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한반도의 평화정착 프로세스가 시작된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될 것이다. 전쟁을 불사할 듯 극한 대결로 치닫던 북한과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열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 하나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이 같은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년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지난 1년 동안 대화 국면을 이끌어왔던 환경과 여건이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합의에서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해 신뢰구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보였다. 이는 북한 입장에서는 커다란 외교적 승리다. 외형상으로 이 합의는 미국이 줄곧 주장해온 ‘선(先) 비핵화’가 아닌, 북한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상호 신뢰 구축’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왜 이런 구조의 합의문에 서명하게 됐는지 정확한 내막은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합의 이후에도 미국이 여전히 ‘선 비핵화’ 요구를 접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전략적 결단을 내려 북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미국은 싱가포르 합의를 만들어낸 원동력인 ‘톱다운 방식’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오히려 실무협의를 거친 합의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지금 북·미대화가 덜컹거리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를 실패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주장은 자신들의 실수를 감추려는 허세일 뿐 아니라 싱가포르 합의에서 잘못한 부분을 2차 정상회담을 통해 만회해야 한다는 자기고백에 가깝다. 과거 북핵 협상을 통해 축적된 미국의 경험과 자산을 활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 이후 대화 방식을 바꾸려는 것 자체가 협상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은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3단계 방법’처럼 핵을 없애고, 제재를 해제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는 식의 간단한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음을 비로소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실무협상을 통해 싱가포르 합의를 보완할 수 있는 결과가 보장되어야 김 위원장과 2차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북한이 ‘싱가포르 대첩’의 기억을 쉽게 잊을 리 없다. 북한은 북·미대화 경색의 책임이 싱가포르 합의를 수정하려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 행정부 고위관료들에게 있다고 보고 이들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조·미 수뇌분들의 신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트럼프가 또 한번 톱다운 방식으로 대화의 동력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싱가포르 합의의 ‘후속편’을 완성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을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미국은 상대를 얕보다 전반전에 불의의 골을 먹은 뒤 전술을 바꾸고 선수도 교체해 후반전에 임하려 하고 있고 북한은 전반전의 리드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수비에 치중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싱가포르 합의가 북·미대화 진전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실로 아이로니컬하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정상이 만나고 싱가포르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 변화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같은 패턴으로 성사시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무산된 것도 이 같은 기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도 비핵화와 제재해제의 빅딜이 성사되고 한반도 평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은 지금도 ‘1년 전을 되돌아보라’는 말을 자주한다.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일촉즉발 위기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초석을 놓는 극적 반전 드라마를 쓴 것은 엄청난 성과라는 것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1년간의 성과에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북·미대화 정체가 장기화될 경우 한반도 평화정착은 더욱 멀어질 뿐 아니라 정부는 남북관계와 비핵화 진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2018년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길이 남기려면 지난 1년간의 관성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변화된 상황에 맞는 창의력과 새로운 상상력으로 한국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