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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10 ‘어쩌다 대통령’

요즘 미국 정가의 뜨거운 화제는 마이클 울프의 신간 <화염과 분노>다. 주변 인물들 인터뷰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전후를 생생하게 담았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트럼프 캠프의 누구도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는 점이다.

 

“대선 당일 저녁 8시를 넘기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예상 밖의 전망이 확정적으로 보일 때였다. 트럼프의 아들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라고 말했다. 멜라니아는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대선 승리 소식에 트럼프와 부인 멜라니아가 놀라는 대목이다. 유명해지고 싶었던 트럼프는 대선 일주일 전에 친구인 로저 에일스 전 폭스뉴스 사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꿈꿔왔던 것보다 더 강력하다. 져도 진 것이 아니다. 이만큼만 해도 우리가 이긴 것이다.”

 

트럼프는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 측은 “쓰레기 저자”의 “기괴한 소설”이라고 부정하지만 책의 내용은 신빙성이 높다. 실제 대선 당일 필자가 확인한 뉴욕 힐튼미드타운호텔에 마련된 트럼프 캠프의 분위기는 승리의 기대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캠프가 제이콥자비츠 컨벤션센터에서 대대적 승리 이벤트를 준비한 것과 너무나 대조됐다. 트럼프의 오랜 친구 크리스 루디 뉴스맥스 사장은 최근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어쩌다 대통령(accidental president)”이라 불렀다. 루디는 “그 말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대통령이 됐다. 우연한 상황의 연속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의 초반 1년이 왜 그렇게 혼란스러웠는지를 알 만하다. 대선에서 유명해지면 그만이었으니 집권 이후 구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길 생각이 없었으니 욕을 먹더라도 세금 내역을 공개할 이유는 없었다. 대선 승리 후 트럼프에게 기성 정치권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지, 그가 얼마나 큰 자신감을 갖게 됐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을 반대해온 공화당 주류가 발아래로 보이고, 포퓰리즘의 힘을 한껏 느꼈을 것이다. 줄곧 클린턴이 이긴다고 떠들던 주류 언론이 민심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가짜뉴스’ 공격에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국에는 유명한 ‘어쩌다 대통령’이 또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된 후 1945년 취임 4개월 만에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S 트루먼이다. A J 베임이 지난해에 출간한 <어쩌다 대통령: 해리 S. 트루먼과 세계를 바꾼 4개월>에 따르면 당시 한 백악관 출입기자는 트루먼을 “마치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뽑힌 것처럼 백악관에 들어온 남자”라고 묘사했다. 한반도 전쟁 위협, 핵전쟁 이야기도 두 사람의 겹치는 부분이다. 일본 원자폭탄 투하, 6·25 전쟁 파병이 트루먼 재임 시 이뤄졌다.

 

운으로 시작했다고 훌륭한 대통령이 못될 이유는 없다. 트루먼은 승계한 대통령직을 마친 후 재선에도 성공했고,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질서의 기틀을 다졌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이들이 모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도 못 채우고 쫓겨났다. 다만 트럼프에게서는 성공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는 게 비극이다. 트루먼은 취임 5개월 만에 지지율 87%를 찍었지만 트럼프는 1년이 지난 현재 정신건강 의혹까지 제기되며 30%대의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선거 캠페인과 통치는 다른 영역이고, 유명인과 훌륭한 정치인은 겹치는 게 아니며, 리얼리티쇼와 대통령직 수행은 달라야 한다는 게 증명됐다.

 

1년 만에 미국 사회에서는 반지성이 횡행하고, 가진 자들의 탐욕은 노골화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위대한 미국’의 시작이 아니라 미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