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지구촌 정세를 전망하는 보고서들에서는 주로 위기 요인들이 거론된다. 무질서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유럽 포퓰리즘의 확산과 유럽연합 통합력 약화 등이다. 이란 핵합의를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갈등, 시리아·아프가니스탄 내전 등도 리스트를 채운다. 그보다 앞에 놓이는 것이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이 깊어질 것’이란 예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과 중국 간 전면적 무역전쟁으로 글로벌 경제성장과 안보가 나빠지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제시된 사례들만 보면 내년은 올해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한반도와 관련해선,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답보 상태지만 내년에 군사적 대치 국면으로 바뀔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많다.

 

세계질서는 강한 나라의 입김에 흔들린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이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패권적 지위는 여전하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세우고 덩샤오핑이 번영을 일궜으니 이제 자신이 중국을 세계무대에서 가장 윗자리에 올려놓겠다고 한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붕괴 후 잃어버린 강대국 지위를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내세우는 가치는 다르지만 서로 힘을 합쳐 미국 주도의 질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중·러를 최대 위협 국가로 지목했다. 대륙의 큰 판들이 충돌할 것 같은 분위기다.

 

유엔에 193개 회원국이 있다. 어느 국가인들 나라의 현재와 미래가 강대국에 휘둘리고 싶어 하겠는가. 상당한 규모의 경제력을 갖추고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이 있는, 이른바 중견국들은 특히 고민이 많다. 세계질서에 거대한 변환이 일고 있지만 자체 역량만으로는 질서를 바꿀 힘이 부족하다. 고래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중견국들의 외교적 과제다.

 

중견국의 외교 기조가 주목받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인도·태평양 구상도 그렇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양쪽으로 끼고 있는 호주는 2000년대 초반 ‘인도·태평양’ 개념을 처음 착안해 발전시켜왔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구상은 일본이 내놓은 구상으로 곧잘 이해된다. 아베 신조 총리가 2007년 ‘자유롭고 번영하는 인도·태평양’을 거론하고 2016년 외교전략으로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인도·태평양 전략’을 아시아 정책으로 제시한 뒤에야 보편적 용어처럼 쓰인다. 호주와 미국·일본·인도가 이 개념을 공유하지만 아직 똑부러진 정의는 없다.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항행의 자유, 규칙기반 질서(법의 지배), 민주주의 등 몇 가지 원칙만 세워둔 정도다.

 

참여국마다 셈법도 다르다.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등 경제·군사적 급부상을 방어하는 전략적·안보적 측면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해 세계질서의 한 축이 되려고 한다. 일본도 그 기저에는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지정학적 고려가 깔려 있다. 인도는 전략 범위를 아시아로 끝내는 게 아니라 서인도양을 면한 동아프리카로 확장하고 싶어 한다.

 

이달 초 호주 정부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포럼을 통해 만난 호주 정부 인사들과 싱크탱크 관계자들은 인도·태평양 시대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 견제용으로 인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바닷물이 경계 없이 섞이듯 개방적·포용적 개념으로 발전돼야 하는데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실상 호주는 미국과는 안보 동맹 관계이지만 대외무역에선 중국의 비중이 가장 높다. 미·중이 충돌하면 그 틈바구니에서 괴로워진다.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걱정도 많다.

 

호주의 처지는 한국에 대입된다. 지정학적으로 미·중의 대립 구도 사이에, 미·일 동맹 대 중·러 협력 사이에 한국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안보와 경제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려면 미·중 사이에 균형감이 필요하다.

 

중견국이 국제정치의 구조적 질서 재편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해도 국제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자나 촉진자 역할을 한 사례는 여럿 있다. 국가안보 개념을 넓혀 대인지뢰금지협약 등을 주도한 캐나다, 개발협력 분야에 적극적인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한국이 직접적 당사자이기는 하지만, 주변국들 등 국제사회와의 협력적 논의를 통해 일촉즉발의 한반도를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킨 것을 평화지향적 외교의 성과로 볼 수 있다. 중견국 외교가 설득력을 갖고 지속적으로 이뤄지려면 그 방향성에 대해 국내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안홍욱 국제부장>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