시주 오크리지는 ‘원폭의 고향’이다. 미국 정부가 1942년 비밀 핵개발 프로젝트였던 ‘맨해튼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와 함께 인공적으로 급조한 도시다.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꼬맹이)를 이곳에서 만들었다. 리틀보이는 맨해튼계획을 승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별명이다. 이때부터 오크리지는 ‘비밀의 도시’ ‘원자력 도시’로 불렸다.

 

이곳에는 지금도 원자력 공장과 원자에너지 박물관 등 미국의 국립과학시설이 있다. 워낙 한적한 곳이라서 평소 찾는 이가 드물지만 일본인 관광객이라면 질색할 만한 장소다. 이 도시 주민들도 맨해튼계획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미 정부에 따르면 5만2000여명이 암 발병 등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보상을 받았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인 매년 8월6일 이 도시 주변에서 반핵집회가 열린다. 핵 없는 세상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해야 할 상징적 장소다.

 

냉전 종식 이후 오크리지는 핵물질과 관련 장비의 저장고 역할을 해왔다. 1994년 빌 클린턴 미 정부가 구소련 붕괴 후 핵물질 관리가 잘되지 않자 카자흐스탄에 있던 핵무기 원료 고농축우라늄(HEU) 600㎏을 이곳으로 옮겨온 게 효시다. 이어 2003~2005년 25t에 달하는 리비아의 핵개발 장비와 문서들이 옮겨졌고, 2010년부터는 칠레의 HEU도 이곳에서 보관되고 있다. 냉전 시 ‘원폭의 요람’이던 곳이 ‘핵 종말처리장’ 혹은 ‘핵무덤’으로 바뀌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핵은 인류를 단번에 무덤으로 보낼 수 있는 역사상 가장 흉측한 무기다. 그런 점에서 핵무덤은 많을수록 좋다. 아니 종국적으로는 핵무덤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노력이 요구된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3일(현지시간) 북한의 핵물질을 반출해 보관할 장소로 오크리지를 지목했다. 그는 비핵화가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 핵무기를 폐기해 오크리지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핵물질 보관 및 폐기 기술력과 경험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인 제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북핵은 반드시 미국으로 옮겨야만 하는가?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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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스라엘 주재 자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14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시민 최소 58명이 숨지고 2700여명이 부상당했다.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항의시위를 이스라엘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스라엘군이 비무장 민간인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하며 무차별 진압에 나서면서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가자지구는 핏빛으로 얼룩졌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영상을 보면 이스라엘군은 어린이와 노약자가 포함된 무방비 상태의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했고, 저격수가 도망치는 시위자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전쟁범죄나 다름없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다.

 

국경없는의사회 팔레스타인 현장 책임자 마리 엘리자베스 잉그레스는 15일 발표한 성명에서 “무기를 지니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총격을 당하는 장면은 견디기 어렵다”고 현지의 참상을 전했다. 이번 사태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데서 비롯됐다. 미국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예루살렘 지위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국제사회도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공동성지인 예루살렘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해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12월 이 원칙을 파기했고,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대사관 이전을 강행함으로써 ‘중동의 화약고’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됐다. 종교와 민족 간 갈등이 난마처럼 얽힌 중동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과거 미국은 중동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 자체가 갈등의 핵심 축이 돼버렸다. 중동평화를 위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란 핵합의를 철회한 것은 중동은 물론 서방 국가들 간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이 중동평화의 파괴자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국제사회는 이번 유혈사태로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자제를 촉구했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것은 물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성명 채택까지 무산시켰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중단해야 한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정부를 적극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미국이 당면한 책무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스라엘을 무조건 편드는 일방주의적 행태를 버리지 않는 한 중동평화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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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북서쪽 13번가 1500번지. 원형 교차로 길가의 빅토리안 양식 3층짜리 갈색 벽돌 건물이 보였다. 복원 공사를 마치고 오는 22일(현지시간) 개관식을 앞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다. 22일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일이다. 개관식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 건물에 국기 게양이 중단된지 113년만에 처음으로 국기 게양식이 열린다.

 

개관을 앞둔 공사관을 14일 미리 찾아갔다. 돌계단을 따라 현관에 들어가니 왼쪽으로 손님들을 맞았던 객당, 오른쪽으로 연회공간인 식당이 보였다. 관계자는 사진 자료와 고문서를 바탕으로 1880년대 공사관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객당에는 서양식 카페트와 한국 전통의 병풍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사 집무실과 공관원 사무공간이 나온다. 한복 차림에 수염을 기르고 갓을 쓴 채 서양식 탁자에 앉아 있는 공사관 직원들을 상상해봤다. 숙소로 사용했던 3층은 전시관으로 꾸며놨다.

 

복원공사를 마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외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전시관에서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아픈 과거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1888년 1월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 일행은 피셔하우스를 임대해 업무를 시작했다. 조선왕조는 이듬해인 1889년 2월 당시 정부 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2만5000달러를 투자해 이 공사관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 공관은 1897년 10월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외교 활동의 중심 무대가 됐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 건물 관리권도 일제로 넘어갔고, 일제는 이 곳을 단돈 5달러에 강제로 매입해 미국인에게 10달러에 팔아넘겼다. 이후 공사관은 되찾아야 할 독립의 상징으로 남았고, 102년 만인 2012년에서야 문화재청이 350만달러에 매입해 원형 복원 공사에 착수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1층의 객당. 문화재청 제공

 

공사관을 사용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더 생생하다. 초대 공사 박정양은 고종의 명을 받고 2개월에 걸쳐 미국 군함과 일본 여객선을 갈아타며 39,215리 길을 달려 워싱턴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던 청나라는 그에게 영약삼단이란 해괴한 원칙을 요구했다. 주재국에 가면 먼저 청나라 공사관에 알린 뒤 청나라 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교부를 방문하고, 외교 모임에서는 청나라 공사의 아랫자리에 앉고,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 공사와 합의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청나라 관계자 없이 스티븐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고 “양국의 우위가 돈독하며 영원히 화평하여 피차 인민이 균등하게 권리를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요청했다.

 

박정양과 함께 근무했던 초대 서기관이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월남 이상재다. 1896년부터 주미 공사를 지낸 이범진은 이후 러시아 공사로 자리를 옮긴 후 1910년 나라를 잃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의 미국 근무 당시 초등학생으로 아버지의 백악관 방문에 동행해 통역을 해줬다는 아들 이위종은 고종의 헤이그특사 중 한 명이 됐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2층의 공사 집무실. 박영환 특파원

 

전시관까지 살펴보고 되돌아 내려오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구한말 준비 없이 열강의 힘싸움에 휘말려 일본에 나라를 잃었고, 독립 후에는 다시 냉전 대결의 최전방이 되면서 전쟁과 분단이란 비극을 되풀한 우리의 역사가 스쳐지나갔다. 한반도의 현재 상황을 구한말과 비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국은 궐기를 선언했고, 미·중 대결 구도가 심화되면 한국은 또다시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라 이날 방문이 더 특별했는지 모르겠다. 북핵 문제 해결과 종전 선언은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미국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는 평화체제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는 세기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역사적인 순간에 서 있는 것이다. 오는 22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찾는 문재인 대통령도 대미 외교 개척의 현장인 이 곳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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