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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 천황 방한설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 그것도 일본이 아니라 교착상태에 있는 한·일관계를 풀기 위한 초대형 카드로 정부·여당의 지일파들이 물밑에서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몇 차례 “천황의 방한이 실현되면 양국관계의 발전을 위해 큰 계기가 된다고 평가”했다. 이수훈 주일대사도 천황 방한에 대해 “한·일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라고 기대한다.

 

198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방일 이래 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일본 천황 방한을 한·일 간의 현안을 해결하는 특효약처럼 매달려 왔지만, 천황의 방한이 정말 한·일 간의 현안을 해결하는 특효약이 될 수 있을까?

 

조선이 천황 개인의 소유물이었던 일제하에서도, 해방 후에도 천황 방한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열화와 같은 민족적 저항이 있어 조선에 왔다가는 안전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해방 후에도 천황에 대한 민족적 분노와 원한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측에서도 우익들이 천황이 위해나 수모를 당할까봐 방한에 반대해왔다. 거기에는 지엄한 천황이라는 신격화와 일본인의 반한·혐한 감정이 개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화한다면 천황 방한의 가능성은 한·일 간의 역사청산 수준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다.

 

한·일 간 갈등의 근본원인은 일본의 한국병합조약이 적법하다는 일본 측의 인식에 있다. 식민지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권국가로서 대등한 국교를 수립하고자 하는 취지의 한일조약에서 “병합조약은 이제 무효”라는 어구로 한국병합의 불법성을 호도하려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는 배상금도 보상금도 아닌 국교정상화 축의금으로 유·무상 5억달러를 받아 일본의 식민지 지배 범죄를 면책했다. 일본은 그렇게 부정·불의하게 만들어진 조약이 날개를 달자 그 후 반세기에 걸쳐 세상을 누비고 왔으며, 악질 고리업자처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너희가 도장 찍지 않았느냐”며 낡은 증서를 끄집어 낸다. 쓰러져가는 박근혜 정부가 민의의 수렴도, 합의문의 공개도, 국회의 비준도 없이 외교장관의 구두 발표로 합의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12·28 합의와 그 구도가 똑같다.

 

그런데 촛불정권 들어서도 누가 봐도 부당한 합의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외교적 합의라고 주장하는 아베 정부에 정면으로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하고, 무슨 TF를 만들어 검토하니 하면서, ‘합의’가 불법적이고, 문제의 봉쇄를 위한 것이라는 근본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무슨 ‘소통 부족’이니 하면서, 우리 국민의 눈치를 살피며 합의의 무효화와 재협상을 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역사문제니 인권문제보다 외교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한·일 셔틀 정상회담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겠다.

 

한·일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아베 정권의 행태이다. 아베는 일본제국주의의 범죄를 인정치 않고, 그 영광의 부활을 꿈꾸는 자로서 과거 청산에 대한 의지는 추호도 없고,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대한 민족적 우월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 천황 방한을 추진하려는 지일파들의 심정과 논리는 무엇인가?

 

우선 일본 국민의 호감도가 80%를 넘는 천황이 방한한다면 혐한·반한에 찌든 일본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대폭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혐한·반한적 태도를 키우는 아베 정부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것이지 천황의 인기에 기대어 일본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는 심산은 너무 저열하다.

 

‘지일파’ 정치인이나 한국 언론은 아키히토 천황을 ‘평화주의자’이며, ‘호헌파’라고 치켜세우고, 환상을 뿌리고 있다. 물론 아키히토가 교활한 아버지 히로히토보다 착할 수도 있으며, 성품도 야비한 아베보다 온화할 수 있다. 지난 10월, 1300여년 전 고구려에서 유래된 사이타마(埼玉)현의 고마(高麗)신사를 방문했으며, 2001년 기자회견에서 “나로서는 간무(桓武天皇)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데에, 한국하고의 인연을 느낍니다”라고 천황가의 뿌리에 대해서 언급한 점, 2019년 4월30일로 예정된 퇴위를 앞두고 방한을 못다 한 과업으로 유념하고 있다고 말한 점 등을 들어 아키히토가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흐뭇해하는 정치인·언론인도 많다. 아키히토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오키나와, 태평양의 섬에까지 해마다 전쟁 희생자에 대한 위령 순례를 지속하면서, 일본 국민의 호감도를 높이고 있다. 1991년 동남아 국가를 대상으로 과거사 사죄 순방을 한 바 있고, 1992년 10월23일 일본 천황 중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해 “중국 국민에게 심대한 고난을 준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면서 중일전쟁 등 과거사를 사죄한 바 있다.

 

그러나 천황이 한반도의 핏줄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우쭐댈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희생자를 낸 천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다. 천황이 위문 순례를 하는 것도 그 책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며, 제국시대에 천황이 자기의 위세와 인자함을 과시하기 위해 한센 병원이나 고아원, 고도·벽지를 순시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일본에서 평화문제나 헌법문제가 나올 때 어쩌다가 나오는 천황의 말 한마디에 여론이 요동친다는 점이다.

 

2006년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종전의날(8월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다고 했을 때 아키히토는 천황의 시종인 도미타의 메모를 누설하여 불쾌감을 나타냈다. 그것으로 고이즈미의 참배를 막지는 못했으나, 일본 여론에서 천황이 민주주의자고 평화주의자라는 호감도가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천황의 선정에 기대어 그 날개 밑에서 숨쉬는 일본의 평화나 민주주의를 ‘천황제 평화주의’니, ‘천황제 민주주의’니 하고 비꼬기도 한다.

천황은 수천만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범으로 단죄되어야 했음에도 미국의 패권전략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일본 헌법에서는 신의 지위에서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으로 내려왔고, “헌법에 정해진 일정한 국사행위(國事行爲) 이외 국정(國政)에 관한 권리의 주장과 행사는 불가하다”(동 제4조)라고 규제되어 있다. 그럼에도 일본 천황은 은연중에 정치에 개입해왔다.

 

한·일 간의 적폐청산은 어디까지나 현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훗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 하물며 ‘천황제 한·일 화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일파의 업적 만들기에 끌려서 천황 방한을 서둘러서는 안된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Posted by KHross

“이제 미국과 중국은 북한 체제 붕괴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할 때가 됐다. 그런 대화가 이뤄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이 이 같은 현실이 도래했음을 인정해야 하고, 미·중이 이런 논의를 한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몰라야 한다.”

 

미 행정부 고위 관리를 지낸 아시아 전문가가 2013년 초 사석에서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했던 말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갑작스러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3대 권력세습이 이뤄져 정권의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은 강경 보수 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렸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피벗(회귀)’을 내세우며 집권 2기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북한 체제가 정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과 ‘북한 붕괴’를 상정한 논의를 회피했다. 미국도 동맹국이자 북한 문제 당사국인 한국이 미·중 간의 이 같은 논의를 지켜보기만 하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했다.

 

4년 반이 지난 현재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2일 애틀랜틱카운슬 주최 토론회에서 중국 고위 관계자들과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고 매우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중국과 (북한의) 핵무기 확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이 이미 준비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공개하고 “(미·중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진입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할 것을 중국에 약속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이처럼 민감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중국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급변사태 논의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 역시 동맹국을 배려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북핵 문제를 급박한 안보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이미 한·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북한과 중국 역시 더 이상 북핵 문제에 대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급변 사태 가능성은 1990년대부터 북한 정권이 취약성을 보일 때마다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기반이 공고해지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할 정도로 북한 정권이 안정돼 있는 지금 미·중이 함께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대비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 인위적으로 그와 같은 사태를 만들어 갈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미·중이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핵으로 무장한 북한 정권의 붕괴는 한국에는 혼돈 그 자체다. 더구나 지금 상태라면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미·중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중은 군사작전을 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자세한 행동규범을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핵무기 관련 문제에 관여할 수 없으며 전시작전통제권도 없다. 난민·국경·식량 등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한꺼번에 떠안아야 한다.

 

그동안 북한의 급변사태와 정권 붕괴는 곧 ‘한반도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 문제가 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된다면 상황은 다르다. 틸러슨 장관 말대로 북한 핵무기가 확보된 이후 주한미군이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하고 북한에 친중정권이 수립되면 중국은 여전히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를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은 더 이상 안보를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미·중은 실리를 얻고 타협할 수 있지만 한국은 북한 급변사태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평화가 얻어진다 해도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가 아니라 ‘분단 영구화를 위한 평화’가 될 수밖에 없다.

 

틸러슨 장관 발언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미래에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로 인해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북핵 문제는 기존의 판을 모두 걷어치우고 새로 깔아야 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패턴화된 대응, 진영논리에 기초한 접근법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북핵문제가 여기에 이른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

요즘 중국에서는 항저우에 사는 60대 부부의 ‘동거’가 뜨거운 화제다.

 

교사였던 왕 여사와 공장 책임자로 일하던 남편은 은퇴 후 3층짜리 전원주택에서 생활해왔다. 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채소를 심을 텃밭도 있다. 여유로운 삶이지만 이들 부부는 자주 외로웠다고 한다. 자녀들이 직장일로 바빠 자주 찾아오질 않으니 큰 집은 썰렁하게만 느껴졌다.

 

왕 여사 부부는 지난 7월부터 처지가 비슷한 5쌍의 노년 부부와 할머니 등 13인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최연소 막내가 62세, 최고령이 77세인 이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재미있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의 특별한 동거가 보도된 후 ‘가장 이상적인 노년 생활’로 세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중국에서 ‘바오퇀(抱團) 양로’라고 부르는 노인 공동거주 형태가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2008년 허베이 한단시의 한 시골마을에서 ‘서로 돕는 행복한 마을(互助幸福院)’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고, 2014년에는 산둥성 옌타이시가 바오퇀 양로 시범 도시로 지정됐다. 그러나 ‘첫 성공’이라는 타이틀은 왕 여사 부부가 차지했다.

 

성공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두루 필요했다. 이들이 사는 방에는 각각 화장실이 딸려 있어 독립된 생활이 보장된다. 13인의 동거인들은 의사, 노동자, 목수, 통신 분야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가사 분담이 가능하다. 사생활이 보호되면서도 서로 돕는, ‘각자 또 같이’ 생활이 가능하다.

 

중국에는 ‘한 가족이 아니면 한 대문을 쓰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피붙이가 아니면 같이 살지 말라는 뜻이다. 성격, 입맛, 가치관이 다르니 함께 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들은 “자녀 문제 등 각 집안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식비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짜에 납부한다” 등의 내용이 포함된 계약서를 작성했다.

 

또 다른 성공 요인은 취미 공유다. 입주한 동거인들은 모두 마작을 즐긴다. 공동의 취미이다 보니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이가 없다. 왕 여사는 행복한 동거를 위해 그동안 20쌍이 넘는 노인 부부들을 면접 봤다고 한다.

 

중국은 부유해지기도 전에 노령화 사회에 접어든(未富先老) 나라다. 60세 이상 노인인구가 2억3000만명을 넘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10월 19차 당 대회 보고에서 인구 노령화와 관련해 양로, 경로 대책의 시급성을 언급했다.

 

사회보장제도가 갖춰져 있긴 하지만 빠른 고령화로 연금을 납부할 인구는 줄고 받아갈 노령인구는 급격히 늘고 있다. 기금 규모를 늘리기 위해 중국 정부는 올해부터 7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실행 중이다.

 

당국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 중국 현실을 따라잡기는 힘들다. 중국은 때때로 아래로부터 대안을 찾았다.

 

1978년 11월 안후이성 샤오강촌 시골마을의 비밀 계약이 대표적이다. 이 마을의 18가구는 국가 소유의 경작지를 나눠 가구별로 생산 책임을 지기로 약속했다. 일정량은 국가에 납부하고 여분은 각 가구가 나눠 가졌다. 당시 분위기에선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사형까지 가능한 위험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이 실험으로 생산량이 5배 이상 늘어나고, 정부 당국이 이를 추인하면서 개혁·개방 초기 농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다바오간(大包幹) 제도가 싹텄다. 그렇게 시작 발전된 개혁·개방이 내년에 40주년을 맞는다.

 

왕 여사 부부의 동거 실험은 반 년밖에 되지 않았다. 구성원도 60대에서 70대로 젊은 편이라 앞으로 문제점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빠르게 나이들어가는 중국에서 의미 있는 대안으로 지켜볼 만하다.

 

<박은경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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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전혀 과도하지 않았던 2017년이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촛불시민혁명이 만들어낸 기적의 기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면서도 이후 일어난 수많은 일들이 만들어낸 두께로 인해 마치 수년이 흘러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주저앉아버렸던 나라는 모든 것이 어려웠고, 또 그래서 모든 것에 희망을 걸게 했다. 역사가 늘 그랬듯이 희망은 시간의 흐름과 반비례하며 작아진다. 소수의 주동자들과 앞잡이들은 법의 심판을 받고 있지만 수많은 공모자들은 겁을 먹었다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뻔뻔해졌다. 반성하지 않고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바로잡으려는 노력들을 사사로운 복수나 세상물정 모르는 아마추어리즘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전혀 낯설지 않다.

 

한국 외교는 긴 터널에 갇혀 있었다. 지난 10년간 지정학적 저주의 그림자는 걷히기는커녕 짙어질 대로 짙어졌다. 미·중 패권경쟁은 동북아에 다시 진영대결구조를 만들고, 남북관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신정부는 촛불혁명의 산물이었지만, 외교에 부여하는 프리미엄은 거의 없었다. 역대 어떤 정부보다 더 자주 더 크게 북한의 도발에 시달려야 했으며, 중국의 제재와 일본의 이간질은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환갑을 훨씬 넘긴 한·미동맹은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지만 사상초유·예측불가의 미국 대통령은 전쟁위기를 고조하며 우리에게 더 큰 시름을 안겼다. 방어적 동맹을 원하는 우리와 공세적 동맹을 가지고 싶어 하는 미국의 인식은 65년의 긴 역사도 무색하게 태평양만큼이나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한반도에 평화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비전은 시작부터 온통 난관이었다. 사드 조기 배치를 새로운 한국 대통령의 사상검증처럼 거칠게 밀어붙이던 미국의 압력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입지는 커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훨씬 더 위축되어버렸다.

 

북한 핵개발로 인해 더 위험해진 한반도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커졌지만 서로의 주판알이 다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미국이 달라졌고, 과거 어떤 행정부보다 신뢰나 리더십은 물론이고, 위선마저 던져버렸다. ‘위기를 생산하고 무기를 판다’는 전형적 군사주의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다. 트럼프가 부르짖는 미국제일주의는 단순한 국익우선의 정책이 아니라 상대가 적이든 친구든 상관없이 미국이 만족할 때까지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겠다는 선언이다.

 

최근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최초로 공개된 국가안보전략(NSS)은 온통 미국우선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중국과 러시아를 현상수정세력 또는 적대관계로 규정함으로써 냉전적 대결관점을 확실히 했으며, 북한과 이란을 깡패국가로 규정한 것은 부시독트린을 연상케 한다. 국경을 보호하고 이민을 통제하며, 미국의 우월적 힘을 이용해 통상이익을 확실하게 챙기겠다는 것에서는 대외정책을 국내정치에 종속시키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험난한 새해를 예고하는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올림픽을 평화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한·미 군사훈련 연기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불법과 합법을 교환할 수 없다는 원칙과 쌍중단의 중국 제안과는 선을 그으면서도 올림픽이 가진 레버리지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극한의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북·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상황을 풀 수 있는 유턴의 묘안이 될 수 있다. 사실은 한국 대외정책의 유턴 결심은 지난 10월31일의 한·중 3불 입장 발표와 그에 이은 방중이라고 본다. 대중경사론 또는 굴욕외교라는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외교 운신의 폭을 넓히고 한반도 평화의 기초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시작일 뿐이다. 한국 외교의 유턴을 가로막는 도전은 이제부터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이 자신들이 만든 구도를 들이밀 것이고, 미국의 최대 압박노선은 불변이다. 3불 입장은 미국 외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것이며, 따라서 다가올 미국의 저항과 압박은 사드 조기 배치 요구보다 거셀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한·미·일 동맹을 통한 대중견제 또는 봉쇄이고, 그 핵심엔진이 미사일 방어이며, 미사일 방어의 출발이 사드라는 점은 NSS에서도 재확인했다.

 

북한과 함께 우리 외교력이 발휘되어야 할 우선 대상은 미국이다. 동맹중독증과 더불어 미국이 한반도 긴장고조의 당사자라도 미국의 존재감과 우리의 의존도가 상승해버리는 덫에 걸려있다는 점에서 험난한 앞길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창을 포함한 2018년 상반기는 한반도의 명운이 걸린 순간이 될 것이다. 재유턴하지 말고 버텨주기를, 더 나아가 새 길을 개척하기를 촛불혁명 정부에 간곡히 바란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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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세제개편안이 20일(현지시간) 상·하원을 통과했다. 향후 10년간 1조5000억달러(약 1623조원)의 세금을 깎아주는 ‘슈퍼 감세안’이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후 31년 만에 최대 규모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내리고,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은 39.6%에서 37%로 낮추는 게 감세안의 핵심이다. 내년부터 감세가 시행되면 혜택은 대기업과 부유층에 돌아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 대기업들은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로 10년간 1조달러의 세금을 덜 내게 됐다. 연소득 73만3000달러가 넘는 부유층은 연평균 5만달러가량의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다. 게다가 개인 상속세 면제 기준이 560만달러에서 1120만달러로 올라가면서 부유층은 상속세 부담도 덜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제개편안이 통과되자 “중산층에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감세안이 시행되면 연방 정부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5890억달러에서 내년부터는 9000억달러 안팎으로 늘어난다. 세수 증가는 4000억달러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 재정이 적자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감세안은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지난 14일(현지시간) 공개된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미국 상위 1% 소득 계층의 몫은 전체의 22%에 그쳤으나 2014년에는 39%로 급증했다. 보고서는 “미국에서 소득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대기업과 부유층에 유리한 세금제도를 운영한 탓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경제정의를 훼손하는 부자 감세안을 통과시키며 소득불평등을 심화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재계와 보수진영은 미국 감세안 통과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22%에서 25%로 올린 것은 글로벌 감세 기조에 역행하는 것이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법인세 실효세율(과세표준 대비 실제 세부담액 비율)을 따져보면 적절치 않은 공세다. 미국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34.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21.8%)를 웃돌지만 한국은 18%에 불과하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내년부터 미국과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이 역전돼 국내 기업을 해외로 내쫓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 원내대표는 감세안이 통과되자 “중산층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뻔뻔한 도둑질”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뻔뻔한 도둑질’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소득불평등 해소에 역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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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18일(현지시간)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질서를 흔드는 ‘수정주의 국가’라고 규정한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다. 중국을 적극 견제함으로써 경제·안보 분야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관철해 나가겠다는 뜻이 담긴 보고서다. 보고서는 미 본토 및 미국민 보호, 미국의 번영 증진, 힘을 통한 평화 유지, 미국의 영향력 확대 등을 4대 핵심 이익으로 꼽았다.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은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는 열강들 간 힘의 대결이 펼쳐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미국 우선주의’를 위해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읽힌다. 뉴욕타임스가 30년간 휴지기를 보낸 초강대국들의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고 분석한 것은 적절한 묘사다.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은 버락 오바마 전임 행정부와 확연히 다르다. 오바마 행정부는 다자주의 안보 체제와 협력을 중시하고 중국과도 파트너십을 강화하려 했던 반면 트럼프는 중국과 러시아를 경쟁 국가로 보는 대결주의를 표방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제19ㅃ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몽’을 내세우며 서방과 체제경쟁에 나설 뜻을 밝힌 것에 영향을 받은 면도 있어 보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해서도 오바마 보고서의 경우 7차례 언급할 정도로 중시한 반면 트럼프 보고서는 한차례에 그쳤다. 출범 초기부터 드러났던 트럼프 행정부의 ‘갈등 유발적 독단주의’가 앞으로 국제사회에 어떤 파장을 몰고올지 걱정이 앞선다.

 

조화와 협력을 지향하는 국제사회의 합의를 트럼프 행정부가 깨뜨린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이미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파기한 데 이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규정해 지구촌의 화약고인 중동에 기름을 부은 상태다. 국가안보전략이 발표된 이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는 모든 결정을 백지화하는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무산시킨 것도 미국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우리는 압도적인 힘으로 북한의 침략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으며, 한반도 비핵화를 강제할 옵션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했다. 강력한 대북압박 전략 기조를 재확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의 해법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미·중의 패권경쟁이 격돌할 장소는 아무래도 동북아시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대해 미국은 이미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의 협력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두 패권국 간의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이 전략적 사고, 균형 감각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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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뒤에 가짜뉴스(fake news)가 있다. 전부 다는 아니다. 물론 일부는 괜찮은 사람들이다. 어디 보자. 한 30% 정도는 그렇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군기지에서 열린 연방수사국(FBI) 내셔널 아카데미 졸업식에서 자신을 향한 카메라를 가리키며 졸업생들과 생중계로 현장을 지켜보던 시민들에게 한 말이다. 가볍게 미국 언론인의 70%는 가짜(fake)가 돼 버렸다.

 

트럼프 정부 출범 첫해가 마무리되고 있다. 워싱턴에서 지켜본 트럼프 정부 1년은 불안하고 실망스러웠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배타적 백인 민족주의로 조금씩 휩쓸려 가는 미국은 더 이상 다양성을 원동력으로 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 우선주의만큼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올 한 해 자주 사용한 단어는 ‘가짜뉴스’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월 한 케이블 채널 인터뷰에서 “미디어가 내가 만든 용어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가짜란 단어를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가짜뉴스란 단어는 19세기 말부터 사용됐다. 물론 이 용어를 세계에 유행시킨 당사자는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다. 영국 사전출판사 콜린스는 지난달 2일 올해의 단어에 가짜뉴스를 선정하고, 지난 1년간 사용 빈도가 365% 급증했다고 밝혔다.

 

가짜뉴스는 본래 언론 보도를 가장해 온라인 공간에서 퍼지는 거짓되고 선정적인 정보를 말한다. 전통 언론의 영향력을 추락시키고 현실을 왜곡하는 가짜뉴스의 폐해는 심각하다. 당장 미국 정보기관은 러시아가 가짜뉴스를 활용해 지난해 미국 선거에 개입했다고 결론 내린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짜뉴스란 말을 자신을 비판하는 주류 언론을 비난하는 데 사용하며 의미를 비틀었다. 존 로이드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안 현실(alternative reality)을 만들어냈다”며 “언론인들의 실수는 가짜뉴스 공격으로 증폭되고, 주류 언론은 거만한 엘리트들이 소외된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묘사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짜뉴스 공격은 권력 견제라는 언론의 기본 기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할 정치권력의 언론 무력화 시도가 수정헌법 1조로 언론의 자유를 명시한 미국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16명이 직접 고발한 성추행 의혹을 보도해도 그는 가짜뉴스라고 역공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298일 동안 하루 평균 5.5개의 거짓말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했다. 가짜뉴스 공격은 포퓰리즘을 무기로 집권한 ‘피노키오 대통령’이 고안한 자기방어 수단인 셈이다.

 

미국의 퇴행은 전 세계 권위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 세계 15개 권위주의 국가에서 인권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 가짜뉴스 공격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군 감옥 인권실태를 고발한 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를 “우리는 가짜뉴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반박했고, 중국 인민일보는 인권운동가 고문 주장에 “트럼프가 옳다. 가짜뉴스는 적이다”고 대응했다. 가짜뉴스가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된 셈이다.

 

가짜뉴스 공격이 통하는 배경에는 주류 언론들의 신뢰 추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민의 신뢰 회복은 언론의 몫이다. 하지만 오만한 언론이 밉다고 언론의 권력 견제 역할까지 무시해서는 안된다. CNN 보도의 형평성에 불만이 있더라도 CNN을 때려눕히는 동영상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는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폐해는 가짜뉴스보다 더 심각하다. 그리고 그 피해는 온전히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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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대북 무조건 대화’ 제안은 사흘 만에 폐기됐다. 백악관이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며 덮은 것이다. 혹시라도 제재·압박 체제에 누수가 생길까봐 황급히 빗장을 거는 모양새다. 온탕 냉탕을 오가는 미국의 태도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대화는 북한에서도 찬밥 신세다.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대사도 유엔에서 “비핵화 대화를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북 대화 시기상조론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지금은 제재하고 압박할 때라는 것이다. 대화무용론도 퍼져 있다. 대화했지만 핵개발을 멈추지 못했다는 이유다. 그러면 압박과 제재하는 동안 핵개발 속도가 빨라진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대화는 소득을 낳는다. 합의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 의중 파악은 가능하다. 북한이 무슨 의도로 핵을 개발하는지, 핵위협의 진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언제 도발행진을 멈출 건지 가늠할 단서를 제공한다. 모두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안이지만 모르는 것들이다. ‘닥치고 제재·압박’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효과다.

 

미국과 한국 보수층은 대북 대화 제의를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한 면죄부나 보상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김정은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기 위한 음모로 몰기도 한다. 이는 오해일 뿐이다. 남북은 1983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북한 공작원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17명이 사망한 아웅산 사건 1년여 뒤 대화를 시작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끌어낸 바 있다. 미국 역시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때 북한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었다. 대화가 보상이나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둘 다 성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화가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위협적 행동이 감소하는 것도 검증된 사실이다. 제재와 압박 역시 유용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대화와 협상을 외면한 채 제재하고 압박하면 북한이 손들고 항복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상상하는 것과 달리 대화는 결코 유화 조치가 아니다. 상충하는 국익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무대이기 때문에 온갖 지략과 책략, 독설과 협박이 난무한다. 괜히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보수층이 대화를 깎아내리는 것은 북한과의 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협상장에서의 북한은, 협상으로 먹고사는 미국도 손을 들 만큼 집요하고 강력하다. 북한의 벼랑끝전술이나 살라미전술은 세계적으로 호가 났다. 이런 북한을 상대하다 실패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시작조차 않으려는 것 아닌가 싶다.  

 

보수층은 대북 강경책을 신봉한다. 하지만 이 강경책은 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김정은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사회가 제재와 압박책을 펴는 동안 3대 세습 권력자에서 핵대업을 완성한 ‘사회주의 위인’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권위와 어깨를 나란히 할 기세다. 외부에서 제재와 압박을 가할수록 지도자를 중심으로 응집력이 강화되는 북한 체제의 특성 때문이다. 오랜 제재에도 북한이 핵능력을 고도화하고 경제가 성장하는 현실을 가볍게 보면 안된다.

 

물론 국제 정세가 북한에 유리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사회 규범을 무시한 핵개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내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다. 틸러슨은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급변사태 대비책을 논의했다는 놀라운 정보를 공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이 이를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자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징과 엄벌 감정이 위험수위라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대화와 압박, 어느 한쪽을 절대화하거나 백안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문제를 이념의 좌표로 삼는 행태를 배격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도덕적, 이념적 잣대가 아니라 오로지 실용적 차원으로 접근할 사안이다.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대화든 압박이든 가릴 이유가 없다.

 

현재 북핵 대화의 여건은 무르익은 상태다. 북한이 실질적인 핵무력 완성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순간에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협상력 극대화를 노린 대화 신호로 보인다. 미국도 북핵·미사일의 실전배치 이전에 현 수준에서 동결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결론은 대화다. 북한과 미국의 대화 거부는 대화 조건을 둘러싼 기싸움 성격을 띤다.

 

원래 대화는 조건 없이 하는 것이다. 신뢰와 비핵화를 대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다가 실패한 과거를 답습할 시간이 없다. 대화를 통해 얻어낼 결과를 대화 시작의 조건으로 거는 것은 시간이 필요할 때나 구사하는 전략이다. 자존심과 적대감 때문에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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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가진 남성이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최근 일본에서 일명 ‘후라리맨’을 두고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후라리맨’은 ‘흔들흔들’을 뜻하는 일본어 ‘후라리’에 남성을 뜻하는 영어 ‘맨(man)’을 합친 말이다. 원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만 했던 남성들이 정년 퇴직 후 가정에서 있을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한 일본 사회학자가 만들어낸 용어다. 그런데 최근엔 ‘후라리맨’이 한창 일할 나이인 남성들에게도 쓰이고 있다. 회사 업무가 끝난 뒤에도 귀가하지 않고 거리를 헤매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의 발단은 공영방송 NHK의 한 정보프로그램이 이 ‘후라리맨’을 특집으로 잇따라 다루면서다. 방송에선 퇴근 후 집에 바로 가지 않고 근처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거나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성 회사원들이 등장했다. 저녁 시간대 도쿄 시내의 가전양판점에 양복 차림의 남성들이 가득한 모습도 보여줬다. 일본 정부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일하는 방식 개혁’으로 퇴근이 빨라졌지만 정작 여유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는 남자들이 ‘후라리맨’이 된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방송이 나간 뒤 인터넷에는 비판 댓글이 쇄도했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남성들이 “혼자만의 시간의 필요하다” “일찍 귀가해도 아내의 집안일에 방해가 된다” 등의 이유를 댔는데, 이게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아내에게 가사와 육아를 강요하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혼자만의 시간은 여성도 필요하다” 등의 비난이 잇따른 것이다. 그중에는 “워킹맘이 식사를 만들지 않으면 ‘엄마 실격’이라면서, 남성은 ‘후라리맨’이라고 해서 ‘여러 부담을 지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니 도대체 뭐냐”라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자 NHK는 후속 보도로 이 같은 반론들과 실태들을 더 다뤘다. 다른 방송이나 신문, 잡지도 관련 기사를 앞다퉈 보도했다. 그런데 후속 보도들에서도 여전히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남자도 괴로워’류의 흥미 위주식 보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NHK는 비판의 목소리를 소개하면서도 “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기분을 이해한다” “전업주부라도 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등 ‘공감의 목소리’를 전했다. 마치 여론이 찬반으로 양분된 인상을 준다. “아이 중심의 집은 거북하다” “육아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 아내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남성들의 심리를 전했다. 한 언론에선 “집 안 내 서열이 반려동물보다 아래”라는 ‘핍박받는 남성’ 사례를 다루기도 했다. NHK는 또 앞서 소개된 남성이 아내와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를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취미를 함께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물론 남자도 괴롭다. 사회는 무뚝뚝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미덕이던 과거와는 다른 남성상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선 ‘이쿠맨(육아하는 남자)’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쿠맨’이 마치 능력 있는 남성의 ‘브랜드’처럼 쓰이는 면도 없지 않다. 가사와 육아라는 끝나지 않은 작업에 짓눌려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련의 후라리맨 보도에선 사회의 요구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진지하게 짚는 대목을 좀체 보기 힘들다. 일본에는 여성 60%가 첫째 아이를 낳은 뒤 퇴직하는 등 성별 역할 분담이 강고하게 남아 있다. 반면 일손 부족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 차치하고 ‘일하는 방식 개혁’의 지향점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고, 부부가 적정하게 가사·육아를 분담하는 것이다. 종국엔 가정과 일을 병립하고, 아이를 키우기 쉬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후라리맨’ 논란은 그러한 의식과 제반 여건이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을 거꾸로 보여줬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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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뒤 노동신문 사설은 이렇게 썼다. “희세의 천출위인이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만이 안아 오실 수 있는 특대사변, 대승리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트로피를 함께 들 사람이 있다. 오바마와 트럼프다.

 

미국은 대북 정책 실패를 통해 북핵 개발에 기여했다.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은 북한의 요구에 대한 미국의 대응, 미국의 요구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얽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북한은 핵무력 완성까지 미국과 함께해왔다. 완성 선언 이후의 길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라는 동반자가 있다. 김정은 홀로 가지 않는다. 이번 2인무(二人舞가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완성 선언 이전보다 좀 더 민감하고 복잡하다는 사실뿐이다.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서로 엇갈리는 두 개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선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완성을 선언, 선을 넘지 않으리라는 암시를 했다. 미국에 예방공격 명분을 주지 않은 것이다. 평창 올림픽과의 시간상 거리도 적당하다. 올림픽 코앞인 1월에 발사했다면 협상으로 국면 전환할 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협상도 가능하다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발언에서 드러나듯 아직 대화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없다. 그리고 미리 완성 선언을 해놓음으로써 비핵화로 되돌릴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2012년 헌법에 핵보유국으로 명기했을 때처럼 비핵화 꿈을 단념케 하려는 심리적 선제공격이다.

 

미국이 완성 선언을 미심쩍어하고, 그 때문에 미국의 대북 자세가 여전히 뻣뻣하다고 느끼면 북한은 핵무기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 이 경우 재진입 기술을 개발해 태평양 상공에서 폭발 실험을 단행하는, 이른바 특대형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는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 놓여 있다. 하나는 북한이 추가 도발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북한이 현재의 핵개발 수준에 만족하고 대화에 나서도록 국면 전환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트럼프의 다른 선택지는 북한이 굴복할 때까지 압박을 강화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짐짓 그걸 과시한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쟁 가능성이 매일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김정은과 트럼프 두 사람 앞에 각각 두 가지 길이 있다면, 상호 작용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네 가지다. 둘 모두 정면충돌하거나 둘 다 충돌을 피해 대화하는 경우, 둘 중 한쪽이 대결적 자세로 나가고 다른 쪽이 맞서지 않는 경우다.

 

최악인 정면충돌을 피하고 최선인 대화국면 전환을 위해서는 정책 결정권자가 냉정하고 매우 이성적이어야 한다. 북한이 만일 미국의 어떤 행동에 자극받아 핵무력에 대한 신뢰를 100% 보장해 보이겠다며 기술 개발에 다시 나섰다고 치자. 그래서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ICBM을 시험 발사하면 어떻게 될까? 북한과 미국 모두 곤란해진다. 전쟁 상황에 직면해서도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누가 먼저 시작하든 전쟁은 북한의 종말을 가져온다.

 

트럼프에게도 딜레마다.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상태를 방치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탄핵당할 것이다. 그러면 북한을 상대로 예방공격을 해야 하나? 미국인을 포함한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천문학적인 군비를 쏟아부으며 전쟁의 수렁에 빠져야 하나? 한국·중국·러시아가 모두 반대하는 전쟁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게임 참가자가 합리적이면 최악의 게임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김정은·트럼프는 서로 미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은 1.5트랙 대화에서 트럼프가 정말 미친 것인지, 그저 미친 척하는 것인지 미국 전문가에게 물었다고 한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미친 강아지라고 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지금 서툰 탱고를 추며 네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통과하려고 한다.

 

북·미관계는 상대의 신호와 선택이 나의 신호와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성에 지배된다. 두 사람은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한발 한발 내디뎌야 한다. 상대의 주파수를 잘 파악해야 한다. 좋은 신호는 좋은 반응을 유도하고, 나쁜 신호는 나쁜 반응을 부추기기 딱 좋은 순간이다. 탱고와 같은 2인무는 박자가 안 맞으면 몸이 부딪치거나 상대의 발등을 밟게 된다. 최악을 피하려는 상대의 입장을 약점이라고 여기고 더 몰아붙여 보라. 즉각 파국이다. 두 사람은 전쟁으로 가는 문을 피하고, 평화로 가는 문을 통과할까?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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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명물 ‘둥피’가 사라졌다.

베이징 동물원 의류 도매시장의 줄임말인 ‘둥피(動批)’는 중국 북부 지역의 최대 의류 집산지다. 1990년대부터 동물원 근처에 들어서기 시작한 의류 도매상가는 10여개로 늘어났다. 도매시장이지만 일반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동물원에 판다 구경 가는 게 아니라 옷 구경하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베이징 관광 코스 중 하나로도 꼽혔다. 둥피에서 일하는 근로자 수는 3만명, 일일 방문객 수는 10만명을 넘었다.

 

그러나 베이징시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둥피는 지난달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상가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둥딩(東鼎)이 이날 마지막 영업을 했다. 정리 세일 기회를 잡으려는 알뜰 소비자들과 사라져 가는 둥피의 마지막 모습을 담으려는 시민들이 몰렸다. 상가에 전기가 끊긴 후까지 손님들의 발길은 끊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이곳에서 설빔을 준비했다던 중년 손님과 옷을 팔아 자식을 대학까지 보냈다는 주인이 함께 추억을 풀어냈다. 그 추억들은 이날 이후 기억 속에만 남게 됐다.

 

베이징의 시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둥화먼(東華門) 야시장이 문을 닫았다. 32년 만이다. 꼬치며 쌀국수를 팔던 88개 상점 주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퇴근길에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던 베이징 토박이들도 추억의 장소를 잃었다.

 

시장이 사라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시장으로 화물과 사람들이 몰리면서 가뜩이나 복잡한 베이징 교통에 부담이 가중된다. 시장을 외곽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베이징의 비(非)수도 기능을 인근 퉁저우, 슝안으로 옮기려는 중국 정부 정책에 부합한다. 알리바바그룹이 운영하는 타오바오 등 인터넷 쇼핑이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 재래시장의 인기가 시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베이징의 시장들은 주로 정책적 이유로 폐쇄된다. 특히 외래인구 제한이 주목적이다. 시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온 외지인들이다. 시장이 베이징 밖으로 이사 가면 베이징 호적이 없는 이들도 함께 외곽으로 이동한다. 베이징 상주인구를 2300만명으로 제한하려는 당국의 계획과 잘 맞는다. 둥피에 있던 대부분 상가들은 베이징 외곽인 옌지아오(燕郊)로 옮길 예정이다. 노동자들도 이곳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을 것이다.

 

지난달 18일 베이징 외곽 다싱구의 한 아파트형 공장에서 불이 나 19명이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 화재가 난 건물은 지하 창고, 1층 공장, 2층 숙소 형태로 된 영세 공장이었다. 베이징시는 이 화재 사건을 계기로 40일간 집중 안전 점검에 나섰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공장에서 일하는 하층민들을 안전 미흡을 이유로 강제로 쫓아내고 있다. 이들은 추운 겨울에 거처도 정하지 못한 채 거리로 내몰렸다. 딱한 사정이 알려지자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임시 거처, 이사 서비스 등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지만 당국은 이 또한 통제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와 매체 보도도 통제하고 있다.

 

도시 밖으로 사람들을 밀어내고, 도시민들 사이의 교류도 단절시키고 있다. 택배 기사, 가사 도우미 등 10만여명에 달하는 하층 노동자들이 베이징 밖으로 밀려났다.

 

도시와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진화한다. 베이징 역사는 3000여년 전 춘추 전국시대 연나라 수도인 옌징(燕京)에서부터 시작됐다. 요, 금, 원, 명, 청나라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가 됐다. 지금의 베이징은 시장도 사람도 떠나간 적막한 곳이 돼 가고 있다. 중국은 베이징의 ‘도시병’을 걱정하면서 핵심 행정 기능과 베이징 호적을 가진 ‘필수 인구’만 남길 태세다. 사람과 온기가 없어지고 기능만 남은 베이징은 도시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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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난달 29일 화성-15형 미사일을 발사하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은 북핵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2017년 11월29일 이전과 이후’로 구별될 만큼 큰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입증한 것은 아니지만, 북핵 문제를 다루는 국제적 메커니즘은 이 같은 북한의 ‘정치적 선언’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국가 전략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핵·경제 병진노선’의 한 축인 핵무력이 완성됐다고 선언한 북한의 다음 목표는 나머지 한 축인 ‘경제강국 건설’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따라서 북한은 제재 해제에 매달릴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핵을 다른 곳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들에게 가해진 제재가 부당하다는 점을 부각시킬 것이다. 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비핵화 요구의 강도를 낮추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제재가 느슨해진다는 것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보유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말하는 ‘경제강국 건설’ ‘병진노선 완성’ ‘제재 해제’ ‘핵보유국 지위 인정’ 등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동의어다.

 

지금 북핵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북한이 핵기폭 장치를 개발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미국에게 북핵 문제는 동북아 지역 문제였다. 지역 동맹국의 안보문제이며 국제 비확산체제의 사안일 뿐이었다. 하지만 북한 미사일이 미국을 사정권에 넣게 되면서 북핵은 지역 문제가 아닌 ‘미국의 안보 문제’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역대 어느 행정부보다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이다. 이제 미국은 북핵 문제의 ‘운전석’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둔 현 단계에서 ‘동결’을 미끼로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한·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추가 제재 등 강력한 대응을 말하고 있지만, 제재를 강화하고 나면 결국 협상론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협상이 열린다면 이는 북한과 미국이 주도하게 되고 한·미 관계는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는 안보 문제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북한이 미국을 직접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핵능력 동결, 핵 사용 및 확산 금지 등에 합의하고 관계개선을 모색하게 되면 북한에는 최상이며 한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북핵 문제는 어느덧 한·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까지 흘러왔다. 미국과의 철저하고 세밀한 협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협상의 궁극적 목표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에 대한 미국의 확실한 동의를 받아야 한다. 또한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한 절대 제재는 풀릴 수 없고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으며 핵보유보다 비핵화의 인센티브가 더 크다는 것을 북한이 인식하도록 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제는 한국이 이 문제를 주도하기 어렵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대북·북핵 전략이 필요하다. 달라진 북핵 논의 구조 속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실종되거나 국익에 반하는 쪽으로 흐름이 전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실력은 이제부터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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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맥매스터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그제 한 포럼에 참석해 “북한의 최근 미사일 발사가 전쟁 가능성을 고조시켰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매일 커지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또 “한국과 일본이 핵으로 무장할 잠재적 위협은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이득이 아니다”라고 한·일의 핵무장 가능성을 제기했다.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어제 CBS에 출연해 “미국의 정책은 북한이 핵탄두로 미국을 공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선제공격이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발사와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대화론이 사라지고 전쟁론이 한반도를 엄습하고 있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 안보 보좌관이 브리핑 룸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전쟁론과 선제타격론은 한 달여 만에 재등장한 것이다. 맥매스터는 지난달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앞뒀을 때만 해도 “전쟁 없이 북한 문제를 푸는 법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이 화성-15형 발사와 핵무력 완성 선언을 실질적인 안보 위협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표다. 그레이엄 의원의 선제타격론도 미국 내 대북 여론의 강경 회귀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 위기 고조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미국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북한이 최근 두 달여 동안 도발을 중단했을 때 제재 강화 외에 적극적인 대화 시도 등 다각적인 북핵 해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8년 임기 동안에는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북한의 핵능력 강화를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과거 대북 정책에 대한 성찰 없이 이제 와서 한반도 위기를 부추기는 초강경정책을 거론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미국이 전쟁을 언급한 것은 전략적인 의도도 엿보인다. 선제타격이나 전쟁론은 북한은 물론 중국, 러시아까지 동시에 압박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협상에 앞서 기싸움을 벌이는 것일 수도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 인정을 대화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중단 및 폐기로 맞서고 있다. 의도야 어떻든 한반도의 파멸로 이어질 선제타격은 절대 안된다. 설령 대북 대화를 위한 전략적 카드라고 하더라도 자제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은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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