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최근 행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폴더 인사’다. 지난 1일 김책공대를 방문해 교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년사, 전국노병대회 행사에 이어 올 들어서만 3번째다. 무오류의 최고존엄, 절대적 존재가 주민들에게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하는 모습은 낯설다. 소탈하고 겸손한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노력일 터이다. 평양 정상회담 때 그는 남측 인사들 앞에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진정성이 묻어난다.

 

김정은의 비전이 빛을 보려면 내부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해외에 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비핵화 협상에서 누군가 양보해야 한다면 그것은 북한이다. 북한으로서는 불만스러운 현실이다.

 

북한은 비핵화-종전선언 프레임부터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에 핵을 개발했고, 미 본토 공격이 가능한 수준으로 고도화되자 위협을 느낀 미국의 필요로 비핵화 협상이 열리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비핵화 협상은 비핵화-적대정책 철회 프레임이 돼야 한다. 북한은 특히 체제보장이란 용어에 반발한다. 자주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호국 취급을 받는 것을 모욕으로 느낄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입장일 뿐이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는 불법적으로 핵개발을 하고 위협한 것은 북한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또한 핵개발은 용인할 수 없으며 제재와 압박으로 응징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도 공유한다. 양측의 논리는 타당성과 허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방어용이라면서 핵위협을 하는 북한이나, 북한을 협상상대가 아니라 항복대상으로 보는 미국 둘 다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지금 시점에서 이런 논쟁은 허망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과성과 책임을 가릴 필요가 있다. 한쪽 의견이 부풀려져도, 과소평가돼도 안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을 계기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비핵화 협상이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이른 시기에 열기로 합의했다는 뉴스가 가장 눈에 띈다. 곧바로 실무협상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북·미의 협상 태도가 달라진 것도 고무적이다.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및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 사찰 허용 등 새로운 카드를 제시했다. 미국은 선 비핵화 입장에서 비핵화하면 상응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비핵화 협상이 비로소 일방주의에서 상호주의라는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타협의 여지는 좀 더 커졌다.

 

그러나 낙관은 금물이다. 미국 조야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반대파와 대북협상 반대파가 더 많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비핵화 협상은 난맥상을 면치 못했다. 사례를 보자. 북한의 조속한 비핵화 압박(“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1년 내 비핵화를 약속했다”, 8월5일 존 볼턴 백악관국가안보보좌관)→김정은 “트럼프 임기 내 비핵화” 약속(9월5일)→트럼프 “북 비핵화에 시간게임 않겠다”(9월26일). 북한이 허들을 넘어서자 미국이 더 높아진 새로운 허들을 제시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을 대표하는 인사도 매번 달라진다. 트럼프는 찬성하는데 행정부의 누군가는 비상벨을 누른다. 트럼프가 북한의 제안을 “환상적”이라고 평가했는데 행정부는 대북 제재를 강화하는 식이다. 조직적 저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니 트럼프가 “김정은을 사랑한다”면서 “슬프지만 제재는 강화하겠다”는 모순적 대응이 나온다.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비핵화 협상은 진전되지 않는다. 이것이 1차 북·미 정상회담 후 지난 4개월간의 뼈저린 교훈이다.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담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 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미국 개최를 제안하기를 권고한다. 미국의 안방을 찾아가 반북세력과 회의론자들 앞에서 비핵화 의지를 역설한다면 그것마저 부정하고 불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급적 미 중간선거 이전에 가는 게 좋지만 이후라도 나쁘지 않다. 북한에는 체제와 2500만 주민의 생존과 번영이 걸린 중대사란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한반도 전체로는 70년 냉전과 대결을 끝장내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물론 미국행이 불가능한 이유는 차고 넘칠 것이다. 빈손 방미 가능성도 있고, 미국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결기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위험과 불이익을 합해도 미국행 결단의 명분과 당위에 비교할 수 없다. 안전 문제가 걸린다면 문 대통령과 함께 가면 된다. 워싱턴에서 남·북·미 지도자들이 종전선언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호연 논설주간>

 

Posted by KHross