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북게임이 시작되었다. 운전석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이 앉았다. 운전자는 바뀌었어도 북·미대화로 가는 차로는 그대로다. 남북대화 현실화에 혼란스러워하던 트럼프도 이내 그것을 깨달았다. “두고보자”던 유보적 태도에서 이틀 뒤 “100% 지지한다”고 돌아선 것은 특유의 손익개념이 발동한 것이다. 과연 트럼프 ‘스럽다.’

 

사실 트럼프로서는 손해볼 게 없다. 어차피 북·미는 꽉 막혀 있다. 남북대화가 잘되면 북·미대화로 연결되지만 잘 안될 경우 책임은 대부분 문 대통령이 진다. 더구나 문 대통령은 남북대화 성사가 트럼프의 공로라며 한껏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걸 자랑하지 않을 트럼프가 아니다. 즉각 트윗에 “내가 확고하고, 강력하고, 북한에 대해 모든 ‘힘’을 쓸 의지를 보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남북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글을 올렸다. 불과 몇 주일 전만 해도 남북대화에 냉소적이던 그 트럼프가 맞나 싶지만 이게 트럼프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남북 고위급 회담은 남북의 운명이 걸린 중대하고 소중한 기회이다. 항간에서 회자되는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회담인 건 맞다. 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문 대통령은 운전석에서 내려와야 한다. 남북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잃은 채 강대국들의 손에 미래를 맡기는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변덕스러운 트럼프는 남북대화를 지지하고 힘을 실어준 유용한 존재에서 언제 다시 한반도 평화를 흔드는 위험한 인물로 표변할지 모른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동맹은 약화되고 그 반대면 강화되는 식이다. 이것이 나쁜 이유는 정치 선동과 음모의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개선 시도를 동맹 이간책으로 몰아가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수용돼 여론화되는 것이다. 이번 남북대화 성사 과정에서도 이런 병폐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회담 성사에 많은 것을 걸어야 했다. 미국의 의심을 감수하면서 ‘3불 정책’과 한반도 전쟁 반대, 한·미군사훈련 연기를 주장했다. 한반도 긴장완화와 북한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지만 미국의 전략과는 배치되는 사안들이다. 하위 동맹인 한국으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다. 문 대통령 개인도 대가를 치렀다. 근육 자랑을 하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끼인 채 미국으로부터는 추종을 강요당하고, 북한으로부터 냉대당하면서 진정성 하나로 버텨냈다. ‘항우의 가랑이 밑을 긴 한신’으로 비유되기까지 했다. 만에 하나 고위급 회담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이 모든 것은 허사가 돼 버릴 것이다. 남북대화는 김 위원장의 신년사가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문재인 정부의 회담 환경 조성 노력이 없었다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남북 고위급 회담은 일정한 성과를 담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를 시사하고 한반도 평화와 다방면의 남북 접촉·왕래를 장담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회담을 수락하는 전통문에서 “남북관계 개선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불안한 구석도 많다. 예컨대 김 위원장이 거론한 ‘조선반도의 평화적 환경과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가 ‘한·미군사훈련과 미국의 전략무기 한반도 전개 영구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의구심이 존재한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지만 당장 시행할 환경은 전혀 조성돼 있지 않다. 북측이 이를 남측에 수용하라고 강하게 요구할 경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패를 쥔 것은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남북대화는 북한의 에어포켓이나 다름없다. 고립된 북한이 국제사회와 연결된 유일한 출입문이자 생존공간이기 때문이다. 남북 고위급 회담은 남측보다 북측에 훨씬 더 소중하다. 남북대화에서 패를 쥔 쪽이 유리하고 반대쪽은 불리하다고 여기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대북 게임의 운전석에 앉은 것은 문 대통령만이 아니다. 운전을 잘못하면 김 위원장은 트럼프와 만나야 한다. 더 위험하고 험난할 것이다. 김 위원장은 모든 것을 걸고 핵개발을 해왔지만 이번 회담에도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남북은 2000년대 초반 10년 동안 남북화해·협력의 길을 함께 걸었다. 당시 김대중·노무현-김정일 그룹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대로를 닦는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김정은 그룹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족적을 따라가면 되는 일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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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핵무기는 보유만 하면 적에 대한 억지력이 확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선제공격을 당한 쪽이 무조건 지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개념이 깨졌다. 일단 상대의 공격을 견뎌낸 후 응징 보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핵전략인‘장성(長城)전략’도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핵 공격 능력은 최소화한 채 1차 핵공격을 감내하고 나서 2차 반격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휘부와 핵무기를 쏘아올릴 미사일을 1차 공격에서 온전히 보존하는 게 필수가 되었다.

 

핵 전쟁 시 미국 지휘부가 머물러 ‘지하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 펜실베이니아주 레이븐록 지하 벙커의 입구

 

지하 벙커가 등장한 이유다. 최근 유사시 중국의 지도부가 대피하는 지하 핵시설이 공개됐다. 지하 벙커는 지도부들이 집단 거주하는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시산(西山) 국립공원 내 지하 2㎞ 깊이에 있다. 이 벙커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화제가 됐다. 자그마치 100만명 이상에게 식수를 공급할 수 있다. 왠만한 도시 하나가 벙커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5월 소림사가 있는 쑹산 일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설과 반격훈련 장면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중국 CCTV는 중국군이 이곳에서 한달동안 밀폐된 채 2차 반격 훈련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 역시 지하 1㎞ 깊이에 총 길이가 5000여㎞에 달해 ‘지하 만리장성’으로 불린다. 중국의 핵전략 중 방어와 공격을 수행하는 두 핵심시설이 공개된 셈이다.

세계 최강의 핵무기 국가인 미국도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핵전쟁에 대비해 수도인 워싱턴 DC인 펜실베이니아주 레이븐록산과 버지니아주 웨더산 지하에 지휘벙커를, 콜로라도주 샤이엔산에 미사일 시설을 두고 있다.‘지하 펜타곤’으로 불리는 레이븐록 벙커는 워싱턴 DC 북서쪽에 있는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인접해 있다. 백악관에서 캠프 데이비드까지는 약 100㎞, 웨더 벙커까지는 70여㎞ 떨어져 있는데 유사시 대통령은 이 둘 중 한 곳으로 가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지난 2001년 9·11 공격이 벌어졌을 때 딕 체니 부통령은 백악관 벙커에서 상황을 보다 하원의장과 장관들에게 헬기 편으로 웨더 벙커로 가라고 지시했다. 웨더 벙커를 전쟁 지휘소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에 있었다.) 만약 당시 부시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 있었다면 레이븐록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핵 벙커 설치를 주도하는 것은 기업과 민간인들이다. 핵 전쟁이 나면 정부가 주요 인사와 필수 인원만 벙커로 데려가 보호하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개인 벙커를 마련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 저명인사들까지 저택 지하에 벙커를 설치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면서 한 업체는 매출액이 5배까지 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민간 벙커 설치가 유행했다.

 

레이븐록 벙커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필수 기능만 갖춘 것에서 호화판까지 벙커도 각양각색이다. 창사 36년만에 최고 매출을 기록한 LA의‘아틀라스 서바이벌 셸터스’는 2만(약 2200만원)∼16만5천달러(1억8천만원)짜리 벙커를 제작하고 있다.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확보하고, 저장고에 음식과 물을 챙겨놔 6개월에서 1년간 생활이 가능하다. 캔자스주에는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콘도형 벙커가 있는데, 지하 15층에 각 층이 50평 넓이로 침실과 거실, 주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헬스장은 물론 영화관과 수영장, 스파에 심지어 무기고까지 있다. 채소를 가꿀 비닐하우스도 있어 75명 전체 입주민이 5년 남짓 생활할 수 있다. 한 개 층 가격이 400만달러(44억원)다. 최근엔 5성급 호텔과 맞먹는 초호화판 벙커까지 나왔다. 한 채 분양가가 1750만달러(약 19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어떤 시설을 갖췄는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미 조지아주에서 분양되고 있는 5성 호텔급 초호화 지하벙커. 한 채 분양가가 190억원으로 제시됐다


미·소 냉전이 종식된 후 핵무기 무용론이 득세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소련 대신 중국이 부상해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북한의 핵개발이 겹치면서 다시 핵 대결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해 자기 핵 단추가 더 크다고 자랑할 즈음 중국이 대규모 벙커를 공개하자 냉전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유사시 벙커에 들어갈 중국인 100만명과 미국의 부유한 시민 수십만명은 전체 인구의 0.1%에 해당한다. 이들만 벙커에서 생존한다면 핵 전쟁에서 이겨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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