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의 하얼빈 겨울을 견뎌온 장인어른에게 베이징의 추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날도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는 아내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볕이 좋다며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웃옷도 입지 않은 채였다.”

 

수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뒤흔든 글 ‘유행성 독감 아래 베이징의 중년’은 이렇게 시작된다. 장인이 감기가 든 ‘그날’부터 사위가 써내려 간 29일간의 기록이다. 공개된 지 3일 만에 8만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클릭 수는 2000만 건에 달한다.

 

콧물로 시작된 장인의 감기는 점점 심해져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 링거를 맞을 때만 해도 그저 심한 감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상태가 악화돼 큰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서야 유행성 독감 판정을 받았다. 장인은 중환자실에서 기관 삽관, 인공 폐 이식까지 했지만 결국 한 달도 안돼 지난달 24일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은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극한 슬픔을 묘사하지 않고 일기 형식으로 객관적 서술에만 충실하다. 이런 차가운 글이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기록 속에 드러난 중국 의료제도의 문제점 때문이다. 중국 의료보험은 전국적으로 통합 운영되지 않는다. 호적 주소지가 아닌 다른 지역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환자가 치료비를 우선 부담하고, 각종 서류를 챙겨 호적지에 신청해야 한다. 치료비를 지급받는 데 보통 1년쯤 걸린다.

 

글쓴이는 전형적인 베이징의 중산층이다. 금융계에 종사하는 그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저축액도 넉넉했지만 하루 350만원에 달하는 중환자실 비용을 계속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그가 느낀 고충에 환자와 환자 가족뿐 아니라 의료계, 법조계까지 공감하고 허술한 의료보험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추진해 온 의법치국은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다. 허술하고 모호한 법을 단단히 세우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보호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유행성 독감 아래 베이징의 중년’과 함께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글이 ‘신시대 장커우커우 열전’이다. 장커우커우는 실존 인물이다. 30대 퇴역군인인 그는 춘제 연휴 첫날인 15일 22년 전 어머니를 죽인 왕씨 부자 3명을 찾아가 살해했다. 두 집은 토지 경계 문제를 두고 싸움이 붙었고 그 과정에서 장커우커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왕씨의 셋째 아들이 살해범으로 지목됐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판결을 받았다. 엄중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살인범으로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왔지만 조사부터 판결까지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법으로 원한을 풀 수 없었던 장커우커우는 군에 입대해 특공무술을 배웠고 복수를 결행한 후 자수했다. ‘열전’에서는 장커우커우가 어머니의 죽음을 복수한 효자, 허술한 사법 체계에 항거해 악인을 단죄한 신시대 영웅으로 묘사돼 있다.

 

법을 근간으로 한 시진핑 신시대가 시작됐지만 법은 여전히 인민들의 편이 아니다. 제때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치료비까지 걱정해야 한다. 법의 심판이 허술해 개인이 징벌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도 중국 공산당은 의법치국을 내세워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3연임 제한을 규정한 헌법 규정 삭제에 나섰다. 언론들은 의법치국을 내세워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당의 영도에 따라야 한다’는 붉은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댓글은 차단되고 인터넷 방화벽은 높아졌다. 개정안이 통과될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에 맞춰 시 주석 업적을 찬양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대단하다 우리나라>가 개봉된다.

 

민중은 마음의 ‘독감’을 앓고 있는데 지도자들은 이상한 약만 처방하면서 권력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은 헌법에서 인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헌법 1장 2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마저도 바꿀 게 아니라면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Posted by KHross

문화·종교계 남성 인사들의 성폭력 전력을 폭로하는 증언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누가 더 충격적인지 경중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명제는 만고불변의 진리였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시기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이 권력을 행사해 여성에게 성적 관계를 강제하는 일은 지역과 문화를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이 시작된 미국을 포함해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도 일부 남성의 성의식 수준은 한국보다 나을 게 없다.

 

가장 최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유력 인사는 바너비 조이스 전 호주 부총리다. 조이스는 그의 공보 비서였던 여성과 내연 관계임이 보도된 데 이어 별도의 성폭력 의혹까지 받고 있다. 2주간 비판 여론이 들끓자 결국 그는 소속 국민당 대표직과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부총리가 일으킨 스캔들은 내각 조직문화에 대한 토론에 불을 댕겼다. 맬컴 턴불 호주 총리는 장관과 부하직원의 성관계를 금지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장관 윤리강령에 매우 분명하고 명백한 조항을 추가할 것”이라며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장관들은 직원과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간 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맡겨뒀던 사안을 윤리강령에 넣어 당 차원에서 관리하겠다는 얘기다.

 

총리가 이렇게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것은 정치인이 직원에게 성적인 관계 맺기를 요구하는 일이 그만큼 만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인과 부하직원 간에 사랑이 싹트는 상황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다수 직원들은 상급자의 심기를 거슬렀을 때 닥칠 불이익이 두려워 불쾌한 언행을 간신히 참아주고 있을 것이다.

 

정치인과 부하직원의 성적 관계라면 미국도 일가견이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당시 백악관 인턴이던 모니카 르윈스키의 염문이 대표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도 과거 그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여성들의 폭로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미국 의회는 호주보다 먼저 의원들과 직원 간 관계 단속에 나섰다. 이달 초 미 하원은 의원과 직원의 성적 관계 맺기를 금지하고, 의원이 성추행 등으로 송사에 휘말렸을 때 합의금을 세비가 아닌 사비로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정치권에도 경각심을 일으킨 셈이다. 결의안이 정식 발효되려면 상원의 표결과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이 필요하지만, 의회가 자정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은 평가할 만하다.

 

영국 의회도 미투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해 말 데이미언 그린 부총리가 성추문으로 낙마한 뒤 의회 내 성폭력조사위원회가 발족해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지난해 의회 직원 5명 중 1명이 성폭력을 당하거나 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조사위는 의원의 성폭력 사실이 확인될 경우 의원직을 박탈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린 전 부총리에게 성희롱당한 사실을 폭로한 칼럼니스트 케이트 말트비는 최근 일간 가디언 기고문에서 영국의 한 의원실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A의원 사무실에 들렀다가 25세 여성 직원을 발견한 B의원이 A의원에게 “자네가 갖지 않겠다면 내가 가져도 되겠느냐”고 공공연히 물었다는 얘기다.

 

말트비는 “의원들은 자신을 신이라고 여긴다”며 “그들은 하급 직원들과의 직업적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르쳐주지 않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 직원에게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는 게 어디 영국 의회만의 일일까. 한국 국회의원들의 성의식 수준이 미국이나 영국 의원들보다 높다는 근거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현재 문화·종교계에 번진 미투의 들불이 언제 정치권으로 옮겨붙을지 노심초사할 국회의원이 다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국제부 | 최희진 기자>

 

'경향 국제칼럼 > 기자메모, 기자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0) 2018.05.08
해시태그의 힘  (0) 2018.03.06
정치권 ‘미투’, 남의 일일까  (0) 2018.02.27
막말의 비용  (0) 2018.01.23
목욕을 생수로 해야 하는 도시  (0) 2017.11.30
가미카제와 쿠데타  (0) 2017.11.02
Posted by KHross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중국 헌법에 규정된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10년 임기를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헌법 개정안은 다음달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추인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시진핑 주석이 당초 임기인 2022년을 넘어 장기 집권할 수 있는 헌법상 근거가 마련된다. 26일 베이징에서 개막된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는 이런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논의한다. 

 

중국 상하이 거리에 26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왼쪽)과 마오쩌둥 전 주석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상하이 _ 로이터연합뉴스

 

국가주석 임기 제한이 사라지면 시진핑 주석은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시진핑은 집권 당시부터 후진타오 전 주석으로부터 당 총서기, 국가주석, 군사위원회 주석을 한꺼번에 물려받아 당·정·군 권력을 일거에 거머쥔 바 있다. 헌법 개정이 이뤄지면 시진핑 1인 체제가 15년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종신집권도 가능하다. 시진핑은 지난해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당 헌법에 삽입, ‘마오쩌둥 사상’에 버금가는 반열에 올리고, 후계자 지명도 하지 않음으로써 장기집권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시진핑의 권력강화 이유에 대해 중국 언론과 관변학자들의 설명은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고 안팎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안정적이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시진핑은 당대회에서 중국을 2050년까지 미국에 맞서는 세계적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제시했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중국의 번영과 미래를 위협할 수 있다.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중국을 장악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대오류를 범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 반성으로 구축된 집단지도체제를 ‘1인 체제’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어서 ‘역사적 퇴행’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의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정치적 슈퍼파워로 마오쩌둥 시대와는 비교조차 어렵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국제사회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웃국가인 중국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한국은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갈등을 통해 한국은 ‘중국이라는 숙명’의 존재감을 뼈저리게 겪은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핵심이익을 지켜가면서 변화하는 중국에 어떻게 슬기롭게 대응할 것인지를 깊이 모색해야 할 시기다.

 

Posted by KHross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

지난달 말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2차 개정협상에서 미국이 백화점식 요구를 쏟아냈다고 한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기업의 방어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참고인 교차신문권과 증거자료 접근권을 요구했다. 공정위로부터 특허권 갑질로 1조원대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퀄컴이 소송을 제기하자 이를 측면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또 디지털교역, 약가제도, 화학물질등록평가법 등 다양한 이슈를 테이블에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용기 에어포스원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런 태도는 자동차 부문에서 실익을 얻기 위한 성동격서식 협상 전술일 수 있지만 일련의 상황을 감안하면 무차별적 통상압박의 일환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미국은 세탁기·태양광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에 이어 무역확장법 232조를 꺼내 철강제품에 대한 고관세를 예고했다. 미 무역위원회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특허 침해를 조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반도체도 사정권에 들어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압력이 강화될수록 그에 비례해 미국 내에서 비판여론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판의 주체가 공화당 진영의 보수성향 경제학자와 언론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 철강 관세 폭탄 검토 등을 거론하며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무역을 무시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엊그제는 월스트리트저널이 2002년 당시 부시 행정부가 수입 철강제품에 고관세를 부과한 뒤 미국의 철강노동자보다 많은 20만명의 연계노동자가 실직한 점을 들어 고관세가 되레 미국 내 일자리를 더 많이 없앨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인 러스트벨트에 있는 디트로이트뉴스조차도 “보호무역이 미국 내 제조업자의 생산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물론 이런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극적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는 11월의 중간선거를 앞두고 일자리가 급한 상황을 감안하면 통상압력은 더 강화될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결국 한국 입장에서는 총력 대응하는 것 외에 뾰족한 방안이 없다. 현재로서는 세계무역기구 제소는 물론이고 같은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의 연대도 필수적이다. 미국에 양국 간 무역 실상을 정확히 알리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가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에 더 손해라는 설득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Posted by KHross

지금은 회사원들도 백팩을 메고 출근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백팩은 주로 등산용이나 여행용이었다. 198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이 본격화되던 무렵 백팩 차림의 대학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시엔 얇은 천으로 만든 꾸러미에 목을 죄는 끈이 달린 신발주머니 같은 ‘원시적’ 백팩도 있었는데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학교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책 한두 권 넣을 정도의 용량이면 충분한 데다 기동력이 있어 편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생, 회사원은 물론 국회의원, 고위 공직자, 대기업 총수들도 메고 다닐 정도로 백팩이 대중화됐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초등학생용 란도셀 같은 큼지막한 백팩에 자료와 책은 물론 치약·칫솔, 물티슈, 휴지 같은 비상용품까지 챙겨 다닌다. 김병관(민주당), 채이배(바른미래당) 의원도 ‘백팩파’다. 김동연 부총리,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도 백팩 차림으로 출근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백팩은 짐을 많이 넣을 수 있어 실용적인 데다 딱딱한 이미지의 서류가방과 달리 경쾌하고 활동적인 느낌을 준다. ‘탈권위’ 이미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달 초 연세대에서 열린 토론회에 자동차 시트를 재활용해 만든 백팩을 들고 참석했다. 사회적기업 모어댄이 만든 이 백팩은 인기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가 착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척추보호 기능을 갖추거나 물에 뜨는 ‘재난대비용’ 백팩이 등장하는 등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총기사고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미국에서 학생용 방탄백팩까지 등장했다는 소식이다. 매사추세츠주의 ‘불릿 블로커’사는 플로리다주 고교 총기 참극 다음날인 지난 15일 하루에만 500개의 ‘강화’ 백팩을 판매해 평소보다 30% 판매량이 급증했다. 이 강화 백팩의 소재는 나일론보다 가볍고 강도는 강철의 5배나 돼 방탄복 제작에 사용되는 ‘케블러’ 섬유다. 하지만 권총 탄환 정도만 막을 뿐 이번 참극에서 사용된 반자동소총은 막지 못한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방탄백팩이 아니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총기를 규제하는 법령일 것이다.

 

<서의동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지난 주말 가족들과 함께 집 근처의 영화관 AMC를 찾았다. <블랙팬서> 개봉 이틀째였다. 극장 입구부터 꽤 긴 줄이 있었다. 흑인 관객들이 유난히 많았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자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감격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여운을 즐기는 관객들도 많았다. 큰 극장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은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도 밖으로 나오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먼 곳까지 찾아가 <1987>을 본 후 감정의 정리가 어려웠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영화<블랙 팬서> 포스터.

최근 미국에서 <블랙팬서>가 열풍이다.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 와칸다를 배경으로 하는 흑인 히어로 영화다. 흑인 히어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에도 시드니 포이티어가 살인사건 전문 형사로 열연한 <밤의 열기 속으로>가 흑인들을 극장으로 몰려들게 했다. 하지만 이번 바람은 다르다는 게 미국 언론들의 평가다. <블랙팬서>는 미국 흑인 문화사의 분기점이 될 작품이란 평가도 나온다.

 

여배우 옥타비아 스펜서는 미시시피의 극장을 통째로 빌려 어린이들에게 단체관람을 시키고 있다. 사업가 로저 잭슨은 시카고에서 극장을 대여했다. 교회와 사업가, 시민운동가들도 단체관람을 진행 중이다. 애틀랜타 교외의 한 AMC에서는 개봉 당일 이 영화만 총 84회 상영됐다. 극장의 모든 스크린에 <블랙팬서>만 비춘 것이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에 따르면 흑인 74%가 이 영화를 볼 계획이라고 답했다. 온라인에서는 ‘블랙팬서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해시태그가 유행이다. 각종 흥행기록도 갈아치울 기세다.

 

<블랙팬서>는 미국 흑인들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영화인 듯하다. 19세 흑인 고등학생 오스틴 매시야는 CNN에서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와 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블랙팬서>는 그 수준에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은 19일(현지시간) 트위터에서 <블랙팬서> 팀을 격려하고 “당신들 덕분에 젊은이들이 마침내 극장에서 자신과 닮은 영웅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이 영화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 영웅이 될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와칸다는 아프리카의 에덴동산 같은 곳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유한 와칸다의 초원에서는 코뿔소와 스텔스 우주비행선이 공존한다.

 

블랙팬서라는 이름은 미국 흑인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1942년 구성된 흑인들만의 탱크부대가 사용한 별명이 바로 블랙팬서였다. 1966년에는 앨라배마의 유권자운동 단체가 상징으로 블랙팬서를 채택했고, 같은 해 오클랜드에서 경찰폭력 등 백인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결성된 조직이 ‘블랙팬서당’이었다. 이들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을 실패로 평가하고 주거, 교육, 시민권의 평등을 위한 혁명전쟁을 내세웠다. 

 

일각에서는 <블랙팬서>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운동이란 주장도 들린다. 언론인 자밀 스미스는 타임지 기고에서 “백인 이민배척주의자 운동에 의해 추동된 문화적, 정치적 퇴행의 한가운데에서 <블랙팬서>의 존재는 일종의 저항과도 같다”고 적었다. 다양성의 존중이 마치 자선인 것처럼 비치는 현실에서 <블랙팬서> 같은 영화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흑인들은 자부심을 일깨우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뒤틀린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블랙팬서>는 미국에 정착한 흑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비현실적인 동경을 담았다는 지적도 있는 게 현실이다. 영화 관람 말고도 수많은 저항의 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당장 흑인들의 대선 투표율은 오바마를 당선시킨 2012년에는 66.6%였지만, 2016년에는 59.6%로 떨어졌고 백인 우월주의자를 옹호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Posted by KHross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핵 관련 발언이 부쩍 줄었다. 최근 20일 동안의 북핵 언급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추가조치가 필요하다”는 지난 12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통화 발언이 전부다. 끊임없이 설화에 휘말리면서도 입놀림을 쉬지 않던 그의 갑작스러운 신중한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 큰 틀의 정책 변화를 앞두고 입조심한다는 인상이 든다.

 

김정은이 여동생 김여정을 특사로 남한에 파견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승부수다. 북한판 북핵 출구 전략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남한과 미국의 보수층은 위장 평화공세에 속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김정은의 카드가 너무 크고 무겁다. 지금 북한이 핵무기 대신 언어와 외교를 대외 정책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은 명백한 대화 신호다. 트럼프의 선택이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이 북한 삼지연 악단의 공연에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에게 북핵은 숙명이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미국 본토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핵문제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핵은 또한 그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한민족의 생존과 미국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위기이지만 해결한다면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트럼프에게 북핵이 제공하는 또 다른 기회를 잡으라고 권하고 싶다. 바로 노벨 평화상이다.

 

북핵이 왜 트럼프의 노벨 평화상 수상 기회가 되는가. 그것은 북핵이 노벨 평화상의 ‘메달밭’이기 때문이다. 45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지미 카터, 버락 오바마 등 4명이 노벨 평화상을 탔는데 이 중 북핵과 관련해 상을 탄 사람이 카터와 오바마 등 2명이나 된다. 북핵 문제가 심각할수록 미국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노벨상과 인연이 없었다. 평화에 대한 열망이 절실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기회가 주어진 탓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운이 좋다. 북핵은 전 세계적인 평화 이슈로 부각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평화파괴자’ 이미지의 트럼프에게 노벨 평화상이라니 가당치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이해한다. 이란 핵합의 파기, 인종차별적 이민정책 등 반평화적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패권국으로서 제공해야 할 국제 안보와 자유경제질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패권국 지위는 유지하려는 대외정책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의 일탈적 대외정책을 트럼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측면도 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시작된 미국의 쇠퇴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노벨 평화상 수상 자격 문제에도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루스벨트부터 보자.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아기곰을 살려준 ‘테디 베어’ 일화의 그 루스벨트가 맞지만 대외정책에서는 철저히 약육강식 논리를 신봉했다. 그의 수상 이유는 러일전쟁 뒷마무리 중재였지만 이는 사실상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묵인해준 것이었다. 만약 한국인들이 노벨상 심사에 관여할 수 있었다면 목숨 걸고 그의 수상을 반대했을 것이다.

 

윌슨 역시 노벨 평화상 취지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가로채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국제사회가 지원해 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안고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우다 스러진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면 그의 노벨상 수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노력을 평가받은 오바마 역시 ‘전략적 인내’ 대북정책으로 북핵을 사실상 방치했다. 사실 노벨 자신도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던 세계 최대의 무기상으로, 인류 평화를 거론할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더구나 트럼프는 임기가 3년 남은 현직 대통령이다. 앞으로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다.

 

트럼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려면 대전제가 필요하다. 반드시 평화적인 북핵 해결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평화상의 취지에 반한다. 그러자면 ‘힘을 통한 평화’ 같은 대외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 갑작스러운 노선 전환이 쉽지 않겠지만 이는 ‘미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대외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트럼프의 정치적 지지기반이나 성향을 고려할 때 그의 노벨 평화상 도전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성취나 업적은 망상적 도전에서 비롯된 경우가 적지 않다. 나라면 트럼프의 유독 강한 인정욕구와 명예욕에 걸겠다. 트럼프라고 노벨 평화상을 못 탈 이유가 없다. 마침 평창 올림픽 덕에 그 기회의 문도 열려 있다.

 

<조호연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일본인은 한국인을 그냥 자기 아래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아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그랬어요.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최근 저녁 자리에서 만난 재일동포 2세가 한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얘기까지 나오나 싶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70년 넘게 살아온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재일동포들이 겪은 일상적인 차별과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또 다른 재일동포는 “일본인의 ‘분풀이’ 대상이 일본 사회 내의 힘없는 사람, 특히 재일동포”라고 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남북 분단의 고통을 누구보다 절감해온 이들이다. 그래서 평창 동계올림픽의 의미는 남다른 듯했다. 본국에 평화와 통일의 불씨가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졌다. 하지만 한국과 평창 동계올림픽을 대하는 일본 사회의 야멸찬 시선에 대한 우려가 더 커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후 평창 블리스 힐 스테이트에서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현안에 대해 논의 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실제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 일부 언론 등 일본 사회의 대응은 편향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북한 핵·미사일 개발로 인한 일본의 위기감이나 대북 압박 정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적지 않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한 대응책이나 관련 언급들을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방한 전부터 아베 신조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조속한 실시를 요구할 것이라고 대놓고 공언했다. 일부 언론에선 ‘만일의 경우’라면서 평창을 노린 북한 미사일 공격을 버젓이 거론하는 등 올림픽 개막 직전까지도 위기론을 부채질했다. 한국 일부 보수단체의 시위를 반복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2일자에 북한 응원단이 쓴 남성 가면 논란을 보도하면서 아예 ‘김일성이 200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인터넷은 더 심하다. 유튜브에 ‘평창오륜’으로 검색해보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한국은 북한의 꼭두각시 나라고, 평창은 한국민들에게도 외면받아 당장 망할 것 같다. ‘헤이트스피치(차별·혐오 발언)’에 저촉되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한국 조롱’과 ‘혐한(嫌韓) 정서’가 넘쳐난다.

 

문제는 이런 퇴행적 인식들이 일부 누리꾼을 넘어 TV 방송과 출판 등 전체 미디어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일 후지TV에 나온 한 패널은 ‘오사카에 북한 테러리스트가 대량 잠복해 있어 위험하다’는 내용의 언급을 했다. 오사카에는 재일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사회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살펴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일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는 <영속패전론>에서 일본의 보수 세력들이 1945년 패전 뒤 미국에 깊이 굴복하는 반면,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아시아에서 온 힘을 다해 패전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뒤틀림이 일본과 주변국에 실질적인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어 파국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전후 70년이 지나도록 과거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역사·영토 왜곡 주장을 강화하고, ‘전쟁가능한 국가’를 향한 개헌을 서두르고 있다. 뭐든 트집을 잡아 ‘재일동포 탓’으로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상당수 일본인은 이에 무관심하다.

 

일본 TV의 와이드쇼 진행자는 올림픽 직전의 한국 사회 ‘혼란상’을 전하면서 “한국 사회의 폐색감(꽉 막힌 느낌)”을 원인으로 들었다. 최근 일본의 과도한 ‘한국 때리기’가  패전 이후 일본의 ‘뒤틀림’ ‘폐색감’의 분출이라고 한다면 편향적이라고 할 것인가.

 

<도쿄 | 김진우 특파원>

Posted by KHross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날, 외신은 문재인 대통령, 김여정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문 대통령과 김 부부장의 악수 장면은 긴급뉴스로 타전됐고, 개회식장 안팎에서 펜스 부통령과 김 부부장이 서로 외면하는 장면도 주요하게 다뤄졌다. 남북선수단 동시입장을 포함한 이날의 풍경은 “한 달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거기에는 엄중한 한반도 상황이 있다.

 

펜스 부통령과 김 부부장이 모두 돌아갔다. ‘평창 외교전’의 1라운드는 끝났다. 북한의 문 대통령 방북 요청은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주일 전 “평창 올림픽은 아주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후는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전개될지는 안갯속이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10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쇼트트랙 경기에서 펜스 미국 부통령과 쇼트트랙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강릉 _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요즘 미국의 대북 메시지가 ‘북핵 문제’보다 ‘북한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북한 문제는 북한 정권과 체제, 인권 등을 말하는데 북한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이를 주도하고 나섰다. 특히 올림픽 개막을 앞둔 상황에서 잇따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의회 국정연설에서 북한에 대해 “잔혹한 독재정권”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탈북자 지성호씨를 국정연설에 초대해 소개했고, 이튿날 백악관으로 탈북자들을 초청해 북한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펜스 부통령은 “북한의 올림픽 납치(hijacking)를 막겠다”며 한국에 와선 평택 해군 2함대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해 북한을 “감옥 국가”라고 맹비난했다. 펜스 부통령의 2박3일 언행은 그가 강경 보수 복음주의 기독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북 강경론자인 마이크 폼페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달 북한 핵개발이 미국으로부터의 체제보전용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남한을 통일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북한 문제와 북핵 문제를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다. 그러면 북핵이 아닌 북한 문제 해결로 방향을 잡았는지, ‘인류 평화의 제전’에 ‘불량국가’ 북한이 끼어드는 게 못마땅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현 상황에서 북한 문제를 우선순위에 올리면 북핵 논의의 초점을 흐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공동 제시한 ‘4노(No) 원칙(북한 정권 교체와 붕괴, 한반도 통일 가속화, 38선 이북 공격)’도 북한에 당면 과제는 체제가 아니라 핵·미사일이니 안심하고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는 의미다.

 

실제 핵·미사일 고도화의 속도로 보면 지금은 북핵에 매달려야 하는 시기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북한 핵·미사일의 본토 또는 미국령 공격 가능 시기를 “곧”이라고 하지 않았나. 북한 문제 해결을 앞세우면 북한의 도발을 만류하는 게 아니라 부추기려는 의도로 읽힐 우려도 있다. 종합적으로 북한과 대화할 생각 자체가 없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평창 올림픽을 북핵 대화의 모멘텀으로 만들겠다는 한국의 ‘평창 구상’도 힘겹게 한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거칠고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반면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자신감만큼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충만하다. “내가 처리하겠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하지만 상호 불신이 깊어 대화의 계기조차 만들지 못하는 게 현재 상황이다. 어렵게 만나도 다시 불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 게 그동안 북핵 협상의 역사다. 이 과정에서 북한 문제가 부각돼 상황이 꼬인 경우도 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인 2005년 북핵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채택하던 날이다. 9·19 공동성명은 포괄적·단계적 접근, 병행적 해결 원칙으로 북핵 논의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미국 수석대표는 마지막 발언에서 돌연 북한 인권문제, 테러리즘, 불법행위 등도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미국이 북한의 돈 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목한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제재로 북핵 논의는 미국이 ‘30일 내 BDA 문제 해결’을 약속한 2007년 2·13 합의 때까지 겉돌았다.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묘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지금 기술적 완성을 눈앞에 둔 북한의 핵 능력을 두고 무조건 협상이 만능일 수는 없다. 제재와 압박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없다. 대북 군사옵션도 함부로 쓸 수 있는 카드는 아니다. 북한을 선제 정밀타격하는 ‘코피 전략’은 미국 강경파조차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경고하자 백악관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고 한발 빼는 분위기다. 결국 제재와 협상을 병행하면서 국제사회의 힘을 모아야 하는데, 지금 논점은 북핵 문제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안홍욱 국제부장>

Posted by KHross

평창 동계올림픽을 축하하러 왔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방한 목적에 어긋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아베 총리는 9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니며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그 문제는 우리의 주권 문제이고 내정에 관한 문제”라며 “총리께서 직접 거론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반박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전 강원 용평 블리스힐스테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의 적절한 대처로 정상회담이 파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베의 발언이 부적절한 발언이며 도를 넘은 내정 간섭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북핵 문제가 일본에도 중요한 현안이지만 한·미 군사훈련은 어디까지나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일로 일본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남북대화의 진정성 역시 전적으로 한국이 판단할 일이다. 일본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주제넘는 참견에 불과하다. 일본은 10년 만에 재개된 남북대화가 영 반갑지 않은 것 같다.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유사사태 발생 시 한국에 체류하는 일본인의 대피와 안전확보에 대해 연대하자고 말한 것도 불편하다. 한국의 어려움을 돕기는커녕 자국 잇속만 챙긴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아베 총리의 외교적 결례는 이뿐 아니다. 지난 9일에는 문 대통령이 주재한 평창 올림픽 리셉션에 30여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는 올림픽 개회식에도 참석했지만 다른 하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낼 때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평창 올림픽을 축하하러 온 건지, 방해하러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속담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다. 한국의 운명이 걸린 북핵 위기 국면에서 아베 총리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한국인들이 똑똑히 지켜보고 기억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Posted by KHross

미국과 옛소련 간 냉전이 한창일 때 ‘둠스데이 머신(Doomsday Machine)’이라는 게 있었다. 핵전쟁으로, 말 그대로 인류 파멸의 날이 왔을 때 작동하게 만든 행동 프로그램이다. 예컨대 미국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쏴 옛소련을 궤멸시키면 옛소련의 둠스데이 머신 ‘죽음의 손(Dead Hand)’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남은 옛소련의 핵미사일이 미국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미국의 둠스데이 머신이 작동한다. 문제는 실제로 작동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1945년 8월 인류의 첫 원자폭탄 투하 이후 70여년간 둠스데이는 오지 않았다. 물론 아찔한 순간은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가 군비경쟁에 한창 열을 올리던 1983년 9월26일의 일이다. 옛소련의 핵 발사 관제센터 컴퓨터에서 미국이 ICBM을 발사했다는 경보가 울렸다. 옛소련 전역의 핵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관제센터 당직자의 냉철한 판단 덕분이었다. 실제 상황이 아닌 컴퓨터 오류로 판단했던 것이다. 인류 절멸을 몇 차례나 가져올 수 있는 핵폭탄을 보유한 상황에서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동안 둠스데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상호확증파괴(MAD)라는 억제전략 덕분이었다. 적이 핵 공격을 가할 경우 적의 미사일 등이 도달하기 전 또는 도달한 후 남아 있는 전력을 이용해 상대편도 전멸시키는 보복 핵 전략이다. 한마디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라면 핵 도발을 감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91년 냉전 종식은 둠스데이 악몽을 잊게 만든 사건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악몽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지난달 말 미 핵과학자회는 핵 위기 등에 따른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를 ‘자정 2분 전’으로 앞당겼다고 발표했다. 1947년 자정 7분 전에서 출발한 이후 지난해는 지구 종말에 가장 다가간 해였다. 미·소 간 수소폭탄 경쟁이 한창이던 1953년에도 자정 2분 전이었다. 핵과학자회는 역사의 시계가 64년 전으로 돌아간 이유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응 등을 댔다.

 

지난해 미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은 미국뿐 아니라 국제사회를 핵전쟁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트럼프의 북한 선제공격 위협을 비롯한 압박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럼프 스스로 둠스데이 가능성을 높인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8년 만에 발표한 핵 태세 검토보고서에서 소형 핵탄두 개발을 천명했다. 지난해에는 보유 핵탄두 숫자를 10배 늘리겠다고 한 바 있다. 미국발 신냉전이라는 분석이 틀린 말이 아니다. 각국의 군비경쟁을 부추겨 둠스데이 위기를 가속화할 게 뻔하다.

 

과거에도 북·미 사이에 현재 못지않은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 1968년 1월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969년 4월 미 해군 정찰기 피격 사건,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94년 1차 북핵 위기다. 운 좋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이성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점이다. 과거에 일어난 숱한 전쟁들이 그 증거다. 더욱이 컴퓨터의 오작동이나 인간의 사소한 실수가 둠스데이의 방아쇠가 될 개연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에 임하는 자세다. 북·미 간 긴장이 고조되던 지난해 10월 말, 미 상원의원 8명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는 북한 선제타격을 할 수 없는 법안을 제출했다. 미국의 핵무기 운용을 담당하는 존 하이튼 전략사령관은 11월 “트럼프의 불법적인 핵 명령은 거부하겠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에 따른 북한의 보복 공격으로 초래될 재앙적인 결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미국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트럼프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하는 실질적인 힘이다.

 

얼마 전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북한 선제공습 반대 결의안 채택”을 주장했다. 미국에서조차 전쟁 반대 목소리가 높은 마당에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만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평창 동계올림픽의 시작으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국회는 주저 말고 관련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쟁 위기 앞에 갈라진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 ‘전쟁은 결단코 반대한다’는 단호한 목소리만이 우리 위에 드리우고 있는 둠스데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조찬제 국제·기획에디터>

Posted by KHross

중국 장쯔다오(獐子島)의 가리비가 ‘또’ 사라졌다. 수산물 양식 전문기업인 장쯔다오는 지난주 업무 실적 보고에서 일부 해역에서 양식 가리비 재고 이상이 발견돼 최대 7억2000만위안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약 1246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상장 기업인 장쯔다오는 실종 관련 전과가 상당하다. 2014년 10월에는 100만여 미의 가리비가 한류(寒流) 영향으로 패사해 8억위안의 영업 손실을 냈다고 보고했다. 이듬해에도 160만 미의 가리비가 실종됐다고 신고했다. 대량의 가리비가 연이어 실종되는 사건으로 장쯔다오에 투자한 주주들은 애먼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가리비 실종 사건이 사기성이 짙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쯔다오와 같은 해역에서 양식하고 있는 다른 기업은 문제없이 가리비를 출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금을 받고 양식장에 가리비 종패를 파종하지 않거나 파종 규모를 실제보다 부풀렸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장쯔다오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는 점이 주주들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 2016년 1월 2000여명의 주주들은 2014년 발생한 가리비 100만 미 실종 책임을 물어 장쯔다오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인데 그사이 가리비 실종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다. 장쯔다오는 2006년 6월 선전 증시에 상장하면서 35개 펀드와 약 16곳의 기관투자를 유치했다. 4년 새 대규모 손실을 연이어 보고하면서 수산물 양식 전문기업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졌다. 신뢰도도 급전직하하고 있다.

 

중국 증시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기업 사기, 정부 규제 등이 중국 증시 투자 리스크를 높이는 ‘블랙스완’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당국의 증시 감시 감독도 도마에 올랐다. 반드시 감독기관이 나서 자연재해인지, 사기극인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기업의 일방적 통보로 수많은 주주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가리비 실종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진핑 정부 들어 반부패, 인터넷, 환경 등 각종 규제는 강화되는 추세다. 촘촘한 정부 규제망 속에서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IT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지금 중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스마트폰 게임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게임업체가 개발한 스마트폰 게임 ‘여행하는 개구리’는 일본보다 중국에서 더 뜨겁다. 내용이 단순하다. 개구리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여행을 떠나는 개구리에게 도시락, 부적, 필요한 준비물 등을 챙겨 줄 수 있다. 그러나 개구리는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예고 없이 갑자기 돌아올 수도 있다. 이용자는 여행을 떠난 개구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중국 매체에서는 이 단순 무료한 게임의 인기 비결로 인연을 강조하는 불교의 사상과 유사하다거나 복잡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을 치유해준다는 등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계기는 장쩌민 전 주석에 대한 향수다. 중국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장 전 주석을 ‘개구리’(혹은 두꺼비)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장 전 주석 재임 기간에 그의 외모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별명이었지만 최근에는 장 전 주석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내는 애칭이 됐다. 장 전 주석의 생일이 되면 소셜미디어에는 개구리 사진이 넘쳐난다. 장 전 주석 시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활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여행 간 개구리를 기다리는 게임에 빠졌다는 것이다.

 

시진핑 시대 들어서면서 강화된 규제는 가리비 실종조차 막지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 게임 속 여행 간 개구리를 기다리면서 장 전 주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현 정부에 대한 불만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경향 국제칼럼 > 박은경의 특파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재반 폐지와 ‘99.8%’  (0) 2018.03.21
독감 아래 베이징  (0) 2018.02.28
[특파원칼럼]가리비 실종 사건  (0) 2018.02.07
중식당의 대약진  (0) 2018.01.17
동거의 성공 조건  (0) 2017.12.28
온기 잃은 도시  (0) 2017.12.06
Posted by KHross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9년 4월 체코 프라하에서 “미국은 핵무기 없는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공헌하겠다”는 비전을 선언했다. 그해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핵 비확산 및 군축 정상회의’를 개최해 핵무기 폐기를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노벨위원회는 ‘핵무기 없는 세상’의 비전을 높이 평가해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오바마는 재임 기간 핵안보정상회의를 4차례 개최했고, 2015년 7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협력해 이란의 핵동결을 담은 ‘포괄적 공동행동 계획’ 타결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2016년 5월에는 원자폭탄 사용국 수반으로서 피폭지인 일본 히로시마를 71년 만에 방문해 원폭 희생자들을 추도했다. 물론 야당과 군부 등의 반대로 핵무기 감축노력이 기대에 못미쳤고, 러시아와의 핵무기 감축협상(New START) 역시 2014년 2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력합병으로 좌초했지만 국제사회에 던진 비핵화 메시지는 뚜렷했다.

 

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오바마의 핵정책을 180도 뒤집었다. 당선인 시절인 2016년 12월 트위터 계정에 “미국은 세계가 핵무기에 대한 분별력을 갖게 되는 시점까지는 핵 능력을 큰 폭으로 강화하고 확장해야 한다”며 핵 확장 정책을 예고했다. 미 국방부가 지난 2일(현지시간) 발표한 ‘핵 태세 검토 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보면 우려가 더 커진다. 적으로부터 핵 공격을 당하지 않더라도 핵무기를 선제 사용할 수 있고, 저강도·소형 핵무기 개발도 추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실제 사용하면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림의 떡’이 돼버린 핵무기를 사용 가능한 무기로 만들려는 것이다. 새로운 핵시대를 여는 불길한 신호 같다.

 

국제사회의 핵질서가 본래 핵 강국에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핵 태세 보고서는 기울기가 더 커질 가능성을 예고한다. 북한 핵은 용납할 수 없다고 초강경 대응을 하면서, 스스로는 핵무기를 쉽게 쓰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는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닐까.

 

<서의동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 2일(현지시간) 자신의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에 대해 “(북한을 향한) 전략적 인내의 시대는 끝났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하러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펜스 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설명하는 한 연설에서 이같이 말한 뒤 “우리는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역시 평창 개회식에 참석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올림픽 폐회 후 조속한 한·미 연합군사훈련 실시’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청할 것이라고 산케이신문이 4일 보도했다. 우방국을 대표해 올림픽 개막을 축하하러 온다면서 한국민들의 평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의 발언에 깊은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AP연합뉴스

 

한국 정부와 시민들은 지금 평창 올림픽을 통해 평화로 가는 문을 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펜스 부통령의 발언에는 이를 고려한 기미가 전혀 없다. 그저 과거 미 행정부처럼 거짓 대화 제스처에 속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으로 북한을 비판했을 뿐이다. 북한을 끌어낼 유인책이나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한 언급은 없이 ‘핵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의 완전한 폐기’만을 요구했다. 지금처럼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순간에 대안 없이 북한을 압박하는 발언처럼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이 없다.

 

아베 총리가 한·미 군사훈련에 대해 언급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다. 아무리 한·미·일 3국 공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일본은 이 문제에 관한한 당사자가 아니다. 올림픽 후 한·미 훈련을 재연기하지 못하게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라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묵과할 수 없는 도발적 행태이다. 올림픽 후 평화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될 수만 있다면, 군사훈련 연기가 아니라 중단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북 공조를 명분으로 이런 강경 입장을 내세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해결에서 이득을 보려는 것이라면 더더욱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처하는 한·미·일 3국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북한이 평창 올림픽을 선전의 장으로 활용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인정한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미 유엔에서 결의한 최고 수준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가동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 개막을 닷새 앞둔 시점에서까지 북한을 압박해 굴복시키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그 자체로 올림픽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이자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아베 총리와 펜스 부통령은 한국 정부가 자신들을 초청한 취지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두 사람이 7일 도쿄 회담에서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똑똑히 지켜보겠다.

 

Posted by KHross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빅터 차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의 주한 미국대사 내정을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아그레망(임명동의) 요청을 한국 정부가 승인까지 한 상태에서 내정 철회가 이뤄졌다면 극히 이례적이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의 30일(현지시간) 보도를 보면 차 내정자는 대북정책과 한·미 통상 이슈에서 트럼프 행정부와의 견해차가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 내정자는 지난해 12월 트럼프 행정부 일각에서 북한에 대한 제한적 정밀타격인 ‘코피 전략’을 검토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파기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전략에 대해서도 반대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DC에있는 하원 회의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북 강경파로 알려진 빅터 차를 그런 이유로 내정 철회한 것이 맞다면 대북 군사공격에 찬성하는 인사만 대사로 보내겠다는 것인지 우려스럽다. 1년 공석 중인 주한 미국대사 자리가 앞으로도 상당기간 채워지지 못하게 되는 것도 걱정이다. 서울과 워싱턴을 잇는 핵심 소통채널이 장기공백 상태에 빠진 것은 양국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 북핵 문제가 시급한 당면과제라며 연일 대북 발언을 쏟아내면서도 이 문제의 당사국이자 동맹국인 한국과는 소통창구도 완비하지 못한 트럼프 행정부의 책임이 무겁다.

 

트럼프는 이날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이란, 쿠바 등과 함께 적으로 규정하면서 최고의 대북압박을 통한 비핵화 의지를 강조했다. 트럼프는 “북한의 무모한 핵무기 추구가 우리의 본토를 위협할 수 있다”면서 “우리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과거 행정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연설에는 북한에 대한 군사옵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고강도의 대북 표현이 새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양보 없는 대북 강경기조를 재확인했다. 국정연설만 보면 트럼프의 대북인식은 북한이 ‘화성-15형’을 발사했던 지난해 11월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올 들어 2년 만에 재개되고 있는 남북대화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대화를 통해 북·미대화를 열어가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혀왔지만 동맹국의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인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이래서는 비핵화를 위한 한·미 공조가 원활히 이뤄질지도 걱정이지만, 무엇보다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한국을 동맹국으로서 존중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