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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 및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은 갈등으로 치닫던 북·중관계 회복과 한반도 비핵화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다. 특히 김 위원장이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서기의 유훈에 따라 비핵화는 우리의 변함없는 입장”이라고 천명한 것은 의미가 있다. 시 주석 면전에서 직접 육성으로 밝힘으로써 비핵화가 흔들림 없는 정책 목표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이달 초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단 면담석상에서도 같은 발언을 했지만 이후 한국과 미국 일각에서 진정성을 의심하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비핵화를 내세운 북한의 갑작스러운 대남, 대미 관계 개선 시도가 대북 제재를 피해 핵개발을 하려는 시간 벌기일 뿐이라는 우려다. 김 위원장이 이런 의구심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유사한 논란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지난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베이징 _ 연합뉴스

김 위원장은 또 북·중 정상회담에서 “남한과 미국이 선의로 우리의 노력에 응해 평화 안정의 분위기를 조성해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를 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단계적 비핵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미국이 먼저 평화 실현 조치를 하면 비핵화할 수 있다는 김 위원장의 ‘선(先) 조치, 후(後) 비핵화’ 방안은 향후 핵심 당사국들과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미국은 아직까지 북한의 핵포기를 주장할 뿐 이에 상응하는 보상조치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의 제안이 문 대통령의 일괄타결 방안과 조화될지도 주목된다. 비핵화의 길이 험난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비핵화가 필수적이라는 남북한과 미국의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향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견해차를 좁힐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북핵 폐기와 평화협정 등을 단계별로 맞교환하는 해결책을 담은 9·19합의 등 비핵화 논의에 참고할 만한 기존 합의와 구상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와 진정성이다. 과거 북·미 간에 여러 차례 비핵화 합의를 하고도 번번이 깨진 것은 불신의 벽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중 정상회담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된 상황에서 끼어드는 형국으로 갑작스럽게 열렸다. 이것이 새로운 변수가 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북·중관계 정상화는 일차적으로 비핵화 등 한반도 문제 해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국 역시 비핵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한반도 영향력이 약화되는 이른바 ‘차이나 패싱’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중국이 한반도 정세에 대한 자국의 역할 확대를 미·중 패권 경쟁에 활용하려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북·중관계 회복이 대북 제재의 끈을 헐겁게 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두 나라가 관계 발전의 일환으로 경협 활성화를 논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대북 제재 강화가 아니라 정밀한 비핵화 로드맵 마련과 착실한 이행으로 풀어야 한다. 한반도 문제의 핵심당사국인 중국이 남·북·미 간 관계개선과 비핵화 논의에 참여하는 것은 시점의 문제였을 뿐 불가피한 일이다. 일본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주변국 모두의 노력이 절실하다.

Posted by KHross

과거 남북 간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절 장관급회담을 포함한 각종 남북 간 교류현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경험은 핵 문제 관련 북한 대남사업 관계자들의 질문이었다. “1994년 제네바합의에서 2002년까지 지어주기로 약속한 경수로건설이 2002년 합의 파기까지 공정률이 얼마인지 아십네까?”(실제 공정률은 40%가 안된다), “2005년 9·19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날 미국이 취한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네까?” 자신들이 핵개발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입장, 즉 미국은 절대 신뢰 못할 존재라는 것이다.

 

지난해 핵미사일 실험에 ‘올인’하면서 한반도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더니 금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신년사를 시작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김여정 특사의 방남, 우리 측 특사 방북 이후 4월 정상회담과 5월 북·미회담이 개최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강화된 유엔과 미국의 제재 때문에 결국 북한이 굴복하고 나섰다는 설명은 북한을 너무나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다. 제재압박이 전혀 무용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본질은 북한이 이젠 자신감을 갖고 대화모드로 전환해도 되겠다는 전략적 판단, 나아가 남쪽 문재인 정부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런 판단을 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김 위원장은 아마도 2차례 정상회담의 대화내용을 숙독했을 것이다. 두 정상의 정치철학과 문재인 대통령의 삶의 족적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신들 정권체제안보를 남쪽과 함께 논의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섰으리라 생각된다. 역지사지 관점에서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한 공감 표시, 나아가 우리의 책임도(사실은 미국이지만) 크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생각된다.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핵 없는 한반도 나아가 신뢰와 평화를 회복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자는 뜻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우리 측이 10·4선언과 2005년 정동영 특사가 북측에 약속했던 내용 등 그간 남북 간 합의된 사항들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제안하다면 북의 핵포기와 경제협력을 포함한 남북교류협력의 재개와 확대,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한 인도적 사안들도 어렵지 않게 합의에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문제는 5월의 북·미대화에서 북이 얼마나 인내심을 갖고 임할 것인가가 관건이라 생각된다. 미국은 동맹관계인 한국의 입장과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점에서 북의 정상회담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심 선 비핵화 조건을 포기한 것이 아님은 여러 가지 징후에서 알 수 있다. 미국 주요 언론의 한반도전문가 기고문의 논점이나 신임 국무장관과 안보보좌관의 인물 면면을 들여다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정상 간 만남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핵포기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직접 전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굴복은 죽음이라는 북의 핵정책과 대립될 것은 분명한 사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에게 북·미대화에서 인내가 필요함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북이 원하는 평화체제 전환과 북·미수교를 위해 한국 정부는 각별히 노력할 것임을 약속할 필요도 있다. 물론 외교파트의 혼신의 노력으로 미국을 설득함도 필요하다. 이번 북·미회담에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는 원칙적 선언과 구체적 프로세스는 6자회담에서 논의한다는 선에서 합의하면 어떨까. 사실 9·19공동성명 내용이 지켜졌다면 한반도는 비핵화, 나아가 진전된 남북교류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성원 한라대 초빙교수>

 

Posted by KHross

‘일본 관료 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최근 한 달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흔들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한때 일본을 떠받친다고까지 얘기됐던 관료 세계의 혼란과 해이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우선 모리토모(森友)학원에 대한 국유지 헐값 매각 의혹을 둘러싼 재무성의 문서 조작. 아베 총리 측이 헐값 매각이나 문서 조작에 관여했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두드러지는 점은 의혹이 제기된 당시 담당 국장이던 사가와 노부히사(佐川宣壽) 전 국세청 장관을 필두로 재무성 관료들이 정권 옹호에 필사적이었다는 것이다. 사가와가 국세청 장관에 임명된 것도 이런 ‘충성심’을 평가받은 덕분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런데 문서 조작 사건이 터지자 상황이 180도 뒤집혔다. 아베 정권은 “최종 책임은 사가와”(아소 다로 부총리)라면서 재무성 관료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사가와는 ‘꼬리 자르기’ 대상으로 전락했다.

 

또 하나의 ‘사학 스캔들’이었던 가케(加計)학원 특혜 의혹은 다른 양상이다. ‘총리 의향’이라고 적힌 문부과학성(문부성) 문서가 공개된 데 이어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성 사무차관도 “총리 관저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마에카와는 ‘데아이케(만남)바’ 출입 보도 등으로 부도덕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최근에는 문부성이 마에카와의 중학교 강연내용을 뒷조사했고, 친아베 성향의 자민당 의원 2명이 이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은 끝까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앞서 사가와 건과 비교하면 정권에 충성해도 잘리고, 정권에 반항해도 잘린다.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시계를 조금 더 앞으로 돌리면 아베 정권 추락의 신호가 된 재량노동제 데이터 조작 문제가 있다. 아베 총리는 “재량노동제 노동자의 근무시간이 일반 노동자보다 짧다는 자료도 있다”고 답변했지만 전제조건이 다른 데이터를 비교한 자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주무부처인 후생노동성이 잠깐만 조사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실수한 것을 두고 ‘과잉 충성’에 눈이 먼 탓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지만, 의도적인 사보타지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일련의 사건들을 지난해 유행어였던 ‘손타쿠(忖度)’ 문제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관료들이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기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감추고 보는 관료 집단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난맥상의 배경에 5년 넘게 이어진 아베 ‘1강 체제’의 부작용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베 정권은 2014년 내각인사국을 신설해 관료들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관료들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총리관저의 뜻대로 알아서 움직이게 됐다는 지적이다. ‘손타쿠’ 구조의 정점에 총리가 있는 셈이다. 일련의 사건에서 보이듯 아베 정권은 관료들을 정권을 지키는 도구로 생각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시한다. 자민당 와다 마사무네(和田政宗) 의원은 지난 19일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오타 미쓰루(太田充) 재무성 이재국장이 민주당 정권 시절 총리 비서관을 지냈던 점을 들면서 “아베 정권을 깎아내리려고 의도적으로 이상한 답변을 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철학자 우치야마 다카시(內山節)는 근대 정치의 병리로 ‘독재정치’를 낳는 불완전한 대의민주주의와 관료제 문제를 들었다. 정치가는 선거가 끝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정치가 밑에서 관료들은 자기보신에 몰두한다. 그 속에 주권자에 대한 공복(公僕) 의식은 없다. 지금 총리 관저 앞에서,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울려퍼지는 함성은 바로 그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훼손된 데 대한 분노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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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모두 속전속결로 성사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 전에라도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트럼프 특유의 쾌도난마다. 정 실장은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북·미가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즉석에서 이를 수용했다.

 

동석했던 트럼프 외교·국방 참모들 중 일부는 ‘괴짜 트럼프’의 도발적 결정에 우려를 제기한 것으로 보도가 됐다. 하지만 이런저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홍해바다를 가르듯 정상회담이라는 수로(水路)를 틀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한국이 선제적으로, 용의주도하게 ‘거사’를 도모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트럼프 행정부와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조용히 북한 비핵화의 태엽을 감기 시작했다. 작년 4월 한반도 위기설의 여진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여기에는 북핵 문제를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신념이 있었다. 미국의 고질적 대북 불신과 무관심 구조 속에서 김정은의 진의가 트럼프에게 전달되는 데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간파,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통역사’ 역할을 자임했다.

 

둘째,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가 워싱턴을 자극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관심을 끌어당기려면 핵 비확산체제를 흔듦과 동시에 한국과 일본의 국가안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완성’이 어쨌거나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위협을 느낀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는 군사적 방법을 통해 ‘체제변화 또는 붕괴’가 긴요하다고 판단했다. ‘최대의 압박과 관여 정책’은 따라서 시간의 문제로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체제생존의 위협을 느낀 김정은은 발 빠르게 남한을 통한 적극적인 평화 공세(또는 ‘갈등적 편승 전략’)로 선회했다.

 

셋째, 국제사회의 계속되는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의 체제 내구성이 상당히 약화됐다. 한때 ‘사회주의 진영의 동방초소’로 불리기도 했던 북한으로서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해 체면도 구기지 않고 대화의 장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셈이다. 한국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김여정이 올라섰다. 매파의 시각으로 보면 ‘불량국가’의 일시적 신분 세탁이다. 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다”는 일본 외무상의 평가처럼 정상회담 개최는 분명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업적이다.

 

넷째, 문재인 정부의 영리한 대미외교가 주효했다. 한국의 공(功)은 최대한 낮추고, 대신에 잘 다듬어진 언어로 트럼프의 지도력을 한껏 치켜세운 외교술이 빛을 발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꼭 여기에 해당됐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사실상 설계자인 서훈 국가정보원장을 정의용 안보실장과 함께 미국으로 보낸 것은 동맹국에 대해 최대의 예우를 표한다는 의미 이외에 방북결과를 설명하는 데 생길 수 있는 ‘해석의 구멍’을 메우는 한 수였다.

 

그렇다고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이 꽃으로만 장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교전·적대국 관계인 북·미, 남북 사이에 지뢰도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청와대 회의에서 “앞으로 두 달 사이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결과도 낙관하기가 어렵고 과정도 조심스러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는 대화로 포장된 길이 낭떠러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문 대통령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변이 없는 한 북·미 정상은 역사적 회담을 하게 된다. 김일성-김정일 때부터 자주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떡하든 미국에 접근하려고 했던 북한이었다. 궁핍한 자원 동원을 극대화하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몰두해 온 김정은으로서는 트럼프를 마주하는 일이 대미외교의 백미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못다 한 꿈을 김정은이 이루는 셈이다. 결국은 미국이 일련의 정상회담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다. 자강(自强)과 균세(均勢)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협상가’ 문 대통령에게 주어진 역사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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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사상자 없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 즉 ‘노 캐주얼티(no casualty)’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1993년 소말리아 민병대가 추락한 미군 헬기 조종사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장면이 방영됐을 때 미국인들의 충격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분노는 적군뿐 아니라 정부까지 겨냥했다. 이란 주재 미대사관에 갇힌 인질 구출에 실패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미군이 전쟁 중 자국 민간인들을 안전한 장소로 소개하는 것은 중요한 작전이 될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유사시 그 가족과 미국 민간인 20만명을 대피시키는 비전투원 후송훈련(NEO·Non-combatant Evacuation Operation)도 이런 차원에서 실시한다. 상·하반기 연중 두 차례 실시하는 이 훈련은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다. 용산 등 미군 기지에 책상 하나 가져다놓고 미군 가족들이 소개에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갖췄는지 등을 점검하는 게 전부다. 한국에 새로 배치된 미군 가족에게 철수 시 절차와 행동 요령을 숙지시키는 것이 훈련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자원자를 받아 평택기지에 집결시킨 뒤 항공기로 부산 또는 일본으로 소개한다. 지난해 북핵 긴장 고조 시 일본 요코다 공군기지로 대피 훈련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7년 만의 해외 소개 훈련으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주한미군이 다음달 16일부터 닷새 동안 이 훈련을 실시한다고 미군 기관지 성조지가 보도했다. 훈련 시기와 내용이 미묘한 것은 사실이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데다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기간이 겹친다. 게다가 미국인 100명을 처음으로 미국 본토까지 철수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주한미군에서 40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영규 공보관은 “새삼스러울 게 없는 훈련이다. 너무 과장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대북 경각심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곧 전쟁이 날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다. 북한이 ‘북침 연습’이라고 주장하는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서는 연례 행사라고 하면서 미국인 철수 훈련은 전쟁의 전조라고 하는 이중적 태도는 곤란하다. 지난해처럼 주한미군 가족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는 식의 가짜뉴스로 시민 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중근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비롯한 800여개 도시에서 24일(현지시간) 총기규제 강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지난달 총기난사 사건으로 17명이 희생된 플로리다주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의 생존학생들이 주도한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에는 초·중·고교생과 교사, 학부모 등 각계각층 시민이 참여했다. 워싱턴 집회에만 80만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지지를 표명했고, 배우 조지 클루니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은 기부금으로 힘을 보탰다. 한 연사는 “혁명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며 자신들의 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했다. 슬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낸 젊은이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은 ‘총기의 나라’다. 민간인 보유 총기 수가 2억7000만~3억정으로 추산된다. 인구가 3억2600여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1인 1정꼴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사건 이후 최소 193개 학교에서 18만7000여명이 총격사건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총기규제가 강화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무기 소지 및 휴대에 관한 권리’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2조가 역사·문화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미국 최대의 이익단체인 미국총기협회(NRA)의 강력한 로비는 정치적 장애물이다. 연방 상·하원 의원들은 총기사건이 발생하면 충격과 분노를 표시하지만 그때뿐이다. 규제 강화 입법에 적극 나서거나 NRA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은 거의 없다. NRA가 쏟아붓는 후원금이 끊길까 두려워서다. 돈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있으니, 이런 야만이 없다.

 

더글러스 고교 사건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학교 내 총기 참사를 막기 위해 ‘교사를 무장시키자’고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또한 공화당의 전통적 자금줄인 NRA를 의식해 근본적인 규제 강화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대해서도 백악관이 “수정헌법 1조의 권리(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행사하는 미국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했을 뿐, 트럼프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청소년들의 요구에 계속 침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고한 시민의 죽음을 막거나 줄일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방치하는 것은 문명국이 아니다.

 

Posted by KHross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명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끝부분이다. 번역 오류라든가 프로스트가 매우 싫어했다던 평론가들의 해석논쟁은 접어두고 가장 광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의미를 새겨본다. 지정학의 저주로 불리는 한반도를 살아가는 한국은 외교에 있어 운명적 결정이 유난히 많다. 그래서 역사적 변곡의 시점이라고 느낄 때마다 자주 이 시가 떠오른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불과 수개월 전만 하더라도 전쟁위기를 말했었는데 지금 대화와 화해를 말하고 있다. 황태덕장이 있었던 세찬 언덕바람의 혹한을 고스란히 받아냈던 평창 동계올림픽은 어렵게 평화의 온기를 만들어냈다. 아무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일이며, 트럼프의 당선만큼이나 정치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온갖 조롱을 받던 ‘한반도 운전자론’이나 북한을 포함한 모든 관련국들의 외면을 받던 ‘베를린선언’은 불과 1년도 안된 일이다. 의심과 냉소 가운데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묵묵히 견지해온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이니셔티브는 높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기적처럼 다가온 한반도 평화의 역사적 기회 앞에서 우리는 다시 두 갈래 길 앞에 선 것처럼 분열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중국, 유럽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의 해결은 ‘이미 가본 길’이라는 말이었다. 이면에는 가봤던 길은 실패의 길이며, 북한에 늘 속고 마는 맹목과 오판이라는 비판이 내재되어있다. 군사옵션을 언급하는 강경파는 물론이고, 상당수 대화론자들도 두 개의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결정되기 이전에는 전적 불신, 이후에도 반신반의에 머무른다.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긍정의 차원에서 강조하는 조심성이라면 희망적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현실감각이 되겠지만, 실패한 역사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섣부른 냉소와 비판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하거나 심지어 뒷걸음질하게 만들 수 있다.

 

어찌 협상만 가본 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에서 북한 핵 문제가 시작된 지 30년을 향하고 있다. 대화, 협상, 경제지원 등의 온건한 방법은 물론이고, 압박이나 제재 등의 강경한 방법까지 동원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 방법이든 충분하게 추진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본 길이라고 하더라도 못 갈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걸려 넘어졌던 자리를 알기에 피해갈 수 있으니 성공의 확률은 높아진다.

 

또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못 갈 이유는 없다. 어느 길이든 완전히 다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스트가 노래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결론은 길이 달라서라기보다 선택한 자의 의지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난한 협상과 검증, 그리고 폐기의 과정은 살얼음이며 유리그릇 같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과거와 확실히 다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어질 두 개의 정상회담에서 해결의 시한과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맞교환하는 빅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모든 과정이 완벽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갔고, 하나라도 어긋나면 백지화되어버렸지만, 이번에는 목적지점을 정할 경우 과정은 축약될 수 있다. 지뢰를 제거할 때 조심스럽게 하나씩 제거하는 방법도 있지만 한꺼번에 폭발시켜 제거할 때도 있는데 지금이 그런 때다. 다른 하나는 지난 수년간 절체절명의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을 겪은 후 혼신을 다해 붙잡은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을 거의 모든 당사국이 절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의 가능성은 매우 높다하겠다.

 

9년간 철저하게 끊어버렸던 대화의 연결고리와 막아버렸던 입구들이 운전자 한국은 물론이고, 북한과 미국도 놀라고 있을 정도의 속도와 규모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아직 없으며, 한국 정부가 물꼬를 트고 나니 주변국들은 벌써 저마다의 주판알을 튕기며 숟가락을 얹으려 하고, 훼방꾼도 등장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선택을 앞에 둔 망설임이 아니라 과감한 선택의 결과로서의 운명을 개척해야 할 때다.

 

<김준형 한동대 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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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을 동원한 미국과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고 극적으로 대화국면으로 반전시킨 북한 김정은 정권의 파격적인 행보가 놀랍다.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수용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파격적 행보도 기대 이상이다. 한반도 정세에 근본적 지각 변동을 가져올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문재인 정부의 공로도 크다.

 

이제 분명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실현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역사적 기회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3월6일 남북합의에서 자신들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에 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성패는 북한의 체제안전을 담보할 평화협정을 미국이 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미국과 북한은 이 협상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려 할 것이다. 확실한 한반도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과 확실한 체제안전 담보를 요구하는 북한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합당한 방안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뿐이다. 이에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70년 이상 우리를 옭아맸던 대결과 분단의 사슬이 끊어지는 대전환의 서곡이 될 것이다.

 

대결과 소모의 역사로 점철된 한반도에도 가슴 벅찬 평화의 빛이 비치고 있지만 이 빛은 다시 스러질지 모른다. 남북, 북·미 간 불신과 적대의 역사가 너무도 깊고 강하고, 여기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의 시기와 방해가 기승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것은 남북, 북·미 간 협상이 좌절되거나 좌초되어 다시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북·미 당국이 천신만고 끝에 이룬 합의는 확고하고도 충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우선 문재인 정부는 북한이 핵을 비롯한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한 데 조응하여 남한도 북한을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해야 한다.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미 군사연습을 중단하거나 최소한 선제공격, 참수작전과 같은 공세성을 제거하고 훈련 규모와 기간을 축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3·6 남북합의’와 북·미 정상회담 제안 등을 통해 약속한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한반도 비핵화 약속 등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 등을 매개로, 한반도 평화협정에 소극적일 수 있는 미국을 견인하기 위한 주동적 조치를 취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한반도 평화협정과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등을 통해 대북 적대정책 폐기를 법적, 제도적으로 담보해 주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연동하여 평화협정을 실현하면 미국과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함께 해소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가 70여년에 걸친 북·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통한 북·미관계 정상화를 이룬다면 한반도 평화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전쟁과 분단을 끝내는 평화와 통일의 여정은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고비마다 헤아릴 수 없는 난관과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이걸 넘어서려면 시민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촛불은 철옹성 같던 국회도, 헌법재판소도 국민의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고 완고하던 박근혜 정권을 마침내 무너뜨렸다. 한반도 평화도 남·북·미 당국에 맡겨둘 수 없다. 이 땅의 주인인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고 통일을 앞당겨야 한다.

 

이에 올림픽 휴전이 끝나는 하루 전, 3월24일 광화문에서 평화촛불을 들자고 제안한다. 이를 시작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및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로 나아가는 긴 여정의 고비마다 평화촛불을 밝힐 것을 제안한다.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이미 70여개 종교, 시민, 노동단체와 개인이 동참의사를 밝히고 있다. 해외에서도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소식을 보내고 있다. 남·북·미 당국자들이 딴마음 먹지 않고, 딴길로 가지 않고,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하여 한반도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되돌이킬 수 없는 확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평화의 촛불을 들자!

 

3월24일(토) 오후 6시,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오혜란 평화와통일을여는 사람들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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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한반도에는 봄기운이 감돈다. 곧 전쟁이 나더라도 이상할 것 같지 않던 엄혹한 상황에서 노심초사하던 것이 불과 한 달여 전 일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항구적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길고 지난한 항해가 곧 시작된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장정이다. 가는 도중 어떤 암초와 풍랑을 만날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과연 끝까지 갈 수는 있는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생각할수록 아득한 여정이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위기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천행이다.

 

온갖 제재와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던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꿈으로써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받아들이면서 반대급부로 제시한 핵심 요구 사항은 ‘체제안전 보장’이다.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 안보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북한이 수십년간 국제사회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핵개발에 매달려온 최종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 셈이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을 맞바꾼다는 간단한 명제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비핵화는 북한의 핵폐기는 물론 이를 검증하는 작업이 수반된다. 또 핵폐기 이후 다시 핵무장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동북아시아 안보환경을 다자안보체제로 바꿔주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은 북·미 적대관계 종식과 각종 대북 제재의 해제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모든 스텝 하나하나가 세계사에서 유사한 사례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희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핵무기 완성 단계에서 스스로 핵을 포기한 국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세계 21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했다가 ‘일시 중단’ 상태로 60년 넘도록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은 전인미답의 길이다. 또한 미국이 공식적으로 교전 당사국이며 불법 핵무장국이자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낙인찍힌 북한과 정식 수교를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이 모든 것들을 병행 추진해 보조를 맞춰 진전시키다가 최종 단계에 이르러 한꺼번에 동시 발효시켜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이 대목에서 당사국들이 과연 이 같은 험난한 여정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핵 문제는 냉전체제와 동북아시아의 미묘한 역학관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모순 등이 모두 집약돼 만들어진 산물이다. 1990년대 초반 북핵 위기가 처음 터졌을 때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이 선행되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국들은 이 같은 본질을 회피하고 뒤로 미루면서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거나, 북한의 핵물질과 기폭장치만 외과수술하듯 도려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60년 이상 쌓여진 국제정치의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고 만시지탄일 수도 있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보수와 진보정권을 거치는 동안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고 국내정치의 도구로 활용돼왔다. 평화체제에 대한 준비가 돼 있을 리 없다. 지금의 상황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미 접촉 성사’에 전력투구하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파격적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하는 ‘더 큰 파격’으로 대응했지만, 본디 행동을 먼저하고 계획은 나중에 세우는 그의 성향상 면밀한 대비가 돼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업적 과시에 집착하는 그가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의 열매를 자신의 임기 내에 따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경우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양국 최고지도자들은 원칙적 선언 수준의 합의를 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 로드맵을 만들기 위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험난한 이행 협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국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국내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정치적 선언을 통해 입구에 들어선 이후 출구를 찾지 못해 미로를 헤매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출항의 뱃고동이 울리기 전에 모든 준비가 완료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항해를 마치겠다는 각오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만들어진 이번 대화 국면은 아마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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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과기대 영재반의 시작은 황홀했다. 1979년 10대 초반의 청소년 21명이 영재 자격으로 과기대에 정식 입학했다. 가장 어린 학생은 11살에 불과했다. 10년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기를 지낸 후 지식 기반이 허물어졌던 당시 중국에서는 이 영재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이들은 ‘지식 황무지 위의 소년 돌격대’라고 불렸다. 돌격대원들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 중 한 명이 닝보다. 과기대 영재반에서 ‘최초의 천재 소년’ 인증을 받은 닝보는 19살에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그러나 닝보는 너무 빨리 다가온 성공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1998년 한 TV 프로그램에서 영재교육의 폐단을 공개 비판했고, 갑자기 출가를 선언했다. 그동안 베이징대, 칭화대 등 여러 대학이 영재반을 만들었지만 슬그머니 폐지했다. 현재는 중국 과기대에서만 영재반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존폐 기로에 섰다.

 

영재교육에 대한 찬반 논쟁은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진행 중이다. 중국에서는 학생의 성장 속도보다는 질적 성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교육의 획일화가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없애 시진핑 주석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개헌안이 지난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8%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투표인단 2964명 중 2958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2표뿐이었다. 향후 중국 정치사의 흐름을 바꿀 중요한 결정이다.

 

개헌안 통과 다음날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둘러보았다. 대규모 집회는 아니더라도 혹시 돌발적 항의 퍼포먼스라도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캠퍼스는 역시 조용했다. 29년 전 민주화를 요구하며 톈안먼 사태를 이끌었던 대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식당이든 강의실이든 헌법 수정에 대해 말을 꺼내는 학생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말을 걸어본 대학생들은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공개적으로 국가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외국인에게는 더더욱 중국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결연함 같은 게 읽혔다. 중국 매체들은 압도적 찬성은 압도적 지지를 뜻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번 헌법 수정안은 21개 조항에 따른 역대 최다 수준의 개헌이었지만 표결은 조항별로 이뤄지지 않고 개헌의 찬반 여부만 물었다. 다양한 의견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이다.

 

17일 표결 결과는 더 상징적이다. 시 주석 재선에 대한 표결 결과는 2970명 전원의 만장일치 찬성이었다. 시 주석이 2008년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될 때는 반대 28표, 기권 17표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일사불란한 단결과 획일화된 의견만 강조되고 있다.

대학생들은 획일화된 침묵을 교육받고 있다. 언론과 인터넷 통제에 그치지 않고 학교 교육에서부터 당에 대한 충성을 세뇌시킨다. 대학마다 존재하는 공산당 학생 조직이 여론을 이끌고 중요한 당의 행사가 끝날 때마다 학습 열기를 퍼뜨린다. 시진핑 사상을 당장에 삽입한 19차 당 대회가 끝난 후 각 대학은 당 대회 보고 연구에 열을 올렸다. 당 조직뿐 아니라 일반 수업에서도 관련 과제를 내준다.

 

칭화대의 한 교수는 강단에서 헌법 수정에 대해 “개헌은 빅뉴스다. 그러나 토론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중국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뉴스인데 왜 논의하면 안되는 것일까. 

 

40년 전 시작된 과기대 영재반이 실패한 이유는 영재들에게 지워진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특기를 가진 영재가 아니라 중국에 빠른 발전을 가져다줄 영웅처럼 여겨졌다. 이들은 영재일 뿐 돌격대원이 아니었다. 중국 교육부는 2020년까지 의무교육 기간 중 영재반 전형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9년간은 모두 획일화된 교육을 받게 됐다. 이런 환경에서 중국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개진할 날이 올 수 있을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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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 제안을 수락하면서 ‘한반도 시계’는 더 빨라졌다. 트럼프는 사상 처음이 될 북·미 정상회담 결정을 스스로 “위대한 뉴스”라고 했다. 준비 부족 등으로 연기설이 나왔지만 지난 금요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5월 회담’을 재확인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회담 준비와 후속 조치를 주도할 국무장관으로 이동시켰다. 트럼프는 지금 자신감이 넘쳐 있다. 김정은을 만나기 위해 질주하고 있다. 무엇이 트럼프를 이토록 강렬하게 유혹한 것일까.

 

“트럼프의 사고방식에서 판단해야 한다. 자꾸 정상적인 상황을 갖고 판단하려는데 그렇지 않다. 트럼프는 남는 장사라고 하면 지른다. 얻는 것이 확실하면 주는 것도 확실하다. 비즈니스맨의 기본적 속성이다. 관료들의 실무적 접근과 많이 다르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봤다. 트럼프의 전격적인, 톱-다운 방식에 의한 북·미회담 결정은 “즉흥적”이라는 미국 조야의 우려를 낳았다. 미국의 지금까지 북핵 협상에서, 적성국가를 대하는 방식에서 보여줬던 방식과 절차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조지 W 부시 등 전임 행정부의 북핵 대응 방식을 비판했다. 북한과의 잘못된 합의로 허송세월하느라 핵·미사일 능력만 키워놓았다는 것이 트럼프의 인식이다. 그러면서 방치하지 않겠다, 직접 해결하겠다고 했다.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와 함께 공을 던지는데 받지 않을 수도 없다. 허언을 했다는 말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북·미 정상 담판론은 북핵 협상의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트럼프도 “그들(전직 대통령들)은 (김정은과) 만날 수 없었을 거다. 내가 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은 과연 비핵화를 할 것인가.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겠다는 것은 ‘그럴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트럼프는 의심이 많다. 참모들에게 지난 대선에서 자기를 찍었는지 대놓고 물어볼 정도다. 트럼프는 북한의 진정성을 어떻게 읽었을까. 교차 검증론이 있다. 북·미 접촉을 통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보고받았는데, 문재인 대통령과 얘기해보니 그 보고 내용과 다르지 않았고, 이는 남한 특사단이 김정은을 만난 결과와도 같았다는 것이다. 한국대표단 면담 45분 만에 김정은 제안을 수락한 것도 무턱대고 베팅을 한 게 아니라 적어도 3단계의 검증 절차를 거쳤다는 분석이다. 다만 과거와 유사한 수준의 합의가 성에 찰 리 없다.

 

국제 정치는 국내 정치 상황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트럼프의 집권 2년차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난 13일 펜실베이니아주 연방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졌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20%포인트 차로 압도했던 선거구였다. 지금 분위기라면 11월 중간선거는 암담하다. 야당이 다수당이 되면 남은 임기는 ‘식물 정부’가 될 터다. 트럼프의 연임은 언감생심이다. 한 전문가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요약하면 대통령답지 않다, 정부답지 않다는 것이다. 거꾸로 지금 트럼프에겐 대통령다움, 정부다움이 필요하다. 대통령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외교”라고 했다. 실제 취임 후 ‘국제질서 파괴자’로 비판받은 트럼프가 한반도 상황을 대결에서 대화로 물줄기를 바꿔놓자 칭송이 줄을 잇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찬사를 보낸다”고 했다.

 

김정은도 여유 부릴 처지는 아니다. ‘젊은 지도자’ 김정은이 장기 집권 체제를 확고히 다지려면 경제를 개선해야 한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일상화, 구조화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핵·경제 병진 노선을 주장하지만 핵을 머리에 이고 경제까지 챙길 수는 없다. 트럼프 임기가 1년밖에 안됐다는 것은 기회 요인이 된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인 2000년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됐지만 당시는 정권 말기였고, 대선 이후 흐지부지됐다.

북·미회담에 합의한 지 열흘 됐지만 둘 다 깊이 들어왔다. 이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판을 뒤엎기 어렵다. 이미 트랙 위에서 기차는 달리고 있다. 미국의 종착지는 북한의 비핵화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의 체제보장이다. 북·미의 최종 종착역은 서로 다르지만 한쪽이 빨리 간다고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니다. 둘이 동시에 도착해야 하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역이다.

 

문제는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사반세기 북핵 협상의 역사에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상황이 더 나빠졌다. 그만큼 난제라는 뜻이다. 북·미 정상이 만나서도 접점을 찾지 못한다? 두 사람의 정치적 타격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미래가 아득해진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안홍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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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장(CIA)을 지명했다.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외교수장을 전격 교체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적인 인사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트럼프는 당사자인 틸러슨에게 교체 사실을 통보하기 전 트위터로 이를 발표했다. 역사적인 담판을 앞둔 미국 정세에 이상기류가 흐르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달 13일(현지시간) 미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폼페이오 국장은 11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극을 하려고 이것(북미정상회담)을 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강조,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충분한 내부 논의 없이 '쇼'하듯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론을 반박했다. 폼페이오 국장은 이날 CBS방송에도 출연해 "이 행정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며, 이번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북한에 계속 압박을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AFP연합뉴스

 

트럼프는 “틸러슨과 여러 사안에서 의견이 달랐다”고 경질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회담을 코앞에 두고 외교총책임자를 바꿀 만한 이유로는 불충분하다. 예측불가 트럼프의 인사법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북핵의 외교적 해법을 선호한 틸러슨의 후임으로 지명된 폼페이오 국장이 대북 강경파라는 점도 신경이 쓰인다. 그는 북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 해법으로 줄곧 북한 정권교체나 군사적 옵션을 강조한 반면 대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모처럼 찾아온 북·미관계 개선 국면에 대화의 가치를 무시하는 외교수장이 등장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과 의견이 맞는 인사가 전면에 나서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힘 있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된 점은 긍정적인 요인이다. 북한과의 대화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복잡한 수싸움을 해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란 점에서 믿을 만한 참모가 필요했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 인선에 대해 “우리는 매우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것이 국무장관으로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폼페이오가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서훈 국정원장과 긴밀히 협의해온 사실을 들어 “환영할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현재로서는 국무장관 교체가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트럼프가 대북강경파 임명으로 대북 압박 효과를 노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북·미 협상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 전쟁 위기를 평화로 이끌 천재일우의 기회를 앞에 두고 있다. 예상치 못한 미 국무장관 교체가 한반도 평화의 흐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를 자극하는 섣부른 언행을 자제하고,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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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워싱턴의 반응이 재미있다. 정치권, 싱크탱크 전문가들, 언론들은 기대감보다는 걱정을 쏟아내고 있다. 백악관이 ‘코피작전’을 준비할 때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며 대화를 강조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정상회담 발표 후 뉴욕타임스는 ‘정말 엉망진창’이라고 평가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어떤 핵 양보도 없이 북한을 인정했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에 놀라워하던 언론들이 다음날에는 가짜뉴스가 됐다. 그들은 ‘그래서 뭐’ ‘누가 신경 쓰는데’라고 말한다”고 비판할 정도다.

 

워싱턴의 불안감을 이해는 할 수 있다. 너무 빠르다.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로 시작해서 대북특사단 파견, 남북정상회담 합의, 북·미 정상회담 추진으로 한 달여 만에 한반도 정세가 급변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이 70년에 걸쳐 추진해온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특사단과의 45분 면담에서 곧바로 결정됐다. 주도권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쥐고 있다. 상황 변화의 시작도, 이후 전개 과정도 그가 던진 카드를 따라왔다. 다음에 무슨 카드를 내밀며 관련국들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

 

북한에 당한 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역사적 합의들은 번번이 북한의 약속 위반으로 무산됐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트럼프 정부의 준비 부족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반도 외교라인은 텅 빈 상태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국무부를 “전멸 상태”라고 표현했다. 상황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북한이 쳐 놓은 덫에 스스로 빠지는 게 아닌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성공을 기대하기보다는 실패에 대비하라고 충고하는 전문가들은 한국에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변화를 선택할 시점이다. 지난 겨울 워싱턴의 화두는 한반도 위기론이었다. 전문가 세미나마다 대북 선제타격론이 거론됐고, 한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을 두고 확률 계산도 이어졌다. 한 공화당 의원의 입에서는 “죽어도 거기서(한반도에서) 죽는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까지 소개됐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한반도 전쟁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쟁 위험에 직면한 한국이나 핵미사일 사거리에 들어간 미국이나 더 이상 앞뒤를 재면서 앉아서 생각만 할 상황이 아니다.

 

북한의 행보가 과거와는 다르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위원장이 실제 핵을 포기하면서 안보와 경제에서 양보를 얻어내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의 1.5 트랙(반관반민) 대화를 해온 수전 디마지오 뉴아메리카재단 선임연구원은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기고에서 “북한 정권은 갈등을 피하고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한 자체 의제를 가지고 있다”면서 “그게 바로 트럼프가 김정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실제 남북정상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택하고, 중국을 제쳐두고 미국부터 만나겠다는 김 위원장의 행보는 기존 문법으로는 해석이 쉽지 않다. 판이 바뀌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될 수도 있다.

 

북핵 문제는 풀기 어렵다. 실타래처럼 얽혀 서로를 간섭하고 있는 이해와 불신을 하나씩 차례로 풀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엉킨 실타래를 끊어버리고 새 실을 바늘에 꿰는 게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최고 지도자의 결단이 정책 방향을 좌우하는 독재 정권과의 협상에서는 이 방식이 효율적일지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한 사상 첫 북·미 정상 간 담판이 그 모범 사례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 트럼프 정부가 할 일은 철저한 준비이고,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를 위한 충고와 제안을 해야 한다. 조태열 주유엔 한국대사의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표현에 적극 공감한다. “기회는 꼬리가 없어서 지나가면 뒤에서 잡을 수 없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에 동의와 기대를 보낸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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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연달아 알려지면서 한반도 안보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불과 1년 전 한국 내 사드 기습배치 문제로 어지럽기 그지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사태 반전이 놀랍다. 남북경협의 가장 큰 장애물인 정치적 긴장이 해소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남북경협으로 눈길이 쏠린다. 더구나 올해는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이 발표되면서 북방정책이 본격 추진되고 남북경협이 첫발을 뗀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한반도 정세의 해빙무드는 한국경제가 지긋지긋한 ‘안보절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임과 동시에 남북경협 복원을 위해 무척 다행스럽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풀려야 한다는 현실적 제약조건이 있지만 남북경협 재개 문제는 앞으로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랐던 남북경협의 싹을 다시 틔우고, 가꿔나가기 위해서는 ‘줄탁동시’의 지혜가 요구된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면 안에서 병아리가 두드리는 동시에 어미가 밖에서 알을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 어미가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 하며 동시(同時)에 이뤄져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남북경협에 적용한다면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북한의 노력과 한국의 대북지원 및 협력이 잘 맞아 돌아가야 남북경협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북한이 폐쇄적 경제체제임은 분명하나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에서 시장화가 진척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결과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를 보면 북한의 시장화는 ‘돈주’라 불리는 거대자본이 공장, 무역회사, 상점 등 여러 분야에 개입하면서 시장을 확대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뒤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외국자본유치를 추진했고, 나진·선봉 등 기존 5개 중앙급 경제특구 개발과 별개로 19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도 신설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 커티스 멜빈 연구원은 위성사진 판독을 통해 지난 2월 현재 북한의 공식적인 시장 숫자가 1년 동안 46개가 증가하면서 482개에 달한 것으로 분석했다. 시장화의 바람은 북한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이 내부에서 형성될 여지가 없는 북한으로서는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이나 한국의 도움을 받는 게 필요하다. 북한 지도부는 시장경제로 나아갈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를 외부로 보내야 한다. 이것이 북한의 줄이다.

 

한국의 탁은 무엇이어야 하나. 북한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협애한 시각에서 벗어나 개혁·개방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경제적 교류확대에 나서야 한다. 밖에서 두드려주지 않는다고 하면 북한 경제가 자생적으로 활로를 찾긴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수정부가 북한의 변화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고 남북경협의 소중한 싹을 밟아버린 것은 잘못된 일이다. 2003년 개성공단 착공으로 남북경협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지만 박근혜 정부가 2016년 개성공단 가동중단을 선택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재인 정부는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원칙하에 교류협력을 이끌어 온 양안(兩岸·중국과 대만)관계를 본보기로 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로의 가치와 삶의 방식은 존중돼야 한다는 양안의 안목은 한반도에도 유효하다. 양안관계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처음 열렸을 때 얼어붙어 있었다.

 

남북관계 개선에 자극을 받은 양안은 지속적으로 소통, 교류했고 결국 2010년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2016년 초 대만 독립파인 차이잉원(蔡英文)이 집권한 후에도 양안관계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이런 노력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통일에 대한 섣부른 기대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 북한을 흡수통일하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통일이 한국경제가 대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나 성급한 통일 대박론을 거론해선 득이 될 게 없다. 꾸준히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촉진시키고, 북한 주민들에게 마음을 얻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정치·안보 문제는 지도자의 결단에 따라 어느 날 거대한 진전을 이룰 수 있지만 경제는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긴 어렵다. 앞으로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가 돌출할 수도 있겠지만 남북 모두 정치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경협을 위한 의제발굴과 치밀한 준비에 나서야 한다.

 

<오관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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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을 12일부터 중국과 러시아, 일본에 파견해 방북 및 방미 결과를 설명한다. 정 실장은 12~13일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차례로 방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면담할 계획이다. 서훈 국정원장도 12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회담 성사 경과를 설명한다. 정 실장이 중·러 두 정상을 면담하지 못할 경우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이들과 전화 통화한다는 방침도 세워놓고 있다. 한반도 정세 진전에는 주변국의 지지가 필수적인 만큼 이들 국가에 정상회담 성사 경위와 취지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과제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후 청와대 관저 소회의실에서 대미특사 자격으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고 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의 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중국의 입장이 특히 중요하다. 중국은 남북 및 북·미 간 정상회담 성사에 환영을 표시했으나 내심 불만을 갖고 있을 수 있다. 북한과의 관계에 손상을 입으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제재에 동참했는데도 북한을 충분히 압박하지 않았다고 비판받아왔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미국이 중국을 건너뛰어 직접 북한을 상대하겠다고 나섰으니 한반도 문제에서 주변화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할 법하다. 이런 중국의 우려가 불식되지 않으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은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세계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면서 북한을 완충지대로 여기는 중국이 북·미 간 접근에 불안해한다면 양측 간 실질적인 관계 진전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북·중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는 해도 중국의 대북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북한이 비핵화 조건으로 내건 체제 안전보장 및 경제적 보상도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일본 또한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되는 것을 우려하는 눈치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사정권에 있는 자신을 배제하고 북·미가 정치적 타협을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남북 및 북·미 관계개선 움직임이 궁극적으로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해 일본이 동참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6자회담의 당사국인 러시아 역시 한반도 정세 진전에 소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북·미 정상회담 성사로 한반도 상황이 급진전하고 있지만 낙관하기는 이르다. 어떤 돌발변수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단단한 국제적 협력의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북·미 및 남북 관계개선에 대한 주변 강국의 협력은 향후 북한의 정상국가화 작업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작업에도 필수적이다. 정 실장과 서 원장 등 특사는 지난 5일부터 숨가쁘게 이어진 강행군에 피로가 누적됐겠지만 한반도 평화의 초석을 쌓는다는 각오로 주변국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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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3제국’ 시절인 1933년 아돌프 히틀러 총리와 폴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베를린 부근 포츠담에서 역사적인 악수를 했다. 이들의 의기투합으로 독일 군대와 나치즘이 손을 잡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됐다. 독일은 참담하게 패했다. 1945년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정상들은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포츠담에 모였다. 나치가 깃발을 올린 곳이 퇴출 결정의 장소가 된 것이다. 또 이 회담의 결정 사항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에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두 손을 들었다. 항복 조인식이 열린 곳은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이었다.

 

제주도. 경향신문 자료사진

 

동서냉전의 전환기인 1972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과 덩샤오핑 주석은 미국 워싱턴에서 만났다. 정권을 이어가며 양국 수도에서 만났다. 핵군축의 주역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서기장 간 회담 장소는 3국인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였다. 서로에게 부담되는 곳은 피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장소에 관심이 쏠린다. 국내에서는 비무장지대(DMZ)와 판문점, 제주도 등이 거론된다. 비무장지대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방한 때 가려 했으나 기상이 나빠져 포기했다. 판문점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장소로서의 상징성이 있다.

 

제주도.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주도는 김 위원장의 외가 쪽 고향이다. 북한에 감귤 보내기 운동으로 ‘평화의 섬’이란 이미지도 갖고 있다. 제주도는 도민들이 회담장 유치홍보에 나섰다. 국외의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꼽히는 스웨덴은 남북 수교국으로, 북한에서 미국의 영사업무를 대행해왔다. 방북했다가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송환을 위한 북·미 교섭도 스웨덴에서 열렸다. 스위스 제네바는 김 위원장이 유학한 곳이자 북·미 제네바합의가 성사된 장소다. 중국 베이징도 거론된다. 모두 북·미 양국과 역사적 인연이 있거나 평화의 상징이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역사적 장소가 된다. 세계 각국이 유치경쟁에 나선 이유다. 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가급적 한국에서 열렸으면 한다.

 

<박종성 논설위원 p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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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왔다. 자유무역협정 당사국들에 딴지 걸기로 시동을 걸더니 본격적으로 무역담장 높이기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미국의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설득력이 없고 거칠다. 대상은 적대국과 우방을 가리지 않았다. 고율관세로 인한 타격은 중국과 러시아보다 캐나다, 브라질, 한국, 멕시코 등 동맹국가들이 더 크다.

 

트럼프의 선전포고에 당사국들이 요동치는 것은 당연하다. 유럽연합은 보복조치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버번 위스키, 리바이스 청바지 등에 대한 관세를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로 나선다면 유럽연합도 미국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제품들에 대해 관세를 물려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인접국인 캐나다는 배신감에 떨고 있다. 트럼프는 유럽연합의 반발에 물러서지 않고, 유럽이 보복에 나서면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세금을 올리겠다고 한걸음 더 나갔다. “친구든 적이든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나라들로부터 속아왔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세계를 대상으로 한판 싸움을 벌이겠다는 뜻을 굳힌 것 같다.

 

취임 이후 트럼프의 경제정책의 모토는 ‘미국 제일주의’ 이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 나간 미국 기업에는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외국 기업들에는 미국에서 생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것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일으키겠다고 한다. 말을 듣지 않는 국가의 상품에 고율의 관세를 물리겠다며 협박하고 있다.

 

트럼프는 ‘자유무역주의를 신봉하면서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추구에 동참하는 이전의 미국’과 결별하고 있다. 이미 세계 각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한 바 있다. 미국은 고율관세라는 높은 성벽을 쌓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고립의 길로 나섰다. 보호무역이라는 깃발 아래에 유아독존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무역전쟁의 결과가 어떤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입증된 바 있다. 1922년 미국 워런 하딩 대통령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겠다며 외국 상품에 대해 38%에 달하는 세금을 매겼다. ‘포드니-매컴버 관세’다. 그러나 관세부과가 생산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상대국의 보복관세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이 됐다. 곧이어 대공황이 찾아왔다. 고관세는 대공황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대공황 기간 중인 1930년 더 강력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만들어졌다. 수입품에 대해 평균 59%, 최고 400%에 이르는 초고율의 관세가 골자다. 이를 통해 대공황 쇼크로부터 미국산업과 국민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멍청함과 탐욕에서 나온 끔찍하고 해로운 결과물’로 끝났다. 유능한 최고경영자 출신으로 훌륭한 경제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던 허버트 후버는 ‘부지런하고 머리가 나쁜 최악의 케이스’라는 혹평을 남겼다. 그 교훈은 자유무역의 확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무역기구가 탄생했다.

 

트럼프가 철강과 알루미늄을 첫 번째 타깃으로 정한 것은 장기간 침체에 있는 일리노이주 등 철강·자동차 산업중심지(러스트벨트) 주민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 제조업의 상징인 러스트벨트를 지원해 중간선거에 우위를 점하겠다는 속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철강산업에서 유효할지 모르나 세계무역의 위축을 가져오고 결국 빈손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에 미국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치열하다. 폴 라이언 미 하원의장은 공개성명을 통해 무역전쟁에 대한 우려를 넘어 당차원의 조치에 나서겠다고 경고할 정도다.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도 무역전쟁은 전 세계를 침체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라며 보복의 악순환이 현실화돼선 안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트럼프는 지난 70년간 자유무역을 통해 연결해 놓은 가치사슬을 끊고 있다. 이는 중국의 확장을 용인하는 것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2050년까지 중심이 되겠다는 일대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협력을 통한 연대의 확장으로 중국은 입지가 넓어지고 있다. 미국은 고립의 대가로 국제적인 입지위축과 성장동력 소실로 가는 길로 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은 경제 성장에서 수출이 64.5%를 차지할 정도로 수출의존도가 높다. 미·중·유럽연합은 수출액의 46%를 차지하는 주요 수출 대상이다. 작금의 상황은 선무당이 작두 타고 칼춤 추듯 아슬아슬하다. 넓고 길게 보고 위기를 넘겨야 할 때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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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 가능성 있는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 표명 등 한국 특사단의 방북 결과에 대해 트위터로 이 같은 입장을 보였다. 그는 또 “우리는 뭔가를 할 것”이라며 “필요한 어떤 길이라도 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북특사단 합의에 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머지않아 북·미대화가 열릴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북·미대화의 환경은 최근 한 달여 사이에 확 바뀌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과 미국 사이에 강경대치가 이어져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평창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면서 기류가 달라지더니 대북특사단을 만난 김 위원장의 대담하고 전향적인 입장 선회로 외견상 대화의 걸림돌은 제거된 상태다.

 

김 위원장은 대북특사단을 통해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며 이는 변함이 없다”면서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 이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북·미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아온 미국의 입장에 부합한다. 김 위원장은 또 대화가 지속되는 한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포함한 전략도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 역시 ‘북한이 일정기간 동안 전략도발을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이를 실천하면 대화한다’는 미국의 대화 조건에 들어맞는다.

 

여기에 대북특사단은 “김 위원장이 미국에만 전달해달라는 입장이 더 있다”고 밝혀 주목된다. 북·미대화는 물론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 큰 결단이 있음을 시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대화에 나설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과 진지한 대화를 할 준비가 됐느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북대화를 할 만한 인적·물적 여건이 구비돼 있지 않다.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대북접촉 경험과 안목을 갖춘 인물들은 실무에서 배제되거나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다. 오랫동안 대북접촉을 해온 조지프 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마저 최근 사임했다. 더구나 북·미 간 오랜 강경대치로 불신이 가득하고 6자회담 같은 대화틀도 마련돼 있지 않다. 대화준비를 가장 서둘러야 할 쪽은 미국이다.

 

미국은 북핵 문제의 최고 당사국 가운데 하나다. 남북이 어렵게 만들어준 떡을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 나라가 아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도 미국은 북·미대화의 여건을 조성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특사단의 김 위원장 면담 결과에 대해 남의 일처럼 논평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공은 미국에 넘어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공허한 원칙론에서 벗어나 한국과의 긴밀한 협의하에 구체적인 북핵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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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31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공동주택 ‘소셜하임’에서 화재로 40대부터 80대의 남녀 1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소셜하임’은 빈곤층의 자립을 지원하는 시설로, 입주자는 경제적으로 곤궁하거나 돌봐줄 친·인척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8월에는 아키타현 요코테시의 맨션 ‘가테야미나미초 하이츠’에서 화재가 발생해 50~70대 입주자 5명이 숨졌다. 사망자는 모두 중·고령의 독거 남성들이었다.

 

앞서 지난해 5월엔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의 맨션 ‘나카무라소’가 전소해 50~80대 6명이 숨졌다. 나카무라소는 임차료를 하루씩 내고 살 수 있는 곳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이나 생활보호를 신청한 노숙인들이 머무르는 장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3건의 화재에서 공통되는 것은 피해자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독거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모두 낡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소셜하임’은 원래 3층짜리 목조 여관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1층과 2층에 10㎡ 정도의 개인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이 빨리 번져 몸이 불편한 고령자들이 대피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소셜하임’ 참사 한 달여를 맞아 일본 언론들은 이번 사고가 ‘방재선진국’ 일본의 방재·피난 대책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셜하임’이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는 시설에 포함되지 않은 점을 들어 법의 ‘사각(死角)지대’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독거·빈곤 문제 등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배경으로 드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화재가 발생한 3곳은 모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독거노인이나 빈곤층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일본에선 2000년대 들어 비영리법인(NPO)을 중심으로 빈곤층의 생활보호자 신청을 지원하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복지 행정은 이들을 받아들일 곳을 정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열악한 주거 환경에 고액의 이용료를 징수하는 ‘빈곤 비즈니스’ 시설이 생겨나게 됐다. 행정 측도 빈곤층이 살 수 있는 공영주택을 줄여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NPO 등은 직접 건물을 확보해 빈곤층에게 거처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자금력에는 한계가 있어 활용할 수 있는 건물은 노후화된 목조 건물이 대다수였다.

 

일본에선 독거노인들이 집을 빌리기란 쉽지 않다. 집주인들이 ‘고독사’ 등을 우려해 집을 빌려주길 꺼리기 때문이다. 결국 재해에 가장 취약한 곳에, 재해에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가 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소셜하임’을 운영하는 업체 대표는 화재 직후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여력이 안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소셜하임’은 유료노인홈이나 무료저가숙박소에 해당되지 않아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었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 해도 수천만원의 비용이 든다. 지금까지의 ‘선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생활보호 급여자 2명 이상이 이용하고, 법적 지위가 없는 시설이 2015년 6월 현재 전국에 1236곳이 있다.

 

최근 일본에선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실내 동사(凍死)’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노인 고립과 빈곤 문제가 배경인 것으로 분석된다. ‘소셜하임’ 사고가 정부의 규제 강화로만 끝날 게 아니라, 노인·빈곤 문제 측면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소셜하임’ 사고 같은 화재 참사가 발생하면 여론은 떠들썩해지곤 한다. 하지만 빈곤 노인의 고독사에 대해선 그 정도 반응이 없는 것은 왜일까. 비단 일본에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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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은 전 세계 인구의 4.3%지만 전 세계 민간인이 가진 총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1968년 이후 미국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남북전쟁과 수많은 해외 참전에서 죽은 사람보다 많다. 비극적인 총기 난사 사고가 반복돼도 미국은 총기 규제로 좀체 나아가지 못했다. 총은 자기방어라는 미국적 신념의 결정체인 전미총기협회(NRA)는 너무도 거대했다.

 

그런 미국에 요즘 균열이 보인다. 지난달 14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한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로 17명이 숨진 후 일어난 총기 규제 여론은 종전과 좀 다르다. 총기를 규제하자고 외치다 거듭 좌절된 절박함이 임계점을 넘은 것일까. 총기를 규제하자고 하는 이들은 이제 ‘행동’하고 있다.

 

그 중심에 해시태그가 있다. 해시태그는 이제 ‘총기규제(#guncontrol)’를 넘어 ‘보이콧NRA(#boycottNRA)’로 진화했다. NRA에 투자하거나 NRA 회원에게 할인을 제공하거나 NRA의 홍보 채널을 가진 모든 연관기업이 보이콧 리스트에 올랐다.

 

‘#보이콧NRA’는 플로리다 총기 난사 사고 이틀 뒤 은퇴한 교장 주디스 피어슨이 트위터에 “내용 없는 애도에 신물이 난다. 이제는 (총기 난사의 주범인) 반자동 소총 AR-15를 불법화하고 이에 응하는 모든 이에게 상을 주자”고 제안하면서 해시태그를 단 것이 시작으로 꼽힌다. 여기에 사고에서 살아남은 10대들과 운동가들이 가세하면서 거대한 캠페인으로 번졌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 연방법원 앞에서 17일(현지시간) 학생들이 ‘돈이 내 친구들을 죽였다’ 등 팻말을 들고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입법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포트로더데일 _ 로이터연합뉴스

 

6년 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정치인들에게 NRA의 후원을 거절하라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아예 NRA의 돈줄을 끊겠다는 전략은 새로운 양상이다.

미국의 거대 민영은행 내셔널 뱅크 오브 오마하를 시작으로 델타항공,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트루카, 허츠, 에이비스, 알라모, 시만텍 등이 불매운동에 손을 들고 NRA와 연을 끊었다. NRA가 24시간 총기를 홍보하는 방송을 내보내는 TV 채널을 아마존에서 내리라는 청원에는 5일 현재 28만여명이 참여했다. 아마존이 계속 침묵하자 이들은 #보이콧아마존(BoycottAmazon)과 #가입취소아마존(CancelAmazon)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회원가입을 철회한 뒤 이를 인증하는 화면사진을 찍어 서로 공유하자, 모든 포스팅에 아마존 보이콧 해시태그를 달라는 주문은 구체적이다.

 

해시태그가 사회운동의 핵심 도구로 쓰이면서 ‘해시태그 행동주의’라는 말을 낳았다. 해시태그는 소셜미디어에 흩어진 목소리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준다. 내 목소리가 거대한 파도의 일부임을 느끼게 한다. 

 

#미투(MeToo)는 고립돼 있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줬고 #미퍼스트(MeFirst), #위드유(WithYou) 같은 공감으로 확산됐다. 인종차별적 공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흑인의생명도중요하다(BlackLivesMatter)’는 흑인의 분노를 거리로 불러냈다. 

 

하지만 해시태그 행동주의는 ‘소심하고 게으르다’는 비판도 받았다. 아무리 해시태그가 널리 퍼져도 실제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미셸 오바마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이 납치한 여학생들을 석방하라며 ‘#우리소녀들을돌려달라(BringBackOurGirls)’는 해시태그를 달고 수많은 사람이 리트윗을 해도 보코하람이 트위터를 보고 ‘아, 우리가 마음을 바꿔야겠다’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미투’의 종착점은 성폭력을 낳는 뿌리 깊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 ‘흑인의생명도중요하다’도 시위를 넘어 흑인을 차별하는 제도를 바꾸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NRA보이콧’이 총기 규제라는 미국의 수십년 묵은 과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면 소셜미디어와 현실의 무력한 괴리를 좁히는 중요한 사례로 기록될 것 같다.

 

<이인숙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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